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을 품고 부처의 세계를 꿈꾼 ‘고죽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용성면 편(2)

2023-05-15 오후 5:25:50

심리학자 툴빙(Tulving)과 펄스톤(Pearlstone)은 사람들이 학습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해당 정보의 기억 흔적이 쇠잔했거나 간섭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저장된 정보에 접근하는 적절한 수단인 인출 단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 기억을 끌어내는 단서만 제공하면 잊었던 것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심리학에서는 단서의존망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망각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한 개인이 학습하지 못해 어떤 사실이 잊혀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 사회적 망각이라고 한다. 이 사회적 망각은 정치적 요인에 의해 주로 일어난다. 특히, 지배자들은 정치적 이유로 어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피지배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망각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기억을 끌어내는 적절한 단서만 제공하면 잊혔던 역사적 사실이 되살아난다. 이러한 망각과 기억의 관계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용성면 고죽리에 있다.

 

▲ 용성면 고죽리 전경 


 

역사와 유래

 

고죽리(孤竹里)는 조선 시대 고죽곡리(孤竹谷里)와 효가리(孝佳里) 2개 촌락으로 자인현 상동면 동삼동에 속했다. 고죽곡리는 천안 전씨 전극창과 김해 허씨 허지수가 개척했다고 알려져 있고, 효가리는 김해 김씨가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기적으로는 모두 임진왜란 전이다. 고죽곡리는 옛날 이 지역에 대나무가 자생하여 명명되었다고도 하고, 커다란 왕대가 홀로 서 있어 명명되었다고도 한다. 다른 설에는 고사리와 대나무가 많아 고죽이라 했다고도 한다. 효가리는 이 마을에 효자가 살아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1880년경 고죽곡리는 고죽리로, 효가리는 천북리(川北里)로 바뀌고,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의 명칭만 바뀌어 각각 고죽동과 천북동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천북동은 고죽동에 병합되어 이 지역 전체를 고죽동으로 부르면서 원래 고죽곡리는 고죽1, 천북리는 고죽2리가 되었다. 현재 천북리와 효가리 마을 터는 논밭으로 바뀌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새로 조성된 중새태가 고죽2리 지역이 되었다.

 

▲ 고죽리 행정지도 

 

▲ 고죽1리 전경 

 

▲ 고죽2리 전경 
 

 

삶의 터전

 

고죽1리에는 양달, 음달(응달), 아랫마실이라는 세 각단이 있는데, 마을 중간 동서로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서쪽은 양달, 동쪽은 음달이라 부른다. 양달은 아침에 해가 먼저 떠 따뜻한 곳이라서, 음달은 해가 늦게 들고 그늘이 져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한때 마을 이름을 죽동(竹洞죽전(竹田)으로 바꾼 적이 있었는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다시 고죽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천안 전씨들이 주로 살고 있다. 또 개울 건너 서남쪽에 김해 허씨들이 몇 가구 살고 있는데, 이곳을 고죽1리에서는 아래에 있다고 하여 아랫마실이라 부른다. 고죽2리 지역에는 효가리, 천북리, 중새태라 부른 촌락이 있었다. 효가리는 현지음으로 소갈이라고도 하는데, 고죽리 동남쪽 효가지 저수지 위쪽에 있었다. 18세기 자인현에는 호장을 지낸 김해 김씨 김몽룡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효자로 소문났다. 그의 선대는 원래 가척에 살았는데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이 집안의 선대 묘가 여기에 있고, 효자 김몽룡이 한때 살던 곳이라 하여 효가리라 명명되었다. 이 효가리가 새로 생긴 중새태(중새터)와 합하여 조선 후기 천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산중보 다리를 기준으로 사미천 북쪽에 있다 하여 천북이라 하였고, 중새태는 고죽곡리와 천북리 중간에 새로 터를 닦았다 하여 명명되었다.

