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0 오후 3:37:27
유전은 DNA를 통하여 후손에게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물학적 유전과 달리 정신적 유전이란 것이 있다. 정신적 유전은 부모의 인성, 가치관 등이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자인면 신관리는 오백 년 동안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조상들의 정신적 유전자가 고스란히 후대에 이어지고 있는 촌락이다.
▲ 하늘에서 본 자인면 신관리(드론 촬영 이홍우 작가)
◆ 역사와 유래 그리고 삶의 터전
자인면 신관리는 조선 시대 자인현 읍내면 북삼동 관상리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대구부 자인군 읍내면 상관동과 하관동으로 분리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마을을 통폐합할 때 자인군 읍내면 신관동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자인군이 자인면으로 바뀌면서 경산군 자인면 신관동이 되었다.
▲ 상관상마을
이 마을은 상관상(윗마실), 하관상(아랫마실), 정잔 등 세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합하여 관상이라 한다. 관상은 1637년 자인현 읍치가 마을 아래 ‘새들’이라는 곳에 들어섰는데, 그때 관청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되었다. 그 이전 촌락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원래 이 마을은 15세기 중엽 주(周)씨들이 처음 들어와 개척하였다. 그 뒤 15세기 말엽 수원 백씨들이 들어 왔고, 이씨는 16세 초엽 경주에 살던 오계 이인부가 이곳으로 들어와 고조부 이지회를 비롯한 윗대 4대조의 묘를 탕건배기 아래 염불암에 조성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주씨, 백씨, 이씨들이 섞여 살았는데 주씨는 19세기 말엽까지 주시찬(周時贊)을 비롯한 몇 가구 살다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수원 백씨는 옥산리과 남산면 등지로 이주하고 현재 몇 가구만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씨들은 삶의 근거지를 떠나지 않고 오백 년 동안 가세를 확장하여 마을의 지배 성씨가 되었다.
▲ 하관상마을
신관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는 금박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탕건을 닮은 탕건배기라는 산과 등성이가 길어 진등이라는 장등산이 병풍처럼 서 있다. 그 동쪽으로 사리나무가 많아 사라지재라 부르는 능선이 전설을 간직한 금학산에 닿아 있고, 남쪽에는 끝이 뾰족하여 속칭 문필봉이라 부르는 삼락산(삼천산·용각산)이 성곽처럼 두르고 있다. 서쪽에는 탕건배기에서 내려온 양지편이라는 작은 등성이가 마을의 외풍을 막아 주고 있다. 남서쪽으로는 한질배미, 왕금밭, 돌티밑보들 등의 들판이 자인 읍내로 이어져 오목천까지 트여 있다.
저수지는 상관상 북쪽의 연꽃이 아름다운 사제지, 동쪽 굴팃골과 오막골 근처의 물에 비친 보름달이 멋진 만세지, 남쪽 울옥으로 가는 넘덕배미 고개 너머의 버드나무가 아름다운 설못, 신관리에 시집온 여자들의 한숨이 서린 새못 등 4개가 있다. 이외에도 신관리는 ‘관상팔경’이라는 8곳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경주 이씨들이 오랫동안 살아오다 보니 갖가지 사연과 삶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 마을이다.
◆ 오백 년 경주 이씨 삶의 저장고 재실

▲ 쌍괴재와 2그루의 회화나무
경주 이씨가 한 마을에 오랫동안 살게 된 것은 관상 문중의 파조인 묵헌 이기업(1561~1631)의 정치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이기업은 입신양명보다는 초야에 묻혀 학문 닦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장 최문병과 함께 신관리 동남쪽에 있는 천장산(삼천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를 올린 후 왜적으로부터 자인을 지켜내었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에 가서 의병장 곽재우와 더불어 의병 활동을 했다. 난이 평정된 후 나라에서 관직을 내리려 하자 마다하고 귀향하여 강학소를 지어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은둔의 성향이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 곳에 오랫동안 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상을 추향하는 재실이 한 마을에 3개나 있는 특이한 마을이다.
▲ 쌍괴재
쌍괴재는 이기업이 세운 강학소가 그 원형이다. 그의 사후 이곳은 경주 이씨 관상 문중에서 염불암할배라 부르는 상징적 입향조 소경공 이지회, 종부시할배라 부르는 실질직 입향조 이인부, 서당갓할배라 부르는 묵헌공파 파조 이기업을 비롯한 7대를 추향하는 재실 겸 서당으로 이용되었다. 건립 연대는 410년 전인 1610년 전후로 추정되며, 쌍괴재라는 이름은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건립 이후 여러 번 중수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한 시기는 1968년이다. 1960년대까지 입덕문 바깥에 훈장이 기거하면서 후손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현재는 훈장도 떠나고 기거하던 집도 헐어 버렸다.
