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5 오전 8:59:52
▲ 하늘에서 본 자인면 울옥리(드론 촬영 이홍우)
주술 중에 전염주술(contagious magic)이란 것이 있다. 이는 과학으로 증명 불가능한 순전히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지만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가족 중에 누가 사업에 관심이 많으면 그 집안사람들은 대부분 사업가로 성공한다든가, 주변에 군인이 있으면 그 마을에 군인이 많이 배출되는 것이 바로 전염주술이다. 믿기 힘든 이 전염주술과 같은 일이 자인현 울곡리(현 울옥리)에서 500여 년 전에 벌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이 마을 주민 전체가 의병에 참가하였다는 것은 이 마을 주민들의 가치관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전염주술의 결과라 볼 수 있다.
◆ 역사와 유래 그리고 삶의 터전
자인면 올옥리는 조선 시대 자인현 읍내면 북초동 울곡리(蔚谷里)와 오견리(烏見里)였다. 오견리는 1895년 옥연동(玉淵洞)으로 바뀌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마을을 통폐합할 때 울곡동과 옥연동을 합하여 울옥동이 되었다. 법정동은 울옥동이었지만 울곡동과 옥연동은 각각 울옥1구와 울옥2구로 분리되었는데, 이러한 기준이 해방 후에도 지속되어 울옥1동, 울옥2동으로 분리되었다가 1988년 동리 명칭 개편 때 이 둘을 합하여 울옥리가 되었다.
▲ 판재와 아랫판재
울옥리는 울곡, 옥연, 연하못둑 등 세 각단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울곡은 현지음으로 울실, 우실 등으로 부르는데, 빽빽하다는 뜻의 ‘울’과 마을의 경상도 음인 ‘마실’의 ‘실’이 결합되어 ‘울실’로 부르다가 ‘ㄹ’이 탈락되어 우실로 굳어졌다. 이 울실이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울곡이 되었다. 옥연은 원래 ‘오견’이었다. 까마귀 ‘오’와 볼 ‘견’을 쓰는데, 현지음으로는 음운변화를 일으켜 ‘외기’라고도 한다. 연하못둑은 연하못 가에 형성된 각단인데, 울곡과는 아랫판재라는 작은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옥리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동부리에 가깝다. 여기서는 이 세 각단 중 울곡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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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옥리 행정지도(상) 울옥리 지명지도(하) -이홍우 제작-
울곡리 주변에는 큰 산은 없지만, 자인면 사무소에서 동남쪽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골이 깊고 들판은 그리 넓지 않다. 산은 북쪽의 남산비알과 마을 뒤의 뒷뫼가 있고, 동쪽으로는 삼천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등성이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남쪽으로는 아미등과 판재라는 작은 등성이가 마을 앞을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 옥산으로 넘어가는 한곡, 자제지 동쪽에 잠못안과 진덕골이 있고, 남쪽 가막지라는 못 동쪽에 가막골과 도장처럼 깊숙하다 하여 붙인 도장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논과 들은 가막지 아래에 있는 강못밑들, 자제지 아래에 있는 잠못밑들, 그 아래에 바래미라는 들과 북서쪽으로 당산못안이라는 들판이 있다. 저수지는 동쪽의 자제지와 동남쪽의 가막지가 있고, 마을 북서쪽에 당산지(구제)가 있다.
이러한 울곡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15세기 중엽 영천 최씨 최모와 아들 최사해다. 그 후 경주에 살던 함양 박씨 박영필이 들어왔고, 뒤이어 경주 김씨 김규년이 들어왔다. 시기적으로는 모두 임진왜란 전이다. 이 세 성씨는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친족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16세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자인현 최초로 온 마을 주민이 의병을 일으켜 자인현을 지켜내었다. 그 뒤 영천 최씨는 원당으로 이거하고, 경주 김씨는 현재 용성면 덕천리 등으로 이거하면서 울곡이 함양 박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 최씨·박씨·김씨 세 문중의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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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곡 마을 풍경들
영천 최씨가 자인 울곡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경위를 알려면 최사해의 처가인 대구 서씨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300년대 후반에서 1400년대 초반 당시 자인현 서면 아방동(현 압량읍 내동과 남방의 앞방들)에는 조선 초 대학자인 사가정 서거정(1420∼1488)의 증조부 서익진, 조부 서의, 부친 서미성(1383∼1431)이 대대로 살고 있었다. 1399년 서미성은 관직에 올라 한양으로 가서 권근의 딸과 혼인하여 서거광(?∼1459)과 서거정을 비롯하여 딸 다섯을 두었다. 이후 큰아들 서거광은 언양 현감을 지내다가 조부가 살던 자인현 아방동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현재도 그의 조부모와 증조부 묘가 아방동 서남쪽 현 유곡리 신제지 가에 있어 ‘거정대(居正垈)’라 부르고 있다. 이 서거광에게는 장녀인 딸(1430년경 생)과 아들 팽소·팽려가 있었다. 서팽소는 1476년 과거에 합격하여 한양으로 이거하고, 모친 죽산 안씨·서팽려·딸은 자인에 살았다. 1483년 죽산 안씨가 사망한 후 서팽려는 영천으로 이거하고, 혼인한 딸은 남편과 함께 아방동에 살았다.
