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6 오전 8:55:09
▲ 점촌동(자인 평산) 전경

▲ 점촌동 행정지도
음식을 채집·생산하여 저장하는 데 필요한 토기(土器)는 인간이 사고력을 지닌 시대부터 있은 중요한 물품이었다. 이것을 생산하는 곳을 흔히 가마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가마를 만들어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고려 때는 장흥고(長興庫)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도기와 자기 등을 진상 받았다. 조선에서도 고려의 장흥고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도기소와 자기소를 지정하고 그릇을 받았다. 어떤 논자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생산 기술이 뛰어났다. 이 용기를 생산하는 장인이 사는 마을을 점촌(店村)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각종 잡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조선이 망하면서 제작이 까다로운 도기소와 자기소는 거의 폐쇄되고, 서민들이 일상생활에 많이 사용하는 옹기 가마가 늘어났다. 그래서 각 지역에 ‘점’자가 들어가는 곳은 거의 옹기를 만들던 가마가 있던 곳이었다. 경산시에 속하는 경산·자인·하양의 곳곳에서도 옹기를 생산하였는데, 현재까지도 ‘점’자가 들어가는 촌락이나 골짜기에는 가마터가 남아 있다. 점촌동은 바로 경산을 대표하는 가마가 있던 마을이었다.
◆ 역사와 유래
점촌동은 옛날 자인현 서면 남방동 점골이었다. 19세기 중반 경산현 동면 동을산리(평산) 들미라 부르던 마을 가운데 양지길을 기준으로 동쪽은 자인현 서면 서초동 평산리, 서쪽은 경산현 동면 평산동으로 분리되었다. 그래서 점골도 자인현 평산동에 편입되었다. 1871년 발간된 『자인현지』에서는 평산리가 없다가 1888년 『자인총쇄록』부터 평산이 자인현의 관할 구역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들미라 부르던 각단은 자인군 서면 평산동으로, 점골이라 부르던 각단은 자인군 서면 점촌동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자인 평산동과 점촌동은 다시 자인군 서면 평산동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압량면이 생기면서 이번에는 두 마을이 점촌동으로 바뀐 후 압량면 점촌동이 되었다. 1987년 경산읍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부터 경산시 점촌동이 되었다.

▲ 1911년 점촌동 지적도
점촌동은 자인평산이라 부르던 들미마을, 점골이라 부르던 점촌, 뱅이골이라 부르던 백안동마을, 붕디미라 부르던 휴원마을 등 4개의 크고 작은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 들미·자인평산
▲ 점촌동(들미마을) 전경
들미마을은 원래 경산현 동면 동을산리였다. 동을산리가 평산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후기 양지길을 기준으로 동쪽 마을이 자인현에 편입되어 자인현 서면 서초동 평산리라 하였다. 흔히 경산평산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인평산이라 불렀다. 이 각단은 점촌동에서 가장 큰 각단인데, 1888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순시를 하였을 때 22가구가 살았고, 리정 즉 마을 대표는 안택문(安宅文)이었다. 1911년 토지조사 때는 42가구로 늘어났다. 현재 약 67가구가 살고 있고, 대구한의대생을 대상으로 한 원룸도 들어와 있다. 일제 때 경산경찰서 평산지서가 평산동 에 있던 코발트광산 징용자들을 감시하였다가 해방 후 철거했다. 또한 이 마을 남쪽 244번지 일대 고려시대 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 점곡·점촌·점골
▲ 점골마을 전경
점골·점곡 등으로 부르던 점촌은 들미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약 6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점촌동의 마을 이름이 유래된 각단이다. 이곳을 점곡·점골·점촌이라 부른 이유는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평산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는데, 1895년 자인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점촌동이라는 정식 행정구역이 되었다. 이곳에서 옹기를 굽던 시기는 180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후 옹기 굽는 가마가 점차 늘어나 1909년에는 15개로 늘어났다. 1911년 약 30가구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22가구 정도 살고 있다. 최근 북서쪽으로 삼성현 도로가 개통되면서 각종 중장비로 뒷산을 깎아서 커피숍과 공장 등이 들어서고 있다.