이기업의 증손자는 둔재 이정완, 은재 이정석, 은와 이정방, 둔와 이정형 등 4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증조부의 삶을 계승하여 집에서 은거한다는 글자를 조합하여 자신들의 호로 삼고 평생 관상리에 은둔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래서 제일 큰집인 둔재 이정완의 직계 후손은 백파, 둘째 은재 이정석의 직계 후손은 중파, 넷째 둔와 이정형의 후손은 계파라 하여 각기 조상을 따로 추향하고 있다. 그래서 이 3형제가 잠든 ‘새미등갓’이라는 묘역은 관상 문중 세 소문중의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 보원재
신관리 아랫마을에 있는 보원재는 바로 큰집인 둔재 이정완의 후손들인 백파에서 1936년 세운 재실이다. 이 보원재 또한 여러 번 중수하였는데, 현재의 모습은 2000년에 이루어졌고 그 후 기와를 한 차례 더 교체하였다. 편액은 대문 현판 ‘목인문’, 본채 현판 ‘보원재’, 큰방 현판 ‘적취당’, 사랑채라 부르는 작은방 현판 ‘무첨헌’, 그리고 보원재의 추향조인 이정완의 호인 ‘둔재’를 현판으로 제작하여 대청마루 가운데 걸어 놓았다. 그리고 상량문과 기문은 대청마루 대들보에 걸려 있고, 주련판은 전면 기둥에 부착되어 있다. 이외의 게판문은 건축 당시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보원재 창건 축하와 문중의 후손 발복을 기원하는 한시 작품들이다.
▲ 모원재
신관리 윗마실에 있는 모원재는 둘째인 은재 이정석의 후손들인 중파에서 1977년 세운 재실이다. 현재 모원재에는 4개의 현판, 5개의 주련, 21개의 게판문이 걸려 있다. 대문은 ‘제창문’, 본채 현판은 ‘모원재’, 큰방 현판은 ‘관덕당’, 작은방 현판은 ‘찬서헌’이다. 대문 옆 서쪽과 본채 뒤 동쪽에 은행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 후손들의 입신양명과 후손 발복도 기원하고 있다.
이렇듯 신관리는 같은 성씨의 재실이 3개나 있는 유서 깊은 집성촌이다. 관상 문중에서는 매년 가을 이지회와 그 아래 7대의 향사를 대문중 재실인 쌍괴재에서 먼저 지내고, 그 다음 백파는 보원재에서, 중파는 모원재에서, 계파는 집에서 따로 모신다.
◆ 노루와 잉어도 감동한 박의인 여사의 효행
▲ 박의인 효부각
마을회관 동쪽 뒤편에는 효부각이 하나 있다. 이 효부각은 박의인(1879-1966) 여사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여사는 1879년 자인현 하북면 북팔동 안촌리(현 진량읍 안촌리)에서 밀양 박씨 박장우의 딸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894년 이종호와 혼인하면서 관상으로 들어왔다.(여사를 제외한 다른 분은 가명으로 처리함.)
