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같은 나라 압독국의 부활을 꿈꾸는 압량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1) - 역사

2024-09-23 오전 9:32:38

▲ 압량읍 전경(구글어스)
 

 

 

프롤로그

 

설화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그 가치가 존재한다.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나 용마가 승천한 이야기도 믿으면 현실이 된다. 이러한 설화 중에도 전설은 증거물로 믿음을 뒷받침한다. 경산의 옛 나라 압독국은 문헌 자료와 몇몇 고분이 증거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압량인의 정신적 DNA에는 압독국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의 영광이 수천 년 동안 녹아 있다. ‘빼앗긴 것은 되찾을 수 있지만 줘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로국에 빼앗긴 압독국의 영광은 지금도 압량인의 뇌리에 늘 자리하고, 언젠가 그 부활을 꿈꾸고 있다.

 

 

상고시대의 압량

 

청동기 시대 군장이 다스리는 여러 촌락 형태로 존재했던 경산 지역은 기원전 2세기경 부족 국가인 압독국으로 통합되어 진한 12개국 연맹체에 속했다. 이때 압독(압량)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그 뜻은 끝없이 펼쳐진 누른 들판이라고 한다(김종택). 금호강을 허리에 감은 넓은 들판의 형상을 나라 이름으로 정한 모양이다. 압독국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경산시 전체와 대구시 수성구 고산 일대, 동구 공산·동촌·안심 일대였다.

 

▲ 상고시대 압독국 추정지도 

 

▲ 상고시대 압독국 추정 영역 

 

2세기(102)에 이르러 사로국(신라의 전신) 파사왕(유리왕 둘째 아들) 때 복속되어 5세기까지 압량소국이란 명칭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삼국사절요에는 압독이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사로국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지증왕 때 신라는 주군현제를 실시하는데, 이때 압량소국은 압독주(압량주)가 되었다(삼국사기). 동시에 압독국에 속했던 대구시 동구 일대, 자인 일대, 진량·하양 일대는 모두 군현으로 바뀌었다.

 

7세기(665) 문무왕에 이르면 신라는 또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 이때 압량은 군으로 격하되어 삽량주 압량군이 되었다.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땅을 나누어 삽량주를 설치하였는데, 하주는 창녕군이고, 상주는 지금의 상주였다(삼국유사). 이때 압량군은 하주의 속현이 되었다. 당시 압량군의 직할 지역은 동쪽으로 압량, 북쪽으로 안심, 서쪽으로 고산, 남쪽으로 남천이었다. 그 외 속현인 치성화현(대구시 동구 공산·동촌), 마진량현(하양·진량), 노사화현(자인·용성·남산)이 있었다.

 

삼국통일 후 8세기 경덕왕 때(757) 삽량주는 양주로 바뀌고 압독군의 명칭 자체를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산군의 속현도 이름이 바뀌었는데, 치성화현은 해안현(解顔縣), 마진량현은 여량현(餘糧縣), 노사화현은 자인현(慈仁縣)이 되었다(삼국사기). 이로써 고대국가 이름이었던 압독(압량)’이란 나라 이름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압독·압량은 천수백 년 동안 압독국의 도읍이었던 곳에 조그마한 촌락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중세시대의 압량

 

▲ 장산군 행정지도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로 접어든 후 940년 장산군은 한자 장산(獐山)을 장산(章山)으로 바꾼다. 그 이유는 전하지 않는다. 이때 압량 지역은 지금의 면에 해당하는 장산군 동계(東界)에 속하였다. 995(성종14) 여량현 일부, 이지현소(신령), 안심소(장산), 양량부곡, 이지부곡 등 금호강 일대 지역을 합하여 하주(河州)라 하고 자사(刺史)를 두었다. 이것이 지금 하양(河陽)의 출현이다. 이 과정에서 하주에 편입되고 남은 여량현 지역은 구사부곡으로 강등된다.

 

▲ 하주(하양) 행정구역 추정지도 

 

▲ 구사부곡 행정구역 추정지도 
 

 

1018(현종9) 장산군, 자인현, 하양현(하주), 구사부곡, 해안현, 영주(영천) 등 경산 지역의 현들은 모두 경주부의 속현이 되면서 압량도 같이 경주부에서 관할하였다(고려사권제11 지리편). 1047(문종1)에 이르면 장산군 동계를 장산군 동면(東面)으로 바꾼다.