▲ 붕디미·휴원
▲ 붕디미마을 전경
붕디미마을은 점골에서 서북쪽 방향 평산1동 선돌배기 마을 동북쪽에 있다. 절벽이 절경이었다. 부엉이가 많이 살아서 부엉디미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붕디미’가 되었다. 이 바위 절벽 부근 31∼44번지 일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을 붕디미마을이라 하였다. 마을 앞 도로가 서쪽 경산에서 동쪽 남방리 쪽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옛날 자인 현감들이 이 길로 부임하여 일명 현감길이라고 하였다. 1888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이 길을 가면서 이곳을 한자로 부엉이 ‘휴’자를 써서 휴원(?原)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1911년 당시 이곳에 3가구, 서쪽 선돌배기 쪽 42번지 일대에 5가구가 살았다. 현재는 신천 쪽에 약 10가구, 안쪽 매촛골에도 집이 들어서서 몇 가구 살고 있다. 붕디미 쪽에는 약 7가구 정도 살고 있다. 옛날에는 붕디미라 불러서 하나의 각단으로 인식되었는데, 현재는 붕디미 사이로 왕복 6차선 삼성현로가 뚫리는 바람에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래서 붕디미는 선돌배기와 합쳐져서 평산1동과 맞붙어 있다. 옛날 이 마을 51번지에 붕디미(부응디미)주막이 있었는데, 수운 최제우 선생이 대구에서 참형을 당한 후 그 시신이 3일간 머물면서 믿지 못할 일이 발현되기도 하였다(신천동 편 참조).
▲ 뱅이골·백안동
▲ 뱅이골마을 전경
▲ 선광사 젼경
뱅이골로 부르는 백안동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골짜기는 평산지 남쪽 바로 위에 있다. 평산지에서 오른쪽은 뱅이골이고, 왼쪽이 챈빗골이다. 이곳에 조선 후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흔히 뱅이골 마을 또는 백안동이라 한다. 큰 바위가 많았다고 한다. 1911년 5가구가 살고 있었다. 현재는 선광사라는 절과 전원주택이 몇 채 들어서 있고, 나머지는 과수원으로 바뀌었다.

▲ 점촌동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저수지
▲ 점곡지 전경
▲ 점곡지 전경
▲ 평산지 전경
저수지는 조선 후기까지 들미마을 남쪽 백안골 입구 248, 239번지에 2개 있었다. 작아서 이름도 없었는데, 현재는 매립되어 밭이 되었다. 일제시대 이후 점골 원당골에 점곡지(선창못)가 축조되었고, 점촌동 남쪽 뱅이골에 1990년대 평산지(점촌지)가 축조되어 현재 2개의 저수지가 있다. 평산지는 행정구역상 점촌에 속하는데 이름은 평산지라 부른다.
▲ 산과 골짜기
▲ 붕디미
점촌동은 남쪽 백자산 북쪽에 위치하다 보니 산과 등성이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찬새밋골 서쪽 양지에 내원암이 있다 하여 붙여진 내원양재, 남쪽 절골 앞에 있는 산으로 너구리가 많아서 붙여진 너구리지미, 새밋등 남쪽의 동산, 줄밋등 남쪽 둥그렇게 생겼다 하여 두리봉, 신솔방 남쪽의 새밋등, 선디미의 음달에 있어서 선듬음달, 봉우리가 바위더미로 되어서 선디미, 선디미 북쪽 소나무가 많아서 신솔방 등이 대표적이다.
▲ 대구한의대학교 전경
그런데 이러한 산들도 남쪽에 있는 것들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모두 훼손되거나 깎여 버렸다. 이렇게 산이 많다 보니 나무도 많아서 옹기 가마를 만들기에 적절한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삼국시대부터 최근까지 이곳에 경산을 대표하는 가마가 자리할 수 있었다.
◆ 경산을 대표하던 가마터가 있던 점골
▲ 경산지역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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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 장흥고 자기(청사기인화문대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산에는 멀리는 삼국시대부터 가까이는 1970년대까지 기와와 각종 토기를 생산하였다. 그 흔적이 현재 지명이나 가마터로 남아 있다. 삼국시대 가마터는 경산시 중산동, 경산시 점촌동의 점곡, 하양읍 사기리가 대표적이다. 고려시대 가마터는 하양읍 대곡리(웃한실), 와촌면 음양리, 경산시 점촌동(자인 평산) 등이다. 조선시대 가마터는 고산 대흥동(내곶⋅노변) 점태골, 남산면 조곡리의 조점리, 남산면 전지리의 점말리, 남산면 평기2리의 새점골, 남산면 경리의 점골, 남천면 산전리의 조조골(모골), 안심면 율하리의 율역촌, 와촌면 대동리의 점마, 용성면 부제리, 용성면 매남리의 독곡(사근달), 용성면 대종리의 점비알, 하양읍 남하리의 점등, 하양읍 은호리의 점골 등이다. 이 중 남천면 산전리 가마는 자기소라 하여 장흥고라는 중앙 관청에 자기를 진상하였고, 안심 율하리와 하양 대곡리 가마는 도기소라 하여 역시 장흥고에 진상하였다(경상도속찬지리지). 산전리 자기소는 조선 후기까지 생산하였고, 율하리와 대곡리 도기소는 조선 초기 폐철되었다. 20세기까지 생산이 지속된 곳은 남산면 조곡리의 조점리와 경산시 점촌동의 점골이었고, 나머지는 소규모로 옹기를 생산하였다. 지금까지 필자가 조사한 경산의 가마터는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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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시 가마터 알림표
▲ 점촌동 삼국·고려시대 가마터
▲ 들미마을 가마터 일대
