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9 오전 9:33:10

▲ 상대리 전경

▲ 상대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상대리는 임진왜란 전까지 경주부 자인현 남면 대사동 대사리였다. 당시 대사동에는 대사리, 유등천리가 속해 있었다.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던 1637년 초대 현감 임선백과 자인현 선비들이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이때 대사리는 상대사리, 남천리, 하대사리로, 유등천리는 유등천리(여천)와 유곡리로 나뉘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뀐 뒤 상대사리는 자인현 하남면 상대동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행정단위를 통폐합하면서 남산면을 새로 만들 때 경산군 남산면 상대동이 되었다. 해방 후 상대동으로 유지되면서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상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912년 상대리 지적도

▲ 대첫골 전경
▲대사리·상대사리·상대리
상대리(上大里)는 대첫골이라 부르는 깊은 골짜기 안에 동쪽으로 개울을 끼고 주거지가 길게 펼쳐져 있다. 마을 이름은 근처에 금당사라는 큰 절이 있어 대첫골이라 하고, 한자로 대사리(大寺里)로 적었다. 금당사(金堂寺)는 신라 때 원효가 창건한 초개사(初開寺)였고, 고려 때 금당사로 개칭하였다. 이 금당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20년경 승 백양이 중건하여 신림사(新林寺)라 하였다. 그러다가 1832∼1888년 사이 폐사되었다. 신림사가 있던 곳은 지금의 유곡동 유음곡리(지름골) 골짜기 안인데, 당시에는 이곳도 대사동의 영역이었다. 이 마을은 1580년경 이정민이란 사람이 처음 개척했다고 알려졌지만, 그 이전부터 마을이 존재했으며 대사동이라 부른 자료가 있다(『경주이씨양월문중고문서』).
▲ 새터 전경
대첫골에는 상대리 마을 서쪽 당산 기슭에 4개의 각단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1912년 마을 입구 영모재가 있는 각단에 약 10가구, 상대온천관광호텔이 있는 두 번째 각단에 15가구, 추모재가 있는 세 번째 각단에 약 10가구, 제일 위쪽 네 번째 각단에 13가구 정도 살았다. 1982년 온천이 개발되면서 첫 번째 각단은 주차장으로, 두 번째 각단은 관광호텔 부지로 수용되면서 사람들은 하대리 쪽으로 이거하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뱀골
▲ 뱀골과 상대공단 전경
상대리 서북쪽에 모양이 뱀처럼 생겨 뱀골(백양)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 동쪽 기슭에 1912년 3가구가 있었다. 이 촌락을 뱀골에 있다고 하여 뱀골이라 불렀다. 조선 중기 홍씨라는 노인이 개척하였다고 한다. 현재 상대공단이 자리하고 있다.
◆ 삶의 터전