한편, 영천이 고향인 영천 최씨 최사해는 1450년경 자인현 유곡 아방동에 살던 서거광의 딸과 혼인하였다. 혼인 초에는 부인의 동네인 아방동 신제지 내에 살면서 아들 최규를 낳고, 이후 고부군수를 역임한 부친 최모와 울곡으로 들어왔다(문중에서는 1498년 무오사화 때 최모가 화를 피해 자인에 들어왔다고 전해짐). 아들 최규는 1470년경 문화 류씨 류인종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공권과 공형, 딸 6명을 두었다. 이 최규의 증손자가 바로 의병장 최문병(1557∼1599)이다. 최문병은 최희지·최경지 두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경주부 남면에서 1470년경 박량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함양 박씨 14세 박영필은 울곡에 살고 있던 최규의 셋째 딸과 1490년경 혼인하면서 울곡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들 박항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박항은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박몽룡·박몽량(1558년생)·박몽리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경주부에 살던 경주 김씨 승사랑 김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규년은 박영필의 딸과 혼인하면서 울곡에 들어와 김우용·김우단·김우련(1552∼1632)·김우주 등 아들 넷을 두었다.
이렇듯 임진왜란 직전까지 이 세 문중은 친인척 관계를 형성하며 모두 울곡리 한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심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자인현 의병이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45명 정도인데, 울곡리에서만 무려 9명의 의병이 나왔다. 당시 한 마을 주민이 기껏해야 10여 가구 정도였고, 여기에다 그들이 거느린 식솔까지 가담했으니 온 마을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울곡리는 온 마을 주민이 의병을 일으킨 이른바 의병촌이었다.
◆ 영천 최씨 문중의 의병 활동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인에 거주하고 있던 영천 최씨 문중은 대거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자인현 안의 영천 최씨들은 읍내면의 울곡리·관상리, 상동면의 곡란리, 하북면 현내리 등지에서 살고 있었다. 이 문중은 현재도 각각 영천 최씨 원당 문중, 관상 문중(신도리), 곡란 문중, 현내 문중이라 하면서 서로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최씨 문중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당시 울곡에 살고 있던 최문병이다. 당시 최문병은 자인현 품관을 맡은 유지였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자인현을 경주부에서 떼어내 경산현과 합속하려고 복현 운동을 벌인 바 있는 의리의 선비였다. 복현의 거사는 경주부에서 파견된 사람들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최문병을 비롯한 거사 참여자들은 경주부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동안 착취를 일삼던 경주부 관리는 경주를 방어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인현의 군인을 모두 경주로 데려가 버려 자인은 군인 한 명 없는 무방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평소에는 과도한 세금과 부역으로 자인을 착취하였고, 어려움이 닥치자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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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장 최문병의 말안장(보물, 경산시립박물관 소장)
이에 분개한 최문병을 비롯한 자인현민들이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최문병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천장산(신관리 앞 삼천산) 꼭대기에 제단을 마련하고 하늘에 제를 올린 후 산 아래 엄살미라는 곳에 진을 치고 토성을 쌓아 자인 의병의 주둔지로 삼았다. 그곳이 현재 『자인현읍지』에 기록된 신관리 ‘진장현’이라는 곳이다. 이 진장터를 의병의 본거지로 삼고 최문병은 두곡, 청도, 영천, 경주, 울산 등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왜적들을 물리쳐 자인에는 왜적들이 한 발짝도 침범하지 못하는 이른바 해방구를 만들었다. 그 결과 경상도 각지에서 자인에만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진량 신제리의 충주 석씨, 용성 미산2리(오산)의 청도 김씨, 고은리의 진주 강씨 등 수많은 사람이 자인으로 이주해 와서 지금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의 두 아들 최희지와 최경지도 부친을 따라 전장을 누볐다. (최문병과 자인 의병의 활약상은 생략함.) 이후 영천 최씨는 원당으로 이거하여 현재 울곡리에는 입향조 최모의 묘만 남아 있다.
