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란서원과 맹구대의 마을 용성면 미산2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용성면 편(5)

2024-03-20 오전 9:21:01

▲ 용성면 미산2리(오산리) 마을 전경 
 

 

역사와 유래

 

용성면 미산2리는 조선시대 자인현 하동면 동사동 오산리(鰲山里)였다. 1895년 자인군 하동면 오산동이 되었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마을을 통폐합하면서 상동면의 사미천리(상사동·하사동)와 합하여 자인군 상동면 미산동이 되었다(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고시 40). 그 후 1914년 전국의 부군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경산군 용성면 미산동이 되었다(조선총독부령 111). 해방 후 법정동은 미산동이었지만 행정동은 미산2동으로 부르다가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미산2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912년 작성된 미산2리 지적도(초록색 : 대지, 노란색 : 저수지와 오산천)

 

 

이 마을은 청도김씨가 들어와 개척했다고 한다. 청도김씨는 김윤채가 15세기 자인현 남면 흥정동 묵곡리로 들어오면서 세계가 이루어졌다. 그 후 김윤채의 아들 김여성은 자인 흥정동 흥정리와 묵곡리(현 연하리) 파조, 김여성의 아들 김선은 자인 묵곡리 소문중 파조가 되었다. 한편, 김윤채의 둘째 아들 김여신은 묵곡에 살다가 외가촌(외촌)으로 이거하여 외가촌 입향조가 되었다. 김여신의 5대손 김수옹은 자인 관상리(신관)로 이거하여 관상 소문중 파조가 되었다. 또 김여신의 8대손 김응지는 외가촌에 살다가 임진왜란 직전 자인 오산리로 이거하여 오산리 소문중 파조가 되었다. 그래서 옛 자인현 흥정리, 연하리, 오산리, 관상리 등에 청도김씨가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산리에 들어온 청도김씨는 김응지로 볼 수 있다. 참고로, 자인 관상리 청도김씨는 1800년대 중반까지 살다가 다시 용성으로 이거했다.

 

▲ 자라등을 닮은 모정말리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이곳에 자라처럼 생긴 작고 동그란 산이 있어 자라 오를 써서 오산리(鰲山里)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 산은 현재 곡신리에 속하는 하신지 옆의 모정말리라는 등성이다. 이외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김응지의 14대조 김한귀가 고려 공민왕 때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는데, 그의 시호를 따 마을 이름을 정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호구총수(1789)에는 낮 오를 써서 오산동(午山洞)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자인현읍지(1832)에는 다시 오산리(鰲山里)라 하다가 1880년경부터 또 오산동(午山洞)이라 하였다. ()를 오()로 표기하는 것은 흔히 사용하던 간략화 방식이다. 오산이란 이름 외에 덜미·멀미, 원산 등의 현지음으로도 부르는데, 멀밋들, 원산보(遠山洑)라는 이름이 아직 남아있다.

 

▲ 오산마을 회관 
 

 

이 마을은 1860년대 자인현 하동면 동사동 서원리 일부인 굴란이라 부르던 각단과 통합되었다. 굴란은 미산2리 서쪽 끝 경계 부분 관란서원이 있는 각단이었다. 1647년 자인 현감 손회종이 이곳에 관란사를 설립하고, 1660년 자인 현감 손처신이 관란서원으로 승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원리라 불렀다. 그 후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관란서원이 폐철되면서 마을도 함께 해체되어 일부는 경동(점골)이 되고, 서원이 있던 굴란의 4가구는 오산리에 병합되었다. 관란서원이 있던 골짜기는 현지음으로 굴란·관란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은 미산1리와 거리상 약 1km 떨어져 있어 오랫동안 별개의 촌락이었는데,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었다. 해방 후 원래 이름을 회복하지 못하고 미산2리로 유지되지만, 마을에서는 오산리라 부르고, 마을회관도 오산마을회관이라 한다.


