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異人)이 살던 별유천지 옥천1리(옥산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자인면 편(4)

2023-04-18 오전 9:11:27

믿음은 사실과는 상관없이 어떤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철학적·심리적 태도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믿음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믿으면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 믿음에 대한 태도는 바뀔 수 있다. , 과거에는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고의 변환 과정을 거쳐, 현재는 거짓이거나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가 자인면 옥천1리에 전하고 있다.

 

▲ 하늘에서 본 자인면 옥천1리
 

 

역사와 유래

 

옥천1리는 1498년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탁영 김일손(14641498)의 숙부였던 중계 김인(1419?)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당시 변란을 피해 청도에서 자인으로 들어와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지세가 좋아서 옥산(玉山)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남쪽 입구에 저수지가 조성되었는데, 이 저수지에 누불미기(꽃뱀)가 많고, 늘 붉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저수지 이름을 누불못 또는 적제라 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마을 이름으로 굳어져 조선 시대에는 자인현 상동면 적제리가 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 때 읍내면으로 편입되면서 옥산이란 이름이 다시 살아나 자인군 읍내면 옥산동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에 의해 남쪽 오목천 가의 한낫개라 부르던 대천동과 합하여 마을 이름이 옥천동으로 바뀌어, 원래 옥산동은 옥천1, 대천동은 옥천2리가 되었다.


 

▲ 옥천1,2리 행정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현재 이 마을은 크게 누불못안, 새태, 못뚝 등 3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불못안은 누불모산·늘모산·늘못안·모산 등 다양하게 불렀는데, 옥산의 원 마을이다. 새태는 누불못 서쪽에 새로 조성된 각단으로 한자로 신기라 한다. 못뚝은 늘못뚝이라고도 불렀는데, 누불못(적제)의 둑 아래 용성면 어일리와 맞닿아 있는 각단이다.


 

옥천1(옥산리) 지명지도(제작 이홍우)

 


 

옥산은 골이 깊어 골짜기와 산, 등성이가 많다. 대표적인 고개는 용성면 고죽리로 넘어가는 고루골재, 서쪽 울곡으로 넘어가는 한곡이 있다. 골짜기는 고루골재에 있는 고루골, 고루골 위쪽에 있는 웃고루골, 남쪽 누불못의 마래(물넘이) 위쪽에 있는 매르채이, 동쪽 수암사가 있었던 수암골, 동쪽 동산의 진등 북쪽에 지형이 둥그렇게 생긴 돌방지 등이 있다. 등성이는 동쪽 누에처럼 생긴 누빗등, 누빗등 서쪽 감나무가 많았던 감나뭇등, 동쪽 동산의 긴 등성이인 진등이 있다. 산은 마을 북동쪽 삼천산, 누빗등 동쪽에 있는 동산, 진등 동쪽 화전과 부엉이 집이 있던 붕디팔밭, 돌방지 북쪽에 계를 모아서 가꾼 말림갓이 있던 짓갓, 짓갓 북쪽 새로 가꾼 말림갓이 있던 새갓, 서남쪽 새태가 있는 새탯비알 등이 있다. 들판은 늘못 밑 서쪽 대추나무가 많았던 대추밭, 대추밭 남쪽의 머롱골, 대추밭 서쪽 절이 있어 부처가 발견되었다는 지땅말리, 대추밭 동쪽 홈통을 놓고 물을 댄 홈거래 등이 있다. 저수지는 마을 남쪽에 조성된 적제지가 대표적이고, 마을 북동쪽 삼락산 아래 삼락지가 있다. 샘으로는 속병에 좋았다 하는 약샘(약천)이 있다.

 

▲ 삼락산, 삼락지, 진등과 붕디팔밭, 감나무등과 누빗등

 

 

또 동쪽 동산에는 너구리가 살았다는 너구리방구도 있고, 작은 바위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어 늘 덩거렁덩거렁거렸다는 등거렁방우(건넝방우)가 있었다. 이 바위는 마을 동쪽 동산 8부 능선에 있었는데, 아래에 작은 바위가 있고, 그 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어 조금만 힘을 주어도 흔들리면서 덩거렁덩거렁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위에 있는 바위를 미는 과정에서 그만 바위가 굴러떨어져 버렸다. 바위가 산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가는데, 이때 마을에서 불이 났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산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불을 끄려고 마을에 내려가니 불은 나지 않고 멀쩡했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바위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니 굴러떨어진 바위가 다시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바위를 용성 어일에 사는 아이 네 명이 와서 밀어 넘어트려 현재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바위를 넘어트린 아이 네 명이 차례로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 마을을 개척한 김해 김씨의 재실 삼락재가 마을 입구에 있고, 마을 위쪽 삼천산 아래에는 창녕 조씨 재실 옥산재가 있다. 또 삼락재 대문 앞 도롯가에는 김사문중하공덕비’(사문은 선비라는 뜻임)라 새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 삼락재

