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배향과 자인현 복현 운동의 발상지 하대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남산면 편(2)

2023-08-11 오전 8:32:56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크게 문화유산자연유산두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문화유산영역은 세부적으로 6개의 기준을 설정하고 이 모든 것이 진정성(신빙성·authenticity)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진정성은 무엇일까? 위원회는 해당 문화유산이 믿을 만하고, 진실되면 진정성의 조건에 충족한다고 한다. 이러한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에 주목할 만한 부분이 위치와 주변 환경이다. 이는 해당 문화유산이 주변 환경과 연관되어 원래 있던 곳에 있느냐의 조건 문제이다. 원래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면 주변 환경과의 연관성이 떨어져 진정성이 결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복원 문제도 언급해 놓았는데, 흔히 가짜보다는 부서진 진짜가 더 소중하다.”라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처럼 문화유산은 원래 있던 곳에 있고, 원래 것이어야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진정성은 세계유산 문제를 떠나 지역의 문화재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므로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 태도 문제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유산이 남산면 하대리에 있다.

 

▲ 하대1리 마을 전경 
 

▲ 하대2리 전경 

 

▲ 남산면 하대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하대리는 기록상 조선 세종 이전부터 존재한 마을로 자인현 남면 대사리에 속한 각단이었다. 당시 대사리는 현 상대리, 하대리, 여천동, 유곡동 등을 아우르는 큰 마을이었다. 또 임진왜란 직전 상대리와 하대리 사이에 새로 마을이 조성되면서 새터(남천)’라는 각단이 생겼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행정 구역을 재편하였는데, 이때 대사리는 자인현 하남면 남3동 상대사리, 하대사리와 서면 유등천리(현 여천동), 유음곡리(현 유곡동) 등 네 마을로 분리되었다. 그 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하대사리에 속해 있던 새터남천리라는 이름으로 정식 행정단위가 되어 자인현읍지(1832)에 등재되기 시작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변경된 뒤 상대사리는 상대동, 하대사리는 하대동으로, 남천리는 남천동으로 변경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마을을 통폐합할 때 하대동과 남천동 두 마을은 하대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14년 남산면이 새로 생기면서 남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해방 후 법정동은 그대로 하대동으로 유지되면서 행정동으로 원래 하대동은 하대1, 남천동은 하대2동으로 구분되어 있다가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하대1(하대사리), 하대2(남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대리의 원래 이름인 대사리(大寺里)는 말 그대로 큰 절이 있는 마을이라 생긴 명칭이다. 여기서 큰 절은 초개사·금당사·신림사라 부르던 절이었다. 이 절은 신라 때 이곳 출신인 원효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지었고,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라 하였다고 한다. 원효가 태어난 곳은 현 자인면 도천산 아래 단북리와 북사리 근처이고, 살던 집은 당시 자인현 유등천리(불등을촌, 현 여천동)에 있었다. 이 초개사는 고려 때 금당사로 개명되었고, 조선 시대(1620) 승려 백양이 주지로 있으면서 신림사로 개명했다. 그래서 초개사나 금당사가 있던 신라나 고려 때부터 이 일대 마을을 큰 절이 있는 마을이라서 대사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기록상 대사동은 1469년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이곳에 마을이 조성된 시기는 압독국 이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대1리는 바로 이 대사리의 아래에 있는 촌락이라 하여 우리말로 아랫대첫골(아랫대삿골)’로 부르고 한자로는 하대사리라 적었다. 현재까지 이 촌락은 1550년경 성주 이씨 이자상(15071579)이 개척했다고 알려졌지만,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이미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대1리에는 석질이라 부르는 각단이 남쪽 개울 건너에 있다. 옛날 물이 귀하여 우물을 파보니 물의 질이 좋아서 마을 전체의 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깊이가 세 길이나 되어서 이곳을 석질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 하대1리 석질 촌락 

 

▲ 하대2리 돌빼기 촌락 
 

 

하대1리에서 약 800m 남쪽에 촌락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현재 하대2리다. 원래는 자인현 하남면 남3동 남천리였다. 조선 중기 전의 이씨가 이곳에 마을을 새로 개척했다 하여 새터라고도 부르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남천은 자인 현감이 현청의 물이 좋지 않아 삼성산 아래 야산 기슭에 수질이 좋은 우물을 발견하여 이곳의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남쪽에 있는 샘이라 하여 남천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한자는 샘 천()이 아니고 내 천()을 쓴다. 이 샘은 현재 하대2리 산2-1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하대2리에는 돌빼기라는 각단도 있다. 옛날 이곳을 개척할 때 돌이 너무 많아서 돌을 빼면서 개척하여 돌빼기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에 청동기 시대 입석이 여럿 있었는데 지금은 몇 개밖에 없다.

