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토지 수탈 전초기지가 되었던 용암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6) - 용암리

2024-11-18 오전 9:42:48

▲ 용암리 전경
 

 

프롤로그

 

용암리는 압량읍 소재 마을 중 비교적 늦은 시기인 조선 후기에 조성된 마을이다. 일제시대와 산업화 시대를 거쳐오면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한 지리적 환경으로 외풍을 고스란히 맞아가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특히, 넓은 농토를 소유하다 보니 일제시대 일본인이 제일 먼저 들어와 토지를 수탈하였다. 용암리에 얽힌 그 수탈의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용암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용암리는 압독국 시대 오목천 북쪽 건흥촌에 속한 들판이었다. 수천 년 동안 들판으로 존재하다가 19세기 중엽 마을이 형성되어 정식 마을로 등재되었다. 용암리가 등재된 최초의 자료는 경산현지(1871)인데, 당시 경산현 동면 용암리로 관문에서 10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바뀌면서 경산군 동면 용암동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이 신설되면서 압량면 용암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이 체제는 이어지다가 1988년 압량면 용암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읍 용암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용암과 물뜸 두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마을이 확장되면서 구분이 어렵다.

 

▲ 1912년 용암리 지적도 
 

 

용암·용바우

 

▲ 용암 마을 

 

용암리는 용바우가 있던 곳이라서 용암이라 하였다. 용바위는 용암리 중심에서 서남쪽 내리 쪽에 있다. 처음 우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각단 서남쪽 제일 끝에 용이 등천했다는 용두산(용더미)이 있는데, 실제로는 오목천 강 건너 내리 쪽에 있는 절벽이다. 원래는 용암리 영역에 속했는데, 일제가 마을의 구역을 정하면서 내리에 편입시켰다. 여기에 있는 바위가 용을 닮아 용바우라고 불렀다. 1911년 이곳에 9가구 살았다.


 

▲ 물뜸 마을

 

물뜸

용암 서쪽 오목천을 낀 곳은 장마가 지면 늘 물에 잠겼다고 한다. 여기에 용암제방이라는 둑을 쌓고 사람들이 살았는데, 물이 자주 침수하여 물뜸 또는 물뜨미라고 했다. 용암 각단보다는 나중에 조성되었는데, 현재는 용암리의 중심 각단이다. 1911년 이곳에 29가구 살았다. 현재 용암리는 경산과 고속도로에 인접하다 보니 주거지 서쪽으로 물류창고 및 공장이 많이 들어와 있다. 주민들은 110여 가구로 구성되어 있고 들판에는 복숭아, 포도, 대추 등을 생산하고 있다.

 

▲ 용암리 지명 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 오목천가에 있는 용두산(용더미)

 

▲ 용두산(용더미)

 

▲ 용더미 용두소
 

 

용암리에는 용암 동남쪽 오목천가에 야트막한 등성이가 있는데,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용두산(용더미)이라 불렀다. 이 산에 용암(龍岩, 용바우)이 있는데 그 아래 용두소(龍頭沼)에서는 용이 등천했다고 한다. 용두소를 장산지(1909)경산군지(1971)에서는 용암연(龍岩淵)이라고 하였다.

 

▲ 용암리 동쪽 들판 
 

 

용암리의 들판은 오목천 북쪽에 자리하여 건흥들판과 함께 경산에서 가장 비옥하여 예전부터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논으로는 현흥리의 건흥들 북쪽 줄부리가 있어서 줄부리논, 줄부리 북쪽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장구배미 옆 횃대처럼 길어서 횃대배미, 횃대배미 북쪽 뱀이 많아서 진상고, 진상고 북쪽 물이 사방에 있어 섬처럼 생겼다고 하여 섬배미, 섬배미 북쪽 메기가 많아서 미기초당 등이 있었다. 또 현흥리의 건흥들판을 용암리에서는 고롱들이라 하고, 진량 만세량보에서 내려온 물을 대는 만시랑봇들 등이 있었다.

 

▲ 용암리 서쪽 들판 


 

그러나 1964년 압량 당리리에서부터 시작된 경지정리 사업으로 이러한 논과 들판 이름들은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이러한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는 마을이다 보니 일제시대 경산에서 가장 먼저 일본인 농업이민이 들어와 그들만의 학교를 만들어 자녀를 교육하는 한편, 넓은 압량 들판을 수탈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 용암리 북쪽 들판 
 

 

 

일본인이 농업이민으로 들어온 경위

 

▲ 1910년대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출장소(출처 : 동척10년사)
 

 

일제는 1904조선이주안내목록(山本庫太郞)을 출간하여 전국 토질을 조사한 후 농업, 과수업 등 지역별 특징을 일본인들에게 안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은 조선으로 이주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로부터 각각 출자를 받아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를 설립하였다. 대한제국은 역둔토 등 국유지 17,700정보를, 일본은 자금을 투자하였다. 동척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전국의 토지를 헐값에 매입하여 일본 농민들에게 배당하였다. 일본에서 소작인으로 살던 농민들은 땅을 헐값에 배당한다는 모집 공고를 보고 전국적으로 응모하여 조선에 들어와 지주가 되었다. 이 이민정책을 주도한 것이 바로 동척이었다.