▲ 상대리 지명지도
▲산·골·재, 들판
▲ 삼성산과 다랑골산
상대리는 남쪽 삼성산과 다랑골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북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 안에 있다. 마을 주변에는 당산제를 지내던 상대 서쪽의 당산, 성지등 남쪽에 있는 방밭갓, 서나무등 동쪽 나무를 베어 못을 수축하였다고 해서 못갓 등의 산이 있다. 남천면 고로곡(高老谷)으로 넘어가는 고로산의 고리실재는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외 반곡동으로 넘어가는 별방곡과 앞방디기, 여천동으로 넘어가는 송고개 등의 고개가 있다.
▲ 한박등
산등성이는 군암등, 화전밭이 있던 군암팥등, 모양이 나비처럼 생긴 나부등, 지형이 넓적한 넙덕등, 베를 짜는 기구인 들말 모양의 들말등, 잔디가 많았던 땟잔등, 모양이 매처럼 생긴 매말등, 불이 나서 나무가 모두 탔다는 불탄등, 서어나무가 많던 서나무등, 큰 소나무가 있던 솔백등, 잣나무가 많았던 잣밭등, 모양이 길다고 하여 진등, 모양이 큰 박처럼 생긴 한박등[대박곡(大朴谷)] 등이 있다. 또 지형이 뱀처럼 생겼다 하여 뱀골(백양곡), 뱀골 서쪽 닥나무가 많던 딱밭골, 불탄등 남쪽 지형이 풀무처럼 생긴 부뭇골, 부뭇골 남쪽에 깊은 샘이 있어 새미등굼, 당산 서쪽 지형이 솔아서(좁아서) 송골 등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 상대리 들판
들판은 일명 안못 밑에 있는 안못밑들, 건내못(외지) 밑에 있는 사지들, 사지들 밑에 있는 상대들, 상대들 아래 백양지 근처 백양들 등이 있다. 논은 건내못 밑에 모양이 탕관처럼 생겨서 탕관배미, 탕관배미 동북쪽에 샘이 있어 샘배미, 샘배미 동쪽에 있는 굼논, 모양이 둥그렇게 생겨 두룽배미, 상대 가운데에 있는 둠벙새미논, 찬 샘이 있던 참새미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경지정리로 거의 잊힌 상태다.
▲ 저수지
조선시대까지 상대리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7개 있었고, 1911년 마을 구획이 바뀌면서 하대리에 있던 백양지(하대사제)가 상대리로 편입되면서 1970년대까지 8개의 저수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중 송곡지 위 186번지에 있던 송곡지윗못, 동쪽 반곡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362번지에 있던 뒷골못, 마을 뒤 당산 573번지에 있던 당산윗못, 576번지에 있던 당산아랫못 등은 모두 매립된 상태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내지(상대사지), 외지(상대사신지), 송곡지, 백양지 등 4개다.
▲ 내지(상대사지) 전경
내지(內池)는 ‘안못’이라고 부르는데, 마을 제일 남쪽 766번지 골짜기에 있다. 이 저수지는 15세기 이전에 축조되어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서림제(西林堤)라고 등재되어 있다. 17세기 마을 이름이 상대사리로 바뀌면서 『여지도서(1765)』에서 상대사동제로 등재되었다가 19세기 말부터 안못 또는 내지로 부르고 있다.
▲ 외지(상대사신지) 전경
외지(外池)는 마을 바로 앞 동쪽에 새로 축조하여 신제(새못) 또는 건내못이라 불렀는데, 자료에는 상대사신제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신제는 『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있어 15∼1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1)』에는 내지와 외지를 합하여 내외지(內外池)로 등재되어 있다.
▲ 송골과 송곡지 전경
송골에 있는 송곡지(松谷池) 또한 『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있어 최소 400년이 넘었다. 이 저수지는 처음 두응동제(頭應洞堤)라 불렀다. 송골 주변에 모양이 둥근 등성이인 한박등이 있어 그 서쪽 골짜기를 두응골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까지 두응동제라 한 것으로 보아 20세기 들어서 송곡지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자처럼 소나무가 많은 골짜기가 아니라 지형이 좁아서 ‘솔다’의 ‘솔’이 ‘송’으로 변해서 송골이라 하였고, 거기에 있는 못이라서 송골지라 했다.
▲ 뱀골과 백양지 전경
상대리 제일 북쪽 뱀골 어귀에 있는 백양지(白楊池)는 처음 하대사리에 속했다. 그래서 이름도 하대사동제였다. 1911년 동리 구획 변경 때 상대리에 포함되었다. 이 또한 『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있어 최소 400년이 넘었다. 축조 당시 백양나무가 많아서 백양지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민간어원설이다. 사실은 뱀골(백양곡)에 있는 못이라서 ‘배암못’으로 불렀는데 ‘배암’이 한자 ‘백양’으로 기록되면서 ‘백양지’가 되었다. 이는 경산 사동이 처음 뱀골(배암골)로 부르다가 백양동으로 기록된 것과 같다. 하대사동제가 백양지로 바뀐 것은 20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 후손 교육의 사랑이 서린 서당 유연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 신목