 

▲ 옥산재
 

▲ 김중하 공덕비

 

 

이인의 삶을 살다가 천상봉으로 떠난 운재 백계하 선생

 

▲ 운재 백계하 묘지 

 

이러한 마을에 수백 년 전도 아니고 불과 70여 년 전 신선 같은 삶을 살다 간 운재 백계하(18781953) 선생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선생은 조선 인조 때 자인현 복현운동을 벌인 백현룡과 백렴의 후손으로 관상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옥산으로 왔다. 묘는 옥산동 뒷산 천상봉(天上峰)이라는 야트막한 봉우리 꼭대기에 있다. 1980년 그의 제자들이 운재백선생묘도비를 세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삼괴재에서 진사 최정삼에게서 글을 배웠다. 육경과 병무의약(兵武醫藥)과 복서(卜筮)에 능통하였다. 또 주역을 탐구하여 하늘의 열고 닫힘을 볼 수 있었으며, 괘와 효로써 미묘한 자연의 원리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주변 학자들이 질문하러 오면 막힘이 없었다. 그가 남긴 글을 손자 백규상이 문집으로 묶은 운재유고(雲齋遺稿)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 주역을 주해한 대학자
 

이러한 그가 1936주역을 주해한 역경해의(易經解義)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총 42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주역은 자연과 인간사의 보편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견해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책이다. 그래서 인간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은 결단의 순간에 주역으로 미래를 알아보려고 했다. 따라서 주역은 그 내용이 오묘해서 웬만한 학자가 아니고서 주해를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러한 주역을 백계하가 1936년 주해를 했다는 것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권근·이황·송시열·정약용과 비견되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학식을 가진 대학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단지, 앞의 학자들이 세상에 나아가 학식을 적용하면서 입신양명의 길로 나아갔다면, 백계하는 재야에 은둔하면서 학문 탐구에만 열중한 그야말로 재야의 고수였다.

 

▲ 백계하 선생이 주역을 주해한 책 '역경해의'의 표지와 내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발간한 이 책은 현재 자인 옥산에는 전하지 않고 몇몇 도서관에만 소장되어 있다. 개인은 경산에 사는 그의 외손자 박종천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손부인 이태조의 증언에 따르면 19세 때인 1957년 결혼하여 시댁에 가니 궤짝에 책과 문서가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후 모두 사라졌다.

 

-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의 일화

 

이러한 주역에 도통한 조선의 마지막 대학자였던 그에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접근하면서 여러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해방 후 이승만 박사는 선생의 학문적 명망을 정치적 동반자인 자인 출신의 배은희에게서 듣고 선생을 서울로 초청하여 대통령에 나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를 물었다. 선생은 이승만에게 여러 방안을 조언하였고, 그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승만은 선생을 컨설턴트(마을에서는 국사, 즉 나라의 스승이라 함.)로 삼으려고 경무대로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응하지 않자 이승만은 재차 예를 다하여 초청했다. 두 번째 부름에는 거절하지 못하여 도포와 갓 차림으로 기차를 타러 경산역까지 갔는데, 그만 그곳에서 갓의 모자 부분이 부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선생은 서울로 갔다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그 길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며칠 후 6·25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었다.

 

그 후 1952년 전쟁 중 이승만은 두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또 선생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때 선생은 그만두라고 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대통령에 재출마하여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1953년 여름 임시수도가 부산에 있다가 서울로 복귀할 때 이승만은 경산역에 기차를 세워 놓고 경무대 사람 두 명을 옥산으로 보내 선생을 모셔 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이번에는 하는 수 없이 따라가기로 하고 이승만을 경산에서 만났다. 날이 저물어 선생은 경산 조영동 셋째 딸 백조이의 집에 가서 하룻밤 묵고 가자고 하면서 이승만을 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조영동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이 잠든 사이 국민이 내려오라고 할 때 바로 대통령을 그만두라. 그러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놓고는 몰래 돌아와 버렸다. 이승만도 세 번이나 거절하는 그를 더 붙잡지 않고 서울로 갔다. 그 후 선생의 말을 듣지 않은 이승만은 세 번째로 대통령에 나가 부정 선거를 하여 1961년 하야했고, 먼 타국에서 별세했다. 비문에 새겨진 그에 대한 평가는 비록 가난하지만 배움을 즐겼고, 넓게 배워서 지조가 높아 대통령의 정성스러운 초청에도 굴하지 않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고 하였다.

