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2 오전 9:23:05
▲ 압량읍 금구리 전경
◆ 프롤로그
대추는 조선시대 경산의 대표적인 토산물로 왕실에 진상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등에도 경산의 토산 진상품으로 대추가 등재되어 있다. 경산에서 대추를 처음 대량으로 생산한 곳은 압량읍 금구리였다. 현재 경산 대추는 전국 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 이중 금구리에서 40%를, 나머지는 기타 지역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지난 2006년부터 ‘경산대추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경산 대추 생산의 중심 마을 금구리에 얽힌 대추 이야기를 살펴보자.

▲ 금구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금구리는 조선시대 현창리(현 현흥1리) 들판에 있던 작은 각단이었다. 현창리 사람들이 샛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어 금구리와 신광리 두 개의 마을이 되었다. 『경산현지(1871)』에 처음 등재되어 19세기 중엽 정식 마을이 되었다.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되면서 경산군 동면 금구동과 신광리가 되었다. 1911년 일제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두 마을이 통합되어 경산군 동면 금구동이 되었다. 1914년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압량면이 신설되자 경산군 압량면 금구동이 되었다. 1988년 압량면 금구리가 되었다가 2020년 압량읍 금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금구와 신광 두 개의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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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리 지적도(1912년)
▲ 금구동
▲ 금구마을 전경
금구동(金龜洞)은 금호강 구미(후미)에 있다고 하여 금구(琴溝)라 하였다고도 하고, 금호강과 만세량천(샛강) 사이 들판이 거북이를 닮아 금호의 ‘금’과 거북 ‘구’를 써서 금구(琴龜)라 하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은 박상옥이라는 사람이 1900년대 초 홍수가 났을 때 마을이 앞뒤로 흐르는 강물로 둘러싸여 마치 금 자라 모양을 하고 있어 금구(金龜)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후대에 윤색된 것이고, 실제는 마을 강가 모래톱이 햇살을 받으면 반짝이는 금처럼 보이고, 마을 북쪽 샛강 너머 둘안들의 형상이 거북이 등 모양이어서 금(金)에 거북 구(龜)를 써서 금구라 하였다. 왜냐하면, 1871년 마을 이름이 『경산현읍지』에 처음 등재될 때부터 금구(金龜)였기 때문이다. 처음 공씨가 들어왔고, 이후 순천박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1912년 당시 26가구 살았다.
▲ 신광리·새터
▲ 신광리 전경
신광리(新光里)는 금구 서남쪽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어 새태라 부르다가 1871년 『경산현읍지』에 신광리로 등재된 마을이다. 일설에는 금구 동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지만, 1911년 지적도에 금구 동남쪽에 마을은 없다. 금호강과 샛강 사이에 금구동이 먼저 조성되었다가 점차 서남쪽으로 확장하면서 하나의 독립된 마을이 되었다. 1912년 당시에도 금구리와 신광리는 거의 맞붙어 동네 구분이 어렵다.

▲ 금구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둘안들판
금구리는 북쪽으로 금호강, 남쪽으로 오목천, 그 사이로 흐르는 만세량천(샛강)가에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노봉이라 부르는 작은 둔덕을 제외하고는 마을 전체가 평지로 되어 있어 예로부터 홍수가 나면 마을이 물에 잠겼다. 들판으로는 금구 북쪽 샛강과 금호강 사이 들판은 섬처럼 보여서 섬챙이, 금호강의 둑안에 있던 둘안들, 금구리 앞 금호강가에 있는 앞갱븐들 정도가 전했는데, 현재는 전체를 통틀어 금구들이라 부른다. 또 오목천과 샛강 두 냇물이 한데 합치면서 생긴 웅덩이를 양합소(兩合沼)라 하였고, 북쪽 금호강가에는 도래웅덩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 금구리 들판
주민은 진주강씨, 순천박씨, 김해허씨, 경주김씨 등 각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진주강씨는 감찰어사를 지낸 강용연(姜龍淵)의 후손들이고, 순천박씨는 병조참의를 증직받은 박매필(朴梅弼)의 후손들이다. 그의 12세손 박순규(朴順圭, 1871년생)가 금구동에 살다가 중방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학식이 높아 사망했을 때 달성군 양동에 살던 성기덕(成耆悳, 1884∼1974)이 시를 짓기도 하였다. 김해허씨는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허정(許禎)의 후손들이다.