 

▲ 미산2리 지명지도

 

▲ 용두골과 용두지 
 

▲ 너부골못터와 광곡

 

 

삶의 터전과 흔적

 

오산리는 오목천 남쪽 넓은 들판 가운데에 있다. 남쪽으로는 용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안고 서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넓은 들판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곡란 회곡지에서 발원한 오산천이 가로질러 오목천에 합류한다. 용산에서 뻗은 골짜기는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골이라 하며, 그 골짜기 아래에 저수지를 축조하여 용두지(용두곡제)라 명명하였다. 이 저수지는 여지도서(1765)에 용두동제라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외에도 자인현지(1786)에 승제(升堤)라 불리는 저수지가 용두골 동쪽 골짜기에 있었고, 조선시대 너붓골못이라 부르던 저수지가 너붓골(광곡)에 있었는데, 둘 다 현재 매립된 상태다. 오산리 서남쪽에 깊고 넓은 골짜기는 넓어서 너붓골 또는 광곡이라 한다. 또 너붓골 북서쪽 골짜기 위는 남산면 경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쪽골고개라 한다. 그리고 가정들, 장구잇들, 새들, 멀밋들 등 들판이 넓은데 경지정리로 지금은 거의 잊혔다.

 

▲ 마을에 있는 고인돌 

 

▲ 관란서원 앞 오목천변에 있는 고인돌 


 

오산리 마을 안쪽과 들판에는 청동기 시대 지석묘가 들판에 18, 531번지 민가에 7, 관란서원 앞 오목천 가에 10, 마을 동북쪽 논에 1기가 있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오목천 가에 있는 것은 도로 확장 공사로 거의 유실되고 현재 1기만 남아있다. 그리고 서쪽 관란서원이 있는 나지막한 산 남쪽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축조 시기는 미상이고, 이름도 그냥 산성터라고만 한다. 또 이 마을에는 무지개샘과 맹구대 이시미라는 전설이 있다. 마을 서쪽 관란서원이 있는 맹구대 절벽 아래 물이 휘돌아 가는 곳에 무지개샘이 있었다. 이곳에는 용이 되지 못한 큰 구렁이인 이시미가 살고 있었는데 오목천을 오가며 물을 관리했다고 한다. 이시미는 눈동자 크기가 무려 접시만 했다고 한다. 이 무지개샘은 도로 확장 공사로 영원히 사라졌다. 이외 마을에는 오산재(鰲山齋)라는 서당이 있는데, 청도김씨 오산리 입향조인 통정대부 김응지의 강학소였다. 현재 별다른 이용은 없고, 1971년 후손 김상대(19051981)가 쓴 오산재 현판만 걸려 있다.

 

▲ 오산제 전경 

 

▲ 오산제 편액 
 

 

미산2리는 1888년 당시 가구 수는 18, 대표는 김윤하(18431889)였다. 그는 자인 현감 오횡묵으로부터 마음이 착하여 직임을 맡길 만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1912년에 이르러 오산리 본 마을에 40가구, 용두지 안에 2가구, 광곡에 2가구, 굴란에 4가구 등이 있어 모두 48가구가 살았다. 현재 이 마을은 100여 가구에 2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을 개척한 청도김씨들이 주로 살고 나머지는 각성들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벼농사, 복숭아, 포도 등 농업에 종사하는데, 벼농사보다는 복숭아나 포도 등 과수업을 많이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하우스를 짓고 샤인머스캣 등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또 마을 외곽에는 소를 키우는 축사, 고춧가루 가공공장 등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마을에 회재 이언적이 다녀갔고, 경주의 효자로 소문난 이승증이 이곳에 살면서 남긴 흔적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란 이승증과 관란대, 맹구대

 

▲ 맹구대와 관란대 전경(현재 도로 공사로 훼철됨)
 

 

마을 서쪽 나지막한 산은 오목천과 인접해 있고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 경관이 좋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풍광을 감상하고 풍류를 즐겼다. 대표적인 사람이 회재 이언적이다. 그는 이곳 오목천에 와서 흔적을 남겼다. 본관이 경주인 이승증(15151599)은 이언적과 같은 경주 출신으로 그의 학풍을 계승하면서 삼족당 김대유의 문인이었다. 경주에서 살다가 말년에 자인 신관리 동쪽 금학산(金鶴山) 아래인 이곳으로 이거하여 집을 짓고 초어와(樵漁窩)’삼회당(三會堂)’이라 명명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가 이곳에서 집을 짓고 지은 시가 전한다. 이 시의 원문은 관란집에 있고,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초어와

 

뒷산에 나무하러 가서 구름과 함께 자고

앞 시내에서 낚시 마치고 달과 함께 돌아오네.

