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6 오전 10:27:16
▲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와 농장이 있던 진못 뒤 들판 일대
신천동 진못 안 깐치밭골은 근대문화의 흔적이 있는 특별한 곳이다. 신천동 마을과는 경산 자인 간 도로로 분리되어 다른 마을처럼 인식되지만, 옛날에는 신천동 주민들의 논과 밭이 있어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대한제국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산에서 자인으로 가는 도로는 신천동 마을 뒤와 용어더미 사이에 있는 시냇가 길이었다. 이 길로 한양에서 부임하는 현감이 지나갔고, 과거시험을 보러 자인현 선비들이 지나다가 붕디미주막에 들러 한 잔의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 1910년대 일제가 현 남성초등학교와 용어더미 뒤 진못 옆으로 경산 자인 간 신작로를 내는 바람에 신천동은 도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작로로 일제시대 경상북도농도훈련소가 들어왔고, 이 농도훈련소의 영향으로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6·25 전쟁 중에는 미국의 메노나이트 선교사가 들어와 수많은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대상으로 직업 교육을 하면서 농촌진흥운동을 하였다. 또 이들이 떠난 후 계명대학교 실습농장이 들어섰고, 동시에 장애우 시설 성락원이 들어왔다. 신천동을 방문하면 앞서 연재한 수운 선생의 기이한 현상이 발현된 붕디미주막 터와 진못을 보고 난 뒤, 차를 타고 성락원과 메노나이트직업학교 터를 한 번 둘러보면 우리가 얼마나 근·현대 문화에 대해 무관심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 깐치밭골
▲ 깐치밭골 일대
깐치밭골은 흔히 깐밭골로 부른다. 진못에서 서북쪽으로 마치 까치 발자국처럼 길게 골짜기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신천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곳을 깐치밭골이라 불렀다. 진못으로 알려진 니지(泥池)는 이 깐치밭골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모아 두었다가 남방의 넓은 들판으로 공급해 주는 신천동의 중요한 저수지다. 깐치밭골 일대는 옛날 압독국의 영역이었고, 압독국이 신라에 복속된 뒤 압독주 군주가 된 김유신 장군이 군사 주둔지를 만들고 넓은 압량 들판에 말을 타고 훈련하던 마사리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 깐치밭골은 천수백 년 동안 잊힌 곳이 되었다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일제시대였다.
◆ 경상북도농도훈련소
▲ 경상북도 농도훈련소가 있던 곳
현재 진못 서북쪽 깐치밭골 제일 안쪽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다 쓰러져 가는 집이 몇 채 있다. 여기에 집이 생긴 시기는 일제시대였다. 일제는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1930년대부터 전국 각 지역에 농민훈련소를 설치하여 조선인들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쳐 배출하는 일종의 단기 훈련소를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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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경상북도 농도훈련소(신천동)
경상북도에는 압량의 ‘경상북도농도훈련소(이하 농도훈련소)’가 본부이고, 그 아래 문경군 문경면의 ‘문경갱생농원’·‘신북갱생농원’, 문경군 호서남면에 ‘호서남갱생농원’, 경주읍에 ‘경주농촌부인강습소’, 예천면에 ‘예천농촌부인강습소’ 등이 소속되었다. 이중 압량면 신천동 깐치밭골 제일 안쪽에 설립한 농도훈련소(農道訓練所)의 규모가 제일 크면서 중심 역할을 했다. 이때가 1936년 5월 19일이다.

▲ 경상북도 농도훈련소 산하 농원
이 농도훈련소의 설치 목적은 “농촌의 우량 청년을 선발 입소시켜 황국 농민의 이상과 신념을 깨우쳐 합리적인 영농 실습 체험과 농촌 부락 경영의 현장 훈련을 통해 견실한 인물을 양성하여 농촌진흥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입학 자격자는 소학교 또는 간이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2년 이상 종사한 청년들이고, 장기생 608명은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단기생 1,206명은 1월에서 3월까지 2기를 운용하면서 각 1개월씩 교육하였다. 1936년 당시 장기생 608명만 입소했다. 여기에 입소한 수련생은 반드시 기숙사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전국의 훈련소는 그 지역의 보통학교 교원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소장은 압량보통학교 교장 토미타 산지로(富田三次郞)가 겸임했다. 소장 밑 보도(輔導)는 압량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일본인 키타무라 타카시(喜多村隆)와 조선인 훈도 장용조(張龍祚)가 맡았다.
