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2 오전 8:55:39
▲ 부적리 전경
◆ 프롤로그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지배자들의 권력욕과 먹거리를 탈취하기 위한 땅따먹기다. 전쟁은 언제나 남성이 주도하였고, 희생자는 남겨진 여성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언제나 슬프다. 압량읍 부적리는 신라의 삼국통일 욕망으로 남성들이 전쟁터로 나가고, 여인들은 그들을 배웅하며 사별을 생각하던 슬픈 사연에서 시작된 마을이다.

▲ 부적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부적리는 압량리와 함께 압독국 시대 도읍이 있던 곳이었다. 압독국이 2세기 신라에 복속된 뒤 6세기 압독주 압량이 되었고, 7세기 김유신이 압독주 군주로 왔을 때 압량에서 분리되어 부적촌이라 칭하였다. 7세기(665) 압량군 부적촌이 되었다가 8세기(757) 경덕왕 때 장산군 부적촌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 장산군 동계 부적촌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적촌에 압량역이 생기면서 압량역촌이 새로 생겼고, 1047년(문종 원년) 동계는 동면이 되었다. 1308년 장산군이 경산현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경산현 동면 부적촌과 압량역촌이 되었다. 1390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승격하자 경산군 동면에 속했고,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종4) 다시 경산현으로 강등되어 경산현 동면 부적리와 압량역리가 되었다.

▲ 1912년 부적리 지적도
부적리와 압량역리가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경산현지(1786)』이다.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이 될 때 부적리와 압량역리는 부적동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이 생기면서 경산군 압량면 부적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이러한 체제가 지속되다가 1988년 압량면 부적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읍 부적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마을이 도시화되면서 아파트와 인구가 급증하여 부적1리부터 부적6리까지 확장되었다.
▲ 부적리 일대
▲ 부적·부지기
부적(夫迪)은 김유신이 압독주 군주로 있을 때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이 압독주 군주로 있을 때 백제를 치기 위하여 남정네들이 이곳에서 전장으로 갔는데, 아낙네들이 지아비가 전장으로 가는 곳이라 하여 ‘부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신라 진덕왕 때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태종은 소정방에게 20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도록 했다. 이때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있으면서 군사 훈련에는 뜻도 없고 늘 술을 먹고 풍악을 울리며 수개월을 보냈다. 고을 사람들은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 비난하며 ‘백성들이 한바탕 싸울 힘의 여유가 있는데 장군이 나태하니 어찌할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를 들은 유신은 압량주 백성의 자질이 훌륭함을 알고 왕에게 청하여 백제를 쳐서 대량주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삼국사기』 유신조). 이 부적이 사투리화하면서 부지기라고도 불렀다. 1912년 부적리에는 19가구 살았다. 전통적으로 옥산전씨 집성촌이다. 현재는 부적1리와 부적2리가 되었다.
▲ 압량역촌 일대
▲ 압량역·압량역리·역리
압량역촌(289∼334번지 일대)은 고려 때 공문수발역인 우역(郵驛)이 압량에 설치되면서 부른 마을이다. 역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압량역촌이라 하다가 조선에 들어와서 압량역리가 되었다. 마을 이름이 최초로 등재된 자료는 『경산현지(1786)』이지만, 고려 때부터 마을이 존재했다. 이후 『호구총수』와 『경산현지(1871)』에서는 ‘역리’로, 다른 자료에는 압량역리로 등재되어 있다. 한때 봉삼동(鳳三洞)으로도 불렀다고 하나 정식 마을 이름은 아니었다. 1895년 부적동에 통합되어 역리의 존재는 잊혀졌다. 1912년 압량역리에는 33가구 살았다. 현재 부적1리이다.
▲ 오목내 마을 전경
▲ 오목내·오목천·오목동
오목내는 부적 북쪽 오목천 가 92번지 일대에 조성된 각단으로 정식 마을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오목천 가에 있다고 하여 오목천 또는 오목동이라 했다. 1912년 당시 4가구 살고 있었다. 그 후 경지정리 과정에서 폐촌되고 바로 옆에 마을이 조성되었다. 현재 삼천리버스회사가 있는 곳이며, 부적2리다.