 

▲ 고죽리 지명지도 

 

▲ 양달과 음달, 유판산

 

▲ 아랫마실과 아미산(알미잔)

 

 

고죽리는 세로로 세운 타원형 지형에 앞쪽에 촌락과 들판이, 뒷쪽에 깊은 산골이 있다. 북쪽에 금박산·아방산·선암산이 있고, 서북쪽에 금학산, 서쪽에 삼락산(삼천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이외 서북쪽 당월산(당우산), 천북 남쪽 미산리 뒤에 있는 새알산, 가낫골에 있는 땅장비알 등 작은 산이 있다. 들판은 천북 서북쪽의 조산배기, 굼보의 물을 대는 굼보바지, 천북 동남쪽의 디미실, 고죽 뒤의 딧들(뒷들) 등이 있다. 또 고죽골 최북단 금박산이 있는 박산골, 대흥사의 부도 있어 부딧거리, 대흥사가 있어 절골, 대흥사 터 동쪽 암자 석송암이 있어 석송암골, 신제지 서북쪽 진량 현내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암자 망과암이 있었다는 만감이, 이 만감이 서북쪽 신방암이라는 승방이 있어 싱발골(승방골), 싱방골 동북쪽 변소처럼 깊고 외졌다 하여 통싯골, 절골 서쪽 매 또는 학처럼 생겼다 하여 매학더미, 가낫골 남쪽 당월골, 당월골 북쪽 산밭골(삼밭골), 산밭골 북쪽 송골, 송골 북쪽 어븐골, 외촌으로 넘어가는 장싯고개에 있는 장골, 고죽곡리 서쪽 자인 옥산으로 넘어가는 골골(고리곡) 등 골짜기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수백 년 된 노거수가 당목이라 불리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곤 하였는데, 현재는 가치관의 변화로 중단된 상태다. 이처럼 과거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던 삶의 터전에 대한 이름이 이제는 몇몇 사람들의 기억과 낡은 문서 속에서만 살아 있을 뿐 대부분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 신제지, 절골입구(사진 왼쪽), 심방골(사진 오른쪽)

 

▲ 장나들과 공동산 
 

 

삶의 흔적

 

고죽리에 사람이 살던 시기는 약 3,000여 년 전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자연석 형태의 입석·고인돌·지석묘 등으로 부르는 선사시대 무덤이 곳곳에 남아 있어 그것을 기억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고죽1리 아랫마을 광일재와 밭에 3~4, 효가리라 부르던 고죽2리 들판에 28기 등이 있었다. 특히, 고죽2리 들판의 지석묘 15기는 약 150여 평에 3열로 군집한 특이한 형태인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일부 훼손된 상태다. 고죽2리 민가에 있는 약 1.5m 높이의 입석(선돌)은 현재까지 기억의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

 

저수지는 흔히 가낫골못이라 부르는 가나곡지(가나지), 골골 위에 있던 골골못(굴곡지), 북쪽에 새로 조성한 신제지, 효가리 근처에 있어 흔히 소갈못이라 하는 효가지, 고죽골 서북쪽 옹당못(굴현지) 등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아직 있지만 삶의 수단인 농사 방법의 변화로 고목처럼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특히, 가나곡지, 굴현지, 효가지는 1765년 이전에 축조한 오래된 저수지다. 가나곡지는 간라곡제(艮羅谷堤), 굴현지는 옹당못으로 불려졌고, 효가지는 자인현 호장을 지낸 효자 김몽룡의 건의로 축조하여 효가지로 명명하였는데, 현재는 이름만 남아 있고 사연은 기억에서 사라진 상태다

 

 

▲ 절골 입구에 있는 신제지 

 

▲ 고죽2리와 효가지 


 

조상을 추향하는 유교 재실로 고죽2리 천북 지역에 천안 전씨 문중의 죽계재(竹溪齋)가 있었는데, 오래전에 훼철되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재실은 임진왜란 의병에 참가한 죽계 전극창(全克昌) 선생을 추향하던 곳이었다. 이후 전안 전씨 문중은 1960년대 고죽1리에 전일재(全一齎)라는 재실을 지어 새로운 기억의 공간으로 삼고 있다. 또 고죽1리 아랫마실에는 김해 허씨의 재실인 광일재(光一齎)가 있다. 이 재실은 김해 허씨 고죽 입향조 허지수(許智壽)를 추향하는 곳인데, 죽천재(竹川齋)였던 것을 개명함으로써 원래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 죽천재가 훼철된 후 입향조 허지수의 13세손 재일교포 허덕구가 1967년 신축했고, 그 후 2층 현대식 구조로 재건축되었다.

