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의 병영유적지가 있는 압독국의 도읍지 압량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5) - 압량리

2024-10-15 오전 9:07:13

▲ 압량리 전경 
 

 

프롤로그

 

시인 김춘수는 에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이처럼 우주 만물은 이름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실체가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이름으로 그것을 기억한다. 고대국가 압독국도 천수백 년 동안 실체가 사라졌지만, 그 이름이 있어 우리는 그 나라를 기억한다. 압량리는 바로 천수백 년 동안 실체가 사라진 나라의 이름이었다.

 

▲ 압량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압량리는 부적리와 함께 압독국 시대 도읍이 있던 곳이었다. 서기 2세기경 사로국에 복속 당한 후 압량소국으로 전락했는데, 그때도 이 소국의 도읍지였다. 6세기 지증왕 때 압독주(압량주)가 되자 압독주의 읍치가 되었다. 7세기 문무왕 때 압량군으로 격하되었을 때도 압량군 읍치가 이곳에 있었다. 8세기 경덕왕 때 압량군은 장산군이 되었는데, 그때도 압량리는 장산군의 읍치였다. 고려 건국 후 940년 장산군은 장산(獐山)을 장산(章山)으로 바꾸면서 읍치를 현재 삼남동과 삼북동 지역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압량리는 장산군 동계에 속하여 장산군의 한 지역이 되었다. 1047년 장산군 동면이 된 후 압독국 도읍지는 압량촌, 압량역촌, 부적촌, 박촌(조영동) 등으로 분할되었다. 이로써 나라 이름이었던 압량이 일개 마을 이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압량은 줄곧 경산현 동면 압량리로 유지되었다.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바뀌면서 경산군 동면 압량동이 되었다. 1914년 부군현 통폐합 때 압량면이 부활하면서 압량면 압량동이 되었다. 이 체제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다가 1988년 압량면 압량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읍 압량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압량리 지적도 
 

 

압량촌·압량·압량리

이 마을은 압량 한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 옥산촌(현 옥산동)에 살던 옥산전씨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전후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여 전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1911년 당시 27가구 살았는데, 거의 옥산전씨였다. 현재는 공업지구로 지정되어 마을 주변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고, 도시화가 진행되다 보니 옛날 전씨 집성촌의 흔적은 사라졌다. 이렇듯 유서 깊은 마을이다 보니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훈련하던 병영유적지나 우물터 등 당시의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 압량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 장대산 전경 
 

 

압량리의 산

압량리에는 해발 60m의 장대산(將臺山)이 있다. ‘장대란 망루를 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을 장고산(長鼓山)이라 하여 현의 동쪽 4리에 있다고 하였다. 영조 연간에 그려진 조선팔도지도에도 압량역을 장고산역(長鼓山驛)이라 하였다(부적리 편 참고할 것). 경산현읍지(1758)이나 경산현지(1786)에도 이 산을 장고산이라 하여 줄기가 운문산에서 왔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경산군지(1933)에서는 이 장고산을 현의 동남쪽에 있다고 하면서 일명 동산(東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현의 10리 압량에 장대산이 있다고 하면서 산 위가 평평하여 충분히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압독국 때 병사들의 훈련장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조선시대 줄곧 장고산이라 부르던 것이 일제시대 갑자기 장대산으로 바뀌었고, 군사 훈련장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였다. 근래에 혹자는 이 산을 성으로 보아 장산성(獐山城)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또한 장고산에 얽힌 불편한 진실 중의 하나이다.


 

▲ 두룩산 전경 
 

 

또 조영동 중귀봉(中龜峰)과 장대산 사이에 모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을 두락산 또는 두룩산이라 한다. 이 두룩산이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하는 병영유적지다. 현지에서는 두룩이, 두룩대, 들누기 등으로 부른다. 또 이 두룩산을 인공으로 쌓았다고 하여 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이로 보아 장고산, 장대산, 두룩산은 별 구분 없이 부른 것으로 보인다.

