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산성을 품은 호국과 효열의 마을 곡신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용성면 편(4)

2023-06-27 오전 8:25:54

▲ 용성면 곡신리 마을 전경 



 

조선 인조 때 홍만종이 쓴 문학 평론집인 순오지(旬五志)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衣以新爲好,人以舊爲好).”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물건은 새것이 좋지만, 사람은 오래 사귀고, 정이 든 사람이 좋다는 말이다. 오래 사귀고 정이 든다는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과도 통한다. 아무리 세대가 지나고 시대가 바뀌어도 옛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대는 가치관이 변하면서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을 우선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과거 삶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호국 의식도 개인의 삶보다는 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나라가 외적의 침략으로 위기에 닥쳐도 자발적으로 나서는 시대가 아니라 법률적으로 요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부모에 대한 효도나 부부간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당연시하던 이러한 삶의 방식이 언제부터인가 합리적·실용적이라는 논리에 의해 매도되거나 비자발적인 행위로 치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과거 삶의 모습이 통째로 부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와 가치관이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가치관이 바로 나라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의리, 그리고 부부간의 사랑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버린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찾아 미래의 가치관으로 삼을 수 있는 이야기가 용성면 곡신 마을에 전하고 있다.

 

▲ 곡신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곡신리(谷新里)는 조선 시대 자인현 하동면 동사동 모정리(茅亭里)와 동칠동 곡란리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경 곡란리에서 떨어져 동칠동 신기리(新基里)가 되었다. 그 후 1896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변경되자 리 단위의 마을이 모두 동으로 바뀌었는데, 이때 곡란리의 과 신기리의 을 따 자인현 하동면 곡신동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자인에서 분리되어 경산군 용성면 곡신동이 되었다. 이 행정구역은 해방 후에도 이어지다가 1988년 동리 명칭 변경에 따라 경산군 용성면 곡신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곡신리 1호 지석묘

▲ 곡신리 2호 지석묘
 

 

곡신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3,000여 년 전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들판에 청동기 시대 지석묘가 31기나 있었는데,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마을 안에 2(661, 680번지), 계사들(800-1번지)2기 등 네 개만 남아 이곳이 당시 주거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661번지에 있는 곡신 1호 지석묘는 큰 돌 앞에 상석 같은 작은 돌이 놓여 있어 제를 올린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마을 뒤쪽 용산에는 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산성(현재 용산산성)이라 부르는 석성이 있고, 이 산성 주변인 곡신리와 미산2(오산리) 관란서원 주변 산 능선에 고분이 다수 산재하였다는 증언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는 통치자가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사동터 
 

▲ 신라 고분 분포지 
 

 

그리고 용산 중턱에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였고, 이 용산성을 중심으로 군사들과 주민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 이곳은 군사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산성도 무너지고 사람들도 별로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려 때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조선 시대 임란 후 인동 장씨가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당시 촌락은 독립된 행정동은 아니었고 일부는 하동면 동칠동 곡란리에, 또 일부는 하동면 동사동 모정리에 속했다. 그 후 곡란리의 남역과 북역에 살던 흥해(곡강) 최씨와 순천 박씨들이 들어와 마을이 확장되면서 새로 터를 닦았다 하여 신기리라 부르게 되었다. 신기리는 자인현읍지(1871)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자인총쇄록(1888)과 그 이후의 자인현읍지에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701888년 사이 행정동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가구 수는 28호였다. 또한, 곡신에 최초로 집을 짓고 산 터가 있는데 당시 4가구가 있었다 하여 사동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그리고 현재 곡신리 입구 다리와 곡신1교 사이 흐르는 내()는 원래 마을 안쪽인 사동 터와 597번지를 거처 454번지로 흘렀는데, 준설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현재와 같이 마을 바깥으로 바꾸었다.

