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6 오후 1:42:16
▲ 남산면 면소재지 전경
◆ 남산의 유래
남산은 원래 자인현 남면 지역으로 오목천의 남쪽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 남면은 자인현청에서 대왕산을 꼭지점으로 하고 우검리, 연하리, 흥정리, 사림리의 골짜기를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은 상남면, 서쪽은 하남면이라 하였다. 한자에 동(東)은 상(上)과 통하고, 서(西)는 하(下)와 통하여 그렇게 불렀다. 이렇듯 남산 지역의 원래 지명에는 ‘남’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자인현을 3개 면으로 분리하면서 남면 지역의 행정명을 새로 만들 때 ‘남’이라는 단어를 우선하여 사용하였다.
남산에 ‘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몇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는 자인현의 앞산에 해당하는 대왕산에서 따왔을 가능성이다. 흔히 앞산을 ‘남산’이라고 하는 것과 통한다. 둘째는 자인현청이나 계림숲에서 남산 지역을 바라보면 마치 선승의 옷자락처럼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수적으로 안산(案山)에 해당한다. 그래서 ‘산’을 사용했을 개연성도 있다. 셋째는 원래 자인현이 인산현(仁山縣)으로도 불렸으니 1914년 새로 행정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인산에서 연상하여 ‘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개연성이다. 결국, 남산의 ‘남’은 자인현 남면에서, ‘산’은 대왕산, 풍광, 옛 지명 등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 남산면 행정지도

▲ 관할 마을
◆ 마을 현황

▲ 남산면 마을 분포도
남산면은 18개 법정리와 24개 행정리가 있다. 법정리 중 경리, 평기리, 사월리, 반곡리, 전지리, 하대리는 역사적으로 사연이 있는 지역이라서 각각 1리와 2리로 구분하였다. 경리 안의 구경동은 원래 관란서원이 있어 자인현 하동면 동사동 서원리였는데, 1868년 서원 철폐로 서원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 구경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경중리, 경하리, 행정동은 원래 상동면 금물리(今勿里)였는데, 행정 구역이 확장되면서 이 셋으로 분리되었다. 또 기존하던 금물리(금문리)는 행정리(살구정)로 바뀌었다. 이렇게 구경리, 경중리, 경하리, 행정리 4개 촌락은 하나의 경동으로 통합되어 1911년 상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남산면에 속했다. 그 후 구경리·경중리·경하리는 경1동으로, 행정리는 경2동이 되었다. 1889년 2월 자인현감 오횡목이 순시할 당시 이들 마을은 통칭 경동(慶洞)이라 하였다. 그리고 높은 데 있어서 마치 들판이 얹혀 있는 듯한 ‘들기’에서 유래한 평지동(평기2리)과 골짜기에 터를 닦았다 하여 ‘텃골’에서 유래한 기곡동(평기1리)은 평기동으로, 옹기점이 있었다는 ‘점말리’에서 유래한 전지리(전지1리)와 ‘밀뱅이’에서 유래한 진방리(전지2리)는 전지리로, 모래가 많고 반달 같은 산이 있어 ‘사달암’이라 하던 데서 유래한 사월남리(사월1리)와 서북쪽 새각단(사월2리)은 사월리로, 고사리가 많아 ‘사릿골’이라 하던 외반동(반곡1리)과 내반동(반곡2리)은 반곡동으로, 금당사(신림사)라는 큰 절이 있어 대사동이라 한 마을의 아래에 있던 하대사동(하대1리)과 자인현청에서 필요한 물을 긷던 샘에서 유래한 남천동(하대2리)은 하대동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191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이 마을들은 각각 원래 촌락을 기준으로 1동과 2동으로 분리되었다가 1988년 동리 개편 때 각각 1리, 2리로 구분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각각의 마을은 일제 잔재 청산의 차원에서라도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외에도 쪽이 많이 났다는 데서 유래한 남곡리, 칡이 우거진 동네라는 갈지리, 주변의 산빛이 비치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 산양리, 솔밭 안에 있다고 하여 송내리,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우검리, 골짜기 안에 있어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여 안심리, 대왕산 대왕이 잘 다스려 흥하기를 바라는 데서 유래한 흥정리, 연꽃이 많고, 마을이 연꽃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연하리, 이른 아침 햇살 받은 이슬이 반짝이는 골짜기라 하여 조곡리, 대사리 위쪽에 있어 상대리, 크게 흥하라고 하여 인흥리 등의 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 중 몇몇 마을은 짧게는 100년, 길게는 천 년 전부터 이름이 있었는데, 정식 행정명으로 기록되지 못하여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단지, 평지, 흥정, 조곡(조을곡촌·霜谷·露谷), 대사동은 조선 초(1425) 이전부터 정식 행정명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남곡·갈지 등은 1637년 자인현이 복현되면서 정식 행정명으로 기록되었다. 제일 나중에 생긴 마을 이름은 1911년 가천동과 강촌동을 통합한 인흥이다.