▲ 부적리 지명지도
◆ 부적리 사람들의 삶의 터전
▲ 고분군과 조산
부적리에는 북쪽 오목천 동쪽 절이 있는 곳이라서 절산이라 부른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평지로 바뀌었다. 또 고분이 있는 산은 인공으로 조성하여서 조산(造山)이라 부른다. 골짜기로는 부적리 남쪽 석정·돌징이·돌정골과 서쪽 안골짝이 있다. 논은 마위지 못 밑에 있다고 하여 마못밑들, 서쪽 산사태로 흙이 내려와 쌓였다고 하여 미통들, 동쪽 부적에 딸린 작은 각단이 있는 들판이라 하여 부적태서리, 부적리와 조영리 경계에 수링잇보의 물을 대는 들판이라 하여 수링잇들, 압량역터 부근에 있는 압역걸 등이 있었다.
▲ 마위지 전경
▲ 석정지 전경
저수지는 마위지로 바뀐 부적지, 신지(새못), 석정지가 있었다. 부적지는 15∼18세기 축조되었고, 신지는 조선 후기 축조되어 『조선지지자료(1911)』에 처음 등재되었다. 이후 신지는 1960년대 경지정리 과정에서 매립되어 논으로 바뀌었고, 주변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석정지는 부적리 541번지에 있는데 일제시대 이후 조성되었다. 1969년 이 일대가 영남대학교 부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그나마 개발이 안 되어 저수지가 보존되고 있다.
◆ 부적리 사람들의 삶의 흔적
▲ 압량역
역참제도는 신라 때부터 있었는데, 압량역(押梁驛)의 존재는 『고려사』에 처음 보인다. 당시 압량역은 경주도(慶州道) 관할 장산(章山)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영천 장수역(長水驛) 관할로 바뀌었다(『세종실록지리지』). 그러다가 조선 후기 청도 성현역(省峴驛) 관할로 바뀌었다. 정식 명칭은 ‘경산구화압량역(慶山仇火押梁驛)’이었다. ‘경산’은 역이 있는 현의 명칭이고, ‘구화’는 공문수발역을 가리키며, ‘압량역’은 역의 명칭이다. 그러니까 압량역은 공문서수발역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압량역에는 역리 23명(名), 역노 27구(口), 역비 15구,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卜馬, 짐말) 10필이 있었다고 한다(당시 평민은 명, 노비는 구로 기록했음). 매년 1필을 분양 받아와서 다음 해 7월 봉상시에 올려보냈다. 『영남역지』에 등재된 압량역이 관리하던 토지는 위답(位沓) 242두락, 전(田) 208두락, 천번답(川反沓) 38두락, 복사답(伏沙沓) 40두락, 천번전(川反田) 23두락, 복사전(伏沙田) 33두 2도락(刀落)이었다.
이처럼 상당한 규모의 역이었는데, 목장은 없었다. 일부 현읍지 번역서나 책에서 ‘목장은 있고, 분양하지 않은 말을 받아와서…’라고 한 것은 한문을 잘못 해석하였다. 『여지도서』에는 경산·자인·하양 모두 목장은 없고, 매년 4월에 말 1필을 분양 받아와서 다음 해 7·⋅8월에 봉상시에 올려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역찰방 제도가 폐지되고, 역원에서 관리하던 전답을 국유지로 편입되면서 압량역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다.
▲ 압량역 터
▲ 압량역 터는 어디일까?
압량역의 위치를 소개한 최초의 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인데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다음 『경산읍지(1758)』나 『여지도서(1765)』에도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고 하였다. 『경산현읍지(1786)』 이후의 자료에는 압량역리가 관문과 10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적리와 압량리는 관문에서 8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산현청을 기준으로 압량리, 부적리, 압량역리 순으로 마을이 있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압량역은 현재 압량리에서 800m 동쪽이나 북쪽에 있었다. 과연 이것이 정확할까?