여사의 기구한 삶은 아들을 낳은 이듬해인 1900년 남편 이종호가 2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여사는 청상으로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셨다. 1920년에는 아들 태우를 송현애와 결혼시켰다. 그래서 당시 집에는 며느리 3대와 시아버지, 아들이 살았다. 1921년에는 손자 이상몽이 태어났다. 그런데 한 달 뒤 시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다음 해에는 갓 돌이 지난 손자 상몽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게다가 아들 태우가 갑작스럽게 1925년에 사망하였다. 15세에 시집을 와 남편, 손자, 시어머니, 아들 이렇게 줄곧 초상만 치르기를 4번이었다. 시아버지 또한 지병으로 거동을 못하여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앉거나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여사는 본인이 직접 시아버지의 더러운 가래와 대소변을 처리하면서 봉양하였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노루 피를 먹고 싶다고 하기에 여사는 산으로 가 노루를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주저앉아 탄식하는데, 그때 사냥꾼이 노루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사서 가지고 와 시아버지에게 먹였다. 또 하루는 살아 있는 잉어로 약을 만들어 드리면 시아버지의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울가에 가서 잉어를 찾았으나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개울가에 앉아 울고 있는데, 마침 물을 거슬러 올라오던 잉어가 촌부가 쳐 놓은 통발에 잡혔다. 이에 여사는 그 잉어를 사서 가지고 와 시아버지에게 달여 드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며느리의 효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노루와 잉어를 보내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도 아들 태우가 사망한 지 4년 뒤인 1929년 사망하였다. 여사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3년을 하루같이 지극정성으로 시묘살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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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집안은 남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청상의 여성 2대가 살아가는 가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조상님들의 제사를 모시고, 또 대를 잇기 위해서 관상 문중 중파 후손 이상발을 손자로 입적했다. 이상발은 1936년 20세 때 이명계와 혼인하여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1943년 일본군에 징집되어 남양군도 사이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위패는 현재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이상발이 사망하자 이 집에는 청상의 여성 3대가 살게 되었다. 이 3명은 증손자이자 손자이며 아들을 끔찍이 보살피며 그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까지 입학하는 수재로 자라났다. 여사는 1966년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러한 여사의 행적이 너무나 기구하고 시부모를 모시는 정성이 남들로부터 모범이 되어 집안의 조카 이회우가 자인의 선비들에게 알리고, 전국 62개 향교가 나서서 여사를 기리는 효부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증손자는 1970년 건축사무소를 차려 국회의원회관·인천공항여객터미널·아제르바이잔 바쿠올림픽스타디움 등을 설계하면서 세계적인 건축설계회사로 키웠다.
이 효부각은 현재 자인에서는 유일하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러나 효부각 자체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얽힌 사연이 지나는 사람의 마음을 애틋하게 한다.
◆ 전설이 현실화되는 마을
▲ 탕건배기(상관상마을 뒷산)
신관리에는 금학산 전설, 왕금밭 전설, 염불암 전설, 함샘 전설 등이 전한다. 금학산 전설은 마을 동쪽에 있는 금학산이 학의 머리를 닮은 형상이라 머리 위에 무거운 것을 얹으면 마을이 쇠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무거운 것이 기왓장인 줄 알고 오랫동안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신관리 동쪽 고죽리로 넘어가는 굴팃재로 2차선 도로가 생겨나 금학산 아래에 공장이 들어섰는데, 그곳이 바로 무거운 쇠를 다루는 공장이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폐기물 재활용 공장이 다시 들어설 예정이어서 전설이 사실로 입증되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또 금학산 아랫마을에는 유명한 장군이 태어나 나라를 구한다는 전설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마을 출신의 현직 육군 3성 장군이 있어 전설이 현실화되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옛날 신관리 어떤 밭에 큰 금덩이인 왕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욕심 많은 땅 주인이 그 금을 차지하려고 물고를 막아 밭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금을 캐기 시작했다. 아무리 캐도 금이 나오지 않자 땅 주인은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리고 얼마 후 큰비가 내려 물난리가 났는데 물고를 막아 놓은 바람에 그 일대가 모두 물에 잠겼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왕금바다 또는 왕금밭이라고 한다. 이 왕금밭은 현재 정잔 앞에 있는데, 동쪽 금학산(봉수산)에 하강한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것을 구경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 탕건배기 아래 능선을 염불암 또는 염불암산이라 한다. 이곳에는 신라 때부터 암자가 많아 아침저녁으로 스님들이 염불을 외는 소리가 마을까지 들렸다. 그래서 산 이름을 염불암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탕건바우라는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 스님들이 구멍을 뚫어 바둑과 윷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 함샘(약수터)
또 마을 남쪽 관상간(官上澗)이라는 개울에는 함샘이라 부르는 샘과 약수터가 있다. 옛날부터 신관리 사람들은 아프면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샘에 가서 정성껏 빌고 헝겊으로 엽전을 꿰어 나무에 매달아 놓고 마시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단옷날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활용하지 않지만, 상엿집도 관상마을 입구에 있어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전설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게 했는데, 이제는 시대 변화와 함께 서서히 잊히고, 전설이 현실화되는 것도 과학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 임진왜란 의병의 진장터

▲ 설못과 진장터
마을 남쪽 흔히 엄살미라 부르는 설못 안 골짜기는 임진왜란 때 자인현을 지킨 의병들의 근거지인 진장터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자인 의병장 최문병과 이 마을 출신 의병 이기업 등이 군대를 조직하여 마을 앞 천장산(삼천산)에 제단을 차려 하늘에 제를 올린 후 이곳 엄살미에 토성을 쌓고 의병 주둔지를 만들었다. 『자인현읍지』에는 이곳을 진장현이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호국의 골짜기가 이제는 빛바랜 역사책의 한쪽 구석에 가려 있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 마을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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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관리 자연부락, 골, 들, 산 지명(이홍우 작가 제작)
현재 주민등록상 가구 수는 75호, 주민 수는 142명이다. 처음 마을을 개척한 주씨는 살지 않고, 수원 백씨는 4가구 정도 살고 있다. 그 외 최근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온 타 성씨들이 몇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경주 이씨다. 그러다 보니 신관리는 마을의 일이 문중의 일이고, 문중의 일이 마을의 일로 인식되는 혈연공동체 촌락이다. 마을에는 문중원들과 마을 주민들의 친목을 다지는 ‘화전’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데, 매년 5월 5일 열리다가 최근에는 4월 말에 개최한다.