 


 

▲ 모정리 터 


 

한편, 자인현읍지(1832)에 하동면 동사동에 모정리라는 마을이 존재한다. 모정리는 모정(茅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그렇게 불렀는데, 자인 현청에서 12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미산2(오산리)와 부제리 사이인 곡신리 동북쪽 들판에 있는 조그마한 산등성이 근처로 추정된다. 곡신에서는 이 산등성이를 모정말리라 하고, 부제리에서는 이곳에 있는 들판을 모정지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자인 현감 오횡묵이 1888년 이 지역을 순시할 때 모정리라는 마을은 없고 대신 신기리라 기록하였다. 이로 보아 모정리는 18321888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96신기리는 모정리 지역을 아우르면서 곡신의 신기을 따 곡신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삶의 터전과 흔적 그리고 용산성

 

▲ 곡신리 지명 지도

▲ 뒷골짝

▲ 얼음정골 
 

▲ 헌못 뒤 절태(골)
 

▲ 궁정지, 진등과 살미등 

 

▲ 모정리 터와 모정지(들)

 

곡신리는 서남쪽에 용산을 끼고 북쪽과 동남쪽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용산 골짜기와 산등성이에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골짜기와 산등성은 마을 뒤 용산 기슭에 있던 뒷골짝, 용산성 북쪽의 북성안, 골이 깊고 응달이 져서 늦봄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다는 얼음정골, 서남쪽에 한때 절이 있었다는 절태, 진등 동쪽 매우 가팔라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지고 내려올 수 없어 한데 묶어 썰매처럼 끌고 내려왔다는 살미등, 이 살미등 북쪽 모정(茅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모정말리 등이 있다.

 

▲ 대청배미와 비석걸(들)

▲ 대밭걸 

▲ 둔터들 


 

▲ 가못들과 새들 

 

▲ 영굿들 

 

▲ 효열문앞들과 계사들 
 

 

또 들판이 넓다 보니 들과 논에 관한 이름도 많다. 마을 동북쪽에 비석이 있어서 들판 이름으로 사용한 비석걸, 비석걸에 있는 논으로 모양이 대청(마루)처럼 평평하게 생겼다 하여 대청배미, 서북쪽 대밭이 있는 들판이라 하여 대밭걸, 동쪽 산비탈에 현청의 역둔토가 있던 둔터들, 북쪽에 새로 생긴 들이라 하여 새들, 북쪽에 있던 영굿들, 열부 양씨 효열문 앞이라 하여 효열문앞들 등이 있었는데 경지정리로 많이 잊혀졌다.

 

▲ 새못
 

▲ 구신지(헌못)
 

▲ 후곡지 
 

▲ 하신지
 

 

들판이 넓다 보니 저수지도 여럿 있다. 행정구역상 곡신리에 속한 저수지는 780번지에 소재한 새못, 765번지 구신지(헌못), 759번지 후곡지, 131-2번지 하신지 등 네 곳이 있다. 흔히 헌못이라 하는 구신지와 새못, 하신지는 조선 후기에 축조되었다. 새못은 헌못 다음으로 조성되어 그렇게 불려진다. 뒷골짝못이라 하는 후곡지는 1960년대에 조성되었다그런데 약 2개월 전 헌못이라 부른 구신지를 경산시에서 매립하여 현재는 3개만 남아 있다.

 

▲ 장굿보 
 

▲ 무지개샘

 

▲ 당수나무 

 

이외에도 영굿보, 장굿보 등의 보가 있었고, 용산에 기우제를 지낼 때 샘물을 가져다 썼다는 무지샘 또는 무지개샘도 있다. 이 샘은 깊이가 깊어 명주실 세 타래를 넣어야 바닥에 닿았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로는 신라 때 여기에 주둔한 군사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마을 서북쪽에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흔히 당목 또는 당수나무라 부른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내고 있다.

 

▲ 용산성 
 

 

