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성채(城砦) ‘무학농장’

가난한 이웃을 위한 헌신과 희생 기억해야...

2024-10-28 오후 7:13:09

하양 무학산 중턱, 해발 350m 일원에는 화강암 견치석으로 지은 성채 같은 건물들이 있다.

 

이 건물들은 1960년대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역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고 이임춘 신부가 영국인 고 수지 영거(Susie Younger, 한국명 양수산나) 여사 등 수많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조성한 무학농장 건물이다.
 

무학농장 전경. 왼쪽 힌 슬로프는 무학산 정상 넘어에서 화강석을 가져와 굴러내려 땅이 패인 흔적이다.



 

무학농장은 1964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1969년까지 목장으로 운영하다 1970년에 매각됐다. 조성한 지 60년이 흘렀고 오랫동안 방치되다 보니, 맨손으로 일군 23만 평의 광활한 농장은 이제 모두 숲으로 덮이고, 건물들은 지붕이 무너지고 잡목들이 건물의 형체를 가리고 있다.

 

농장이 숲으로 변하는 동안 무학농장의 존재도 지역민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히고 있다. 더욱이 무학농장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지역민들을 살리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이임춘 신부와 양 수산나 여사가 이웃사랑을 실천한 희생의 현장이고, 농장 건물들은 그 거룩한 사랑이 만들어낸 사랑의 성채(城砦)’임을 기억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이임춘 신부와 양수산나 여사가 무학농장 건축현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두 분의 거룩한 삶과 이웃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무학농장의 개관, 양 수산나 여사가 무학농장 개간사업에 참여하게 된 재밌는 사연을 차례로 싣습니다.

 

 

무학농장 개관

 

무학산은 하양읍 북쪽에 위치한 해발 588m의 하양읍 진산(鎭山)이다, 하양 소재지로부터 3정도 거리에 불과한 무학산 중산간부는 남북으로 길게 지붕의 용마루처럼 뻗어있고 평탄하고 비옥하여 해방 이후 식량이 부족했던 지역민들이 개간을 염두에 두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학농장 전체 전경
 

 

50~60년대의 우리나라는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절대 빈곤층이 전 국민의 40%를 상회하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6.25 전쟁 후라 상황이 더 심각했다.

 

195551일 하양성당 본당신부로 부임한 고 이임춘 펠릭스 신부는 많은 수의 신자와 지역 주민들이 질병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거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살리고 가난을 구제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첫 강론을 성당 문을 열고 모두 하나로라는 요지로 살아야 희망이 있음을 내비치며 지역민들의 고달픈 삶을 보듬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성가병원 건립 모습(1956)

 


이 신부는 우선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1956년 성가병원을 건립했다. 이 신부가 세계 각지의 은인들의 도움으로 개설한 성가병원은 간디스토마, 결핵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여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염가로 우수한 의료를 제공했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아났다.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여 죽어가던 사람들을 살려내는 한편으로 이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물론 이 사업들도 각국의 구호기관이나 미군으로부터 식량과 물품을 지원받을 수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외부의 원조에 기대는 부분적인 구호 활동이나 지원만으로는 지역민들의 가난과 굶주림을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이 신부는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고민했다.

 

당시 정부는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개간을 적극 장려했다. 일부 지역민들이 무학산 임야를 사용허가(대부) 받아 개간을 시도하였으나, 여력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 신부도 60년대 초반부터 무학산을 개간하여 시범농장을 만드는 구상을 했다. 토지 일부를 매입하는 등 구상을 실현할 준비를 하였으나, 개간에 소요될 막대한 재원을 마련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 개간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할 궁리를 해오다 1964, 우리나라에서 선교와 사회복지 활동을 하던 영국인 수지 영거(Susannah Mary Younger, 한국명 양수산나, 이하 수지 여사라 칭함) 여사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개간 인부에게 임금으로 지급할 미국 원조 밀가루를 가톨릭 구호서비스기구로부터 배분받을 수 있게 되어 무학산 개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아울러 도 및 군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다짐받으며 1964312일 무학농장 개간 첫 삽을 떴다.