특히, 조선시대 상남면 흥정동에 속한 연하리·묵곡리(현 연하리)·안심리·흥정리·외사림리(현 사림리)·내사림리(현 사림리) 여섯 마을을 ‘육리’ 또는 ‘흥정 육리’라 하였는데, 현재도 주민들은 이 지역을 ‘육리’라 통칭하고 있다. 이중 사림리(沙林里)는 명칭 유래가 잘못 전하고 있다. 현재 몇몇 자료에는 사림리 지역에 ‘신림사(新林寺)’라는 큰 절이 있어 ‘신림’이 ‘새림·사름·사림’ 등으로 발음이 변화하면서 ‘사림리’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림사라는 절은 『자인현읍지』와 고지도 등 여러 자료에 현성산 아래 자인현 대사동(현 여천과 유곡)에 있었다. 그러므로 상남면 지역이었던 이곳 사림에 신림사가 있어 ‘사림’이라는 마을 이름이 정해졌다는 설은 와전된 것이다. ‘신림’과 ‘사림’이 발음이 유사하여 마을의 어원을 잘못 붙인 민간어원설이다. 사림은 이곳에 한때 대국사(대곡사)라는 절이 있었고, 숲이 우거졌다 하여 사림(寺林)이라 하다가 석림(石林), 사림(士林), 사림(沙林)을 삼림(三林)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사림으로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내사림동은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19가구가 살던 큰 마을이었는데 1950년대 공비 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마을 전체가 소개(疏開)되어 현재 마을 터는 밭으로 바뀌었다.
한편, 대사동(大寺洞)은 조선 세종 때(1425년)까지만 하더라도 현재 상대리, 하대리, 여천동, 유곡동 등을 아우르는 큰 마을이었다. 이 마을이 대사동이라 명명된 이유는 이곳에 원효가 창건한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효는 자기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라는 절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곳이 현재 여천동과 유곡동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때 금당사, 1620년(광해군 12년) 승 백양이 신림사로 개칭하였다. 그래서 이 사찰이 있는 마을을 대사동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러다가 1637년 6월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대사동은 하남면 상대사리·하대사리·남천리와 서면 유등천리(여천리)·유음곡리(유곡리) 등으로 나뉘었다. 참고로 신림사는 1800년대 중반 폐사된 후 2007년 그 근처에 초개사라 칭한 작은 사찰이 다시 들어섰다. 이렇듯 남산면 각 마을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양상을 겪었지만, 원래 살던 마을의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이상 『삼국유사』, 『경상도지리지(1425)』,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자인현읍지(1786)』, 『자인의 역사(2021)』 등 참고)
◆ 삶의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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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면 마을과 산 분포도
남산은 이름처럼 산이 많고 골이 길다. 동쪽 끝 대왕산과 서쪽 끝 삼성산을 두 축으로 하여 그 사이로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능선이 오목천을 향해 북으로 뻗어 내려오다 멈춘 골짜기 사이 사이로 마을들이 조성되어 있어 마치 신선이 펼쳐 놓은 부챗살 사이에서 살아가는 지역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흥정리·안심리·사림리의 대왕산, 갈지리·남곡리·평기리의 소용산, 세 치의 짧은 활을 닮았다는 조곡리·연하리의 새치궁산, 관 모양을 닮은 송내리의 관절미산, 밤나무가 많던 반곡리의 밤골산, 상대리의 원효·설총·일연 세 성인과 관련한 삼성산 등이 신선이 부치는 부챗살처럼 남산을 둘러싸고 있다. 이외에도 평기1리의 텃골, 평기2리의 대추빈달·띤비알, 갈지리의 동매(동뫼·갈지산), 우검리의 남산, 사림리의 한핑재, 조곡리의 사부량지와 반달처럼 생긴 반월산, 전지리의 건넛갓·사발양지, 하대리의 작은당산 등 크고 작은 산들도 부챗살처럼 오목천을 향해 뻗어 있다. 