 

1172(명종2) 장산군에 감무를 파견하여 경주부의 속현에서 벗어나게 되자 압량도 동시에 벗어났다. 1308(충선왕) 왕의 이름과 음이 같은 글자의 사용을 금지함에 따라 장산(章山)을 경산(慶山)으로 바꾸었다. 역사 속에 경산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로써 현재 압량 지역은 경산현 동면이 되었다. 1317(충숙왕4) 국사 일연선사의 고향이어서 현감보다 높은 현령을 파견하였다. 이때부터 경산현감은 경산현령이라 하였다. 1390(공양왕2) 공양왕비 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 군수격)를 파견하여 경산군으로 승격하였고, 별호를 내렸는데 옥산(玉山)이라 하였다(고려사권제11 지리편). 현재 경산 옥산동과 옥산지구가 바로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 경산군은 1395(태종4) 다시 경산현으로 강등된다. 그 후 1601년 대구에 속했다가 6년 뒤 다시 현으로 복귀하였다. 1895년 경산현은 다시 경산군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압량은 늘 경산현() 동면이었고, 이 행정 체제는 조선이 건국하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빼앗길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일제시대의 압량

 

▲ 일제시대 압량면 행정지도 
 

 

압독·압량이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1911년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하면서 명칭도 새로 정하였다. 3년 뒤인 19143월 부군현 단위의 행정구역을 재편하였다. 이때 경산현 동면 일부와 자인현 서면을 떼어 압량면이라는 행정구역을 탄생시켰다(조선총독부 관보).

 

천수백 년 동안 조그마한 마을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압량이란 이름을 면 단위 행정구역으로 재탄생시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라진 왕국의 이름이 부활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책은 일본인이 하였지만, 구체적인 작업은 우리 조선인이 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머릿속 전설로만 전하던 이 지역 최초의 왕국인 압독압량의 부활을 소망했을 수도 있다. 이는 진량면의 부활과도 궤를 같이한다. 아래는 1914년 압량면 관할 마을 일람표이다.

 

▲ 압량읍 관할 마을 
 

 

해방 이후의 압량

 

▲ 현재 압량읍 행정지도 

 

이러한 마을 체계는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89년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하면서 삼풍동, 평산동, 사동, 갑제동, 조영동 등 기존 경산현 동면 지역 일부 마을과 점촌동, 여천동, 유곡동, 신천동, 내동, 남방동 등 기존 자인현 서면 지역 일부 마을은 경산시로 다시 편입되고 나머지는 압량면에 남았다. 이 과정에서 로 바뀌었고, 마을의 순번도 변했다. 20201월 압량읍으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래는 현재 압량읍 관할 마을 일람표이다.


 

▲ 압량읍 관할 마을 
 

 

현재 압량읍은 16개 법정리와 29개 행정리로 구분되어 있다. 원래 법정리와 행정리가 일치하였는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마을이 확장되자 부적, 신대, 현흥, 인안 등이 몇 개의 리로 분할되었다. 이들 마을에 얽힌 희로애락 등 삶의 이야기는 마을별 이야기 편에서 다루겠다.

 

 

압량면·읍사무소 및 면장

 

757년 경덕왕 때 없어진 압독·압량이란 이름은 1914년 부활했다. 과거처럼 하나의 왕국으로 부활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최하위 행정 단위인 면으로라도 부활했으니 다행이다. 게다가 천수백 년 동안 경산현 동면이라고 불리면서 압량은 마을 이름으로만 남았는데 압량면이 되고, 독자적인 면사무소와 면장이 생기면서 압량인을 위한 정책을 펼 수 있었다.

 

압량면사무소와 읍사무소

 

▲ 1930년대 조영동 일대(출처-일본 학습원대학)
 

 

조선시대 압량의 중심지는 조영동이었다. 면임(면장)도 이 조영동에 살았다. 그래서 1914년 압량면사무소도 이 조영동에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부적리 읍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압량읍행정복지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 1970년대 압량면사무소(출처:압량면지)

 

▲ 현재의 압량읍 행정복지센터

 

이 안에 경산현령 이헌소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와 압량인의 화합을 상징하는 자연석으로 된 면민화합의 탑’, 그리고 압량읍행정복지센터안내석이 있다.

 

▲ 이헌소선정비 

 

▲ 면민화합의 탑 

 