▲ 구제, 현 경산제일고 옆 당산지의 옛 이름
마침 의병장 최문병이 마을 북서쪽 당산지(당시 구제)에서 노닐며 썼다는 오언절구의 한시가 있어 번역만 소개한다. 원문은 『성재실기』에 있고,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구제를 거닐며 읊다
낚시 마치고 긴 못 둑에 오르니
가랑비 내려서 도롱이를 눌러 쓰네.
먼 봉우리는 맑은데 날은 저물어
돌 사이 흐르는 물에 기대어 시를 읊네.
◆ 함양 박씨 문중의 의병 활동
함양 박씨 울곡 입향조는 박영필이다. 호는 무회당이다. 그는 15세기 후반 경주부 남면 구왕동(현 경주시 내남면 덕천1리)에서 살다가 영천 최씨 최규의 딸과 혼인하면서 울곡에 들어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하고 올곧아 지조를 지켰으며, 스스로 배움을 찾았다. 또 효심이 깊어 아버지가 별세하자 큰형 박영번과 함께 시묘살이하여 사람들이 부친의 묘가 있는 산을 ‘박효자등’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회재 이언적이 잠시 자인에 온 인연으로 이후에도 그와 교유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 모두 없어지고 시 3편만 남아 있다. 필자가 번역한 오언절구 한 편을 번역문만 소개한다.
달 밝은 가을밤 *회옹을 그리며
골짜기에 가을이 드니 쓸쓸한 거문고 소리 들리고
기러기 끊어지니 괜스레 달만 둥글구나.
세상을 등지니 근심이 없어졌지만
그대를 그리워하니 잠이 오지 않네.
*회옹: 회재 이언적을 말함.
▲ 진덕골 덕양재와 자제지
현재 그를 추향하는 재실이 울곡리 진덕골에 있는 덕양재이다. 이러한 박영필에게 손자 3명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박몽룡·박몽량·박몽리다. 이 삼 형제와 박몽룡의 아들 박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친척인 최문병과 함께 천장산에서 제를 올리고 의병에 참여했다. 특히 삼 형제는 당시 이잠이라 하였고 후에는 이암·이령으로 바뀐 용성 매남3리 이암 전투에서 왜병을 막아 자인현 지역을 지켜낸 공로가 있다. 정유재란 때는 박몽량⋅박몽리, 박춘이 화왕산 곽재우의 막하에서 또 공을 세웠다. 그들의 공적은 『선무원종공신록』, 『화왕산성동고록』, 『자인현읍지』 등에 실려 있다.
◆ 경주 김씨 문중의 의병 활동
경주 김씨 울곡 입향조는 김규년이다. 경주부에 살다가 박영필의 딸과 혼인하면서 울곡리로 들어왔다. 아들은 김우용·김우단·김우련·김우주 등이다. 김우용은 자인 남촌리(송대) 밀양 박씨 송대 문중 입향조 박구수의 딸과 혼인하였고, 김우련은 서산 류씨 류윤수의 딸과 혼인하여 자인현 복현에 공헌한 취죽당 김응명(1593∼1647)을 낳았다.
김우용·김우련 형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외외가(외할머니의 친정) 쪽으로 6촌 형제관계인 의병장 최문병과 함께 신관리 앞 천장산(현 삼천산)에서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자인전투를 비롯하여 경주 문천·서천·당교 전투에 참가하고 팔공산 회맹에 가입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곽재우의 막하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김우용에 관한 기록은 『용사세강록』에 있고, 김우련은 『용사세강록』과 『자인현읍지』에 있다.
한편, 김응명이 향시에 합격하고 울곡리 집으로 돌아와 쓴 시 한 편이 있다. 원문은 『취죽당일고』에 있고 번역은 문중에서 한 것이 있지만, 필자가 다시 번역하여 번역문만 소개한다.
향시에 합격하여 집에 돌아오니 아버님이 매우 기뻐하심에 삼가 절구를 짓다
부모님 마음 기쁘게 하려 과거에 응시하여
과장 가득 북과 피리 크게 울리고 돌아와
뜰 앞에서 웃으며 색동옷 입고 춤을 추지만
어찌 감히 부모님 은혜에 보답했다 말하겠는가.