역참제도는 1896년 폐지되었고, 역에 소속된 토지는 국유지가 되었다. 이 사실은 1912년 작성된 지적도를 보면 정확하게 나타난다. 하양 화양역이 있던 서사리 지적도에는 많은 논이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국유지는 화양역에 속한 전답이었다. 자인현 산역리에 있던 산역 터 주변에도 국유지가 존재한다. 이처럼 국유지로 표시된 곳이 바로 역이 있던 곳이었다. 압량리 동쪽 들판이나 내리, 심지어 용암리의 지적도를 보아도 국유지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다.

▲ 1912년 압량역리, 부적리, 압량리 지적도
그런데 부적리 고분군 근처에 국유지 내지는 공유지로 되어 있는 곳이 있다. 이곳이 바로 압량역 터였다. 구전에도 이곳을 압역걸, 압량역촌이라고 한다. 현읍지나 기타 자료에 기록된 압량역리 12리는 현읍지의 전승 과정에서 검증 없이 등초하다 보니 생긴 오류이다. 실제로는 압량역리와 부적리가 관문에서 8리, 압량리가 12리인데 압량역리와 압량리의 위치를 잘못 기록하였다. 결국, 압량역 터는 현재 부적리 고분군 서남쪽 336∼337번지(과거 주소) 일대로 추정된다. 현재 빌라와 주택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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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팔도지도
한편 영조 연간(1724∼1800)에 발간된 「조선팔도지도」에는 압량역이 장고산역(長鼓山驛)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압량리의 장대산(두룩산)을 장고산이라 하였고, 그 근처에 있어 장고산역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 정보교환의 장소였던 압량장

▲ 압량공설시장
▲ 압량장이 있던 압량읍행복발전소
각종 물건을 매매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정보를 교환하던 시장으로 압량장도 부적리에 있었다. 압량장은 일제시대까지 없었는데, 1957년 부적리 압량면사무소 근처 459∼461번지 논에 2일과 7일에 개시하는 정기시장으로 개설되어 어물, 의류, 옹기, 채소류 등을 거래하면서 1960∼70년대에 크게 번성하였다. 한때 압량공설시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2021년 그 자리에 지상 4층의 압량읍행복발전소가 건립되었다.
▲ 기타
▲ 부적리 고분군

▲ 이현소현령비와 압량면민 화합의 탑
이외 부적리 압량역이 있던 곳에 삼국시대 고분, 압량읍사무소, 이현소현령비(읍사무소 내), 압량공립보통학교 등이 있다. 고분은 2016년 발굴조사 결과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여 현재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 편입되었다. 압량읍사무소는 원래 조영동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압량공립보통학교는 부적리 604번지에 1928년 개교했는데, 현재 압량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또 당목이 마을 가운데 있었다. 여기서 별신굿 형태의 당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마위지에 얽힌 불편한 진실
이러한 역사성이 있는 마을이 일제시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상태로 전승되고 있어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그 불편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 마위지 전경
▲ 마위지와 김유신 장군의 결합
영남대학교를 지나 진량으로 가는 대학로라 붙여진 도롯가 서쪽 264-2번지 일대에 마위지라 부르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말에게 물을 먹이거나 말의 귀를 씻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마위지(馬位池) 또는 마이지(馬耳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2010년 경산시는 이 마위지 주변에 마위지근린공원을 조성하여 각종 조형물과 김유신 장군 동상을 세워 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마위지와 김유신 장군의 결합은 작위적이다. 김유신 장군이 압독주 군주로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저수지 연기 설화가 뒤엉켜 조선 후기나 일제시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적 이야기일 따름이다.
▲ 마위지 김유신 장군 조형물
▲ 김유신 장군과 마위지는 관련 있을까?