이러한 것들보다 단연 곡신 마을을 대표하는 삶의 흔적은 바로 용산에 있는 용산성(龍山城)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 때 신라가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용산산성으로 이름이 굳어졌는데, 용성이라는 행정명이 여기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곡신 사람들의 자부심이 묻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이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압독주총관에 임명된 후 656년부터 장산성(獐山城)을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자료에 경산 지역은 과거 압독국(押督國)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757년 경덕왕이 장산군으로 개명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비교해 보면 656년에 이미 장산이라는 산과 장산성이 있었고, 100여 년 후 이 장산성이 있던 압독국 전 지역을 장산군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장산과 장산성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과 산성이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 장산성이 바로 현재 용산성일 개연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면 현재 용산 또한 신라 때는 장산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장산이 용산으로 바뀐 고리 역할을 하는 자료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아 확정할 수는 없다. 단지, 조선 시대에 발간된 자인현읍지에는 장산장산성은 보이지 않고, ‘용산용산성이 있어 이미 고려나 조선 초에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군사 요충지였던 이곳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산성 또한 기능을 잃어버려 천수백 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잊혔다. 1786년 발간된 자인현지에도 당시에 성은 무너져 폐허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하여 석성 일부를 복원하고 차가 오를 수 있도록 도로를 닦아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 견고한 석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 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현재도 용산 북쪽 능선에는 돌이 많으며, 곡란리 남쪽 우붕골에는 골재용 석재를 채취하는 회사가 온 산을 파헤쳐 놓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이러한 용산의 형성과 관련한 걸어오다 주저앉은 용산이라는 전설이 있다. 한 아낙네가 마을 앞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들판 가운데 큰 산이 걸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낙네가 그만 산이 걸어오네라고 외치자 산은 그 자리에 서 버렸다고 한다. 이 산이 바로 용산이다. 자인현읍지에는 이 용산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는데, 여기서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마을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흥해 최씨 문중과 시부모에게 효를 다 했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남편에 대한 사랑을 지킨 효열부인 양씨의 애틋한 사연이 전하고 있어 옛것을 잊어버린 현세대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용산서원에 깃들어 있는 흥해 최씨 문중의 효행과 호국 활동

 

▲ 용산서원 전경 
 

 

자인현읍지에는 유일하게 일가족 4대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효행과 호국으로 이름난 곡신리의 흥해 최씨(곡강 최씨) 가문의 최순동, 최운수, 최응해, 최팔개·최팔원이다. 최순동(崔順潼)1452(문종 2) 진사시와 무과에 합격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를 받고, 권지(權知)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의 관직을 지냈다. ‘권지는 임시직을 말한다. 원래 그는 지금의 청도인 밀성군 풍각에서 최지형(崔沚衡)의 차자(次子)로 태어나 살다가 자인현 하동면 동육동 구화리(현 용천1)로 이거하였다. 그 후 다시 현재의 곡란리로 이거하여 사량지(思良池)’라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일명 진사들이라고 하는 들판을 개척하였다. 자인현읍지에는 이 저수지를 사량동제(思良洞提)’ 또는 사량제라고 하는데, 곡란의 옛 이름이 사량동으로 추정된다. 그는 효행으로 이름이 나 자인현읍지에 등재되어 있다.

 

▲ 진사들과 용산 
 

 

이러한 최순동에게 아들과 딸이 각 1명씩 있었는데, 딸은 영천에 살던 최철견과 혼인하여 곡란 수동에 살면서 난포고택의 안주인이 되었고, 아들 최운수(崔雲水)는 효행으로 소문이 났다. 최운수의 자는 천택(天澤), 호는 난실(蘭室)이다. 1540(중종 35) 경자 식년시 생원 3등급 중 58위로 합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자인현읍지에는 생원으로 훈도(訓導)에 천수(薦授)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훈도는 향교의 훈도를 가리킨다. 1540년 과거에 응시할 때 제출한 사조단자(四祖單子)에도 전력이 훈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인향교가 1562(명종 17)년 설립되었기 때문에 경주향교의 훈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550(명종 5) 한양을 지키는 중위(中尉) 밑에서 군사 업무를 맡아 보던 사마(司馬)에 임명되었으나 산속으로 종적을 감춰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과 효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최운수에게는 아들 최응해(崔應海)와 최응하(崔應河)가 있었는데, 이 두 형제 또한 효행과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최응해는 호가 난고(蘭皐)이고, 동생 최응하는 호가 난계(蘭溪)였다. 최운수와 아들 둘, 그리고 최운수의 매제였던 영천 최씨 난포 최철견은 모두 자신들의 호에 난초 ()’을 사용하여 친족임을 드러내었다.

 