이러한 마을이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하는 토산품 연실을 생산하였고, 근대 이후에는 대구·경북 사과 재배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추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 조선시대 왕실 진상품 연실(蓮實)의 주생산지 금구리
▲ 금구리 연밭 전경
『여지도서』와 『경산현읍지』에 따르면 경산의 토산 진상품으로 연실을 제일 먼저 기록해 놓았다. 연실은 흔히 연밥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약재로 사용하였다. 경산 지역은 전국적으로 저수지가 많은 곳이라 연의 재배가 용이하였다. 대표적인 저수지가 압량 선화리의 건흥지(연지), 진량 내리리의 연화제, 자인 울옥의 연화제 등이었다. 선화리 연지는 경산현, 진량 내리리 연화제는 하양현, 울옥리 연화제는 자인현에 속했다. 이중 선화리의 연지가 가장 넓고 커서 연실의 생산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 저수지는 농업용수를 겸하면서 자연적으로 연을 재배한 곳이었다. 인공으로 논에 물을 채워 연을 전문적으로 재배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압량 금구리였다. 1912년 금구리 지적도에 모양이 길쭉하게 생긴 약 5,300평 크기의 저수지가 표시되어 있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경산의 진상품인 연실의 주 재배지 중의 하나였던 연밭이었다. 1960년대 경지정리 과정에서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최근 일부가 하우스나 밭으로 변하고 나머지는 아직 연을 재배하고 있다.
언제부터 연밥을 진상품으로 올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진상품으로 연실은 없는데, 『경산현읍지(1758)』부터 등재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연실을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산현의 대표적인 저수지인 건흥지(연지)의 축조 시기와 일치한다. 건흥지는 현재 연지로 부르는데, 기록상으로는 건흥지라 하였고, 현지에서는 연이 많이 난다고 하여 연지라 불렀다. 이 저수지는 임진왜란 이후 건흥리로 이주한 정응지라는 사람이 축조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자료에도 건흥지는 『경산현지(1758)』부터 등재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금구리의 연밭도 이 시기에 축조되어 연밥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 일제시대 사과의 주생산지 금구리
조선 후기까지 연실을 생산하여 왕실에 진상하던 금구리는 대한제국 때 새 원예작물이 들어오면서 환경이 바뀌었다. 바로 일본에서 들어온 사과였다. 사과는 우리나라에서는 능금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내금(來禽) 또는 임금(林檎)이라 적었다. 능금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자료는 중국 북송의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와 보고 들은 것을 쓴 『선화봉사고려도경』 토산물 편이다. 여기서 능금을 내금(來禽)이라 하였는데, 왜국(倭國)에서 들어와 맛이 싱겁다고 하였다. 맛이 좋아 날짐승을 불러들이므로 내금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먹는 사과는 이 능금과는 품종이 다르다. 일본은 평과(?果)라고 하였다.

▲ 일제시대 능금 홍보 사진
우리가 현재 사과라고 일컫는 품종은 유럽의 개량종인데, 1884년 일본 동경에 있는 농학사 진전(津田)이 기증한 사과 묘목을 인천 일본 영사관 구내에 심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대구에는 1892년 미국인 선교사 존슨이 남산동 자택(제일교회 맞은 편)에 심은 것이 최초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사과는 정원수 정도로 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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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슨이 심은 사과나무(출처 : 신정환 블로그)
사과를 과수 농업에 처음 적용한 사람은 군마현 출신 미와 조테츠(三輪如鐵), 시즈오카현(靜岡縣) 출신 가게야마 히데끼(影山秀樹), 나카하라 후사이치(中原房一) 등이었다. 이들 일본인들이 1904년과 1910년 사이 대구 자신의 집 뒤뜰이나 경산의 밭에 사과나무 몇 그루를 심은 것이 경북 사과의 기원이었다(『慶北産業誌(1920)』). 그 후 1912년 압량에 일본인 농업이민들이 들어오면서 사과 묘목을 압량면 압량·용암·금구·건흥리 일대 들판에 심어 사과 농장을 만들었다. 조선인으로서는 경산 삼남동에 살던 안병규씨가 1914년 고산 자신의 밭 30,000평에 1천9백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것이 최초였다. 이중 금호강과 인접한 금구리의 토질이 좋아 사과 재배지로 적절하여 금구리 일대 들판에 사과밭이 많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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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과물동업조합 운임표(출처 : 신정환 블로그)
일제 당시 경산군 주요 과수로 사과 15,445그루, 배 278그루, 복숭아 503그루, 감 9,507그루로 단연 사과가 제일 많았다. 생산량도 112,771관(422.9톤)으로 대구과물동업조합에 가입하여 조선 각지와 일본 본토까지 이출되었다(『경북대감』, 1936). 1962년 농림부 통계를 보더라도 경산에서 생산한 사과가 1천4백만관(52,500톤)으로 경북의 50%를 차지하였다. 또 1971년 경산시 통계에도 총 과수 농가 1,600여 호, 연간 생산량 46,724톤에 이르렀다(『경산군지』). 이중 거의 절반 이상이 압량들판에서 생산되었고, 그중에서도 금구리를 비롯한 압량의 사과밭에서 제일 많이 생산했다. 이처럼 금구리는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경산을 대표하는 사과 생산지였다.