 

- 미래를 예견하는 이인의 풍모

 

워낙 학식이 높고 대통령의 부름에도 굴하지 않은 그의 지조, 미래를 예견하는 그의 능력이 널리 알려지자 축지법을 써서 서울을 3일 만에 갔다 왔다는 등 이인(異人)으로서의 그에 대한 전설까지 생겼다. 그가 출타하여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울곡에서 옥산으로 넘어오는 한곡이라는 고개에 늘 범이 나타났다. 그러한 범을 선생은 말로 다스리고 지금 나를 잡아먹지 말고 길잡이를 하면 앞으로 풍족한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그 후 범은 고개에서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마을까지 길을 안내하고 돌아갔는데, 다음 날이 되면 마을에서 개나 소가 꼭 한 마리씩 없어졌다. 하루는 경산에 사는 소경이 옥산에 찾아와 죽기 전에 세상 구경을 한번 하고 싶다고 했다. 선생은 소경에게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소경은 그날 밤 산천경개, 전국 각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구경을 다 하고 나니 다음 날 아침이었는데, 모든 것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또 선생은 손자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과 부인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는 능력까지 지녔다. 그의 장손은 백규상인데, 1931년생으로 6·25전쟁 직전 경찰이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체포할 때 선생이 이를 예견하고 손자에게 돈을 모자라게 주면서 담배를 사 오라고 시켰다. 손자는 돈이 모자라 담배를 사지 못하자 꾸중 들을 것을 염려하여 산속에 숨어 버렸다. 그 사이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청년들을 체포해 갔는데 다행히 손자는 체포되지 않았다. 그때 잡혀간 사람들은 대부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생매장당했다.

 

그 후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함락되어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내려오고 피란민이 속출하자 자인 사람들도 두려워 피란 가려고 보따리를 싸고 있을 때, 선생은 사람들에게 느긋하게 보리쌀이나 좀 사 두어라.”라고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보따리를 다시 풀고 보리쌀을 사 두었다. 그런데 며칠 후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피란민이 자인으로 물밀듯이 밀려오고, 오목천을 비롯한 각 마을에 들어와 숙식을 해결하려고 난리를 쳤다. 이때 보리쌀을 사 둔 사람들은 재미를 좀 보았다고 한다. 전쟁이 나도 이곳은 안전하다는 것을 선생은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손자가 군대에 징집당하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며느리에게 주먹밥을 해서 손자에게 주라고 하면서 산속에 들어가서 3일 동안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손자가 산속으로 들어간 날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청년들을 징집해 갔다. 다행히 백규상은 마을에 없어 징집당하지 않았다. 그때 입대하였다면 손자는 전장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라고 집안에서 전한다. 그 후 손자는 정전 후에 군대에 입대하여 바다 건너 제주도 안전한 곳에서 5년간 군 복무를 했다.

 

이러한 선생이 어느 날 집안사람을 불러 놓고 오늘 밤에 자기는 죽을 것이고, 다음 날 새벽 부인도 같이 가는데, 부인이 앞서고 자기는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과연 선생은 별세하였고, 다음 날 새벽 부인 김해 김씨도 별세하였다. 그래서 집에서는 한꺼번에 두 개의 상여, 이른바 쌍상여가 나가는데, 신기하게도 부인 상여가 앞서고 선생의 상여가 뒤를 따르는 형국이 되어 자인 사람은 물론이고, 멀리 경산·영천·청도 사람까지 몰려와 진귀한 장례식을 구경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는 비사실적인 전설에 해당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설적 인물이 될 정도로 선생이 이인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다. 불과 70여 년 전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백계하와 그가 살던 옥산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졌고, 지금은 아득한 전설이 되고 있다.(이상 운재 선생 이야기는 손부, 증손녀, 외손자 및 마을 주민 김성식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였음.)

 

마침 선생이 쓴 수많은 한시 중 유일하게 신관리 보원재에 한 편이 전하고 있어 필자가 번역하여 소개한다.

 

삼가 운을 따서 짓다

 

덕이 산처럼 쌓여 이 누각 지으니

영광스런 선조가 후손에게 준 복이 개중에 있네.

흉금 터놓은 예속은 사람을 포용할 마음이요

벽을 둘러싼 도서는 사물을 읊은 말씀이네.

집에는 풍도가 높아 천 년 동안 고결하고

섬돌엔 화기가 짙어 사시사철 따뜻하도다.