 

압량리의 골짜기와 논밭

 

▲ 사문깐, 독시밭구미, 독지암골 전경 

 

▲ 만지곡(만줏골) 젼경 
 

 

골짜기로는 사문깐(삼문깐) 동쪽 독사가 많아서 독시밭구미, 북쪽 독주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독지암골, 사문깐 남쪽 만지라는 저수지에 있던 만지곡(晩池谷·만줏골) 등이 있었다. 압량리 긴 개울가에는 장포암(長浦岩)이라는 바위가 있었고, 북쪽에는 웅장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메기를 잡아먹다가 그 가시에 걸려 죽었다고 하여 웅장웅딩이가 있었다.

 

▲ 압량리 들판 전경 

 

▲ 압량리 북쪽 들판 
 

 

논과 들판으로는 만줏골 서남쪽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다고 하여 자배미, 자배미 북쪽 횃대처럼 생겼다 하여 횃대배미, 횃대배미 동쪽 칼치처럼 생겼다 하여 칼치도가리, 두룩산 동쪽 장구처럼 생겼다 하여 장구배미 등의 논이 있었다. 또 두룩산 동쪽 오목천 가에 있다고 하여 갯밭들, 동쪽 꽁못이라는 못 안에 있다고 하여 꽁못안들, 두룩산 밑 압량리와 내리에 걸쳐 있는 들누깃들, 들누기 동쪽 압리들, 압량 북쪽 옛날 사문깐이 있어 사문깐들 등의 들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름들은 196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지형이 바뀌고, 그에 따라 이름도 하나둘씩 잊혀졌다.

 

저수지

 

▲ 만줏골못이 있던 만줏골 
 

 

압량리 147번지 장대산 바로 아래에 있던 만지(晩池)라는 저수지는 이 마을 유일의 저수지였다. 마을에서는 만줏골못이라 불렀는데, 경산현읍지에는 없고, 조선지지자료(1911)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지적도에도 이 저수지가 표시되어 있다. 일제시대나 해방 후에도 존속했는데, 근래에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현재는 매립되어 수풀만 무성하다.

 

 

고대국가 압독국의 도읍지

 

압량리의 자부심은 두말할 것 없이 압독국의 도읍지였다는 것이다. 압량 지역의 문화는 고대국가였던 압독국 시대와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전 압독주 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용성과 남산 및 자인 등지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덤과 유물은 압량 지역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용성과 자인, 남산 지역에 살던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이곳 압량 지역으로 이주해서 부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 압독국 건국의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 압독국 도읍지였던 압량리 일대 
 

 

고대국가였던 압독국의 도읍은 현재 압량리에 있었다(여지도서). 이 기록은 구체적인 증거물로 뒷받침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압량읍 일대에 산재한 고분들이다.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부적리 약 6, 내리 6, 인안리, 의송리, 당음리 2, 금학리 등 압량 곳곳에 있다. 이외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자인 등지에 남아 있는 고분들도 모두 압독국과 원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 압독국 시대 고대 성터 
 

 

그리고 현재 압량읍 행정구역은 아니지만 고산 성동 성산(城山)의 고포성(古浦城), 남천면 금성산의 금성(金城), 임당동[궁당동]의 궁곡성(弓谷城) 등 고대 성들도 모두 압독국의 흔적이다. 이처럼 압량읍 지역에는 고대국가 압독국의 흔적들이 수천 년의 흐름 속에서도 그대로 남아 당시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압량리 주민의 자부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경산병영유적 제1연병장이 있는 압량리

 

▲ 두룩산 전경 

 

두룩산의 진실

현재 압량읍과 진량읍 선화·가야리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말을 훈련시키던 곳이라 하여 마사리(馬沙里)라 불렀다(일부 자료에 당음리 옛 이름이 마사리였다고 하나 당시에는 압량 동북쪽 지역 전체가 마사리 영역이었다.) 이중 압량읍 압량리·내리와 진량읍 선화리(두인동)에 모양이 동그랗고 나지막한 등성이가 일정한 간격으로 있어 특별히 관심을 끈다. 이 등성이를 압량리에서는 장대산 또는 두룩산, 내리에서는 들누기, 선화리에서는 두리산으로 부른다. 장대산은 공식 문서에만 확인되고, 그 외는 현지 주민들이 부르는 용어이다.

