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8 오전 9:48:45
◆ 프롤로그
하양읍 한사리는 조선 조 하양현 읍치(邑治)였다.
▲ 한사리 마을 전경
본향(本鄕)이 자인현이고, 수양대군의 오른팔이며, 15세기 관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시인 겸 문장가로 꼽히는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하양현 동헌 동쪽에 있던 용벽루를 보고 ‘하양(河陽)의 용벽루(聳碧樓)’라는 시를 남겼다.
하양의 용벽루 河陽聳碧樓(하양용벽루)
바라보니 나는 새는 구름 속 멀리 들어가고 望中飛鳥入雲遙(망중비조입운요)
누각은 텅 빈 하늘 반공중에 꽂혀 있는데 樓在虛無揷半?(누재허무삽반소)
장한 절개 긴 대나무는 천 줄기 옥창이요 壯節脩篁千玉?(장절수황천옥삭)
가는 허리 약한 버들은 만 가닥 금실이로다 纖腰弱柳萬金條(섬요약유만금조)
청천의 좋은 시구는 지금 그 어디 있는고 晴川句好今安在(청천구호금안재)
고목의 재주 높은 건 자랑할 것 없다마는 孤鶩才高不用驕(고목재고불용교)
굽어보고 쳐다보며 많은 생각하노라니 俯仰登臨多少思(부앙등임다소사)
산 중턱엔 또 아침 내내 빗발이 날리누나 半山飛雨又崇朝(반산비우우숭조)
- 한국고전번역원 임정기 (역) 2008
한사리는 이 용벽루가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 중기까지 하양현 관아가 있는 읍내(邑內)였다. 1960~70년대에는 경북 일원의 양파재배를 선도한 앞서가는 농촌 마을이었고, 오늘날에는 농가가 60여 가구, 비농가가 70여 가구가 사는 근교 농촌마을이다. 산천은 의구하건만 동헌과 서거정이 노래한 용벽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어진 현감의 선정비와 인근에 향교와 육영재가 남아 있어 한사리가 하양현의 구읍내 임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긍지와 전통을 소중하게 지켜오는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 한사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마을 서쪽 구릉 일대(산 14번지, 460번지 일대)에 삼국시대 분묘유적인 한사리 고분군이 있다. 신지 남동쪽 능선 정상부에 있는 석곽묘 고분 2기에서 삼국시대 경질 토기 편이 나왔다. 구천지 북편 능선(산 20, 산 22번지)에도 삼국시대 분묘유적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고려 중엽 때 곽(郭)·박(朴)·채(菜) 씨들이 입향했다고 전해진다. 1510년 경주최씨가 입향하여 이후 한동안 경주최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의 역사
한사리는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하양현의 읍내였다. “영락(永樂) 병신년(1416)에 현감 송을개(宋乙開)가 용벽루(聳碧樓)를 창건하였다. 지금은 없다.”라는 『하양현지』(1780년대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 출처 미상, 삼성현역사문화관 번역) 기록, 서거정의 「하양 용벽루」 시를 볼 때 조선 초기부터 한사리는 하양현의 향청이 있던 읍내였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정미년(1607)에 다시 현을 설치하고 ‘한사동 관아’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숙종 조 을미년(1715)에 현감 이의장이 읍의 터를 남쪽으로 5리 거리에 있는 천천면(泉川面, 현 하양읍 도리리) 옮겼다. 이후 18세기 말에 하양현 북면 한사리(翰斯里)가 되었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볼 때 한사리는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300여 년 동안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 하양현 읍치(邑治)였다.
▲마을 이름 한자표기를 ‘한사리(翰斯里)’로 바로잡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군·면 통합, 관할구역 변경, 명칭변경 등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을 단행했다. 한사리 한자표기는 일제시대인 1911년 전국동리통폐합 때 종전의 ‘한사리(翰沙里)’에서 땀 한(汗) 모래 사(沙)자를 쓰는 한사리(汗沙里)로 바뀌었다. 어려운 한자를 쉬운 한자로 바꿨다는 설과 일제가 한사리에서 인물(선비)이 많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붓을 상징하는 깃털 한(翰)을 땀 한(汗)으로로 변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북면 한사리(北面 翰斯里)로 표기된 호패문서(사진제공 =최재명 씨)
한사리 한자 표기는 1995년 한사리(翰斯里)로 바로잡았다. 정정은 경주최씨 한사 문중 종손인 최재명 씨가 대대로 내려오는 고서들을 정리하다 고조부의 호패문서를 발견하여 가능했다. 광서 2년(1896년)에 하양 현감이 발행한 호패문서에 북면 한사리(北面 翰斯里)로 기록되어 있었다. 재명 씨는 종친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과 논의했고, 최재림 씨 등이 나서서 행정당국에 바로 잡을 것을 요구했다. 1995년 한자 표기를 한사리(翰斯里)로 정정하여 마을 정기를 회복했다.