농도훈련소의 부지는 3,600평이었다. 여기에 도장 겸 식당 1동, 농사 12동, 작업실 겸 수납사 2동, 욕장 1동, 소장 주택 1동, 교원 주택 2동, 조수 주택 1동, 부속건물 16동 등을 지어 놓았다. 이외 학교가 소유한 실습장은 논이 25,738평, 밭 9,969평, 과수원 1,750평, 임야 24,140평, 저수지 663평 등 총 65,860평이었다. 현재 경산 자인 간 도로변 입구에서 깐치밭골까지 진못 안 전체가 농도훈련소였다.(이상 『農山漁村に於ける中堅人物養成施設の槪要(1936)』 참고)
◆ 새마을운동의 모티브가 된 경상북도농도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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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갱생농원 전경(1936)
재미있는 것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농도훈련소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직·간접적 영향을 준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주도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농촌진흥운동이었다. 이 기발한 정책을 박정희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그곳은 바로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관리하던 문경갱생농원과 신북갱생농원이었다. 신천동 농도훈련소의 하위 농장인 문경갱생농원의 지도원이 당시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부임해 온 박정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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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원 사진(앞줄 가운데 아리마 차카요시(有馬近芳) 교장, 뒷줄 왼쪽 끝 박정희(출처:최길성 논문)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이란 일본어 논문을 쓴 인류학자 최길성은 신북갱생농원에서 박정희로부터 농촌진흥기술을 배웠다는 증언자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최길성은 박정희가 여기서 농촌진흥운동의 기본 틀을 배워 이후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최길성, 「セマウル運動と農村振興運動」,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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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갱생농원 학생 국민체조 모습(1936)
어찌 되었든, 경산 신천동에 농도훈련소가 들어선 이유는 이곳의 넓은 토지가 유용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훈련소가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해방 때까지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곳에 농도훈련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우리나라 자료에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이곳을 일본군 주둔지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주장하는지 궁금하다. 흑역사이든 백역사이든 무엇이든지 기록이나 증거물을 남겨 놓아야 할 텐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가 안타깝다.
◆ 경산농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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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농과대학 건물(출처:선교사이야기)
해방 후 이 농도훈련소는 1944년 4월 개교한 대구농업전문학교의 후신으로 1946년 학교명을 바꾼 대구농과대학 경산 실습장이 되었다. 이후 대구농과대학은 1951년 경북대학교가 개교하면서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이 되었다. 이에 따라 농도훈련소도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경산실습장이 되었는데, 그냥 ‘경산농과대학’이라 불렀다. 경산농과대학이라 불린 시기는 1946∼1953년까지다.
◆ 메노나이트직업학교(MVS) 및 농장
▲ 메노나이트
메노나이트는 종교개혁 시기에 나타난 개신교 교단이다.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근원적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대표자가 바로 메노 시몬스였다. 그래서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을 메노나이트(Monites)라 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세례파(anabapist)라고도 하였다. 특히, 이들은 성서에 기초한 삶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와 선교적 삶을 살았다.
▲ 미국의 메노나이트 선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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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선교 4인 개척자(출처:선교사이야기)
처음 유럽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라 하였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가문도 메노나이트 교도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52.12.06.). 이러한 미국 메노나이트 교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고 대구⋅경산 지역에 몰려든 피란민 소식을 듣고, 1951년 보도듣도 못한 한국에 왔다. 이때 활동한 선교사는 데일 A. 네블, 달라스 C. 보란, 데일 A. 위버, 어네스트 D. 레이버 등 4명이었는데, 이들을 메노나이트 한국 선교 4인 개척자라 부른다. 이들이 처음 본부를 둔 곳은 대구 동산기독병원 선교사 사택이었다. 또 활동한 지역도 대구 상동·신천동·대명동과 인근 화원, 성주 등에 무료 급식소를 마련하고 피란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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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노나이트로 들어가는 입구 장승(1959, 출처:M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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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노나이트 직업학교(1955, 출처:MCC)
그러다가 1953년 5월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경산실습장(구 경상북도농도훈련소) 78에이커(95,000여 평)에 있던 건물 27채, 건물이 있던 47에이커(57,000여 평)를 유엔한국재건단(UNKRT)의 후원으로 매입하였다. 그리고 주변 논밭 31에이커(38,000여 평)는 한국 정부로부터 임대했다. 여기에 메노나이트직업학교(MVS)를 설립하고 이사로 위버 선교사, 경북도지사, 경북의회의장, 경북대총장, 사회사업가협회장, 동산기독병원부원장, 콜스 선교사 등 8명으로 구성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직업학교 개교와 관련 있는 인물이었다.
