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5 오전 9:35:41
▲ 유곡동 전경

▲ 유곡동 행정지도
현 유곡동 마을회관이 있는 곳은 옛날 아방동(앞방골)이라 불렀다. 이곳에 조선 초 대학자 서거정의 조상 분묘가 신제지 안쪽에 있다. 그래서 서거정도 자인현에 있던 이 분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대구서씨 사가공파에서도 현재 관리를 잘하고 있다. 이 분묘에 얽힌 이야기가 풍수지리설과 연계되어 유곡리에서 전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이 오지 중의 오지여서 접근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대구한의대학교 네거리에서 하대리 쪽으로 큰길이 생겨 경산에서 차로 10분 이내에 도착하는 곳이니, 유곡동을 찾기 전에 이 마을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알고 가면 유곡동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 역사와 유래
유곡동은 조선시대 경주부 자인현 서면 유음곡리(油音谷里)였다. 유음곡은 조선 초까지 자인현 서면 대사동(大寺洞) 유등천리(柳等川里)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 당시 자인현 서면 대사동에는 유등천리 외에 상대사리와 하대사리가 있었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상대사리와 하대사리는 자인현 하남면 남삼동에 편입되고, 유등천리는 유등천리, 유음곡리, 내동리로 각각 분리되어 자인현 서면 서초동에 편입되었다. 19세기 후반 유음곡리는 유곡리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유곡동이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압량면을 신설할 때 자인군에서 분리되어 경산군 압량면 유곡동이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다가 1987년 경산읍, 1989년 경산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경산시 동부동 관할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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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지적도
이처럼 유곡동은 자인과 경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관계로 남방·내동·여천 등과 더불어 행정구역 개편 때마다 여기저기 편입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개척 초기부터 있던 유곡(지름골), 이후에 조성된 새만당, 새태, 숲밑 등 여러 개의 작은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음곡·유곡·지름골·원유곡
▲ 유음곡 전경
유음곡은 유곡의 본래 마을로 유곡동 남쪽 ‘고란’이라는 골짜기 제일 안쪽에 있었다. 마을 이름이 처음 기록된 『호구총수(1789)』에는 유동리(油洞里)로 등재되어 있는데, ‘동(洞)’은 ‘곡(谷)’과 상통한다. 『자인현읍지(1832)』에서 유동리는 ‘유음곡리’로 바뀌어 등재되어 있다. 여기서 ‘유음’은 ‘기름’ 내지는 ‘지름’의 순우리말의 차자표기다. 이로 보아 실생활에서는 ‘기름골’ 내지는 ‘지름골’로 불렀고, 기록에는 ‘유동리’ 또는 ‘유음곡리’로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지름골’로 부른 유래는 마을에 물이 기름처럼 귀해서 ‘기름골’의 경상도식 발음인 ‘지름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1888년 당시 이곳은 20여 가구 살고 있었다. 해방 후 공비들 때문에 마을 소개령이 내려져 주민들은 바로 아래 새태로 이주하고 지름골 마을은 없어졌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사람들이 다시 살기 시작했다. 현재는 불광사라는 절과 2∼3가구가 있다.

▲ 당나무와 당집터
한편, 이 지름골 213번지 길가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 곳에 일제시대까지 조그마한 당집도 있었는데, 마을이 소개(疏開)되면서 함께 사라지고 당나무만 있다.
▲ 신기·새태
▲ 신기 전경
신기는 새로 터를 닦아서 ‘새터(새태)’라고도 하는 작은 각단이다. 유음곡 북쪽 약 550미터 지점에 있다. 마을이 조성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1912년 8가구 살고 있었다. 해방 후 공비들 때문에 지름골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확장되었다. 현재 16가구 정도 살고 있다. 한때 유곡동의 중심 마을이었다. 해방 후 지름골과 신기 사이 618번지 일대 논을 매립하여 저수지를 축조하고 유곡지라 명명하였다. 이 저수지 서쪽 산속에 도솔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도 있다.
▲ 숲밑
▲ 숲밑 마을 터 전경
숲밑은 새태에서 북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회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숲밑이라 불렀다. 1912년 당시 8가구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논밭으로 바뀌었다.
▲ 새만당
▲ 새만당 전경
유곡 제일 북쪽 내동과 접한 각단이다. 고갯마루에 마을을 새로 개척하여 마루의 경상도 발음인 ‘만딩이’에 ‘새’를 붙여 ‘새만당’이라 불렀다. 원래 내동에 속한 각단이었으나 1911년 마을을 통폐합할 때 유곡동에 편입되었다. 1912년 당시 6가구 정도 살았고, 해방 후 유음곡리와 내동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을이 확장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단성현감을 역임한 밀양박씨 박울을 배향하는 재실인 율수재와 마을회관도 이곳에 있다.