*원문의 ‘반의(斑衣)’는 색동옷을 의미하는데, 『북당서초』에 나오는 구절로 노래자가 나이 70에 색동옷 입고 부모 앞에서 춤을 추어 기쁘게 했다는 데서 따온 것임. 주로 효도와 관련하여 많이 쓰는 고사임.
이처럼 울곡리는 500여 년 전 경주부로부터 버림받은 자인이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였을 때 온 마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의병을 일으켜 자인과 주변 지역을 방어하면서 왜적을 물리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러나 세월이 물처럼 흐르다 보니 갖가지 사연도 함께 흘러가 버리고, 그 흔적은 울곡리 주변 세 문중의 묘소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울곡리에 서려 있는 삶의 흔적
울곡리에는 과거 영천 최씨의 인지정사, 함양 박씨의 울영재, 최근 발굴된 취죽재 등의 강학소(서당)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함양 박씨의 덕양재와 전의 이씨의 사모재 등 조상을 추향하는 재실이 있다. 인지정사는 최사해의 5세손 최문병이 22세 때인 1579년경 세운 강학소로 진덕골 자제지 북쪽 기슭에 있었다. 초기에는 영천 최씨들이 학문을 닦고 후손을 교육시키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원당에 있던 자인현청이 동부리로 옮겨 가고 영천 최씨가 원당으로 이주했는데, 그때 이 인지정사도 원당으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인지재라 하여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취죽재 터
취죽재 또는 취죽서당은 현 덕양재 뒤쪽에 있었다. 울곡의 고 박유택 씨가 증조부 산소 위치를 친필로 “翠竹書堂局內,現齋室後酉坐(취죽서당국내, 현재실후유좌)”라 써 놓은 글이 족보에 있었다. 이를 근거로 아들 박상준 씨가 얼마 전 발굴한 결과 일렬로 박힌 주춧돌 5개가 발견되어, 그곳이 취죽재 터였음이 확인되었다.(취죽재에 관한 기타 정보는 이견이 있어 언급하지 않음.
그리고 마을 입구 18번지에 함양 박씨가 세운 서당 울영재가 있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입구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울영재 폐철 후 철거했다. 속칭 영재서원으로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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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 황기식
동부리의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였던 황기식이 울곡의 함양 박씨 박기동과 울영재에 머물면서 시도 몇 편 남겼다. 아래 작품은 1951년 1월 황기식이 동생 황기완과 울영재에서 하룻밤 묵으며 쓴 칠언율시의 한시인데, 필자가 번역하여 처음으로 소개한다. 원문은 황기식의 일기 『무예록』에 있다.
동생과 함께 울영재에 가서 불천 박기동과 하룻밤을 묵으며
서리 차가운 오래된 마을 하늘에 달이 걸려
맑은 하늘 등불 주변에 단아한 모임을 여네.
술병을 당겨 술을 따르니 마음이 먼저 기뻐
붓을 잡고 시를 쓰자니 생각은 아득해지네.
처마 끝에는 두 그루 회화나무 그림자 멀리 비치고
담장 머리 어린 대나무는 구름과 안개를 잠그네.
울영재 선비는 영혼이 어질고 밝으니
이로부터 한가한 운명은 저절로 이어지네.
▲ 덕양재
덕양재는 함양 박씨 문중에서 세운 재실인데, 1938년 4월 건립했다. 이 재실은 함양 박씨 울곡 문중의 입향조 박영필을 추향조로 하고 있다. 덕양재는 울곡리에서 동쪽으로 마을 끝인 진덕산 진덕골에 있다. 재실은 북향이고 기본적인 골격은 1938년 건축될 당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정면 4칸ㆍ측면 1칸 반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와로 마감하였다. 경사진 산기슭을 깎고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재실을 얹어 놓아 웅장하다는 느낌을 준다. 마당은 관리상 편의를 위해 시멘트로 덮어 놓았다. 대문은 솟을대문이고, 담장은 시멘트 벽돌담을 둘러놓았다. 문호 현판 ‘자영문’과 재호 현판 ‘덕양재’가 있고, 덕양재기와 상량문 및 한시 등 게판문이 4개 있다.
▲ 사모재
사모재는 전의 이씨의 재실인데, 자인의 향토사학가인 약사 이종대의 부친이 세웠다고 한다. 당호 현판 ‘사모재’는 2000년에 썼고, 전체적으로 소박하게 건립되었다.