그러면 두룩, 들누기, 두리는 무슨 뜻일까? 이 셋은 모두 어원이 둥글다라는 뜻이다. 정확히는 한 말 정도의 종자를 뿌릴 만한 넓이의 땅을 재는 두락(斗落)’에 그 어원이 있다. 그 이유는 곡식을 재는 ()’ 모양처럼 둥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두락이라 부르다가 음운변화가 일어나 두룩, 들누기, 두리 등으로 바뀌었다. 진량읍 신상동의 두락산(豆樂山)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현재는 압량의 이 세 산을 한자로 두락산(斗落山)이라 칭하고 있다.

 

▲ 제1병영유적지(두룩산) 전경 

 

1연병장

이 두락산은 일제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압독국 시대 군사 훈련장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연병장이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압량리에 있는 두룩산이 제일 먼저 알려져서 제1연병장이라 부른다. 1연병장은 부적리와 압량리에 걸쳐 있는 장대산에 있는데, 흔히 토성연병장이라 부른다. 주소는 압량리 179번지 일대다.

 

▲ 병영유적지 토루 
 

 

지표 조사 결과 제1연병장은 얕은 구릉에 7m 높이로 흙을 쌓고, 윗면을 평평하게 하여 원형으로 조성하였다. 둘레 약 300m, 면적 약 1,100평 정도이고, 동남쪽에 높이 10m의 토루(장대)가 있었다고 한다. 19714월 사적 218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유적지 명칭은 압량유적이었는데 경산병영유적으로 바꾸었다(2011.7.28.).

 

 

김유신 장군 우물

 

▲ 우물터가 있던 곳(왼쪽 하단 공장 지붕이 보이는 곳)

 

▲ 우물터가 있는 공장과 우물 단면(출처: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5월 압량읍 압량리 186-1번지 공장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연대를 알 수 없는 우물 유적이 발견되어 회사 대표가 당국에 신고하였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조사한 결과 깊이 5미터 석조 우물 바닥에서 각종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중 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조각도 있었다. 발굴단은 이 토기를 근거로 우물 축조 시기를 7세기경으로 보았다. 특히, 이 우물터가 사적 218호로 지정된 제1연병장과 5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점, 그리고 김유신 장군이 7세기경 이 지역 군주로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이 우물이 김유신 장군이 병영에 주둔한 군사들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확정했다.

 

▲ 우물터에서 발굴된 토기(출처:한국문화재보호재단)
 

 

게다가 이 우물에서 각종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이곳에서 제의 행위도 함께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공장 내부 바닥에 표지석과 공장 입구에 안내판을 설치해 두었다. 이 우물 유적은 경산병영유적과 상보적인 증거물로서의 역할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세월의 흐름과 무관심 속에 또다시 잊혀지고 있다(경산 압량리 186-1번지 유적참고).

 

 

에필로그

 

경산의 전설과 민담(2003), 경산지방의 설화문학연구(2005)에서는 2000년 이용칠이라는 사람에게서 채록하였다는 혈이 끊긴 배미재, 압량리 배미재라는 전설이 압량리에 전승되었다고 한다. 또 이를 근거로 경산문화대전(2009)디지털경산문화대전(2022)’에도 압량리에서 전승한다며 혈이 끊긴 배미재라 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설의 최초 기록은 내 고장 전통(1980)이며, 전승 지역도 자인현 당곡, 일언, 안촌 지역이다. 이들 마을에 걸쳐 있는 배밋장 또는 사산(蛇山)이라는 산에 있는 배미재에 얽힌 전설이다. 어느 누군가의 오류를 검증 없이 인용하면서 지방의 역사가 조금씩 왜곡되어 가고 있다. 이 또한 압량리의 불편한 진실 중의 하나이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압량리 전경 
 
▲ 압량리 전경 
 
▲ 압량리 들판 
 
▲ 독시밭구미골 
 
▲ 독지암골 
 
▲ 두룩산(장대산)
 
▲ 들누깃골
 
▲ 만줏골터
 
▲ 만줏골
 
▲ 삼문깐
 
▲ 칼치도가리 
 
▲ 우물터가 있던 곳
 
▲ 우물터가 있던 공장 
 
▲ 제1병영유적지
 
▲ 제1병영유적지
 
▲ 압량리 마을회관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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