인생세간 모든 집은 내 분수가 아니니

서까래 셋 초가집을 산 중턱에 짓고 사네.?

 

삼회당

 

서늘함이 찢어진 창으로 스며 바람은 산들산들하고

빈방이 환하게 되니 달빛은 뉘엿뉘엿하네.

청산 또한 풀어헤쳐 한가로이 음미하니

문을 밀면 뒤따라 와 한 집에 함께 하네.

 

 

이 삼회당을 기준으로 남쪽에 작은 집을 지어 초어와라 하였고, 그 앞 30보 정도 앞에 두 봉우리가 있었는데, 북쪽은 관란대’, 동쪽은 맹구대라 하였다. 그는 이 맹구대를 소재로 칠언절구 3편을 남겼는데, 후학들이 절벽에 새겨 놓았다. 원문은 관란집에 있고, 두 번째 시는 자인현읍지(1832)에도 실려 있다.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맹구대 삼수

 

시내 위 황량한 절벽은 높이가 백 척이고

한가로이 갈매기와 백로 따르며 굳은 맹세하고자 할 때

조물주는 또 시와 더불어 즐거움을 주니

새가 날아가는 먼 봉우리는 여인의 눈썹같이 푸르구나.

 

기러기 소리는 맑은 가을을 알리고

흰눈 내린 갈대꽃에 푸르디푸른 물이 흐르네.

내가 이 사이에서 절경을 차지하려니

모래톱 주인인 갈매기와 백로들에게 부끄럽기만 하네.

 

골 깊고 숲 짙어 세속과 끊어진 곳에

집을 지어 한가로이 사니 얼굴빛이 좋구나.

읊고 감상하고 새를 찾는 것 외에는 내 버려두니

용산이 옥처럼 서서 푸르게 천 겹으로 둘러버렸네.

 

그 후 흥해에 살던 진사 운와 채구장(16841743)이 맹구대에 와서 맹구대가라는 시 세 편을 짓고 절벽에 새겨 놓았다.

 

맹구대가

 

맹구대여, 맹구대여!

누가 절벽에서 갈매기와 맹세하였는가?

맹구는 바로 그 숨음을 맹세한 것인데

갈매기가 아니면 맹세는 이룰 수 없다네.

 

맹구대여, 맹구대여!

한가로이 왔다갔다 하는 물결 위의 갈매기

세상에 어찌 이 갈매기와 희롱할 수 있겠는가?

한가로운 자가 갈매기와 짝이 될 수 있으리.

 

맹구대여, 맹구대여!

맑은 바람은 백 년 동안 홀로 절벽에 남았고

선생은 구천에서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

슬퍼하는 몇 점의 갈매기만 왔다갔다 하누나.

 

이외에도 맹구대에는 조선 영조 때 인물인 장시하, 홍순빈, 홍익원, 이홍리, 경상감사를 역임한 김노응의 맹구대명(盟鷗臺銘)’, 김대명, 윤지현의 경차맹구대운(敬次盟鷗臺韻)’ 등 수많은 시가 새겨져 있었다.

 

▲ 통대구사렴문(출처 : 관란집)
 

 

이승증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의 노구로 의병을 일으켰다. 또 같은 해 528일 대구의 사림에게 통대구사림문이란 격문을 자인진사 이승증이름으로 보내어 경상도 지역의 초기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학문과 호국에 큰 업적을 남긴 이승증은 15991012일 자인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신관리 동쪽 금학산 동북쪽인 용성 외촌 명계리에 있다. 후손들이 그 아래에 재실을 지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 이승증 묘소 

 

 

관란서원과 자인현 선비

 

▲ 관란서원 전경 

 

▲ 관란서원 편액 
 

 

이승증 사후 1647년 자인현 선비들과 자인 현감 손회종이 이곳에 관란사를 건립하고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였다. 이곳은 1660년 자인 현감 손처신 때 관란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폐철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유림에서 그 자리에 위패를 묻고 단소를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서원의 유래를 알 수 있게 하는 수많은 게판문과 유생들의 시가 유실되었다. 그런데 1900년 가을 경상감영 소속 아전 정재학이 이 단소를 훼철하고 몰래 묘를 쓴 투장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경주 양동 이언적의 후손들은 현풍 도동서원, 안동 도산서원 등에 통지문을 보내 투장 사건을 알리고, 1901123일 자인 단소에서 모임을 갖고 무덤을 파내기로 결의하였다.