북돋운 뿌리를 보면 가지가 창달함을 알겠으니

옛 덕을 간직하고 새것을 따르면 번성한다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옥산리

 

▲ 벚꽃이 만개한 적제지 


 

4월 벚꽃이 만개하는 때가 되면 옥산리는 그야말로 당나라 시인 이백이 산중문답에서 노래한 별유천지비인간의 세상이 펼쳐진다. 마을 앞 누불못이라 부르는 적제지에는 수백 그루의 벚나무가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싸 있다. 이 벚나무가 3월 말이 되면 움츠렸던 꽃봉오리를 터트리며 만개하여 저수지 주변이 온통 하얗게 물든다. 그리하여 4월 초가 되면 동쪽 매르채이 등성이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만나 하얀 꽃잎이 휘날리면 적제지에는 온통 함박눈이 내리는 듯한 장관이 연출된다. 거기다가 적제지 위쪽 들판과 천상봉 등성이의 복숭아밭에는 붉은 복사꽃이 마을을 감싸 마치 흰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은 처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으려고 누운 것처럼 온 마을이 별천지가 된다. 이와 더불어 산란기를 맞이한 적제지의 팔뚝만 한 잉어들도 물 위로 튀어 오르며 함박눈처럼 내리는 벚꽃으로 정욕을 불태운다.

 

에필로그

 

운재 백계하 선생이 이인처럼 살다간 별유천지 옥천1리는 현재 가구 수 65호에 130여 명이 살고 있다. 마을을 개척한 김해 김씨는 몇 가구 살지 않고, 그 외 함양 박씨·경주 김씨·밀양 박씨·수원 백씨가 몇 집 있고, 나머지는 각성들이다. 최근에는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온 사람도 몇 있다. 마을 입구 새태라는 곳에는 공장이 들어서서 작은 공단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원주민들은 과거에는 벼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현재는 수익성과 관련하여 논을 밭으로 바꿔 복숭아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최근에는 포도가 새롭게 수익성이 있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 이처럼 옥천1리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형으로 마을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인간은 증명 불가능한 어떤 사실에 대해 경험적 시간의 범위를 넘어서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적 시간과 일치할 때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믿음의 공간 정도는 남겨 놓는다. 이러한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물음을 던져주는 운재 선생과 관련한 이야기는 믿어서 사실로 된 것일까, 사실이어서 믿는 것일까? 그래서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결론은 믿으면 현실이 되고, 믿지 않으면 전설이 된다.

 

글을 마치니 느낌이 일어나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옥산리 신선

 

엄마 같은 사촌 누님 시집간

엄살미 고개 너머 옥산리 초가집

촌수 잊은 채 삼촌이라 부르며

해죽거리는 나이 많은 조카

운재 선생 얘길 하니 증조 할배라며

두 입술 구름 같은 거품을 무네.

 

나라님 욕심내던 사람에겐

두 번이나 나라님 만들어주고

축지법 쓰면서 서울 갔다 오다

달빛 내리는 한곡 골짜기에서는

범 선생과 이바구도 나누고

앞 못 보는 소경에게는

온 세상 산천경개 구경시켜주었단다.

그러다가

삶과 죽음의 책자를 훔쳐보고는

놓쳐 버린 아들 대신 손주 살리고

삼락산 기운이 서리처럼 처마 밑 엄습하는 날

할배와 할매의 죽음을 누설하고는

무지개처럼 두 분이서 쌍상여 타고

천상봉으로 갔다 한다.

 

어이요!” 하는

엄마 같은 사촌 누님 얼굴색이

매르채이 복사꽃보다 더 붉게 물들기에

구름처럼 허황하여 나서는 옥산 마을 길

홀연히

고루골 봄바람 칼날같이 두 뺨 스치고

누빗등 시냇물 밧줄처럼 두 발목 잡고서

삼락재 담장 밑 이내 몸 붙잡더니

누불못 벚꽃 하얀 장막으로 피어올라

나이 많은 조카 허옇게 거품 물던

구름 같은 이야기

하나둘 다 보여주네.

 

하아!

머릿발 쭈뼛 서는 몸서리에

가는 길 재촉하다 뒤돌아보니

흰 구름 지붕 삼은 천상봉 마루

기대앉은 신선 같은 운재 선생이

외손자로 현신하여 살포시 미소 짓고

그 아래 나이 많은 조카는 해죽거리며

두 손 흔들고 있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 김성식(90, 옥산리 주민이종원(옥천1리 주민)
 

다음 회에는 용이 깃든 고장 용성면' 편을 연재합니다.

 

 

<사진 자료>
 

▲ 삼락지와 고루골
 
▲ 적제(누불못)
 

▲ 구현(개고개)
 
▲ 메르체이골
 
▲ 새태
 
▲ 삼락재
 
▲ 옥산재
 
▲ 마을회관
 
▲ 누불못안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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