▲ 한사리 별칭 - 구읍내·굽내·행리·하리·사창마을
한사리가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1876)』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한사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한사리는 지형이 새 날개와 같다는 뜻으로 ‘한사리(翰斯里)’라 불렀으나, 18세기 중엽 한사리(翰沙里)로 바꾸었고, 이후 ‘한사리(汗沙里)’로 한자표기를 바꾼 것을 1995년에 다시 한사리(翰斯里) 바로 잡았다. 또 한사리는 하양현의 향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구읍내’ 혹은 ‘굽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 큰 은행나무가 있어 ‘행리’라고도 하고, 고을 동쪽에 살구 마을이 있어 행동동(杏東同), 교리 아래쪽에 있다 하여 ‘하리’, 사창(社倉)이 있어 ‘사창마을’로 명명되기도 했다.
◆ 삶의 터전

▲ 한사리 지명지도
▲위치와 환경
한사리(翰斯里)는 하양읍 소재지에서 북동쪽인 와촌면 방면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해 있다. 마을 앞에 지방도 제919호가 관통하고 금송로와 한사들길이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면적은 약 1.5k㎡이고,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중앙으로 구천골에서 시작된 도랑이 흐르고, 서쪽 남산 아래로는 교리에서 내려오는 소하천이 한사들로 이어진다. 남쪽에는 한사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 앞 소하천 제방에는 왕버들을 심어 숲을 이뤘는데 지금은 노거수가 되어 몇 그루 남지 않았다. 한사리에서 태어나 가장 오랫동안 한사리에 살고 있는 최재림 경산시 노인회장은 “이 숲은 외부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게 마을을 보호할 목적으로 조성한 ‘조산숲’이라며 “어릴 적에는 소를 내놓는 그늘로 사용하거나, 동네 화전을 하는 장소”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정월 대보름날이면 이곳에서 동제를 올리고 있다.

▲ 조산숲 노거수
▲산과 들, 골의 이름
한편, 지금은 거의 잊혀진 산과 고개, 논과 들판도 각각 이름이 다 있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모양이 부채를 펼쳐 놓은 것 같은 선자봉(扇子峯)이 있다. 이 선자봉은 대별봉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굽내 동북쪽 못 위 고개를 목고개라 하였고, 굽내 서북쪽 대학리 용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한곡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별이라는 벼랑 복판에 지형이 송장을 넣는 관처럼 생겼다는 영장배미, 영장배미 동쪽 조선시대 하양현 관리들의 옷을 빨아 준 사람이 농사를 지었다는 서답사래, 서답사래 동북쪽 말사래, 한사 남쪽 옛날 땅의 번지를 매길 때 황(荒) 자에 해당했다는 황청지기, 황청지기 동쪽에 있는 너너플, 모그섬이 있던 모그섬들, 사창이 있던 사창밭, 영장배미 남쪽에 널로 다리를 놓았다는 너더리, 너더리 동쪽 상승말리, 대별 남쪽 하양현의 장방이 있었다는 자방골, 굽내 동쪽 옛 하양현 관아의 문 앞이었다는 허문앞들 등의 논과 들판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다.
◆ 유물과 유적
서거정이 노래한 동헌 동쪽 용벽루, 경치가 아름다워 주민들이 즐겨 찾았다는 관서정(觀逝亭)은 지금은 없어지고 이름만 남았다. 마을 가운데에 동헌 터는 개인 주택이 들어서 있고, 고을 원님이 살던 집도 ‘관전댁’으로 불리고 있으나 개인소유가 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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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한사동 지적도(파란색이 구 하양현 공청객사 터)
그러나 현감 최제(崔濟) 선정비(1657년 건립), 현감 황택(黃澤) 선정비(1670년 건립), 현감 정중조(鄭重朝) 선정비(1697년 건립), 현감 이복인(李復仁) 선정비(1710년 건립)가 마을 입구 조산숲에 남아 있다. 아울러 교리에 있는 향교와 마을 앞 남산에 자리한 육영재가 조선 조 하양현 읍내의 품격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517번지에는 사당도 있었는데, 지금은 훼철되었다.
▲ 조산숲과 선정비
▲용벽루(聳碧樓)
병신년(丙申, 1416년)에 현감 송을개가 하양현 동헌 동쪽에 세웠다. 서거정이 ‘하양의 용벽루’라는 시를 남겼다. 용벽(푸른 하늘로 솟아오름)이라는 누각 이름과 “누각은 텅 빈 하늘의 반공중에 꽂혀 있네.”라고 표현한 서거정의 시구를 볼 때 용벽루는 높게 지은 웅장한 누각으로 추정된다. 향토사에 밝은 최재림 회장은 용벽루가 있던 위치를 하양농협공판장 동쪽 근처로 추정했다.