산이 많다 보니 골도 길고 깊어 평기2리의 새로 만든 옹기점이 있던 새점골과 산에 막을 쳤다는 산막지골, 불을 켜놓고 소원을 빌었다는 송내리의 불싼곡, 풀무간이 있어 풍덕딩이라 하던 조곡리의 분덕곡과 산소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초막골, 범이 살았다는 전지리의 호곡(범골), 긴 뱀처럼 생긴 상대리의 뱀골 등 수많은 골짜기에 각각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벼락을 맞았다는 사림리의 배락방우, ‘선일대’라 새긴 평기2리의 바위, 군데군데 말발굽이 찍혀 있는 듯한 흔적이 있는 조곡리의 말쭉바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긴 남녀가 위아래로 붙은 형상을 한 듯한 안심리의 남녀바위 등 기묘한 바위도 있었고, 비만 오면 무지개가 솟아난다는 조곡리의 무지개샘과 산신령이 마셨다는 참샘, 마시면 위장병에 좋아 위장병 환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없애버렸다는 반곡리의 약수탕, 아기장수의 전설이 깃든 하대2리의 북더샘 등이 있었다. 이들 산과 골짜기 등은 원래는 그 이름을 붙인 사연과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세월의 흐름 속에 이름만 남고 사연은 잊혀졌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이름조차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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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면 마을과 저수지 분포도

▲ 전국적인 사진찍기 명소가 된 반곡지
들판은 저수지를 중심으로 이름이 붙여졌는데 조곡리의 약수지 아래 약수평(장구배미), 반곡리의 반곡지 아래 반곡평, 진방리(전지2리)의 진방지(산대지) 아래 진방평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들판에 이름이 붙여져 있었으나 1970년대 경지정리로 인하여 지금은 거의 잊힌 상태다. 저수지는 상대리 송골에 있는 송곡지(송제), 산신령이 앉아서 마셨다는 물에서 유래한 조곡리의 성좌지(조을곡리제), 전지리 진방리에 있는 산대지(진방제) 등은 1425년(세종 7년) 이전에 축조된 문화재급 저수지로 보존이 필요하다. 골짜기에 옹기점이 있던 경리(구경동)의 점골못(점곡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데서 유래한 남곡리의 호명지, 안심리의 안심지(안심구제), 연하리의 먹실못(묵곡제)과 밀못(며일제), 조곡리의 약수곡제·독자지(독자곡제)·사거지, 전지리의 요리지, 풍광이 아름다워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반곡지(외반곡지), 상대리의 내지(상대사곡제)·외지(두응곡제), 하대리의 관음지(하대사곡제), 인흥리의 자라지 등도 적어도 1786년 이전에 축조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약 45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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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양리 노거수
그리고 산양리, 사월리, 남곡리, 사림리, 송내리, 흥정리 등에는 수백 년 된 노거수가 있으며 일부는 당목이라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또한, 「조선지지자료(1911)」에 의하면 상남면 지역은 생지황이 토산품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용산에는 산성이 있던 흔적이 아직 있다. 이렇듯 들판과 저수지, 노거수 등은 모두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하여 정성스레 조성한 것인데, 이 또한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여 서서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오래된 저수지 중 쓰임이 없는 것은 매립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옛날 상남면 산양리에 삼거리주막, 행정리(경2리)에 살구정주막, 하남면 조곡리에 조곡주막(숲거리주막), 반곡리에 외반주점(범골주막), 사월리에 사월주막(사더람주막), 하대리에 하대주점(한살주막)·하대주막(모갈주막), 상대리에 상대주막(다산주막), 인흥리에 가천주막(새술막) 등 여러 주막이 마을과 마을을 잇는 중간에 있어 길가는 나그네의 피로와 배고픔을 한 잔의 술로 위로하였다.
◆ 사회문화
▲ 지석묘
오목천 주변인 경리, 갈지리, 평기리, 산양리, 흥정리, 하대리 등지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인 지석묘가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의 지석묘에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접시 모양의 홈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갈지리 입구와 안심리·연화리로 가는 당고개에는 약 20기의 고분이 있는데 평지에 조성된 것이라서 주목받는다.