▲ 들미마을 가마터 일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십 곳에 이르던 가마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점차 폐쇄되었고, 20세기까지 존재한 곳은 남산면 조곡리의 조점리 가마와 경산시 점촌동 점곡 가마였다. 남산 조점리 가마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옹기를 비롯한 각종 토기를 생산했지만, 점촌동 가마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 흔적이 점촌동 35-1번지 가마터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점촌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가마터도 있었다. 이곳은 점촌동 244번지 일대인데, 그동안 밭이었다가 2010년 삼성현로가 개통되면서 가마터가 드러났다. 한빛문화재단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 총 3기의 기와 가마터와 150여 점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시료 조사 결과 빠르게는 1150년(고려 의종)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점촌동 가마터 신림사 영문 와편
특히, 이곳에서는 ‘신림사(新林寺)’라 새겨진 암막새 조각과 ‘신수사(新數寺)’라 새겨진 암키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사찰 건축에 사용되던 기와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가마터였던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점촌동 35-1번지 가마터는 방치되어 있고, 244번지 기와 가마터는 삼성현로 아스팔트 도로 밑으로 사라졌다. 참고로 신림사는 유곡 골짜기에 있던 사찰로 원효가 창건하여 신라 때 초개사, 고려 때 금당사, 조선 때 신림사 등으로 개칭해 왔는데, 조선 후기 폐사되었다. 2007년부터 그 주변에 초개사라 칭하는 작은 사찰이 창건되어 원효의 초개사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신림사 터를 이곳에서 약 동남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점촌동 168번지 일대 절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인현읍지』를 읽어보면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1.75km 떨어진 유곡동 골짜기에 신림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굴 조사를 해보면 논란은 종식될 것이다.
▲ 점촌동 조선시대 옹기 가마터
▲ 점촌마을 가마터 일대
조선시대 점촌동 옹기 가마는 점촌동 70∼80번지 일대에 있었다. 현재 발굴된 곳은 79번지 한 곳이지만 점곡·점골이라 불릴 정도로 마을 전체에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 이곳에서 옹기가 생산된 시기는 19세기 중반부터였다. 처음 어떤 사람이 점골 언덕에서 화로를 만든 것이 옹기 가마의 모태였다. 그 후 이 마을 일대에 옹기를 굽는 가마가 한두 개씩 늘어나 마을 전체가 가마로 가득 찼다. 190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마 수는 15개, 전문 직공은 5명, 생산액은 당시 화폐로 1,500원이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생산 제품은 항아리, 시루, 동이, 물병, 장주발 등이었다. 이 제품은 주로 자인·경산·대구·청도 등지에 판매되었다(『관립공업전습소보고(1909)』). 그 후 일제시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 여기서 옹기를 생산했다. 필자도 어릴 적 항아리를 사러 가는 모친을 따라 이곳에 와 본 적 있었다. 당시 신천동 도로변에 있던 논 전체가 항아리로 가득 쌓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옹기를 만드는 재료는 이곳의 흙을 사용하지 않고 자인면 남촌리에서 가져왔다. 남촌리에는 지금은 과수원으로 바뀌었지만 흙을 채취하던 ‘옹결구딩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촌리 주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이 옹결구딩이에서 흙을 채취하여 점촌과 조곡의 가마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 후 1970년대부터는 흙은 안강·영천·창원 등지에서 가져왔고, 땔감으로 벙커C유를 사용했다. 실제로 점촌동 79번지 발굴 조사 결과 벙커C유를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대개 2개월에 한 번씩 옹기를 구웠는데, 처음 한 달은 옹기를 만들고 나머지 한 달은 옹기를 가마에 넣고 불을 때는 기간이었다. 한 가마에 연간 5,000개 정도의 옹기가 생산되었다.
◆ 에필로그
남천면 산전리 가마터(경산산전동분청사기요지)가 지배자들이 이용하던 자기소였던 반면, 점촌동은 삼국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민들이 사용하던 옹기나 기와를 구워 주변 지역에 보급하던 경산의 대표 가마가 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나이 많은 주민의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뿌리를 알 수 없는 유적지까지 왜곡해 가면서 문화 공간을 조성하는데, 경산은 존재하는 문화 유적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오로지 땅을 파헤쳐 공단과 아파트를 짓는 등 개발에만 몰두하고 있다. 점촌동을 방문하면 점골에 한 번 들러서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점골 안쪽 점곡지에도 가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 개발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발과 보존은 상보적이어야 한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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