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7 오전 9:46:00
▲ 압량읍 현흥1리 전경
◆ 프롤로그
현흥1리는 예로부터 벼농사와 보리농사가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경산현의 동창(東倉)이 들어와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흥업주식회사의 압량농장과 일본 농업이민이 들어와 벼농사와 과수농사를 하였다. 해방 후에는 과수와 대추 농사를 짓다가 현재는 참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렇듯 시대 변화에 따라 농사 형태가 바뀐 현흥1리에 얽힌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현흥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현흥1리는 처음 압독국에 속한 들판이었다. 임진왜란 후 경산현 동쪽 사창인 동창(東倉)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행정구역 개편 때 경산현 동면 현창리(賢倉里)가 되었다(『경산현지(1786)』).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바뀔 때 현창동이 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현창의 ‘현’과 건흥의 ‘흥’을 따 경산군 동면 현흥동(賢興洞) 하나의 마을로 통합하였다. 1914년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이 신설되면서 경산군 압량면 현흥동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현흥1구라 하였다. 해방 후 현흥1동이 되었다가 1988년 압량면 현흥1리가 되었다. 2020년 압량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압량읍 현흥1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현창과 새태 2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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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흥1리 지적도(1912년)
▲ 현창·선창
▲ 현창동 전경
현창리는 동창, 즉 경산현의 동쪽 사창이 있어 현창이라 하였다. ‘현창’이 사투리화하면서 ‘선창’이라고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배를 대는 선창이 있었다는 유래가 생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동음현상에 의한 유래설일 뿐이다. 현흥교회가 있는 곳이다. 1912년 당시 사창이 있던 각단에는 22가구 있었다. 그리고 배성보(排星洑)라는 보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새태·새각단
▲ 새태 전경
새태는 현창마을 동쪽으로 마을이 확장되면서 새로 터를 잡았다고 하여 새태라 불렀다. 1912년 당시 11가구 살고 있었다. 1910년대 경산 진량 간 신작로가 생기면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차츰 들어오면서 가구 수가 더 늘어났다. 일본인 중 카가와 테츠지(香川鐵治)와 미야모토 소오스케(宮本宗助)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벼농사와 광산업에 종사하였다. 특히, 미야모토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압량면 면의회 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마을회관이 있는 곳에 주거지가 들어서서 현창과 새태 두 개의 각단이 거의 맞붙어 있다.

▲ 현흥1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현흥1리 들판
현흥1리는 들판 가운데 있다 보니 산과 골짜기는 없고, 논이 대부분이다. 현창 동쪽 샘이 있었다고 하는 생골, 생골에 모양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현창 북쪽 횃대처럼 길다고 하여 진배미(횃대배미), 현창 남쪽의 배비, 배비 동쪽 영장늪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 현흥초등학교 전경
그리고 1913년 용암리에 개교한 일본인 소학교 육향공립심상소학교가 1917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현재는 현흥초등학교라 한다. 이 초등학교 안에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입석이 하나 있다. 흔히 선돌이라 하는데 예전에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러한 선돌은 경산 대정동과 평산리 등에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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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흥초등학교 내 있는 선돌(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러한 마을에 조선시대에는 경산현의 곡물 창고인 동창이 있었고, 현재는 경산맛난참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 경산현 동면 사창(동창)이 있던 현창리
사창(社倉)은 조선시대 의창을 대신해 각 군현에 설치한 곡물 대여 기관이다. 가을에 환곡을 받아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이자를 받고 대여했는데, 군현에서는 동서남북에 각각 설치하여 현령이나 현감이 직접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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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현 고지도(산남여도)
▲경산현의 사창
경산현에는 동·서·남·북면과 현청 안에 각각 사창을 두었다. 동면 사창은 동창(東倉)이라 하였는데, 현청에서 10리 지점인 현창리에 있었다. 북면 사창은 북창(北倉)이라 하여 현청에서 북쪽으로 20리 지점인 내곡리(현 대구시 동구 내곡동)에 있었다. 남면 사창은 남창(南倉)이라 하여 현청에서 13리 지점인 남천면 협석리에 있었다. 서면 사창은 서창(西倉)이라 하여 현청에서 10리 지점인 서면 우산리(현 대구시 수성구 매호동)에 있었다. 현청 안 사창은 읍창(邑倉)이라 하여 각 사창에서 납부한 세곡을 집하하는 장소였다.
▲경산현의 조세 납부
조선시대 경산현의 조세는 무명이 가장 많았다. 토지세를 대신하여 무명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무명은 매년 3월 거둬들여서 4월 육로를 통하여 도성 호조와 군자청, 선혜청 등에 납부하였다. 미곡은 선혜청에 납부하였다. 당시 세곡을 납부하던 경로는 경산현 동서남북 사창에 모아둔 곡식을 경산현청 내 읍창으로 모았다. 그러고는 문경 초점(草岾, 문경새재)까지 육로로 운반하였다가 남한강에 있는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납부하였다. 가흥창에서는 다시 배로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각종 세금이 부과되어 경산현민을 괴롭히다가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창이 있던 현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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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현 동창이 그려진 경산현지도(1872년)
경산현은 현흥들판이 곡창지대라서 이곳에 동면 사창인 동창을 설치하였다. 경산현 4개 사창 중 현창리 사창이 가장 컸다. 동창에서는 주로 현흥들판에서 생산된 환곡을 보관하였다. 19세기 말 흉년이 들었을 때 경산현은 각 사창에 있던 곡식을 백성들에게 구휼미 명목으로 나눠주었는데, 그때마다 현령이 직접 행할 정도로 미곡 관리는 엄격하였다.

▲ 조선흥업주식회사 압량농장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사회가 바뀌면서 사창은 폐지되고 그 땅은 국유지로 편입되어 일제시대 조선흥업주식회사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차지하였다. 사창이 있었던 곳은 현흥리 528번지 일대인데,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다.
◆ 현흥1리의 경산맛난참외단지

▲ 경산맛난참외단지 전경
1970년대까지 사과와 쌀을 생산하던 현흥들판은 1980년대부터 사과 대신 대추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국민들의 식생활 습관이 바뀌고, 수입쌀이 들어오면서 벼농사가 수익을 보장하지 못하자 논에 복숭아와 포도, 참외 등 원예작물을 심어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중 참외는 부적리에서 현흥리로 가는 대학로 도롯가를 중심으로 하우스를 설치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한두 가구가 재배하다가 주변 논으로 확대되어 현흥들판 약 40ha가 참외 하우스 단지로 바뀌었다. 참외가 대량으로 생산되자 경산시는 이곳을 ‘경산참외단지’로 지정하고 홍보에 나섰다.
현재 ‘경산맛난참외단지’라 하여 성주 참외 못지않은 생산량과 맛을 자랑하고 있다. 참외는 주로 울산공판장으로 보내고 일부는 도롯가에 간이판매대를 설치하여 농민이 직접 일반인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그런데, 참외 판매대가 왕복 4차선 도롯가에 있어 참외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불법주차를 해야 하고, 또 교통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어 개선책이 필요하다. 시 당국에서도 관련 법령 개정과 예산 등의 문제로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좋은 해결책이 나타났으면 한다.
◆ 에필로그
금호강가 비옥한 토지에 자리한 현흥1리는 예로부터 경산현의 곡창지대였다. 시대 변화에 따라 다양한 농작물을 가꾸면서 잘 살기를 기원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그런데 진량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는 추세여서 현흥1리도 조만간 부적리처럼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도시화가 나쁜 것도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니다. 그저 수백 년 살아온 현흥1리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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