 

▲ 하대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하대리는 남쪽 삼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북쪽으로 뻗어 내린 동쪽 줄기 끝에 위치하고 있다. 남으로는 상대리, 북으로는 인흥리가 있다. 마을 서쪽 원효를 모시던 큰당산(여천 산85), 설총을 모시던 작은당산, 하대2리 동쪽 덧갓, 동북쪽 새탯갓이라는 작은 산을 두고, 북으로 넓은 벌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동북쪽으로는 자인의 계남리를 거쳐 내려온 오목천이 휘감아 돌아가고, 마을 가운데로 삼성산에 내려온 작은 개울이 북으로 가로지르는데 하대리에서는 운지랑 개천이라 한다.

 

큰 산이 없어 골짜기는 다른 마을에 비해 많지 않은데, 하대2리 남쪽에 옛날 고남사(관음사)라는 절이 있어 고남질, 삼밭이 있어 산밭골(여천동)과 하밭골이라 한 골짜기가 있다. 논은 하대 동쪽에 있는 원당배미, 원당배미 동쪽에 바위가 있었다 하여 방구배미, 방구배미 동쪽의 첫매기, 첫매기 동쪽 호박 모양의 수통을 놓았다 하여 호박수통, 호박수통 동쪽 새로 된 논이라 하여 새번달, 새번달 북쪽 홈통을 놓았다 하여 홈걸, 자갈이 많았다 하여 작살배미, 작살배미 북쪽 주막이 있던 곳이라 하여 주막디, 주막디 서쪽에 깊고 큰 논이라서 한고래, 인흥의 자라지(者羅池·자래못) 밑의 못밑고래와 자라들, 백양지 밑이라 하여 백양지못밑 등 논과 들에 관한 이름이 많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로 인하여 많이 사라졌고, 한달들과 자라들(자라평) 등 몇몇 곳의 이름만 남아 있다.


하대2리에는 1765년 이전에 축조된 하대사곡제라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현재는 상대리에 속하여 백양지라 부르고 있다. 또 관음사라는 절이 있어 관음지 혹은 고남질못이라 부르는 못과 그 동쪽 덕곡못(덕곡지)이라 부르는 작은 못 2개가 있는데, 모두 1912년 이전에 축조된 것이다. 보는 자라들에서 계남1리로 넘어가는 오목천에 있는 자라보, 남천 서쪽에 있던 새밋도랑보, 새밋도랑 남쪽에 있던 수뭇도랑보, 하대 서쪽에 있던 모길도랑보, 하대 북쪽의 광대징이도랑보, 하대 동남쪽 한달도랑보 등이 있었다. 이중 자라보(者羅洑)1786자인현지에도 기록되어 있는 최소 300년 이상 된 보이다. 이러한 보 또한 경지정리가 되면서 사라지거나 흔적만 남아 있다.

 

▲ 사라숲 전경 

 

▲ 천부경 비석 
 

 

그리고 하대1131번지 일대는 노거수가 집단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2015년 이곳을 사라숲이라 명명하고 정자와 비석을 세워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하고 있다. 이 사라숲 안의 느티나무 1그루가 경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이외에도 수백 년 된 은행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이 1리와 2리에 분포되어 있다. 특히, 사라숲에는 9천 년 전부터 구전되어오다 5천 년 전 한민족 고유한 글자인 녹도문자로 기록되어 전하던 천부경을 신라 최치원이 81자의 한자로 번역한 것을 바위에 새겨 놓은 천부경비석이 있다. 이외에 마을 입구에 하대주점(한갈주막)과 하대주막(모갈주막)이라는 주막이 있어 주민과 나그네에게 배고픔과 휴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대1리 석질이라는 촌락에 1949년 남산국민학교 하대분교가 개교되어 1956년 삼성국민학교로 독립했다가 지금은 폐교되었다.