◆ 대추 생산 메카로 거듭난 금구리
1910년대부터 사과 재배를 시작하여 1960년대 절정에 달한 압량읍 금구·용암·압량리, 하양읍 환상·대조·부기리를 비롯한 경산 일대 사과 생산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 들었다. 그 이유는 기후 변화와 사과나무의 노령화를 들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산이 공업지구와 인구 증가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환경 변화가 사과 농사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된 원예작물이 대추였다.
▲ 금호강 주변 들판 전경
대추는 고려 중기 일본에서 들어왔는데(『고려도경』), 수백 년 사이 경산까지 퍼졌다. 특히, 경산현 동면(압량)은 금호강과 오목천 주변 비옥한 충적 평야가 있어 대추 생산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사실 대추는 연실을 왕실에 진상하던 훨씬 전부터 경산의 대표 토산물이자 진상품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산현’ 편에 경산의 토산물 중 하나가 대추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에도 경산의 토산물로 대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대규모로 대추밭을 조성하여 생산하지 않고 밭이나 집에 한두 그루 심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임금에게 진상할 정도로 경산 대추는 유명했던 모양이다.
▲ 금구리 대추밭 전경
경산에서 대추를 처음으로 대량 생산한 곳은 바로 금구리이다. 1980년대 초반 금구리에 살던 강대용 씨가 청도에서 묘목을 구해와 사과나무를 뽑아내고 대추나무를 심은 것이 대단위 대추 농사의 시초였다. 그 후 금구⋅용암⋅현흥리 등으로 퍼져나가 사과밭이 대추밭으로 바뀌었다. 또 압량을 넘어 하양, 진량, 자인 등지에서도 사과나무 대신 대추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특히, 쌀농사가 수익을 보장하지 못하자 벼농사를 짓던 논에다 대추나무를 심어 온 들판이 대추밭으로 변하였다. 현재 전국 대추 생산량의 40%를 경산에서 생산하고, 경산의 생산량 중 40%를 금구리에서 생산할 정도로 금구리는 대추 생산이 많은 마을이다.
◆ 행안부 지정 금구맛 대추 정보화 마을 금구리

▲ 금구맛 대추정보화 마을
이러한 이력으로 금구리는 2005년 4월 행안부가 지정하는 정보화 마을로 선정되었다. 특히, 대추를 주제로 한 마을 고유의 ‘금구맛 대추마을’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온라인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홍보하고, 전자 상거래를 통하여 판로를 개척하였다. 그 결과 2008년 정보화마을 전국지도자대회에서 우수사례를 발표하였고, 2010년 제7회 경상북도 정보화마을 지도자대회에서 경상북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 에필로그
금구리의 역사를 살펴본 필자는 ‘금구리 주민은 강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 옛날 압독국 시절부터 벼농사를 지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진상하는 연실을 생산하였다. 또 시대가 변하자 새 원예작물인 사과를 재배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과 생산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사과 재배가 어렵게 되자 포도 등 다른 작물을 모색하다가 대추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앞으로 대추도 여러 원인 등으로 금구리의 원예작물이 되지 못하겠지만, 그때가 오면 금구리 주민들은 또 다른 원예작물로 전국적인 이름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구리 주민은 강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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