자인현읍지에는 형제로 효행과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 두 사람 모두 참봉에 천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최순동, 최운수, 최응해·최응하 3대는 과거에 급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재야에 묻혀 학문과 효행에 힘을 써 당대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최응해의 아들 최팔개(1560?)는 호가 죽은(竹隱)이고, 그의 동생 최팔원(15621592)은 호가 죽포(竹圃)이다. 이 둘에 대해서 자인현읍지에는 효성과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다. 아우는 문과(文科) 박사(博士)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부름에 나아가 순절하고 함께 나아간 형 최팔개가 초혼(招魂)을 행하고 의관(衣冠)으로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그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두 형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과 마을 장정 28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동생 팔원은 평소 친분이 있던 동래부사 송상현이 도와달라는 격문을 보내자 처와 자식을 회곡(현 곡란 두곡) 산중에 두고 형과 함께 동래로 향했다. 가는 도중 언양과 양산에서 왜적을 만나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들이 동래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동래부사 송상현은 전사한 후였다. 그래서 부산까지 적군을 쫓아가서 싸우다 형 팔개가 총탄에 맞기도 하였다. 이에 최팔원 혼자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왜장 조박붕(鳥博鵬)과 저영유(?永洧)를 죽이고, 연이어 장렬히 싸우다가 그만 전사하였다. 혼란한 상황에서 형 팔개가 동생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고향에 돌아와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두 형제의 이러한 공적을 팔원의 아들 흘(?)이 경주부윤에게 알렸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경주부를 방어하지 않고 동래에 가서 의병 활동을 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형제의 의병 활동 기록은 자인현읍지와 문중 자료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용산서원 현판
 

▲ 경의사 현판 

 

▲ 영모재사절각창건실록 게판문 


 

그 후 흥해 최씨 가문에서는 1635(인조 13) ‘영모재(永慕齋)’를 지어 최순동 이하 4대를 추향하였다. 향산 이만도(李晩燾, 18421910)1903년 쓴 영모재기에는 잡풀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1903년 후손 최석붕(崔碩鵬)과 최한곤(崔漢坤)이 성조동(聖助洞, 현 곡란리 남역 촌락)8칸의 집을 지어 영모재라 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사절각(思節閣)’을 지어 최팔개와 최팔원 형제를 따로 추향하였다. 이곳은 1964년 증축하여 영모재는 용산서당으로, 사절각은 경의사로 개명하여 용산서당경의사(龍山書堂景義祠)’라 이름을 고쳤다. 그 후 1987용산서원(龍山書院)’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용산서원에는 용산서원경의사현판이 있고, 강당 안에는 후손 최경한이 1904년 쓴 영모재사절각창건실록과 이만윤(李晩胤)이 쓴 한시 게판문이 걸려 있다. 아래는 이만윤의 게판문과 그것을 필자가 번역한 7언율시다.

 

▲ 한시 게판문 
 

 

判得熊魚見義明(판득웅어견의명) 곰 발바닥과 물고기를 알고 의리를 보는 눈이 밝았으니

重公一死泰山輕(중공일사태산경) 공의 죽음에는 태산조차 가볍네.

亭亭秀竹長留節(정정수죽장유절) 우뚝 솟은 빼어난 대나무에는 절개가 길이 남아 있고

袞袞流江不盡聲(곤곤유강부진성) 곤곤히 흐르는 강에는 명성이 끊이질 않네.

往事琴軒還似夢(생사금헌환사몽) 지난날 금헌에서의 일은 꿈처럼 되었으니

仙區雲物更關情(선구운물갱관정) 신선 고장의 풍경이 더욱 간절해지네.

谷蘭幽馥春常蔭(곡란유복춘상음) 곡란에는 그윽한 향기로 봄이 늘 그늘지고

肯構賢仍永慕誠(긍구현잉영모성) 재실에는 현명한 후손이 길이 사모하는 정성이네.

 

*웅어(熊魚) : 맹자에 나오는 구절로 곰 발바닥과 물고기 중 하나를 택하라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듯, 의리와 생명 중 하나를 택하라면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는 데서 따온 말임.

*금헌(琴軒) : 현감이 근무하던 정사당을 가리킴. 이만윤이 강원도 금성현감으로 있을 때를 상기한 것으로 보임.

 

 

이처럼 한 집안 4대가 나란히 읍지에 실린 예는 드물다. 그만큼 이 4대가 효행이 뛰어나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신이 굳었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러한 4대의 행적은 오백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에 스러져 현재는 용산서원속에서만 웅크리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효열부인 양씨의 애틋한 사연

 

옛 자인현 지역의 정려각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1674(숙종 1) 세운 용성면 용천1리 효자 박정우의 효자각’, 1846(헌종 12) 세운 곡신리 효열부인 양씨의 효열각’, 1967년 세운 자인면 신관리 효부 박의인의 효부각3개다. 이외에도 남산면 전지리 효자 서렴의 정려각은 1718(숙종 44) 세워졌는데, 1922년 후손들이 현 경산시 대정동 652번지에 이건해 놓았다. 이중 곡신리 효열부인 양씨는 살아서는 효를 다 하고 죽음으로 사랑을 지킨 특이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 효열각 전경 