 

▲ 1920년대 대구근교 동척 소유 연초 농장(출처 : 동척10년사)
 

 

당시 농업이민은 자유이민과 보호이민으로 구분되었다. 자유이민은 스스로 자금을 마련하여 조선에 와서 토지를 구입하여 자작을 하거나 조선인 소작인을 붙여 농사를 짓는 자작농계급과 일본인 대지주의 모집으로 조선에 와서 지주 소유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계급으로 나뉜다. 이 자유이민은 1936년 당시 5,000명 정도였고, 주로 남한 지방에 많았다. 보호이민은 동척 소유의 농지를 이자를 주고 할당받아 자작하거나 소작하였다. 이 보호이민도 농지를 2정보(6,000) 할당받은 제1종이민과 10정보(3만 평)를 할당받은 제2종이민으로 나뉜다(二十五年! 朝鮮たか?, 1936). 동척이 보호이민을 처음 모집한 것은 1910년이었다. 당시 1,235호 응모하여 160호가 선정될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이후 제2(1911) 720, 3(1912) 1,167, 4(1913) 1,330호가 선정되었다. 5회부터 점차 숫자가 줄어들다가 1936년 보호이민은 총 3,895가구였다(東洋拓殖株式會社三十年誌, 1939).

 

 

압량의 농업이민자

 

▲ 부산항에 도착한 일본인 농업이민자(출처 : 동척10년사)
 

 

당시 압량면에 이주한 일본 농민은 제3회 때 선정된 제1종이민자로 총 31가구였다. 이들은 거의 일본 가가와현 육향촌(六鄕村) 출신이었다. 이들이 처음 할당받은 토지는 압량에서도 가장 비옥한 건흥들판 186천 평이었다. 이외 제2종이민자도 여럿 있어 건흥들판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 이들은 주로 용암리, 금구리, 현흥리에 주거지를 마련했는데, 용암리는 이 세 곳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 일본 농업이민자 소유의 사과 농장(출처 : 동척10년사)
 

 

이들이 맨 처음 들어와 한 것은 기존 조선인과의 협력이었다. 풍속도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친밀감을 드러내면서 우량 종묘를 보급하고, 농기구를 빌리는 등 친밀감을 조성하면서 점차 조선인을 소작인으로 고용하였다(종묘 보급에 대해서는 하양 환상리 편에서 다루겠음).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사토오 시게유키(佐藤重行)와 사토오 마사카즈(佐藤政一) 두 형제였다. 이들은 토지를 60정보 소유한 대지주였다. 또 다카사키 카즈사(高崎和佐)는 이시카와현(石川縣) 군서기로 있다가 상주군청 서기로 근무하였다. 1916년 잠시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제2종이민자가 되어 1919년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압량면 압량동 22번지 6,000평을 배당받아 사과 농장을 경영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또 경산 중방동 344번지에 과수업에 필요한 물품을 중개 매매하는 경북원예주식회사을 설립하고(조선회사표), 1938년 대구과일동업조합 조합장으로 선정되는 등 과수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부산일보, 1938). 이런 이력으로 경산에 이주한 일본 농민들을 대표하여 일본 왕에게 바치는 헌곡전(獻穀田) 봉경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 1930년 압량의 헌곡전과 육향조합을 소개하는 일본 신문 기사(기사 제목은 '풍염의 가을날 찾은 헌곡전의 압량면, 진귀한 육향학조'라 적혀 있다.)


 

헌곡전(獻穀田, 겐고꾸덴)은 일본왕에게 바칠 곡물을 생산하는 논밭을 가리킨다. 일본 왕은 매년 가을 쌀 수확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하는 신지 축제를 여는데, 일본인은 주변의 농경지 중 가장 비옥한 곳을 골라 헌곡전으로 선정하고, 여기서 생산된 쌀을 왕에게 바쳤다. 참고로 1930년 압량면에 살고 있던 일본인은 33세대에 남자 88, 여자 72명으로 모두 160명이었다(경상북도통계연감).

 

 

현흥초등학교의 불편한 진실

 

▲ 육향학교조합규정을 마련했다는 신문 기사(부산일보)
 

 

191331가구로 구성된 일본 이민들은 건흥들판의 중심 마을인 용암리에 학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본은 학교조합을 만들어 학교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우선 1913428일 육향학교조합을 만들고, 그해 73일 육향공립심상소학교(六鄕公立尋常小學校) 설립을 위한 인가를 받았다. 관리 구역은 현흥·금구·용암·신촌·의송·내동·압량·인안·신대·부적·조영·삼풍·갑제·평산·사동·하양 내환상동 등 경산현 동면 지역이었다(조선총독부 관보1918).

 

▲ 1910년대 일본인 농업이민자들이 세운 일본인 소학교(출처 : 동척10년사)
 

 

이 학교는 먼저 용암리에 가교사를 건립하였다. 교명은 이들의 고향인 육향촌에서 따왔다. 용암리에서 약 4년 동안 운영하다가 19171228일 건흥동(현 현흥1)으로 이전하여 정식 교사를 짓고 일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당시 부지는 514, 건평은 교사, 창고, 변소 등을 포함하여 46평이었으며, 학생 수는 30여 명, 교직원은 23명이었다. 그 후 1941년 육향공립국민학교, 1946년 압량북부국민학교, 1956년 마을 이름인 현흥국민학교로, 1996년 현흥초등학교로 바꾸었다.

 

▲ 용암리에서 바라본 현흥초등학교 원경 

 

▲ 현흥초등학교 
 

 

현재 현흥초등학교는 바로 압량 들판을 수탈하러 온 일본 농민들이 자녀를 교육하기 위하여 세운 육향공립심상소학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부끄럽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에필로그

 

▲ 용암리와 오목천을 가로지르는 KTX 철로 
 

 

일제시대 일본 농업이민자들에 의해 수탈을 당했던 용암리는 이제 각종 공장이 들어와 들판은 물론 주거지까지 침범당하고 있다. 부적리에서 시작된 압량의 도시화가 동쪽으로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용암리 용더미를 바라보며 한 번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

 

/사진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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