▲ 유곡동 지명 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산과 골짜기, 들판
▲ 유곡 골짜기
유곡동은 남북으로 긴 골짜기 사이에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골짜기와 고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고개로는 유곡 안산에서 여천으로 넘어가는 안산고개, 유곡 서쪽에서 평산동으로 넘어가는 응고개가 있다. 골짜기는 유곡 제일 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고란골과 유곡 뒤(남쪽)에 있는 딧골, 딧골 남쪽에 있는 남산골, 남산골 북쪽에 있는 덕골, 유곡 서쪽에 있는 대방골, 서북쪽에 있는 서낫골 등이 있었다.
골짜기가 깊어 들은 별로 없는데, 숲밑마을 남쪽에 있는 숲들, 덕골 북쪽 큰밭에 둑이 있어서 붙여진 큰밭둑 정도가 있었다. 그리고 유음곡 마을 앞 동쪽에 있는 안산(남산), 유음곡 제일 안쪽 봉우리가 감투처럼 생겨서 붙여진 감태봉 또는 텃기만댕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이외 벼락을 맞았다는 배락방우와 불을 켜고 소원을 빌었다는 불썬방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 저수지
▲ 신제지
현재 유곡동에는 신제지, 유음곡지, 지름골못, 명신지, 유곡지 등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있다. 신제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도 등재되어 있어 적어도 15세기 이전에 축조한 오래된 저수지다. 원래 내동과 남방의 옛 이름인 아방동[앞방골]에 속했는데, 1911년 마을 구획 정리 때 유곡동에 편입되었다. 이 저수지 서남쪽 등성이에 큰 묘지가 있는데, 조선 초 대학자 서거정의 조상이 묻혀 있어 옛날부터 거정대라 불렀다(대구서씨 거정대에 관한 이야기는 남방·내동 편 참고). 이 거정대 아래에는 고려 공민왕 때 단성현감을 역임한 밀양박씨 박울의 묘가 있는데, 족보에는 이 신제지를 아질방제(阿叱坊堤)라 기록하였다. 아질방은 우리말 ‘앞방’으로 읽으면 된다.
유음곡지는 자인현읍지나 기타 자료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1911)』에서 처음 등재된 저수지다. 이 저수지는 유곡동 본 마을이었던 유음곡리 바로 앞 221번지에 있었다. 현재 많이 축소되어 웅덩이 규모로 남아 있는데, 곧 매립될 것으로 보인다.
▲ 지름골못
지름골못 또한 『조선지지자료』에 처음 등재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유음곡리 제일 남쪽 골짜기 265번지 옛날 신림사가 있던 곳에 있다.
▲ 명신지
▲ 유곡지
이외 유곡리 291번지 명신지, 618번지 유곡지는 일제시대 이후에 조성되어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저수지다.
◆ 갈용음수형의 명당 거정대에 얽힌 서씨·박씨 문중의 사연과 대구서씨 자운재와 밀양박씨 율수재
▲ 거정대 전경
▲ 갈용음수형의 거정대
유곡동 서북쪽 신제지와 접한 능선에는 거창한 묘지가 있다. 조선 초기 대학자 서거정의 증조부 서익진과 조부모의 묘가 있는데, 이곳을 서거정의 윗대 묘가 있어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거정대라 하였다. 그리고 이 묘지 제일 아래쪽에는 성씨가 다른 묘가 있다. 바로 고려 공민왕 때 단성현감을 역임한 밀양박씨 모고당 박울과 모친 옥산전씨의 묘이다. 박울(1365∼?)은 대사헌을 지낸 박해(1347∼?)의 아들이다. 박해는 청주 계림촌에 살다가 경산현 서면 위마리(현 매호동)로 이거하였다. 그 후 후손들은 자인현 유곡으로 이거하였는데, 여기에 있던 신제지 안쪽 등성이 아래에 옥선전씨와 박울의 묘소를 마련했다. 모자가 이곳에 묻히기 전 위쪽에는 이미 서씨의 분묘가 있었다. 당시에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서씨들이 이곳을 잘 찾지 않자 누군가 서씨의 묘 상석을 뽑아 한쪽으로 치웠다. 그러자 후손 서원리가 1656년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묘소를 찾아 다시 비를 세웠으나, 그가 다른 곳으로 이임하자 또 비석을 뽑아버렸다. 서씨문중에서는 박씨문중 사람들이 치웠다고 전한다(「대구서씨양세묘단비」). 이후 서씨문중에서는 묘의 선후관계를 알 수 없어 대구 공산에 살던 서종화가 1754년 이곳을 찾아 묘소를 단장하고 산소 아래쪽에 제단과 비를 설치하였다. 지금 있는 제단과 비는 이때 설치한 것이다. 상석을 뽑은 사연은 양쪽 문중의 얘기를 다 들어봐야 알 수 있을 텐데, 세월이 워낙 흘러버려 밝혀내기도 쉽지 않고, 그래봐야 의미도 없다. 지금도 그때 뽑힌 상석이 묘지 주변에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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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용음수형의 거정대(사진:구글어스)
이곳에 이런 기막힌 사연이 전하는 이유는 거정대가 삼성산 자락이 마치 용처럼 내려와 신제지의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朝鮮の風水(조선의 풍수)』에도 이곳을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이라 하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래서 300년 전 남산면 사월동에 사는 박씨의 조상이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여 후손들이 번창하고 출세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 율수재와 자운재