 

▲ 양씨가 빠져 죽은 사량지 

 

 

이 효열각(孝烈閣)은 현재 곡신리 651-2번지 길가에 있다. 효부각도 아니고 열녀각도 아닌 효열각이라 부르는 것은 을 동시에 기린다는 뜻이다. 이 효열각의 주인이 바로 앞서 얘기한 양씨 부인이다. 그녀는 본관이 남원이고 청도군 운문면 운문댐 상류에 있는 공암령(공암리)에서 나고 자랐다. 18세에 곡란의 순천 박씨 박덕윤(朴德潤)과 혼인하여 이곳으로 왔다. 혼인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죽었는데 자식을 얻지 못했다. 집안에는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남편을 염하고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다. 시어머니는 늙고 시동생은 어린 관계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길쌈을 하면서 가정을 보살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형편이 좋지 않아 하늘에 호소하니 호랑이가 살찐 개를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또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기에 호소하니 매가 꿩을 잡아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6년 동안 부지런히 집안을 보살폈다. 어느 날 그녀의 친정아버지 양현룡(梁見龍)이 딸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개가시키려 하자 그녀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친정아버지가 몇 번이나 설득하고 나중에는 야단까지 치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 하여 밤에 몰래 집을 나와 마을 동쪽에 있는 사량지라는 못에 빠져 죽었다. 시댁 식구와 친정아버지가 그녀를 찾았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여 일이 지나서 그녀의 시신이 사량지 못 한가운데서 떠올랐는데, 저고리와 치마는 그대로였고 안색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행적에 감명받은 마을 사람들이 조서를 꾸며 장계를 올려 정려를 받고, 부역을 면제받게 되었다. 아래는 최도언이 쓴 양씨를 찬양하는 글[]인데,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殘縷朴氏(잔루박씨) 잔약한 목숨의 박씨는

忠孝明族(충효명족) 충효로 종족을 밝혔네.

之子于歸(지자우귀) 이 아가씨 시집와서

有道如學(유도여학) 배움과 같이 도를 행하였네.

生能孝悌(생능효제) 살아서는 효도와 공경하며

死盡貞節(사진정절) 죽어서는 정절을 다 했네.

彛同竇氏(이동두씨) 천성은 두씨와 같고

行專令女(행전령여) 행실은 오로지 영녀와 같네.

三綱有二(삼강유이) 삼강 중 효행과 절개 둘이 있으니

間世人芳(간세인방) 세상에 드문 사람의 향기네.

士林咸休(사림함휴) 사림이 모두 아름답게 여겨

報啓天陛(보계천폐) 임금께 아뢰는 글을 올렸네.

天感實情(천감실정) 하늘이 참모습에 감동해

恩典易下(은전이하) 은전이 쉬이 내리셨네.

貞以銘之(정이명지) 정절로 이 사실을 명으로 지어

以告來者(이고래자) 후세 사람에게 알리네.

 

*두씨 : 당나라 봉천현 두씨의 두 딸을 가리키는데, 도적이 침입하여 겁탈하려 하자 목숨을 끊어 지조를 드러낸 인물임. 구당서에 나옴.

*영녀 : 위나라 조문숙의 아내로 남편이 죽은 뒤 재가시키려 하자 스스로 코를 베었다 함. 삼국지위서에 나옴.

 

 

▲ 최도언이 쓴 효열각 게판문 

 

 

그 후 그녀의 시동생[?叔] 박수인(朴壽仁)이 정려각을 지으려 했지만, 형편이 닿지 않아 매번 포기하였다. 그러다가 자인현 선비들이 힘을 합해 1846년 자인으로 가는 큰길 가인 이곳에다 효열각을 세우게 되었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녀의 행실을 몸소 목격한 흥해 최씨 최도언(崔道彦)학생 순천 박덕윤처 효열부인 양씨지려라는 게판문을 써 걸어 놓았는데, 2백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크게 훼손되지 않고 아직 걸려 있다. 그 후 정려각을 세운 지 42년이 지나 비바람에 훼손되자 양씨의 계자 박해욱(朴海旭)1887년 중수하고 종증손 박노일(朴魯一)이 제113대 자인현감 조희빈(趙凞斌)에게 부탁해서 쓴 효열부인 양씨 정려 중수기문이 오른쪽에 걸려 있다. 그 후에도 한두 번 중수했는데, 1987년에는 효열각 전체를 다시 짓고, 1988년 후손 박종태(朴鍾泰)가 밀양 박씨 박희동(朴熙東)에게 부탁하여 쓴 효열부인 남원양씨 정려 중수기가 정려각 왼쪽 벽에 걸려 있다. 그녀의 행적은 자인현읍지1980년 발간된 내 고장 전통에 실려 있다.