 

▲ 경주양동래문(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그 후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하자 단소가 있던 곳에 지역 유림들이 관란서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하고, 1923년 장임으로 있던 최한주, 김홍배 등이 서당을 중수하였다. 이때 윤현기가 쓴 관란서원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고 하는데, 서원 현판이 걸렸는지 서당 현판이 걸렸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19371968년까지의 게판문에는 관란서원이 아니라 관란서당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관란서원이라 칭한 게판문은 1971관란서원중수표창기부터이다.(관란서당중수기참고)

 

 

일제시대 자인현 선비의 풍류 장소였던 낙호대

 

관란대와 맹구대 절벽에는 수많은 문인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나라 잃은 자인현 선비 16명이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이곳을 낙호대라 칭하고 자연을 노래하면서 각자의 이름과 자()를 새겨 놓았다. 특히, 낙호대에는 남산 조곡리에 살면서 1897년 자인향교 도유사를 역임한 안병희(18541939), 경주김씨 김윤홍, 미천리에 살면서 학천대를 건립하고 1904년 자인향교 공사원을 역임한 김진학, 1895년 자인향교 장의를 지낸 김창호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이중 안병희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원문은 경산군지(1934)에 있고,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낙호 두 글자가 절벽에 걸리니

관란의 경치는 더욱 트이는구나.

모랫가에는 갈매기가 날아와 앉고

깊은 연못에는 물고기가 뛰어오르네.

()이 보존되니 더욱 예를 아끼고

희생이 길러지니 옛 잔을 따르네.

벗의 이름을 연달아 함께 새기니

안빈낙도를 즐기며 보내고 맞이하네.

 

*양과 희생 : 최소한의 예를 보존하겠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것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가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말했다.

 

 

에필로그

 

자인이 현이었던 시절, 공립학교로는 자인향교’, 사립학교로는 관란서원이 양대 축을 형성하면서 젊은 세대의 교육을 담당해 왔다. 시대가 바뀌어 교육과정이 서구식으로 변화된 지금, 수백 년간 이어온 학문은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지식이 되어 버리고, 서원은 옛것을 지키려는 노유림들에 의해서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관란서원 앞 관란천(오목천) 절벽에는 문인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흔적인 관란대, 맹구대, 낙호대라는 글씨와 그들이 창작한 수많은 한시 작품이 단서로 새겨져 있었는데, 1990년대 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모두 훼철되거나 땅속에 묻혀 버렸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고, 이제 그들이 남긴 시들은 몇몇 문서에서만 확인될 뿐이다. 의식 없는 공무원과 토목업자들이 문화재를 훼철하고 역사까지 묻어 버렸다. 현재의 편리함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과거의 흔적을 없애도 되는가? 한 번쯤 질문을 던져보게 하는 오산리 마을이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오산리 연가

 

용산에 오르던 맹구대 이시미

관란천 무지개샘 주인 되어

가정들 장구잇들 원산보

오백 년 삼일우로 적셨는데

천둥처럼 땅속으로 묻혀 버려

그리움만 짙어가네.

 

금학산 날아들던 관란대 갈매기

오목천 모래사장 임자 되어

회재선생 관란선생 자인선비

오백 년 노래로 맹세했는데

구름처럼 강물로 흘러가 버려

그리움만 짙어가네.

 

그래도 맹구대 이시미 관란대 갈매기

그 옛날 맹세하던 노래가

자라등 용두곡 너붓골 멀밋들

사이사이 굽이치는 오산천

오산리 복사꽃으로 피어나니

그리움으로 살겠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 양재완 작가

 

<자료사진>

 
 
▲ 관란서원 
 
▲ 관란서원 안인사 
 
▲ 관란서원 앞 오목천변에 있는 고인돌 
 
 
▲ 마을에 있는 고인돌 
 
▲ 오산제
 
▲ 오목천
 
▲ 오산천 오산2교 
 
▲ 오산천 
 
▲ 용두골
 
▲ 용두골 목밭들
 
▲ 용두지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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