 

하대1리에는 몇몇 전설이 있다. 석질 마을 서편에 작은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이 묘지에서 여우가 울면 마을에 초상이 나고, 남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넘어오면 비가 온다고 한다. 또 용감한 현감과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명관과 원혼녀 이야기’, 가난하지만 착한 인간이 바다나 하늘의 여인과 만나 행복하게 살다가 금기를 깨트려 버린 인간과 신녀 이야기등 전국적인 전승을 보이는 설화의 변형 버전(version)이 전한다. 그리고 원효의 집과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원효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하대2리인 남천에는 애기장수와 용소버전의 전설이 있다. 마을에 소나무가 많고 가파른 길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옛날부터 이곳에서 장군이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에서 진짜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는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역적질을 할까 두려워 그만 죽여 버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용마가 내려와 북을 치고 슬피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이 샘을 북더샘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두를 집대성한 유학자 설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

 

▲ 도동서원 전경
 

 

하대1리 서쪽에는 이두를 집대성한 유학자 설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이 있다. 설총은 신라 고승 원효와 태종무열왕(김춘추)의 딸 요석공주의 아들로 이 지역에서 출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설총이 이 지역 출신이라고 알려주는 제일 오래된 자료는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인현지(1786). 이전의 자료에는 설총이 경주 사람이라는 언급만 있을 뿐 구체적인 출신 지역에 관한 언급은 없는데, 이 자료를 기점으로 이후에 발간된 모든 자료에는 자인 출신이라고 등재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인이 경주부의 속현이어서 단순하게 경주 사람이라고 하다가 1637년 자인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경주와 자인을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문헌상으로 기록만 하던 설총의 탄생지를 구체적으로 발현한 시기는 1864년이다. 당시 자인 사람들은 기록과 구전을 바탕으로 지금의 유곡리 골짜기 현성산 아래 도동단을 세웠다. 이곳에는 신라 때 설총의 아버지 원효가 세운 초개사가 있었는데, 설총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생을 마감하자 초개사 근처에 장지를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고려 때 금당사, 조선 때 신림사로 불리다가 19세기 중반 폐사되었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자인 사람들은 폐사된 신림사 터에 단소를 조성한 것이다. 현재 경주에 있는 설총의 묘는 진위가 확실치 않고, 자인 하대리에 있는 묘는 가묘인데, 경주에는 후손들이 조성한 것이고 자인에는 자료와 구전을 바탕으로 유림이 조성한 것이다.

 

또한, 1948년 간행된 홍유후선생실기에는 유곡에서 태어나고 유천에서 자랐다고 하였지만, 여러 정황상 설총이 태어나 자라고 학문을 배운 곳은 여천동(불등을촌·유등천리)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그러나 유곡이나 유천은 옛날 대사동에 속한 같은 촌락이었으므로 논쟁은 무의미하다. 1888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당시 유천리였던 여천동을 방문하고 유천은 홍유후가 생장(生長)하고 강학한 곳이라 하면서 아래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필자가 번역한 번역문만 소개한다.

 

홍유후 설총 선생의 강학소 옛터에서 느낀 감회

 

지난날 홍유학 설총의 얘기를 듣고

오늘 아침 옛터를 둘러보았네.

꽃가지에 새는 한가하게 앉아 있고

이름 모를 풀은 바람에 누워 있네.

천 년이나 내려온 학문의 계통은

오랜 세대에 걸쳐 스승이 되었네.

동방은 군자 나라인데

문치는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그런데 도동단을 세우자마자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흐지부지 관리 부실로 방치되었다. 그 후 조선왕조가 망하자 여기저기에서 사당과 서원이 복원되었는데 그 흐름을 타 1913년 도동단이 있던 곳에 지역의 유림이 홍유후설선생신도비를 세웠다. 전면에는 비의 제목이 새겨져 있고 뒷면 비문은 장승택(18381916)이 썼다. 장승택은 칠곡 사람으로 여러 문중의 비문, 문집의 발문 등을 많이 쓴 영남 지방의 유학자였다. 비를 세운 사람은 김진홍, 최병일, 김경인, 배동호 등이고, 공사 담당자는 단유사 정진룡, 감역 정재진·우광희, 사화(경비지출자) 김은범·김태식·윤세호 등이다.