 

개간은 1, 2차로 나누어 시행했는데 약 4에 이르는 진입도로 개설공사와 저수지 조성공사 외에는 모든 작업을 인부들의 수작업으로 시행했다. 64312일부터 8월 말까지의 1차 공사에서 13만여 평의 경지를 개간하고, 축사(우사) 건립과 진입도로를 개설했다. 649월부터 시작한 2차 공사에서는 목초지 조성, 창고, 합숙소, 싸일로, 돈사, 저수지를 축조하여 약 23만 평의 무학농장을 조성했다.

 

무학농장 우사 전경(1965년경)

 

 

1966년경에는 젖소 65, 돼지 200마리를 사육할 정도로 당시로는 초현대식 목장 규모를 갖추었으나, 만성적인 적자 운영으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69년 하반기에 농장운영을 중단했다. 1970년에 농장을 매각하고 문을 닫았다.

 

무학농장 개간은 진입로 개설, 저수지 축조에만 군에서 지원한 중장비를 사용했다. 23만 평의 부지, 경작지, 목초지 조성과 건축은 전적으로 곡갱이와 호미에 의존한 인부들의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이는 가난한 지역민 구호가 최우선 목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임 또한 당시 시중노임보다 더 많은 밀가루를 지급함으로써 빈민 구호를 최우선 했다.

 

312일부터 5월 말까지 개간에 투입된 인원만도 12천 명(일 평균 1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구호사업이었다.

 

또한, 구호물자나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려는 지역민들에게 노동을 통해 정직한 대가를 받는 자활 의지를 고취한 농촌자활운동의 모범이었다.

 

무학농장은 일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 이임춘 신부와 양 수산나 여사의 거룩한 이웃사랑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장이자, 세계 곳곳의 후원자들이 보내온 사랑의 원조, 보편적 인류애가 실현된 특별한 공간이다.

 

아울러 최빈국에 대한 원조가 최고로 성공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며, 고대 원효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이타행(利他行) 경산인들의 아름답고도 거룩한 삶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성채(城砦), 성지(聖地).

 

개간 기간

무학농장은 64312일에 개간을 착수하여 659월경에 개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부지면적

무학농장 조성지는 당시 하양면 대학동 산144-1번지(466단보). 교동 산68-1(292단보)과 대학동 604번지~616번지의 토지 4,500평으로 구 지적으로 약 231,900평 규모이다. 경작지가 약 13만 평, 목초지를 10만 평 개간한 규모였다.

 

시설물

 

- 우사

석조 스레트 구조의 3층 건물로 외벽을 화강암 견치석 쌓기로 축조하여 외관이 웅장하다. 크기는 건축면적 174.6, 연면적 349.2, 1, 2층은 젖소 외양간이고, 3층은 작업장으로 사료작물을 실은 운반도구가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유럽식 구조로 3층 작업장에서 1, 2층 외양간으로 사료작물을 내려보내는 우물구조의 먹이통과 3층 작업장에서 엔실리지를 담고 1, 2층에서 꺼내 먹일 수 있도록 설계한 당시로는 초현대식 우사였다.

 

- 돈사

연먼적은 546.843층 돈사와 220.022층 돈사 그리고 관리사 1동이 연결된 2층 아파트식 구조이다. 지형과 단차를 이용해 작업 편의성을 높였다.


 

아파트식 돈사 모습
 

 
- 기타건물

화강암 견치석 석조 구조의 창고(211.56), 숙소(242.2), 사무실(35.2)이 남아 있다. 한우사육 축사도 여러 동 건립하여 한우 사육을 하였으나, 사진 기록 외에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하양 동서리 593번지에 우유가공소를 지어 운영했고, 동서리(쌀전 맞은편)에 가톨릭여자기술학원 하양 분원을 건립하여 운영했다.

 

- 문을 닫은 사유

일각에서 무학농장이 문을 닫게 된 사유로, 무학농장에서 생산한 우유가 대구까지 판매시장을 넓히자, 경쟁 관계에 있는 유업체에서 깡패를 동원하여 우유 판매를 방해하여 목장의 문을 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생존 무학농장 관계자 대부분은 대구지역으로 시장을 넓힐 때 일부 유업계와 마찰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농장문을 닫은 것은 과도한 채무에 따른 자금 압박과 경영난 때문이지 깡패나 경쟁우유업체의 방해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했다.








 

 

 

편집자주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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