일제시대 압량면장

1914년 압량면이 생기기 전 아이러니하게도 면장이 먼저 탄생하였다. 조선시대 최하위 행정수장은 현령과 현감이었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하였는데, 현령은 행정의 편의를 위하여 자신이 임면하는 면임제를 운영하였다. 그래서 각 현의 면에는 면임을 두었는데, 주로 그 지역 향청에 출입하는 유지를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정식 관직은 아니었다. 1895년 이후 현령·현감은 모두 군수라 하였다. 대한제국은 1906지방관관제를 반포하면서 군수 밑에 주사(主事)를 두고 군수가 궐석 시 군수 업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대한제국 관보1906년 제3570). 이들은 실무 행정가로서 각 면의 유지 중에 선발하였는데, 상황에 따라 이들을 면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도 정식 관직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면제에 관한 규칙을 조선총독부령으로 발표하면서부터 각 군의 주사들이 면장직을 이어받아 각 면의 초대 면장이 되었다. 이들 주도로 1911년 동리 통폐합이 진행되었다. 이때 압량면장이 된 사람은 박병석이었다. 그는 경산군 동면 면장으로 있다가 1914년 압량면이 생기면서 압량면장이 되었다(조선총독부 관보1914.10.21.). 그 뒤 박병훈이 제2대 면장이 되었다. 초대와 2대 면장 모두 밀양박씨다. 이후 1920년 김기열이 3, 1924년 박병채가 4대 면장이 되었다(매일신보 1924.10.24.). 1941년 제5대 면장 김순준(金順俊)을 끝으로 일제시대 면장이 막을 내렸다(압량면지(2000)에는 박병석, 김기열, 박병훈, 박병채, 김순준 순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조선총독부 관보를 참고하면 박병훈이 제2대 면장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경산군지(1971)에는 김기열이 누락되어 있다.).

 

이중 박병채가 가장 오랫동안 면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조영동의 중심인물이었고, 한문을 수학하고, 간단한 국어(일본어) 회화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1925년 농사개량실행조합, 1928년 근농공제조합(勤農共濟組合)을 설립하여 조영동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또 매년 1회 부락 내 노인 대상 경로회를 개최하여 향응을 베풀었다고 한다(農村[농촌은 빛난다],1934). 이하 해방 후 면장은 경산군지(1971)를 참고하기 바란다.

 

 

압량의 민의 대변 기관 면협의회·면의회

 

일제시대 면협의회

한때 각 면에 면의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면의회는 1952년 처음 실시되었는데, 그 뿌리는 일제시대 면협의회다. 일제는 19176월 조선총독부 제령 제1면제(面制)를 발표하고, 면장을 보좌하는 상담역’ 4명을 두었다. 이 상담역은 1920년 제령 13호를 통해 면협의회로 바꾸고 민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지방자치를 이룩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일본인이 면장으로 있는 지정면에만 국한하였는데, 당시 경산 지역에는 경산면만 일본인이 면장이어서 1926년 선거를 통하여 정원 10명의 면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외 지역은 군수가 직접 임명하는 면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 면의회도 인구 5,000명 이상인 지역에만 구성할 수 있었다. 이에 압량면도 1931, 1935, 1939, 1943년에 선거를 통해 조직되었다. 정원은 10명이었다. 당시 압량면의회 명단은 사정상 게재하지 않는다.

 

해방 후 면의회

면의회는 19497월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1952425일 첫 선거를 치르고 조직된 최하위 행정기관의 의회이다. 일제의 면협의회를 모방한 정부는 194974일 자로 국회에서 의결된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켰고, 그해 81관보호외를 통하여 공포하였지만 정작 선거는 전쟁 등의 원인으로 3년 뒤에 전국적으로 치러졌다. 이에 따라 압량읍도 제11952, 21956, 31960년에 선거를 치렀다. 이때 당선된 면의회 명단은 경산군지(1971)에 등재되어 있다. 3기 면의회는 19615·16 혁명으로 곧 해산되었다. 그 후 면의회는 더 이상 조직되지 못하고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압량의 교통·통신 치안

 

▲ 압량역 터(부적리)

 

▲ 건흥원 터(현흥2리)

 

압량에는 조선 후기까지 교통과 통신의 주요 역할을 했던 역()이 두 곳이나 있었다. 하나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부적리의 압량역(押梁驛)이고, 다른 하나는 자인현 역참이었던 강서리의 산역(山驛)이었다. 또 여행자를 위한 공공숙소였던 원()도 있었는데, 현흥2리에 있던 건흥원(乾興院)이었다.

 

▲ 압량우체국(부적리)

 

압량우체국은 1963년 부적리 471-3번지 압량면사무소 담장 남쪽에 개인이 운영하는 별정우체국으로 개국하였다. 2012년 경산압량우체국으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압량파출소(부적리)

 

치안을 담당하던 파출소는 1920년대 설치된 평산주재소와 압량주재소가 있었다. 평산주재소는 보국코발트광산[경산코발트광산] 징용자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경산경찰서 산하로 설치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폐쇄되었고, 부적리 압량행복발전소 건너편에 있는 압량주재소는 하양주재소 관할로 설치되었다가 압량파출소로 개명되어 현재까지 있다. 또 신대리에는 경산소방서가 있다.

 

 

에필로그

 

현재 압량읍 중 경산과 가까운 마을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중심지에서 먼 마을에도 각종 공장이 들어서서 수천 년 농사를 짓던 논과 밭들이 공장들로 가득하다. 특히, 통신부대와 돼지농장이 들어선 마을은 개발 제한과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단골 화두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 압독국의 영광을 다시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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