 

▲ 초개사 내 설총 신도비 

 

▲ 도동서원 내 설총 신도비와 가묘 

 

 

그러다가 이곳이 1914년 압량면으로 편입되면서 자인과 구분되고, 또 단소까지는 험하고 거리가 멀어 관리 소홀로 방치되자 1922년 경주 이씨 자인 관상문중(신관리) 백파 이종호(李鍾浩, 18751927)와 자인의 유림이 현 하대1리에 재실을 지어 도동재(道東齋)라 하였다. 이때 도동재의 기왓장 및 부재는 용성 고죽리 북쪽에 있던 대흥사의 것을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도동재 지붕 기왓장 일부는 오래된 흔적이 보인다. 그 후 1926년 도동재 뒤편에 설총의 가묘를 만들고 유곡에 있던 신도비를 가져와 단소를 조성하려 했으나 유곡 주민들의 반대로 원 비석을 모방하여 이 도동재 안에 세웠다. 2005년에는 지역 유림이 도동재 뒤편에 사당 경모사(景慕祀)를 짓고 묘소도 단장하였다. 2010년에는 성균관의 승인을 받아 도동재를 도동서원으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동서원에서는 매년 3월 정일에 설총에 대한 향사를 올린다. 한편, 유곡에 있던 신도비는 세월의 흐름 속에 관리가 소홀하여 방치되었는데, 2007년 이곳에 초개사라는 사찰이 들어서면서 사찰 경내로 옮겨 현재 보존 중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일부에서는 단소의 진정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둘 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고 있으므로 각각 진정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도동서원의 도동(道東)’이란 명칭은 도동단에서 따 왔다. 그런데 이 도동의 어원을 설총이 동쪽 경주로 갈 때 쉬어가는 길목에 세웠다.”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재실의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 이렇게 단순하게 짓지는 않았다. 사실은 설총이 유학의 거두여서 유학의 도가 동쪽으로 간다.’라는 데서 딴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학자 마융(馬融)이 산동성이 고향인 제자 정현(鄭玄, 127200)을 돌려보내면서 우리의 도가 이제 동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구나[吾道東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고사에서 동쪽을 해동 조선으로 간주한 퇴계 이황을 비롯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도동이란 어휘를 많이 인용하였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와 같이 도동서원이 이곳 하대리에 있게 된 역사성과 사연이 이러한데, 제대로 된 문헌이나 현장 조사 없이 일부 자료만 가지고 설총의 자인 탄생설은 허구이다라고 진정성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이 서원을 삼성현역사문화공원으로 옮겨 배향하자.”라고 하면서 진정성을 훼손하는 지역의 문화 권력자들이 있다.(설총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인 복현 운동과 두 형제를 기리던 상덕사

 

이 마을에는 자인현 복현 공적을 세운 이광후, 이창후, 김응명 3명을 추향하는 상덕사가 있었는데, 이 또한 문화유산의 진정성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사당이 있던 장소는 남천리 남서쪽 상대리 71번지 일대 서원비알이라는 곳이다. 이 사당이 남천리에 세워진 사연을 알려면 먼저 조선시대 자인과 경주의 관계, 또 자인현 복현 운동의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 자인현 복현 운동의 배경

자인은 신라 때까지 장산군에 속한 독립된 현이었는데, 고려 현종 때(1018) 경산·하양과 함께 경주부의 속현이 되어 수백 년간 경주부 사족과 관원들로부터 억압과 피해를 당했다. 그러다가 경산현은 고려 명종 2(1310), 하양현은 조선 태종 13(1413) 각각 경주부에서 독립했지만, 자인만은 그렇지 못하고 복현 운동이 성공한 1637년까지 무려 619년 동안 억압을 당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냥 내 탓이오!”라고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1562년 자인에 향교가 세워지고 여기서 교육받은 자인 사람들이 힘을 모아 경주부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자인현 복현 운동이다. 이 운동은 무려 50여 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줄기차게 일어났다.

 

- 1차 자인현 복현 운동

1차 자인현 복현 운동은 15844월에 일어났다. 자인향교에서 교육을 받은 최문병(원당리)을 비롯한 정침, 정현, 이표 등 자인 품관과 유향소 좌수 안량(남곡리), 별감 권응형·허연수, 유사 임세진 등 향리들은 경주부의 횡포에 벗어나기 위하여 자인시장에서 소를 구입하고, 남방리에서 도살하여 제를 올렸다. 다음 날 이들은 원당리에 다시 모여 관찰사에게 올릴 소장을 작성한 후 416일 대사리(현 하대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자인현민들을 모아 경주부에서 벗어나 경산현에 합속할 것을 집단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는 자인에 파견된 경주부 관원 정두박, 이인풍 등에 의해 발각·체포되어 경주부로 압송당한 후 갖은 고문과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이러한 사연으로 하대리는 자인현 복현 운동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유서 깊은 동네이다.