400여 년 동안 조상 이기업의 정신적 유전자를 이어받으며 향리에 은둔했던 경주 이씨 관상 문중 사람들은 근대화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로 100여 년 전부터 차츰 세상으로 나아가 뜻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이 마을 출신들은 관상이라는 이름과 문필봉의 정기를 받아 교육행정가, 교수, 교사, 공무원, 예술가, 공학자, 과학자, 군 장성, 사업가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이름만 밝히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인물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묵헌 이기업의 유지를 받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인물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밝힐 수 없음을 양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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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관리 동남쪽의 삼천산
글을 마치니 흥이 일어나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관상팔경(官上八景)
까아만 하늘 밑에 살다가
오백 년 경주 이씨 관상리에
취한 신선들이 그려놓은 팔경이 있다기에
꼬불꼬불 복사꽃 길을 찾아가니
탕건 쓴 염불할배의 넉넉한 웃음은
장등산 진등을 타고 내려와
한질배미 온 들을 감싸고
금학산 선녀의 거문고 소리가
정잔 앞 왕금밭에 닿기도 전에
발길은 서당갓할배가 머무른 쌍괴재에 다다르네.
회화나무 두 그루 바라보며 관상팔경 물으니
굴티 골짜기 같은 손바닥에 일경이라 쓰는데
탕건배기 염불암 정자는 봄구름을 이고서
혼인날 화장한 색시처럼 밤꽃향에 취해 있고
물오른 설못 버들가지는 엄살미 진장터 등에 업고
신들린 신랑처럼 춘풍에 칼춤 추니
이경이라 하더라.
해는 기울어
귀락곡 박절미산 긴 여름 저녁노을은
읍내 계림숲 마루에 붉은 커튼처럼 걸리니
관상 삼경이라 사경을 그리니
비 그친 만세지 보름달은
윗마실 아랫마실 모원재 보원재 처마까지 넘쳐흐르더라.
유하주 한 잔으로 오경을 그리니
오목천 고기 잡던 돛단배가
누런 파도 헤치고 돌티밑보를 거슬러 올라오고
비 젖은 쌍괴재 노란 은행잎이
가을의 꿈처럼 쌓여있으니
육경이라 하더라.
솜털 같은 할배 품에 기대어 칠경을 찾으니
탕건바위에 새겨진 바둑판에는
억새꽃이 탈속한 할배들 흰 수염처럼 살랑이고
팔경은 차마 못 봐 오막골처럼 두 눈 감으니
할배의 손바닥에는 어느새
신선의 도포를 입은 듯한 삼천산 백룡이
은하수 같은 안개를 내뿜고 있더라.
그 옛날
종부시할배가 터 닦은 이름은 잊었지만
새미등갓 누운 아득한 둔재 은재 둔와 할배 할매는
그 사연 다 간직하니
현청 위에 살고 있어 관상이라 불러도
까아만 하늘을 하얗게 노래하는 마을이니
있는 사람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눈물 머금은 사람까지
관상팔경은 복사꽃처럼 다 품어주더라.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 이상정(신관리 이장)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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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원재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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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가봐야 하겠씁니다. ^^
한번 가봐야 하겠씁니다. ^^
잘보고 갑니다.역시 대단 하십니다그곳 재활업체 정리가 잘 망수리ㅈ되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