▲ 대곡사지 3층 석탑
흥정리(614번지)에도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지석묘가 과수원 가운데 있다. 상대리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다. 흥정리에는 옛날 대곡사(대국사, 341-2)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과수원 안에 대곡사지 3층 석탑과 연화대석이 아직 남아 있다. 남산의 주산으로 여겨지는 대왕산 정상에는 돌무더기가 있는데, 지금까지 봉수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자인현읍지에 봉수대는 자인에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우단으로 보인다.
▲ 도동서원
조선 시대 유교의식을 바탕으로 한 재실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누·정·대도 여럿 있다. 하대1리에 이두를 창안한 설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이 있고, 탐진 안씨 안우·안지를 추향하는 조곡리의 조곡서원은 최근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4호로 지정받았다. 안지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와 용비어천가 창작에 참여한 인물이다. 같은 마을에 탐진 안씨 재실 영모재(944번지)와 수성재(280번지), 김녕 김씨 삼 형제를 추향하는 삼의재(848번지) 등 5개의 재실(사당)과 서당이 있다. 또 송내리에 탐진 안씨의 이로재(204번지), 상대리에 성주 배씨의 추모재와 경주 김씨의 영모재, 우검리에 영천 이씨의 검계재(儉溪齋), 사월리 소리기그늘에 흥해 최씨의 봉명재(봉양재), 반곡리에 수원 백씨의 영모재가 있다. 이외에도 각 문중이 관리하던 경리 김녕 김씨의 금계재(琴溪齋) 등 약 12개의 재실이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훼철된 상태다. 그리고 경리에 김상규가 지은 만휴정, 김두영이 지은 용파대(龍坡臺), 평기리에 김성규가 지은 석장대(石章臺)와 신행(愼行)이 지은 유정(柳亭) 등 풍류를 즐기는 누·정·대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남산초등학교
근대 이전 교육기관으로 조곡의 율산정(이여정, 462번지)이라는 강학소(서당)가 아직 있고, 안심의 안인재(安仁齋)를 비롯한 갈지, 반곡, 산양, 송내, 연하, 평기, 흥정, 상대 등 각 마을에도 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름도 잊히고 건물도 훼철된 상태다. 현대 교육기관으로는 산양리에 남산초등학교(1929)가 있고, 1949년 우검리에 남산초등학교 육리분교(성남초등학교), 하대1리에 하대분교(삼성초등학교)가 개교되었으나 각각 1995년과 2010년 폐교되었다. 송내리에는 영남삼육중고등학교(1999년 통영에서 이전)가 있다.

▲ 삼성현역사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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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동의한방촌

▲ 경산시 사직단
인흥리에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경산동의한방촌, 경산현 사직단이 있고, 남산면 산양리 파출소 안에는 1949년 무장공비를 소탕하다 순국한 5명의 경찰을 기리는 ‘반공순국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상대리에는 상대온천이 있고, 최근 온천 앞 공터에 유채꽃단지를 조성하여 꽃피는 시절에 온천을 즐기러 온 관광객이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회로는 전지리의 남산교회(전지교회, 1905)가 제일 오래되었다.
사월리는 농토가 넓어 모심는 소리 등 노동요가 발달하여 전승되고 있었지만, 현재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리고 사월1리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지내던 동제와 영등제 등 세시 풍속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진 상태다. 이외에도 각 마을에는 전설과 민담, 민요 등 구비문학이 많이 전승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잊힌 상태다. 이렇듯 이 지역에 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면서 남긴 수많은 이야기와 흔적들이 시간의 흐름과 가치관의 변화로 망각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 사람과 행적
근대 이전의 인물로 남곡리의 충주 안씨 안량(1507∼?)은 1584년 78세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유향소 좌수로 있으면서 원당리의 최문병 등과 함께 자인을 경주부로부터 독립하려고 제1차 자인현 복현 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한 후 경주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의 아들 안천민(1555∼?)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최문병과 함께 자인 천장산(현 신관리 앞 삼천산)에서 창의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반곡리의 상산 김씨 김응광(1555∼?)도 1592년 최문병과 함께 천장산에서 창의한 인물이다. 전지리의 담양 전씨 전복명(1544∼1625)은 영천 권응수 장군의 진영에서 활동하다 영천성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정대임과 안강전투에도 참가했다. 남곡리 안천민의 아들 안종효와 평기리 텃골의 방희국(1574∼1658)은 1633년 자인현을 복현시켜 달라고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경주부 사람들로부터 고문을 당하였다.