▲ 과거와 현재의 율수재
유곡동에 있는 율수재는 바로 이 거정대에 묻힌 박울과 모친 옥산전씨를 배향하는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지붕이고, 왼쪽 1칸, 오른쪽 2칸의 방을 두고, 마루 처마에 율수재 현판을 달아 놓았다. 1920년대 지었고, 1966년 후손 박용진이 쓴 중수기문이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기존 재실이 낡아 허물고 양옥집으로 재건축하였다.

▲ 과거와 현재의 자운재

▲ 자운재 현판
한편, 길 하나를 두고 맞은편 내동에 대구서씨의 재실 자운재(문중에서는 梓를 ‘자’로 발음)가 있다. 당호는 서거정의 시 ‘푸른 가래나무엔 묵은 구름이 끼었을 텐데’에서 따왔다. 현재 건물은 2003년 중수했다. 대문은 3칸의 맞배지붕이고,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역시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대청마루에는 문을 달아 놓았다. ‘자운재’ 현판과 1897년 서정옥이 쓴 「자운재상량문」, 서상우가 쓴 「자운재기」가 있다.
이처럼 유곡동에 가면 거정대와 신제지, 재실을 꼭 한 번 찾아서 두 문중에 얽힌 이야기를 상기해 보기 바란다.
◆ 에필로그
글을 마치니 어릴 적, 아니 최근까지도 우리나라에 전하는 황당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정기를 꺾기 위하여 전국의 명산과 명당을 돌아다니며 쇠말뚝을 꽂고, 산허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일제의 잔혹함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나라를 빼앗긴 무능력에 대한 정신적 보상으로 삼았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한국은 참 좋은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 일제의 탓으로 돌리는 만능열쇠이다. 이 만능열쇠만 있으면 조선왕조의 무능함도, 현재 우리의 문제점도 다 해결할 수 있다. 더 황당한 것은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일제가 꽂은 쇠말뚝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나라가 온통 시끄러웠다. 방송국과 전문가들은 전국에 있는 쇠말뚝을 뽑는 퍼포먼스를 하고, 독립기념관에서는 쇠말뚝을 전시하면서 일제의 만행이라고 선전했다. 그런데, 이 쇠말뚝은 사실 1910년 3월 대한제국 토지조사국에서 전국의 지형을 측량할 때 삼각측량을 위해 산꼭대기에 꽂은 것이었다. 대한제국이 시작한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계승하여 1918년까지 진행하였다. 그 결과 단군 이래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조선 전체의 지형 지도가 탄생하고, 논밭과 대지의 지적도가 만들어졌다(식량 수탈 목적도 있음).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사용하는 모든 지적도는 이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독립기념관은 쇠말뚝을 전시장에서 슬그머니 철거하려다 일본 NHK 방송국 기자에게 들키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최근 개봉한 영화 ‘파묘’도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를 근거로 제작한 정말 황당한 영화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일제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만능열쇠를 쥐고 있는 한 우리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쇠말뚝과 관련한 상세한 이야기는 아래 블로그를 참고하기 바란다.
블로그 주소 - (https://blog.naver.com/quixcha/223155600780)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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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