 

▲ 전일재 

 

▲ 전일재 앞 전해인 기념비 

 

▲ 광일재 

 

▲ 광일재 안 허덕구 기적비 
 

 

이외에도 전일재 동편에 천안 전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흥문당(興文堂)이라는 서당도 있었는데, 대흥사 요사채 부재를 가져와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헐리고 현판만 남아 몇몇 사람들의 기억에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흥사 터 서쪽 매학산에 인동 장씨 장병두의 묘각인 매학재(梅鶴齋)가 있었다. 흔히 장부자로 불린 자인 북사리 장재수가 지었는데 지금은 훼철되어 마을 사람도 모르고 있다. 장재수는 자인 출신 소설가 장덕조의 부친이다.

 

▲ 흥문당 현판 

 

▲ 전일문 현판 

 

 

임란 호국과 미래를 예견한 전씨 문중 사람

 

고죽리에 살던 사람 중 근대 이전의 인물로 죽계 전극창(15741646)이 있다. 천북리에 살았는데, 19세의 나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곽재우의 막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쳤다. 그의 행적은 용사세강록자인현읍지에 실려 있다.

 

근대 이후의 인물로는 주역과 한의학에 능통한 전극창의 후손 이재(易齋) 전해인(全海印, 19021977)이 있다. 그는 곡란 사람이 운영하던 대구 이산약방에서 일을 하다 낙향한 후 흥문당에서 인술을 펼쳐 주위로부터 명의라는 소문이 났다. 특히, 주역에 도통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이인의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경산 남매지 저수지 일대는 통일이 되어 세계의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장으로 쓰이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통일될 때까지 손을 못 대도록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을 서울로 보낼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사는 곳을 서울처럼 만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논이 바둑판처럼 반듯해지는 농경지 정리를 예언하였고, 들판이 서리 내린 듯 하얗게 될 때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다는 비닐하우스 경작 시대도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간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할 때 엄청난 경비를 들여서 가봐야 가져올 것이라고는 결국 돌멩이밖에 없다고 했다 한다(이상은 반재원 저, 단군과 교웅에 실린 전해인 항목을 참고하였음). 족보에는 그에 관해 천지 만물의 이치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세상 사람이 모두 도통군자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그의 공덕비가 전일재 앞에 세워져 있다.

 

천년을 견디다 바람 속에 스러져 간 신라 고찰 대흥사

 

이러한 마을 북쪽 신제지 위 354번지 일대에 신라 고찰 대흥사(大興寺)가 천 수백 년 동안 존재했었다. 이 사실은 몇몇 주민의 기억과 단서로만 남아 있을 뿐 현재 사회적·개인적 망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자인에 부임하는 현감들이 꼭 한 번은 들러 주변 경관을 구경하고 자신의 문필력을 자랑하는 시 한 수를 남겼고, 자인현읍지에도 반룡사·신림사보다 먼저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고 큰 사찰이었다. 심지어 불교를 천대하던 유학자들도 대흥사를 보려고 일부러 자인에 찾아오곤 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대흥사에서 쌀을 씻은 허연 뜨물이 고죽리 천북계와 오산리 사미천 시내까지 흘러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절이 있던 금학산 주변에는 수많은 암자가 산재해 스님들의 불경 소리가 산 너머 신관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현재 신관리에는 그러한 염불 소리가 들린 곳을 염불암이라 칭하고 있다. 특히, 고죽리는 앞뒤와 좌측에 높은 산과 시내가 자리하고 그 중간에 대흥사가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이 이곳을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곳으로 인식하여 아방산, 아미산, 수양산, 사미천 등으로 이름을 명명하였다. 이러한 대사찰이었던 대흥사가 어느 한순간 흔적도 없이 폐사되어 버리고 지금은 복숭아밭으로 변해 상전벽해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망각의 상태에 놓인 대흥사를 기억하는 몇몇 단서가 현재 남아 있어 다행이다.

 

▲ 절골과 대흥사 터 

 

▲ 복숭아밭으로 변한 대흥사 터 
 

 

- 대흥사의 흥망

 

사실 대흥사는 1638년 승 수기(守機)가 중건하면서 명명한 이름이고, 그 이전에는 원통암(圓通菴)이라 하였다. 이 원통암은 자인 출신 고승 원효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적어도 원효 입적 시기인 686년 이전부터 존재한 고찰이었다. 이후 고려 때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조선 초 기록으로는 임진왜란 전 이곳을 유람한 자인 출신 의병장 최문병의 한시 한 편이 성재실기에 전하고 있어 사찰을 기억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금학산의 절을 유람하면서

구름 걷힌 높은 하늘에 달빛은 한없이 밝고

소나무 둥지 속 외로운 학은 그지없이 맑네.