 

▲ 1584년 5월 1일 주동자 명단을 기록한 자료(국편제공)
 

 

- 2차 자인현 복현 운동

그런데 1차 복현 운동을 벌인 지 15년 후인 1599년 자인에서는 또 복현 운동을 벌이는데 이것이 제2차 자인현 복현 운동이다. 이유는 경주부의 가혹한 조세와 부역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또 평소에는 자인현민에게 과도한 조세와 부역을 부담시키던 경주부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자인현의 군인들을 모조리 차출하여 경주부를 방어하는데 데려가 버려 자인현은 군인 하나 없는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문병을 비롯한 자인현민들은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워 자인을 왜군 하나 없는 일종의 해방구로 만들었다. 그러자 다른 지역에 있던 청도 김씨, 충주 석씨, 진주 강씨 등 많은 문중이 자인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후손들이 아직 자인에 살고 있다. 자인현에서 임란 의병이 제일 많이 배출된 데는 바로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그래서 의병장 최문병과 친척 최두성(신도리), 이기업(관상리) 등 임란 의병 출신 선비들은 1599년 봄 경상도 관찰사 한준겸에게 경주부에서 벗어나 대구부와 합속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를 알게 된 경주부윤 이시발은 자인현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소장을 관찰사에게 보냈는데, 관찰사는 당시 권력자였던 이시발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인현의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이후 최문병과 복현 운동 주동자들은 7월 경주부로 끌려가 또 갖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는데, 최문병은 다음 달인 84일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 1599년 7월 14일 최문병, 최두성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자료(국편제공)
 

 

- 3차 자인현 복현 운동

그러다가 33년 후인 16331월 자인현 관상리(신관리)에 살던 28세 된 백렴이라는 청년이 백현룡과 이기업 등 자인현민이 작성해준 상소를 들고 홀로 상경하여 조정에 제출하고 자인현을 독립시켜달라고 농성을 벌였다. 백렴의 상소를 받아 본 인조는 경상도 관찰사 정세구에게 명하여 자인현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했는데, 이를 안 경주부의 방해로 정세구는 불가하다는 보고서를 올리고 인조는 없던 일로 해 버린다. 경주부는 이를 빌미로 곧바로 보복을 감행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명문세가들은 집을 버리고 도망가고, 일반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져 자인은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세 차례나 벌인 복현 운동은 경주부의 갖은 방해로 모두 실패하였다.

 

- 4차 자인현 복현 운동

그런데 6개월도 안 된 16336월 방희국(15741658, 평기리), 백현룡(신관리), 최진강(15841645, 원당), 안종효(남곡리), 김근 등 자인현민들은 또 상소를 올린다. 이번에는 자인 현민 300여 명이 집단으로 상경하여 인조에게 상소를 올리고 도성 앞에서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집단 농성까지 벌였다. 이에 해당 부서는 임금에게 상소를 전달하였는데, 이때 또 경주부에서 대응 상소까지 올리면서 방해하였다. 그래서 해당 부서는 임금에게 자인현의 소청을 거부하라는 방계를 올리고 인조는 또 없던 것으로 하였다. 해당 부서는 농성하는 데 도움을 준 여응복에게 장 100대를 때린 후 의주 백마산성으로 유배를 보내 버린다. 그리고 경주부윤 전식은 농성 주동자인 백현룡, 최진강, 안종효 등에게는 의자에 앉혀 놓고 정강이 부분을 때리는 형신을 가했고, 방희국와 김근 등은 장을 때린 후 전라도 해읍(여수)으로 유배를 보내 버렸다. 이로써 제4차 자인현 복현 운동도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 5차 자인현 복현 운동

그로부터 4년 후인 1637년 봄 이시혐(신관리), 백렴(신관리), 이광후(하대리), 이창후(하대리), 김응명(울옥리) 등 자인현민들은 또 자인현을 독립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때 상소를 올린 이유는 경주부의 횡포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면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병자호란 당시 의병 창의의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 갔다는 소식을 접한 자인현민들은 의병 300여 명을 규합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문경 새재를 넘던 도중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면서 회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자인현민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또다시 자인현을 경주부에서 독립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자인현의 움직임을 간파한 경주부에서도 대응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이경여에게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했고, 이경여는 자인현민들의 요구가 합당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전의 관찰사가 몇 번이나 부당하다는 보고서를 올린 데 비하여 이경여가 합당하다는 보고서를 올린 이유는 그가 바로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한 이력이 있어 의병을 일으킨 자인현민들의 공적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인조는 이경여의 보고서를 받은 후 자인을 경주부에서 독립시키라는 윤허를 내려 16376월 자인현은 619년 만에 독립된 현을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자인현 복현 운동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광우의 논문과 필자의 자인의 역사에 실려 있음)