▲ 새칭숲과 할배나무
마을 앞 동남쪽 나부등산에서 내려온 물이 두룽배미를 지나 건내못(외지⋅새못)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이 개울이 꺾이는 639번지 오솔길 가에 40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한 그루는 할배나무, 다른 한 그루는 할매나무라 부르면서 신목(神木)으로 섬기며 매년 정월 보름날 제를 올렸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거수노수명목지(1919)』에도 수령 320년, 신목으로 동제를 지낸다고 등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 나무가 있는 곳은 자연스레 숲이 조성되어 새칭숲이라 하였는데, 이 숲 개울 앞 636번지에 1904년 경주김씨, 성주배씨, 수원백씨, 영천최씨, 인동장씨, 청도김씨 등 마을 선비 12명이 유연재(儒硯齋)라는 서당을 건립하고, 훈장으로 상대리 배동호를 초빙하였다.

▲ 유연재사적비
한때 인근에서 한학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훌륭한 인재를 배출했는데, 시대가 바뀌는 바람에 1960년경 폐철되었다. 현재 이곳에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할매나무는 고사하고 할배나무 한 그루만 경산시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서당이 있던 곳에는 1999년 서당을 건립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유연재사적비」를 건립하였는데, 글은 김진우가 짓고 글씨는 자인면 신관리 이공우가 썼다. 주민들은 마을의 정체성 회복을 위하여 서당 복원을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숲 바로 동쪽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샘터 또는 새칭이라고 불렀다. 현재 매립되었다.
◆ 조상 추모의 정성이 담긴 재실
▲ 추모재 전경

▲ 추모재 현판
조상을 추향하는 재실은 성주(흥해)배씨 문중의 추모재(追慕齋)와 경주김씨 문중의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추모재는 마을 한 가운데인 584번지(현 526번지)에 성주배씨 상대리 입향조 효자 배성길을 배향하기 위해 1970년 건립하였다.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동환(1898∼1984)이 쓴 「기문」과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기윤(1891∼1971)이 쓴 상량문 「양송(梁頌)」이 걸려 있다. 당호 현판 ‘추모재’ 역시 이기윤이 썼는데, ‘팔십옹 극암’이라 하여 이기윤이 별세 직전 1970년에 썼다. 3칸의 솟을대문에 문호는 경행문(景行門)이다. 대리석 기단에 정면 5칸, 측면 1칸 반, 왼쪽 방 2칸은 『시경』의 “영원히 효도하라. 효도하는 것이 법도이다.”에서 따온 ‘유칙헌(維則軒)’, 정면 마루 2칸은 추모재, 오른쪽 방 1칸은 『중용』의 “(조상님이) 위에 있는 듯하고 좌우에 있는 듯하다.”에서 따온 여재당(如在堂) 편액을 달았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5량가 목조건물이다. 1997년 중건하였다.
▲ 영모재 전경