산속 가득 새들은 소리를 알아주는 이 적은데

성긴 날개 털면서 한밤 내내 울어대네.

 

그러다가 이 사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38년 승 수기가 중건했다. 이 기록은 자인현읍지 관련 자료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1638년은 자인현이 복현된 그 이듬해에 해당하는데, 당시 자인현 읍치가 고개 너머 신관리 아래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읍치와 가까운 이곳에 있던 절을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초대 현감은 임선백이었는데, 그는 유학자 신분이지만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대흥사와 반룡사를 중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1643년 동서 요사채, 1655년 법당, 1669년 종각, 1756년 현감 신대수가 종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대흥사에 딸린 암자가 중암(中菴), 상암(上菴), 옥천암(玉泉菴), 망과함(望果菴), 석송암(石松菴) 등 무려 5개였고, 여승이 거처하던 신방암(新房庵)이 따로 있는 등 사찰 규모가 상당했고, 면적은 3,000평이 넘었다고 한다. 그 후 1800년대 초반 조선 순조 때 절은 갑자기 폐사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현재 몇몇 단서만 남아 있는 상태다.

 

- 문인들의 작품에 남아 있는 대흥사의 단서

 

사찰 규모가 크고 유명하다 보니 지방 유생들은 반드시 이 사찰에 한 번씩 들러 부처의 세계를 경험한 듯하다. 그 단서가 현재 한시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생의 작품은 칠곡에 살던 백포 채무(蔡楙, 15881670)여동지유대흥사(與同志遊大興寺)·유대흥사(遊大興寺)2, 예천에 살던 구계 신완(申完, 1738?)대흥사삼수(大興寺三首), 경주에 살던 활산 남용만(南龍萬, 17091784)대흥사차판상운(大興寺次板上韻), 영천에 살던 갈산 이항배(李恒培)대흥사(大興寺)등이다. 여기서는 이항배의 작품 1편을 인용한다. 그는 1683년 지금의 경북 영주 지역인 영천(榮川) 갈산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자는 계실(季實), 호는 갈음(葛陰), 본관은 경주이다. 그의 후손이 엮은 문집 갈음집(葛陰集)이 현재 전하고 있다.

 

대흥사

 

새 사찰 대흥은 옛 원통암인데

남은 터는 분명 한가지로 아름다운 이름이네.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 조각 관음보살의 거처인데

옛것에 의거하여 세 칸의 제석궁이네.

신령스런 샘이 나뉘어져 조계파가 되었으니

수려한 봉우리가 옮겨 와 천축봉이 되었네.

시인이 우연히 동풍이 부는 곳을 쫓아가니

그 가운데 고승이 앉아 허공에 설법하네.

 

자인에 부임한 현감들도 시를 남겨 대흥사를 기억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현감의 작품은 손회종(孫會宗)중암시(中庵詩), 우규(禹糾)중암시, 정충언(鄭忠彦)종각시(鐘閣詩)등이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판각하여 대흥사 법당 안에 걸려 있던 것인데, 폐사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정충언의 작품 1편을 인용한다. 그는 1763년 제50대 자인현감으로 부임하여 수천 년 무당의 굿 형태로 이어오던 한장군제를 유교식 제의로 바꾸고, 경비도 관에서 부담하도록 하여 체계적으로 완성한 사람이다. 현재 계정숲 안에 있는 시중당의 당호 글씨는 그의 작품이다.

 

종각시

 

현문의 동쪽 금학산 꼭대기에

비취색 봉우리가 하늘 가운데 우뚝 솟아 있네.

태수가 최근 업무가 별로 없어

말 타고 문 나서니 대낮이라 어리둥절하구나.

물이 가득 찬 연하못은 비 갠 후 화창하고

보리밭둑은 남풍 불어 물결처럼 일렁이네.

사미천 주위에는 대암과 감초가 많고

고죽동 안에는 고사리만 무성하네.

걷고 걸어 점차 조계문 가까이 다가가니

황관도사가 와서 서로 안부를 묻네.

돌길에 가마는 나는 듯이 빠르고

백년 묵은 오랜 누각은 참으로 크게 지었구나.

계피나무 좋은 향기는 장보관을 일으키고

금빛 나는 대웅전 불상은 어린애를 놀라게 하네.

문득 지난해 이 절을 찾은 것을 생각하니

남쪽 봉우리의 두견화가 수놓은 것 같고

올해는 병이 들어 봄이 이미 다했으니

꾀꼬리 소리 가득 찬 골짜기는 짙은 그늘이 덮였구나.