▲ 메노나이트 직업학교가 있던 곳과 저수지
▲ 메노나이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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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노나이트 직업고등학교(MVHS) 제1회 졸업식(1959, 출처:MCC)
경산 신천동에 둥지를 튼 메노나이트는 구제사업, 직업학교, 전쟁미망인 지원, 농촌진흥 등의 사업을 펼쳤다. 특히 직업학교(MVS)에서는 전쟁고아를 입소시켜 목공, 금속, 농업 등의 기술을 가르치고, 미망인들에게는 재봉 기술 등을 가르쳐 그들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누리도록 하였다. 메노나이트직업중학교는 1956년, 고등학교는 1959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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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음리 여성 4H클럽 회원들(출처:MCC)
메노나이트 신자들의 특징은 농축산업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랜 박해를 피해 유럽 산간벽지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윤작제를 실시하고, ‘몽벨리아르’라는 젖소 개량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1970년대 미국의 메노나이트 신자들은 약 25만 명 정도였는데, 이들도 대부분 시골에 살았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시골 출신이어서 농축 분야에 상당한 기술을 가졌다고 한다(동아일보. 1972.6.23.). 그래서, 메노나이트직업학교가 있는 신천동 주변 갑제, 당음, 부적 등 압량 지역 마을을 대상으로 4H 및 농민회를 조직하여 위생 교육, 우물 파기, 기계를 이용한 신농법 등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메노나이트중앙본부(MCC)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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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CC 근로자들의 당음리 4H 활동(1962, 출처:M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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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근 씨가 당음리 펌프를 설치한 후 설명하는 모습/ 외국인은 칼 바르치와 존 주크(1963, 출처:MCC)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들은 일체의 기독교 선교 활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봉사와 농촌 구제 사업만 하였다고 한다. 이 단체가 얼마나 유명했으면 신천동이란 마을을 메노나이트라고 불렀겠는가? 이 단체가 경산 지역에 뿌린 봉사 정신을 경산 사람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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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바느질 프로젝트 수료식(1963, 출처:M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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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제동에서 우물을 파고 살펴보는 MCC 직원과 이동근(1963, 출처:MCC)
이 메노나이트직업학교에는 한때 사람들이 많아서 깐치밭골 능선 곳곳에 숙소와 돼지 농장 등이 들어서서 일종의 독립된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을 다녀간 선교사가 무려 80명이나 되고, 한국인 기독교인들도 이곳을 성지처럼 여겨 봉사활동을 하려고 이곳을 많이 찾았다. 특히, 이들은 전쟁 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곳을 졸업한 학생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어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전 총신대 총장 김인환 박사, 전 고신대 부총장 이상규 목사 등 목회자도 있고, 직업중학교 출신인 스탠리 G. 장은 미국으로 이민가서 캘리포니아 IBM 본채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70년대 독재에 항거하다 몇 차례 투옥된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도 계명대학교 신학과를 나와 이곳에서 잠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선교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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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노나이트 직업학교(1966, 출처:MCC)
그러다가 1971년 메노나이트 단체는 모든 자산과 운영권을 한국인에게 양도하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미망인들을 돕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이 메노나이트 선교사 이야기를 영남신학대학교에서 2021년 『대구 경산에서 사역한 메노나이트 선교사 이야기』란 책으로 출간하였다.
◆ 계명대실습농장
▲ 계명대실습농장 터 전경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에게서 법인을 양도받은 한국인은 사실 계명대학교였다. 계명대학교는 미국 북장로회에서 설립한 대구의 대표적인 기독교 학교였다. 그래서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은 종파는 다르지만 같은 기독교 설립 기관인 계명대학교에 무상으로 운영권을 넘긴 것이다. 이 시설을 양도받은 계명대학교는 ‘계명대실습농장’이라 명칭을 바꾸었다. 그 후 계명전문대가 운영하면서 ‘계명문화대학교실습농장’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다가, 농장을 성주·합천으로 이전하면서 그 일대를 개인에게 매각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80여 년 만에 다시 평범한 농촌의 논밭으로 바뀌게 되고, 메노나이트직업학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혔다. 최근 경산 지역 기독교 대표들로 구성된 (사)경산메노나이트 근대문화 유산보존회가 조직되어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 사회복지법인 성락원
▲ 성락원 전경
이 실습농장 일부에 대구 봉덕동에 있던 사회복지법인 성락원이 1973년 들어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성락원은 1953년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영아 17명으로 운영을 시작하였다(성락원은 메노나이트와는 별개임). 현재 이곳은 전성기 때의 각종 건물은 많이 철거되었지만, 당시 돼지를 키우던 몇몇 건물과 교회 및 직업학교 운동장 터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 메노나이트직업학교 건물

▲ 메노나이트직업학교 건물
◆ 에필로그
조선 500년, 일제 36년,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경산인을 비롯한 한국 서민들은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의 비극적 상황이 세계에 알려지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계인이 동양의 작은 나라를 돕겠다고 이역만리 떨어진 곳으로 왔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번영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고 개구리 된 생각만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대구·경산 지역에 와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20여 년간 전국의 수많은 피란민·전쟁고아·전쟁미망인, 그리고 대구·경산 주민의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노력했던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신천동 메노나이트 유적지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근거 자료 및 그 현장이 남아 있는 곳인데도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다. 게다가 메노나이트직업학교가 들어오기 전 신천동 깐치밭골에 얽힌 일제시대 경상북도농도훈련소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모티브가 된 곳이라는 사연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연이 왜곡되어 전하고 있다.
그나마 현재 경산의 기독교인들이 메노나이트의 역사적·교육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당국은 이 메노나이트 현장이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교만 많이 있다고 경산이 교육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역사적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경산이 문화·교육의 도시로 한 걸음 더 발돋움할 것이다. 신천동 깐치밭골에는 일제시대부터 최근까지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앙코르와트처럼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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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초등학교

▲ 성락보호작업장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정명환 작가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