 


▲ 자인현감 조희빈이 쓴 효열각 게판문 




이와 같은 그녀의 행적은 현재의 가치관으로 보면 전근대적, 비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강요된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희생된 여성이라고 평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맺은 사랑의 인연을 죽음이 어찌 갈라놓을 수 있고, 한 번 맺은 부모 자식의 인연을 가난이 어찌 허물 수 있겠는가? 자기들끼리 사랑한다 해서 결혼해 놓고 못 살겠다 하면서 합리적실용적 선택이라 포장하고, 부모 자식의 관계를 경제적 수단으로만 생각하면서 시대 변화에 탓을 돌리는 일부 현대인들은 그녀의 이러한 행적 앞에서 한 번쯤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들의 행적에서 현대를 지혜롭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노하우를 배워야 할 것이다.

 

 

마을 현황

 

용산성을 품고 최씨 형제의 호국 정신과 효열부인 양씨의 애틋한 사랑이 전하는 곡신리는 현재 주민등록상 100가구에 17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은 영천 최씨가 약 20, 흥해 최씨가 약 40, 순천 박씨가 5가구 정도 살고, 이외 성씨들도 몇 있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주 수입원은 복숭아와 포도이며, 벼농사도 짓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 저녁에 당수나무라 부르는 당목에서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고, 4월에는 주민 화합을 도모하는 화전도 한다. 이장은 곡신이라는 마을이 충과 효, 그리고 호국의 마을로 널리 알려지고, 또 용산산성이 하루빨리 전체적으로 정비가 되어 관광객이 많이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곡신리

 

용신이 살던 용산이

봄바람 타고 사람의 마을로 내려오다

봄물에 겨울 씻던 열아홉 처녀 만나

봉선화 꽃망울같이 멈춘 골짜기에

옹기종기 새터를 닦아

곡신이라 하였네.

 

고랑골 타고 온 햇살은

얼음골의 얼음을 녹이다가

도원 같은 영굿들판 복사꽃으로 내려앉고

살미등 나무꾼 한숨 소리는

하신지 한 모금 물로 숨돌리다가

후곡지 물안개로 피어오르네.

 

그 옛날

구름 같던 애기장수의 언약은

무지개샘 장마철 이무기처럼 웅크려 있고

천둥 같던 죽은 죽포 형제 외침은

경의사 현판 가을날 목화처럼 걸려 있고

산수유 같던 양씨의 사랑은

사량지 물 위 초파일 풍등처럼 떠다니네.

 

비 내리고 바람 불어

구름과 천둥과 산수유가 오산천에 실려 가도

그렇게 그렇게

용산 땅거미가 마을에 내릴 즈음

전설 같은 얘기를 당수나무에 걸어 놓고

오늘도 옹기종기 꿈을 꾸는

곡신 마을이라네.

 

 

글쓴이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 최강근(곡신리 이장이상훈(곡신리 주민)

 

<사진 자료>

 

 

▲ 곡신리 마을 전경 

 

▲ 곡신리 마을회관 

 

▲ 곡신리 지석묘

 

▲ 당수나무 

 

▲ 대밭걸 

 

▲ 모정리 터 
 

▲ 무지개샘

 

▲ 용산서원 경의사 

 

▲ 새못 
 

▲ 용산

 

▲ 사량지 

 

 

 

 

▲ 용산산성 
 

▲ 용산산성 우물지 
 

 

 

▲ 용산서원

 

▲ 하신지 

 

▲ 헌못 

 

 

 

▲ 효열각 

 

▲ 후곡골 

 

▲ 후곡지 

 

▲ 후곡지 뒤 얼음정골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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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거목 (2023-07-02 오전 6:59:20)   X
    곡신리에 대해서 잘 배웠습니다 곡신리가 충과효의 고장이군요.곡신리 주민의 자긍심을 느낌니다
  • 경산인 (2023-06-28 오전 4:36:18)   X
    잘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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