구월 가을 단풍과 국화가 어찌 좋지 않겠느냐마는

현청의 서류 뭉치로 바쁘기만 하네.

일 년에 한 번 노는 것이 또한 행운이라 하니

나중에 만날 일은 모르는데 어찌 또 이날이 있을까.

산은 내게서 멀지 않은데 내가 스스로 멀어지니

허리에 두른 세 척 허리띠가 부끄럽구나.

 

*사미천(思美川) : 용성면 미산에서 자인으로 흐르는 내인데, 자인에 이르면 오목천이라 함. 용성 미산리는 이 사미천에서 유래하였음.

*장보관(章甫冠) : 선비들이나 유생들이 머리에 쓰던 관을 말함.

 

- 대흥사 폐사에 관한 전설

 

주민들에게서 전해오는 몇몇 구전은 대흥사가 폐사된 원인을 기억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현재 대흥사 폐사에 관한 전설은 세 가지 유형으로 전하는데 모두 묫자리와 관련 있다. 첫 번째는 옛날 자인 사람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대흥사 근처에 묘를 쓰려고 하다가 주지와 갈등이 일어났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묫자리에서 징을 쳐서 대흥사 법당까지 들리지 않으면 묘를 써도 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벼슬아치는 징을 치지도 않고 징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묘를 써버렸다. 그 뒤 실제로 징을 쳐보니 징소리가 법당까지 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이 폐사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고죽리 고개 너머 신관리는 경주 이씨 집성촌인데 이들의 권위가 상당하였다고 한다. 이 문중에서 묘를 쓰기 위하여 대흥사 스님들을 모두 쫓아 버렸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대흥사 터 주변에는 경주 이씨 문중 묘가 산재해 있다.

 

세 번째는 옛날 어떤 부자가 묘를 쓰기 위하여 대흥사 근처 산을 모두 사 버렸다고 한다. 부자가 매입한 지역은 대흥사 절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법정 다툼이 일어나 절이 망해 버렸다고 한다. 실제로 이 대흥사 서쪽에 자인의 장부자로 불린 장재수의 선대 묘가 있고, 장재수는 이곳에다 매학재라는 묘각을 세워 놓기도 하여 전설이 사실에 근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흥사 폐사는 1800년대 초반이고 장재수가 매학재를 세운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시기적으로 선후관계가 맞지 않아 후대에 각색된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절에 빈대가 많아 망했다는 설도 있다.

 

- 유물로 남아 있는 대흥사의 단서

 

한때 번창했던 대흥사는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다. 원래는 있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고, 땅에 묻혀 단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문헌 자료는 자인현읍지에 자인현감 신대수가 써서 세웠다는 종덕비(鐘德碑)비문이 있고, 유물은 범종, 부도탑, 주춧돌,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기왓장 정도가 대흥사를 기억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신대수는 1775년 제47대 자인현감으로 부임했는데, 이때 대흥사 주지 병선(炳善)이 절을 크게 중수하여 그의 치적을 칭송하는 비문을 현감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고죽리에서 절골이라 부르는 골짜기 길가에 부도탑이 하나 서 있다.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 옛날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힘겹게 알리고 있다. 또한,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범종은 원래 대흥사의 것이었다. 1847년 헌종 135월 포운(布雲) 법사가 알선하여 폐사된 대흥사의 범종을 경주 기림사에 팔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남산면 하대리 도동서원의 기와가 이 대흥사의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도동재 지붕 기왓장은 낡은 것과 새것이 섞여 있다. 기타 대흥사 유물은 1980년대까지 주춧돌과 석축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이후 절골 아래에 있던 신제지 준설 공사를 하면서 흙으로 덮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 고죽리 절골 

 

▲ 대흥사 기왓장 

 

▲ 도동서원 지붕의 기와 
 

 

특히, 고죽리 전유준 씨가 소유하고 있는 대흥사 여막새기와는 숭덕 갑신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644년에 제작된 것이다. 그런데 대흥사 요사채가 1643년경에 지어졌다는 기록과 고죽1리 흥문당을 지을 때 대흥사 요사채 부재를 가져왔다는 구전 등으로 보아 이 기와는 대흥사 요사채에 사용된 여막새기와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기타의 글씨는 요사채를 지을 때 시주를 한 사람의 이름과 기타 내용이 있는데 시간을 두고 상세히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헌과 유물 이외에 고죽리 주변 지명이 이곳에 큰 사찰이 있었다는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 대흥사가 있던 골짜기를 절골’,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이 있던 자리를 일짐웅디’, 부도가 있는 곳을 부딧거리’, 신방암이 있던 곳을 심방골’, 중암이 있던 곳을 중암터’, 망과암이 있던 곳을 망과암터’, 석송암이 있던 것을 석송암골 등이라 하고, ‘무지절골이라 부르는 곳도 있고, 마을로 들어오는 시내를 사미천이라 한다.