특히, 방희국은 전라도 여수(해읍)로 유배갔는데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후손들도 현재 그 주변에 살고 있다. 전복명의 손자 전우벽(1604∼?)은 남곡리 이몽두가 실패한 구사부곡(현 진량 지역) 합속 문제를 1653년 한양으로 올라가 직접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아낸 인물이다. 같은 동네 서렴(1592∼1662)은 효자로 소문나 1718년(숙종 44년) 정려각을 전지1리(점말리)에 세웠는데, 현재 경산 대정동으로 이건해 놓았다.
하대2리의 성주 이씨 이광후(1564∼1643)·이창후(1576∼1648) 형제는 정유재란 때 화왕산 곽재우 장군의 막하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특히, 이 두 형제는 1637년 ‘제5차 자인현복현운동’에 참여하여 경주부에 속했던 자인현을 독립시키는 데 성공하고, 자인현 읍치의 기본 틀을 닦는 데 공헌하였다. 자인현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한 사당을 남천리(현 하대2리)에 세워 상덕사(尙德祠, 현 용성 덕천리 남천서원)라 하였다.
남곡리의 하빈 이씨 이몽두는 1640년(인조 18년) 현재는 진량이고 당시는 자인이었던 구사부곡 지역을 경주부에서 자인현으로 돌려달라는 상소를 최초로 올린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자인현읍지에 등재되어 현민들로부터 모범이 되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름과 행적이 점점 잊히고 있다.
한편, 1888∼1889년 전국적으로 흉년이 닥쳤는데 자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감 오횡묵은 가산이 넉넉한 주민 20여 명을 선정하여 구휼하도록 했는데, 경동에 사는 김녕 김씨 김계곤(金啓坤)이 조 40석을 희사했다. 이에 마침 경동을 순시할 때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김계곤이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시 한 편을 청하자 아래의 시를 써 주었다. 번역은 필자가 하였고, 원문은 『총쇄록』에 있다.
경동의 감역 김계곤에게 주다
벗님의 집이 산골 시내 동쪽에 있는데
바람에 가랑비 흩날리니 계수나무 무성하네.
붉게 떨어진 꽃을 밟으니 삼월이 저물어가고
푸른 향기 나는 풀을 지나치니 오솔길로 통하네.
들판의 술통이 나그네를 기다리니 봄 정취가 따스하고
새의 꿈이 가지에 걸리니 저녁 기운이 쓸쓸하네.
이 고을의 걸출함을 만약 묻는다면
주인의 고상한 운취가 이 산중에 있다 하겠네.
*계수나무 :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곳을 의미함.
*새의 꿈 :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 김진채 가옥
근대 이후의 인물로 앞서 얘기한 김계곤의 3남인 경동의 김상규와 아들 김두남은 1924년 자인 서부동 출신의 일본밀정살해조직단 ‘다물단’의 일원이었던 항일투사 서동일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서동일의 협박에 못 이겨 반강제로 내었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풀려났다. 같은 동네 친척인 김진채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남산면 발전을 위하여 공헌을 많이 하였다. 그가 살던 집이 현재 ‘김진채가옥’이라 하여 경산시 비지정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자인 동부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였던 황기식의 동생인 서예가 황기완도 경동에 살았는데, 그는 자인 북사리의 제석사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반곡리의 김용규는 독립운동가이자 행정가였다. 그리고 1960∼70년대 농촌계몽운동을 펼친 예대원, 배우 활동을 하다 낙향하여 경산에서 연극 활동을 하는 이원종, 1999년 옷로비사건을 수사하다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벌여 사표를 던진 변호사 이종왕은 모두 하대리 출신이다.
1984년 미국 LA하계올림픽에서 레슬링 동메달을 획득한 방대두와 세 차례 민선 경산시장을 역임한 최영조는 평기1리(기곡·텃골) 출신이다. 또 경기도 부지사를 역임한 예창근은 산양리 출신이다.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리고 검사 시절 검찰 내부 비리를 고발한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는 책을 쓴 변호사 김용원은 연하리 출신이다.
이외에도 남산 사람들은 대왕산과 삼성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놓고 있다. 특히, 남산 사람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정신을 삶의 터전인 남산에서 터득하여 세상에 나아가 살고 있다.