◆ 양반도 걸어 넘던 판령 전설
▲ 전설이 전해져오는 판령, 현재는 마을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울곡리에는 판재 또는 판령에 관한 전설이 있다. 울곡리 마을 앞에는 자그마한 등성이가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데 옛날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울곡리로 다녔다. 어느 날 어떤 양반이 말을 타고 고개를 넘다가 밥상처럼 생긴 것을 보고 ‘사람이 먹는 밥상 위로 말을 타고 넘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내려서 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는 판재 또는 판령이라 부르고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내려서 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마을회관이 있다.
이외에도 마을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속칭 개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곳을 일제 때 일본인들이 길을 내면서 혈을 끊어 버렸는데, 공사 도중 벌건 피가 섞인 흙이 나왔다고 한다.
◆ 마을 현황
▲ 울곡마을 봄 풍경
1888년 울곡리는 가구 수 20호에 함양 박씨 박기태·박재하, 전의 이씨 이석귀 등이 살고 있었다. 현재는 30여 가구에 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성씨는 박씨가 15∼16가구로 가장 많고, 전의 이씨 2가구, 청주 한씨 등이 있다. 청주 한씨는 청도 방지에서 살다가 300여 년 전 울곡으로 들어왔다. 이 마을 출신인 전의 이씨 이종대는 약사이지만 향토 문화 보존에 열정을 가지고 『자인의 맥』을 저술함과 동시에 경산자인단오제, 자인팔광대, 자인줄다리기 복원 등 자인의 문화예술을 정리하는 데 열정을 쏟다 요절한 인물이다.
◆ 에필로그
500여 년 전 나라가 위기에 닥쳤을 때 마치 전염주술에 걸린 듯 세 문중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 온 마을이 의병에 참여한 울곡리, 지금은 왜군을 향해 호령하던 영천 최씨, 경주 김씨 문중은 다른 곳으로 이거하였고, 함양 박씨 후손들만 조상이 물려 준 깊은 골짜기 울곡에서 떠가는 배에 몸을 맡기듯 흐르는 세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글을 마치니 흥이 나 필자도 한 편의 시를 써 본다.
울곡리를 아시나요
울곡리를 아시나요.
그곳에는 아방곡 거정대 살던 최씨 총각이
연지 같은 사랑하는 서씨 처녀 손목 잡고
울울창창 울곡에 들어와
봄날의 바람처럼 살다 보니
마을 가득 매화꽃이 피었답니다.
울곡리를 아시나요.
그곳에는 서라벌 구왕동 살던 박씨 총각이
곤지 같은 사랑하는 최씨 처녀 반하여
울울창창 울실에 들어와
여름날 구름처럼 살다 보니
마을 가득 난초꽃이 피었답니다.
울곡리를 아시나요.
그곳에는 서라벌 경주부 살던 김씨 총각이
연지곤지 같은 사랑하는 박씨 처녀 만나러
울울창창 우실에 들어와
가을날 햇살처럼 살다 보니
마을 가득 국화꽃이 피었답니다.
매화꽃 난초꽃 국화꽃은 남산비알 피어나
오견산 건너 오목천으로 향기 뽐낼 때
섬 오랑캐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기에
하늘 같은 천장산 올라가서
이꽃 저꽃 다 모아
보름달 같은 꽃불을 피웠답니다.
그 후
긴 햇살이 가막골 강못 밑으로 흘러가는 동안
매화꽃 국화꽃 하나둘 바람에 떠나갈 때
무회당이 피운 난초꽃 한 송이만
겨울날 대나무처럼 진덕골 덕양재 처마 밑에
숨 쉬고 있답니다.
그리하여
밤하늘 별들이 물고기처럼 자제지 가막지에 노니는
울곡리를 아시나요.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 박상인·백종상(울옥리 주민)
다음에는 4월이면 별유천지가 펼쳐지는 자인면 옥천1리(옥산리)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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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덕산
▲ 자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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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등

▲ 당산지와 당산못밑들
▲ 가막지와 가막골
▲ 울곡리 우실
▲ 진덕골과 한골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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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산소 이전으로 울옥리 다녀왔는데 ,이글을 통해 몰랐던 함양박씨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지방 역사 잘알아보니 새로운역사를 배웠네요 우리가살고있는 역사 바로알고 후대에 잘전해야합니다 좋은글잘읽어 보았습니다
우리지방 역사 잘알아보니 새로운역사를 배웠네요 우리가살고있는 역사 바로알고 후대에 잘전해야합니다 좋은글잘읽어 보았습니다
내용중관상문중(신도리)가 관상문중(신관리)의 잘못표기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