 

 

현 상황

 

현재 고죽리의 주민 등록상 가구 수는 105가구, 인구는 187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고죽1리의 고죽곡리에는 전씨들이 주로 살고, 아랫마을에는 허씨들이 34가구 살고, 이외 여러 성씨가 있다. 고죽2리에는 허씨들이 주로 살고, 그 외 안씨, 유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복숭아와 포도 등 과수업이 대부분이고, 소를 키우는 축산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있다. 또한, 고죽1리에서는 상엿집에서 동제를 지냈는데 새마을운동 때 없어졌고, 고죽2리에서는 매년 음력 223일 동제를 당목에서 지냈는데, 최근 가치관의 변화로 중단되었다.

 

한때 천년 고찰 대흥사를 품고 마을 곳곳을 부처의 세계로 인식했던 고죽리, 그리고 그 부처의 세계에 귀의하려고 찾아오던 고관대작들의 호령을 온몸으로 견뎠던 고죽리. 이제는 천년 고찰 대흥사도, 부처의 세계도, 고관대작들의 호령 소리도 매학재 숲속으로 사라져 기억의 영역에서 망각의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지만,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몇몇 단서들이 아직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새로운 기억을 만든다면 또 다른 천년을 기억하는 마을이 될 것이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고죽리

복사꽃 흐르는 사미천 천북계

그 옛날 원님 행차길 따라

선암산 아래 찾은 봄바람 같은 마을

지팡이 짚은 도인 같은 노인이

왕대가 서 있어 고죽이라 하고

골이 깊어 고죽골이라 하고

사람이 살아 고죽곡리라 합니다.

 

해를 안은 절골 대흥사

원왕생 휘갈기던 속세 문인들의 노래는

먼지처럼 서책 속에 잠겨 있고

금박산 아방산 금학산 산산이

원해탈 두들기던 신방암 비구니의 목탁 소리는

장승처럼 부도 속에 잠들어 있답니다.

 

유판산 달밤만딩이

시간 잊은 선사인의 약속 같은 고인돌은

고죽리 사람에겐 달의 이야기고

새알산 아미산

왜적 향한 죽계 선생의 서리 같은 외침은

천북리 사람에겐 바람의 노래랍니다.

 

그리하여

해와 달과 바람이

가나골 절골 삼밭골로 내려와

양달 응달 아랫마을 다 적시고

중새태 천북리 효가리 휘영청

진사래걸 굼보바지 우거진 그늘

얼씨구 한바탕 돌려버리는

사람 사는 고죽골이랍니다.

 

도인 같은 노인의 지팡이 끝을 따라

일짐웅디 조계문 터로 올라가니

황관도사 버선발 비웃던 소나무는

선승의 삿갓처럼 가지를 드리우고

두견새 하얗게 품어주던 부도탑은

수미산 천왕처럼 골 깊숙이 왜 왔냐고 묻는데

고개 숙인 나그네의 손끝은

산 아래 고죽골만 가리킵니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 전유준(고죽리 주민)

 

<사진 자료>

 

▲ 고죽1리 골골못(굴곡지)

 

▲ 고죽1리 광일재 허덕구 기념비 

 

▲ 고죽1리 아랫마을 고인돌 

 

▲ 고죽1리 음달마을 

 

▲ 고죽1리 전일재 

 

▲ 고죽1리 전일재 전해인 기념비 

 

▲ 고죽2리 가나곡지(가나지)

 

▲ 고죽2리 노거수 

 

▲ 고죽2리 지석묘 

 

▲ 고죽2리 중새터 

 

▲ 골골못에서 본 고죽1리 

 

▲ 광일재 

 

▲ 대흥사 기와 

 

▲ 대흥사 터 

 

▲ 대흥사 터 주춧돌 

 

▲ 신제지(새못)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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