▲ 영모재 현판

▲ 영모재상량문
영모재(永慕齋)는 마을 입구 한박등 아래 541번지에 있다. 경주김씨 취죽당(김응명)공파 상대문중에서 김필망과 그의 아들 김의주를 배향하기 위하여 1976년 건립하였다. 대문은 3칸의 솟을대문이고, 문호는 영락문(永樂門)이다. 2단으로 된 시멘트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고, 시멘트 난간을 두른 3량가 목조건물이다. 중앙 마루 위에 영모재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 방에는 ‘조상님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라’는 뜻의 ‘경모당(敬慕堂)’, 오른쪽 방에는 ‘항상 입을 다물고 행실을 삼가라’는 뜻의 ‘신묵헌(愼?軒)’이라 쓴 편액을 걸어 놓았다. 마루에는 1970년 김상조가 쓴 「영모재상량문」, 2004년 박명희가 쓴 「영모재중건기」 등 게판문이 있다.
◆ 기타 삶의 흔적
상대리 산11-14번지 송곡지 골짜기 일대에 20여 기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또 이곳은 하대리와 함께 자인현 복현 운동의 발상지다.(자인현복현운동관련 내용은 하대리 편을 참고할 것.) 이외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설화의 변이형인 「꾀 많은 여동생」, 은혜를 저버린 주인에게 복수를 한 「범과 싸운 소의 앙갚음」, 삼성산에 희귀한 꽃이 피는 「일곱 가지 색깔의 자귀나무 숲」 이야기 등이 주민들의 삶 속에서 형성되어 전하였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다 잊혀졌다.
◆ 더운물이 솟아올라 빨래하던 곳에 들어선 상대온천
▲ 상대온천관광호텔 전경
이러한 마을에 옛날부터 따뜻한 물이 솟아나는 ‘더운바위샘(더운방샘)’ 또는 온암정(溫巖井)이라는 곳이 있었다. 전하는 바로는 신라 때부터 이곳에 따뜻한 물이 사시사철 솟았다고 한다. 혹자는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한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안 된다. 또 이곳에 더운물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 시기는 1830년대부터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사시사철 따뜻한 물이 솟아나는 개울에서 주민들은 겨울에 빨래도 하고 봄가을에 채소도 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맥반석도 나왔다. 맥반석은 예로부터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맥반석을 타고 솟아오른 상대리 온암정의 물을 마시면 위장병에도 효과가 있고, 목욕하면 피부병에도 좋아서 옛날부터 주변 사람들이 약수로 받아 가기도 하고, 목욕도 했다고 한다.
▲ 개발 경위
그러다가 1972년 마을 앞 논에 모를 심으면 모가 떠오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이 국립지질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온천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1977년 시추를 시작하여 1982년 양질의 온천수로 판정받았다. 그래서 1982년 마을의 집과 논을 매입하여 상대온천관광호텔과 주차장 및 부대 시설을 갖추고 영업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상대리 유채꽃밭
▲ 현 상황
온천이 처음 개발될 당시에는 ‘경산온천’으로 불리며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1995년 청도 화양읍에 용암온천이 개발되고, 2000년대 들어 현대식 시설을 갖춘 목욕탕과 찜질방이 도시 곳곳에 생기면서 상대온천은 사양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개발 초기 관광객을 수용하려고 닦아 놓은 주차장은 현재 공터로 남아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곳에 유채꽃을 심어 놓았다. 현재 경산시와 마을에서는 상대온천을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연계하여 관광테마파크로 조성하여 상대온천의 재기를 꿈꾸고 있다.
▲ 상대리 전원주택단지 전경
◆ 에필로그
상대리는 1888년 45호의 가구가 있었고, 마을 대표는 배한장이었다. 현재 주민등록상 130가구 243명이 거주한다. 주민 중 다수는 전원주택을 짓고 전입한 외지인이다. 원주민들은 대부분 복숭아와 포도 등 과수업에 종사하며,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가구도 많다. 그리고 상대리 입구 사지들과 상대들 서쪽 불탄등이라는 산기슭에 대단지 전원주택이 조성되어 있고, 산 너머 송곡지와 백양지 사이 뱀골에는 상대공단이 있다. 이외에 풍광이 좋고 경산과 가까운 곳이다 보니 카페, 요양원, 식품가공공장, 오토캠핑장, 제조업공장, 에너지공장, 직물공장, 통신기기공장, 농자재공장 등이 들어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루빨리 상대온천이 활성화되어 관광 마을 상대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상대리
그 옛날 큰 부처 모시는 절이 있어
대사리라 하였는데
복사꽃 여러 번 피고 지니
상대리가 되었네.
윗못의 물이 두룽배미 아랫못에게 인사하러 가다가
바위샘 따신 물에 잠시 손을 씻었는데
살구꽃 몇 번 피고 지니
얼씨구! 온천 지대가 되었네.
고리실 고개 너머 나물 캐던 자매는
천 년 묵은 여우가 겁이 나
삼성산 산마루 해가 되었고
뱀골 너머 시집간 막내딸은
뱀보다 표독한 시누 등살에
뱀골못 보름달로 떠올랐네.
복사꽃 살구꽃은 예전같이
나비등 봄나비처럼 상대평 백양들
골짝골짝 처마 밑으로 흩날리는데
대사리든 상대리든
사람 인심 온천처럼 따스하니
당산 할배는 너털웃음 지으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정명환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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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