▲관서정(觀逝亭)
한사리 남쪽에 세운 정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하양현 편에 “현의 남쪽 4리 지점에 있다. 앞에는 큰 냇물이 평평한 넓은 들을 감돌아 흐른다. 영락 갑진년(1424)에 현감 채륜(蔡倫)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치가 아름다워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홍수로 정자는 없어졌으나 지금도 이곳을 남쪽 정자가 있던 곳이라 해서 남정지(南亭址, 현 동서2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육영재(育英齋)
한사리 남산에 있다. 순조 23년(1823)에 현감 이태승과 김이덕, 채석이, 허장 등 하양 지역 선비들이 하양의 인재 육성을 위해 마음을 모아 건립한 교육기관이다. 훈장 1인, 유사 2인 체제를 기본으로 일제시대인 1938년까지 70여 년간 운영됐다. 훈장 75명, 유사 218명이 재임했고 사마시 합격자 배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기문으로 육영재 상량문과 육영제기(育英齊記)가 있다. 상량기문에 “하양은 작은 고을이지만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으며 충효를 배우고 익혀 재상과 장군이 나오는 어뜸 고을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같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여 지역과 나라가 신음할 때 분연히 일어나 의군(義軍)을 조직하여 호국 애족에 앞장섰던 고장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라고 하양현의 특성을 규정했다.
▲ 육영재 전경
▲팔용재(八龍齋)
한사리 551번지에 있다. 경주최씨 한사리 입향조 최곤(崔崑) 공의 10세손인 최명락(崔命洛)의 팔재종(八再從)이 순조 32년(1832)에 창건한 재실이다. 창건 후 1937년까지 사장(師長)을 모시고 유학을 가르치는 최씨 문중의 서당으로 사용됐다. 2005년에 후손인 최규식(崔圭軾) 씨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정에 수령 200년이 넘은 학자수(學者樹) 회화나무가 학풍과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 팔용재와 회화나무
▲동산재(東山齋)
하양향교 인근인 교리 365번지 대나무 숲에 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최문환 박사의 증조부인 최경규(崔景珪) 처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우모소로 1932년 무렵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정면)正面) 쪽으로 온돌방 2칸과 대청 1칸을 연접시킨 후, 좌측 온돌방 뒤로 2칸 대청을 달아내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건물 주위에 쪽마루를 둘렀으며, 우측 마루방 둘레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설치하였다. 전정 양쪽에 학자수 은행나무를 한 그루씩 심고 가운데에 연못을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었다. 완산(完山) 이후(李?)의 춘우당기(春雨堂記), 후손 최종만(崔鍾萬)이 쓴 동산재기(東山齋記), 이후와 채경원(蔡景源)의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와은(臥隱, 조선 후기의 학자, 장위항, 자인현감) 동산서회(東山書懷) 등이 전해지고 있다.
▲ 동산재
◆ 한사동 최부잣집 인물들
경주에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대명사 경주 최부잣집이 있듯이 한사동에도 최부잣집이 있었다. 만석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천석꾼의 넉넉한 살림과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으로 자식들을 동량으로 키우고 인심을 잃지 않았다.
한사동 최부잣집은 제10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최문환(崔文煥) 박사의 부친인 우산(友山) 최상연(崔相淵 1899~1969)공의 집이다. 그는 천석꾼으로 미대 어른, 미대 댁으로 불렸다. 조선 중종 때 경주에서 한사동으로 이주한 경주인 최곤(崔崑, 경주 최씨 한사리 입향조)의 후손이다. 그의 증조부(振華)는 덕행이 많았고, 조부(景珪)는 근검절약으로 큰 부를 모았다고 한다. 최 공은 검재 조병희(曺秉羲)에게 수학하고 만년에는 낭산 이후(李?)의 문하에서 형설의 공을 쌓았다. 시(詩) 364수 관동기행문 등을 실은 『우산문집』이 전해진다. 아들 넷과 딸 여럿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최 총장이다.