◆ 일제 징병·징용 거부자들의 ‘결심대’ 조직과 대왕산죽창의거
남산에는 일제 말 국내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자생적인 징병·징용 거부 항일무장단체 ‘결심대’가 조직되어 항거하다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이는 국외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한 단체와는 달리 국내에서, 그것도 농촌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항일무장단체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안창률을 비롯한 산양동·사월동·남곡동·송내동 등 조선 시대 상남면 지역인 면사무소 근방에 살고 있던 청년 29명은 1944년 6월 징병과 징용 대상자로 선정되어 남산국민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월리의 박재달·박재천 형제의 맏형이 북해도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차피 죽을 목숨, 일제와 맞서 싸우자.”라는 결심을 하고 1944년 7월 죽창을 만들어 대왕산 꼭대기에 진지를 구축하고 군대 조직과 유사한 결심대를 조직하여 저항을 시작했다.

▲ 대왕산 죽창 의건 결심대 조직도
▲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
이를 안 일본 경찰은 가족을 동원한 회유와 총을 쏘며 협박했으나 그들은 돌을 굴리면서 3차례나 저항했다. 그 후 그들은 용성의 용산성, 사림리의 조래봉, 조곡리의 약수정 꼭대기로 근거지를 옮기며 저항하다 식량 부족으로 하산하여 마을에 숨어 있다가 18일 만인 8월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 경산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다 안창률과 김경화가 옥사하였다. 그 뒤 그들은 모두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들의 행적은 해방 후에도 알려지지 않다가 1986년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1995년 사월1리 입구에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를 세우고 2013년 개보수하였다.
이처럼 대왕산죽창의거는 일제시대 국내에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라는 측면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의미 있는 항거였다. 그것도 식자층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농촌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은 더욱 유래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 의회에까지 보고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월리 입구 한쪽에 비석 몇 개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고, 그 누구도 이들의 행적을 기념하거나 알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이제라도 이들의 행적을 기념하는 행사를 정부 주도하에 매년 개최하여 일제에 항거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야 할 것이다.
◆ 현 상황
남산, 이름만 들어도 온화하고 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이다. 이름에서 삶이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하나같이 겸손을 미덕으로 살아왔다. 현재 주민의 주요 경제 활동은 복숭아·포도를 중심으로 한 과수 농사와 하우스 농사가 대부분이고, 일부 마을에서는 한우를 키우는 축산업도 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전지공단, 송내공단, 상대공단, 산양공단 등 일부 마을에 소규모 공단이 들어와 공업단지도 농촌도 아닌 농촌형 공업단지로 변하고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경산과 가까운 곳인 상대리, 하대리, 인흥리, 전지리 등 옛 하남면 지역에는 개별 전원주택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들이 대규모로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하여 원래 살던 주민들보다 더 많은 가구가 집단으로 들어오면서 수백 년간 형성된 마을의 정체성이 혼란을 겪고 있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남산 사람들
사월리의 달빛이 스러질 즈음
대왕산 대왕님은 죽창에 걸린 햇살을
천상의 은하수처럼 풀어내어
세 성현 깃든 삼성산 봉우리로 던지고
그 빛을 타고
남산 사람들은 하나둘 깨어난다.
오목천의 물길은 모래굼으로 들어와
“어기여차” 모심는 소리에 맞춰
돌빼기를 돌아
호명지 호랑이의 목을 축이고
한바탕 춤을 추다가
대국사 석탑 가랑비가 된다.
바람 타고 온 바깥 삶이
갈지산 칡덩굴처럼 원래 삶과 뒤엉켜도
여전히 햇살은 새치궁산을 넘어
성좌지 산신령에게도 한 사발 주고
사월들판의 물길은
골바지 돌부푸리 밀뱅이 구룽배미 온 들판
두루두루 적시고
반곡지로 돌아와
햇살과 만나 물안개로 피었다가
남은 것은
남산 사람들에게 돌려준다.
이리하여 남산 사람들은
대왕산의 죽창을 손에 쥐고
삼성산의 성현을 머리에 이고
대국사의 석탑에 기대어
호명지의 범과 함께 하늘을 보다가
사월의 달빛 아래서
반곡지의 물안개를 마시고
하나둘 손을 잡는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정명환 작가
감수 : 각 마을 이장님
<사진자료>
▲ 조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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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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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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