민주주의는 똘레랑스(관용) 이다!
[칼럼] 이욱열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장

2011-04-27 오후 2:46:56



▲ 이욱열 협회장
영어의 ‘tolerance(관용)’라는 단어는 불어의 ‘똘레랑스’에서 온 말이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아량, 포용력이라 할까.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에서 유래된 이 단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를 간직한 단어이다.


왕의 종교와 항상 일치해야만 했던 당시에 개신교를 인정하는 대변혁은 당연히 피로 얼룩진 세계 최대의 개신교 순교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프랑스는 모든 종교에 대해 똘레랑스(관용)를 가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동양적인 관점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서양의 똘레랑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며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르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똘레랑스가 얼마나 허용되는지 여부에 따라 민주주의 국가로 구분하기도 한다.


며칠 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과 4·19 혁명 희생자 유족들의 화해가 무산된 사건을 보면서 왜 우리사회는 똘레랑스와 동떨어져 있는지 분단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지 걱정이 된다.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과거를 분단을 통한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로 표현했다. 그 시대가 그만큼 치열했고 격량이 심했으며 그만큼 왜곡과 굴절이 심한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해방이후 60년이 지났건만 굳이 미국 워싱턴 D.C의 내쇼날 몰이 아니라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과 동상 하나 제대로 없는 나라, 오로지 국가의 이익보다 자기 지역의 이익을 위하여 두 눈을 부릅뜨는 지도자가 많은 나라이다.


이쯤 되면 앵똘레랑스(불관용)가 도를 넘어섰다. 최장집 교수는 그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한국사회를 걱정했다. 이웃나라 중국은 ‘마오쩌둥에게는 7의 공과 3의 과가 있다’는 걸로 과거사 문제를 정리했다.

 

“이승만과 4·19는 모두 건국자산이며 큰 역사는 화해로 가고 있다”는 이세기 전 장관과 “일방적으로 사과한다고 해서 통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가 아물고 관용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라며 “수유리 묘지에 처박힌 ‘슬픈 이미지’의 4·19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출발을 알린 분수령으로서 4·19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유세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이제 관용이 넘치는 사회인지 반대로 불관용이 넘치는 사회가 되는지 그 몫은 오롯이 우리 모두에게 빚으로 남아 있다. 5년 전 4월 19일자 일기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날의 아픔을 기리듯이 봄비가 내리고 앞서간 영령들을 위한 진혼곡의 나팔소리가 끈임 없이 울려 퍼진다. 마치 그날의 함성처럼!! 마치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끈임 없는 민초들의 투쟁처럼!!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의 조각 하나 하나의 그 편린들이 이어져서 역사의 물줄기를 이루어 왔지 않는가? 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특히 국민의 의사를 결집하여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정당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역할은 무한하다고 할 것이다.


4·19를 기리는 오늘, 일본은 EEZ(배타적 경제수역)를 침범하여 독도탐사계획을 강행, 우리 정부는 강력저지 내용 발표. 무대 위의 주인공만 달라졌을 뿐 자유, 민주, 정의를 향한 민주주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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