▲ 최문환 전 서울대 총장(사진:서울대 홈페이지)
최 총장은 1916년 한사리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제1호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희대학교 상학과 교수, 고대 정법대 교수, 서울대 상과대 교수, 대학장을 거쳐 제10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심사위원, 고등고시 위원장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를 했고,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밤새 폭음을 자주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75년 국무총리에 내정된 상태에서 5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 최문환 총장 생가
미대 댁의 둘째 아들은 독립운동가 최인환(崔仁煥)이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에 다닐 때(1935년)부터 일본인 교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학생을 응징하는 등 항일투쟁 열혈아였다. 서울대 약학과를 나와 유한제약에 근무하면서 폭탄 제조를 시도했다. 1944년에는 총독 방문 시 총독을 제거하기 위해 독약을 제조했다. 총독 방문이 취소되자 동지들과 과학자로서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했다. 거사를 단행하기 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 등으로 30살에 요절했다. 유족들이 그가 25살에 쓴 유고 『근대 과학 사상사』를 책으로 출판했다. 셋째 아들은 최임환(崔壬煥) 전 성균관대 교수이다. 그는 우리나라 재정학의 권위자로 한국재정학회장을 역임했고, 경제학 대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최초로 완역했다.
미대 댁은 농지개혁 이전에 소작농들에게 보유 토지 대부분을 넘겼고, 동산장학재단을 만들어 육영사업에도 기여를 했다. 무학중학교의 모태가 된 동산학원도 설립하였으나 개교 전에 이임춘 신부에게 매각했다. 한사리에 양파재배법을 보급했다. 1950년대 창령 성씨 가문에서 일본으로부터 양파재배법을 도입해 양파농사를 지어 높은 소득을 올렸다. 성씨 가문과 교류가 있던 미대 댁은 사람을 보내 양파재배법을 배워오도록 했다. 이후 한사리에 양파재배법을 보급하여 한사⋅와촌들 일대는 양파 주산지가 되었다. 당시 한해 양파 농사를 지으면 재배한 논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파는 고소득 작물이었다. 양파재배는 한사리를 부촌으로 만들었다. 이후 양파재배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는 일이 생겨났고, 이임하는 경산군수들이 새로 부임하는 경북도 곳곳에 양파재배를 전파했다. 이렇듯 최부잣집은 선각자의 안목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다했다.
◆ 한사리가 배출한 인물
한사리는 일제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이름 한자표기를 바꾸었지만, 현대에 들어 많은 학자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앞서 언급한 최문환 총장 형제 외에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 한국 사회학회장을 지낸 최홍기(崔弘基) 전 서울대 교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고 최재찬(崔在瓚) 영남대 행정학과 교수, 최찬환(崔燦煥) 서울시립대 건축과 교수, 최만기(崔晩基) 전 계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최연숙(崔姸淑) 영남대 독어독문과 교수, 4차산업혁명 권위자이자 성균관대 부총장인 최재붕 기계공학부 교수 등 100가구도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참 많은 학자가 나왔다. 그리고 제9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고 최영수 사도 요한 대주교, 고 최문기 한국무역협회 상무이사, 최기원 전 육군 소장, 최태일 전 한국노총위원장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많은 동량들이 한사리에서 배출됐다.
◆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
현재 한사리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사람은 최재림 경산시노인회장이다. 최 회장은 한사리에서 출생하여 군 복무기간 이외에는 한사리를 떠난 적이 없다. 마을의 전통과 미풍양속을 지키는 소나무가 되어 마을 일과 지역 일에 앞장서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도 전교, 유림회장, 번영회장, 종친회장, 노인회장 등 다양한 봉사 직책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최재림 회장이 육영재 총회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육영재 훈장 시절)
현재 한사리 중심부에는 고색창연한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최 총장의 생가와 팔용재 사이에 100년이 넘은 고재로 지은 ‘밝달 한의원’과 ‘무문(無門) 선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들은 한사리 출신 최수현 씨가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20여 년 한의원을 하다, 2006년에 귀향하면서 100년 이상 된 고택들을 옮겨와 지은 집이다. 그는 6대째 이어오는 한의사로서 고향에서 인술을 베풀며, 팔용재를 중건하는 등 한사리의 전통을 보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 최수현 밝달한의원 원장
이외에도 경주최씨 한사 문중 종손인 최재명씨가 계명대학 사무처장으로 퇴임하고 마을에 거주하며 문중 일과 마을 일을 돕고 있다.
▲ 한사들 전경
◆ 에필로그
한사리는 조선 조 초·중기 하양현의 읍치, 인근에 하양향교와 육영재가 자리한 교촌, 상당 기간 경주최씨 집성촌으로서 전통과 긍지를 지켜오는 마을 공동체다. 유구한 세월과 시대의 흐름으로 60여 호에 이르던 경주최씨 가구는 이제 9호만 남았고, 모두가 농가이던 마을이 반농반도의 근교마을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사리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조산숲에 모여 동제(洞祭)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꿈꾼다.
그렇지만 도시화와 개인주의 물결은 한사리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마을 북쪽에 골프 연습장이 들어와 마을의 경관과 고요를 해치고 있다.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공익이 갈등을 빚는다. 전통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조산숲에서, 한사리 주민들이 전통과 문화에 대한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길 기도했다.
글 : 최상룡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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