전설은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했을 때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민담일 뿐이다.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 군주로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에서 증명된다. 그러면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 있을 당시 저수지도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면 스토리는 진실을 담보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나아가 조선 초기에도 부적리에 저수지가 있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김유신 장군과 마위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정작 김유신 장군과 얽힌 저수지는 따로 있다(이에 대해서는 곧 게재하겠음).
▲ 마위지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 부적지와 신지 지적도
경상도 지역의 저수지를 기록한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다. 이 자료에는 당시 경상도 지역의 모든 저수지가 이름과 함께 관개 면적까지 등재되어 있다. 당시 부적리를 포함한 압량 지역은 ‘현동’이라 하였다. 이 현동에는 동을산리에 마관제와 매촌제, 마사리에 갑제, 적화이제, 사제 등 5개의 저수지만 등재되어 있다. 이 중 말과 관련한 저수지는 동을산리의 마관제 한 곳이다. 동을산리는 평산리의 옛 이름인데, 지금은 사동과 평산으로 분리되었다. 마관제는 사동에 있다. 현재 ‘말매못’이라 하여 아파트 숲속에 둘러싸여 마치 정원의 연못처럼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이외 4개의 저수지는 지금도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면 부적리의 저수지는 언제부터 자료에 등재되었을까? 최초의 자료는 1758년 제작된 『경상도경산현읍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산읍지다. 이 읍지에 부적제(夫迪堤)라 하여 부적리에 처음으로 저수지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없고, 이 읍지에 있으므로 곧 15∼18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여지도서』나 경산현읍지 등 조선시대 자료에는 줄곧 부적제라 하고 한 번도 이름이 변경되지 않았다. 1911년 지적도에도 현재 마위지와 같은 위치에 저수지가 원형대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부적제는 빠르게는 15세기 후반이나 늦어도 18세기 중반에 축조되었으며, 이 부적제가 현재 마위지임이 분명하다.
▲ 부적제가 마위지로 바뀐 사연은?
부적제는 1899년 마지막으로 제작된 『경산군읍지』에도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 또 1911년 제작된 『조선지지자료』에도 부적지라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경산군지(1933)』에서 갑자기 마위제(馬位堤)로 바뀌면서 부적제가 사라졌다. 이 책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합병한 지 20여 년 후에 출간되었다. 이미 그 이전 1914년 경산군, 자인군, 하양군은 경산군으로 통합되었고, 현청이 있던 주변 지역은 각각 경산면, 하양면, 자인면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경산군 유지들이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과거 전해오던 3개 군의 읍지를 저본으로 하여 내용을 추가하여 만든 것이 바로 『경산군지』다. 이 과정에서 경산군의 유지들이 나라를 빼앗긴 허탈함을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과 부적지를 결부시키는 과정에서 마위지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하루아침에 마위지로 바꾼다고 해서 부적지가 마위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에 걸친 구비전승의 결과였을 것이다. 현재는 그 마위지가 마관제(馬館堤), 마위지(馬爲池), 마이지(馬耳池)로 또 바뀌어 전승되고 있다.
◆ 에필로그
지금까지 혼자만 알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했다. 혹자는 “지금에 와서 굳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것이 무엇인가?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 아닌가?” 등의 반박을 할지 모른다. 이런 반박을 하는 사람한테 되묻고 싶다. “조작된 역사를 사실처럼 믿고 시민의 혈세로 증거물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가?” 역사는 준엄하다. 조작되거나 왜곡된 역사는 언젠가 밝혀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부적리의 마위지에 얽힌 이야기가 역사적 설득력을 얻으려면 고고학적 증거, 구전설화, 기록 등 여러 자료를 교차·비교하면서 가장 객관적인 공통점을 바탕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감동과 흥미를 주는 스토리텔링도 자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호소력을 지닌다.
김유신 장군을 따라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 터로 가는 남편을 배웅해야 했던 압량의 여인들에 대한 안타까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진실로 믿고 증거물이 돼버린 마위지의 허황함, 그 마위지근린공원의 조형물이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답답함 등 이래저래 부적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마을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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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