 

- 상덕사의 건립과 진정성

이러한 다섯 차례에 걸친 자인현 복현 운동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곳이 바로 당시에는 대사리였고 지금은 하대리였다. 자인현이 독립하자 복현에 공을 세운 이 마을 출신인 이광후(15641643)·이창후(15761648) 두 형제와 울옥의 김응명(15931647)은 초대 현감 임선백을 도와 자인현 행정 구역 개편, 자인 향교 체제 정비 등 자인현 읍치의 기본 틀을 닦는 데 물심양면으로 공을 많이 세웠다. 그래서 자인현민들은 이 세 사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원당리에 있는 충현사에 최문병과 함께 배향하였다. 그러다가 1700년 남천리(하대2)에 상덕사라는 사당을 세워 이광후·이창후 형제와 김응명을 배향하였다. 그 후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상덕사(남천사)는 폐철되고, 성주 이씨 후손들은 하나둘 출향하여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각종 서원과 재실이 복원되는 과정에서도 이 상덕사는 복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용성 덕천리에 세거지를 마련한 경주 김씨 후손들이 자신들의 세거지에 1927년 상덕사를 복원하여 남천서당 상덕사라 명명하고 김응명을 배향하다가 2008년 남천서원으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천리에 있던 상덕사가 용성 덕천리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역사성과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지, 현 남천서원 상덕사는 원래 배향 인물인 이광후·이창후 형제가 배제된 상태이므로 완전성과 진정성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쉴즈가 하나의 유산이 전통이 되려면 최소 두 세대와 100년의 역사성을 지녀야 한다고 했듯이, 상덕사가 덕천리로 옮긴 지 거의 100년 가까이 되므로 이 또한 하나의 전통 유산으로서의 완전성과 진정성의 조건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을 현황

 

도동서원과 상덕사 터를 품고 있는 하대리는 1888년 하대사리 31, 남천리 11호가 살았다. 현재 주민등록상 가구 수는 하대1113가구, 하대277가구이다. 주민 수는 하대1205, 하대2116명이 등록되어 있다. 최근 전원주택을 지어 전입하는 주민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하대리 주요 성씨였던 성주 이씨는 현재 1가구만 있고, 전의 이씨는 1리에 30여 가구 거주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벼농사와 과수업에 종사하는데, 복숭아와 하우스를 지어 거봉과 샤인머스켓 등 포도 농사를 많이 한다. 그리고 최근 대구한의대학교 네거리에서 하대리 허리까지 삼성현로라는 큰 도로가 개통되어 섬유공장, 자동차 부품공장, 식품공장, 철강공장, 화학공장, 각종 제조업 공장 등이 들어와 여러 사연을 간직한 산··들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특히, 하대리는 원래 있던 문화유산이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또 현존하는 문화유산도 옮기자는 의견이 있어 우리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한 번쯤 고민하게 하는 마을이다.

 

한 편의 시로 글을 마무리한다.

 

하대리

 

바람에도 결이 있다는데

계림숲에서 불던 동풍은

등 뒤로 아스라이 스러지고

송골 너머 여우 소리에 실려 온 서풍에

허리가 파랗게 시리다.

 

아기장수는 눈도 못 떠

용마가 쓸쓸히 승천한 북더샘

북소리는 둥둥둥 작살배미로 퍼지고

원효 설총 스쳐 간 바람은

초개사 도동서원에 빨갛게 머무른다.

 

자인 복현의 뿌리는 이곳인데

노란 향연은 관란천 위에서 피어오르고

두 형제의 사당은 바람에 씻겨

고남질 못 속에 까맣게 잠들고 있다.

 

그래도 삼성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돌빼기와 사라숲을 넉넉히 감싸고

새로 온 바람은 새로 온 바람대로

당산 머리 댓잎으로 샅샅이 잦아드니

하대 남천 사람의 웃는 소리는

대보름날 달처럼 하얗구나.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정명환 작가

감수 : 서정교(하대1리 이장배병호(하대2리 이장)

 

<사진자료>

 

 

▲ 사라숲 노거수와 천부경 비석 

 

▲ 도동서원 경모사 

 

▲ 초개사 

 

 

▲ 도동서원 표창기 
 

▲ 신림사 귀부와 이수 
 

▲ 신림사 부도 
 

▲ 설총 신도비와 가묘 

 

▲ 자라지
 

▲ 백양지 
 

 

▲ 남산초등학교 삼성분교 

 

▲ 하대1리 마을회관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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