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0 오전 8:49:22
▲ 인안리 전경
◆ 프롤로그
『소학』에서는 ‘노래자가 나이 일흔에 색동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굳이 이러한 고사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부모를 모시는 것은 인간의 근본 행실이다. 다만 실천 방식이 다를 뿐이다. 압량읍 인안리에는 고려국사로 추앙받은 한 승려가 자기 나름대로 효를 실천한 이야기가 팔백 년 동안 숨겨져 있다.

▲ 인안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인안리는 압독국 시대부터 마사리(馬沙里)에 속한 작은 각단 인각촌(麟角村)이었다. 이후 마사리가 분할되면서 건흥리에 속했다. 『경산현지(1786)』에는 없고, 『호구총수』부터 정식 마을로 등재되어 경산현 동면 인각리가 되었다. 이후 줄곧 경산현 동면에 속하다가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바뀔 때 북쪽 축안이 정식 마을로 승격되면서 경산군 동면 인각동과 축안동으로 나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마을을 통폐합할 때 인각동과 축안동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경산군 동면 인안동이 되었다. 1914년 압량면이 신설되자 경산군 압량면 인안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이 행정 체제는 이어지다가 1988년 압량면 인안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읍 인안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크게 인각과 축안 두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최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하나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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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안리 지적도(1912년)
▲ 인각(麟角·仁角)·인안1리
▲ 인각동 전경
인각은 인안리 남쪽 인각산 근처의 각단이다. 마을 동쪽 의송리에 걸쳐 있는 해발 60m의 산이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아 ‘인각산’이라 불렸으며, 그 아래에 위치한 마을도 ‘인각’이라 불렸다. 또 다른 설은 이 인각산 아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인각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절이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인각동이 되었다고도 한다. 마을 표기를 인각(麟角)으로 한 것은 『호구총수』 한 곳이며, 이후 자료에는 인각(仁角)으로 되어 있다. 주민들은 그 이유를 군위군의 인각사(麟角寺)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11년 당시 인각동에는 28가구 살았다. 현재 인각 서북쪽에 공장이 들어와 마을 규모가 확장되었지만, 원래 인각동 마을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인안1리라 한다.
▲ 축안(築安)·인안2리
▲ 축안동 전경
축안은 인각 서북쪽에 있는 각단인데, 오랫동안 인각에 속하였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정식 마을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에 의해 다시 인각동과 통합되었다. 이 마을은 16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 살던 정응지라는 사람이 건흥동으로 이주하여 건흥지를 축조하였는데, 그때 건흥지 축대 안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이 마을의 형성 유래다. 그래서 축대 안에 있다고 하여 ‘축안’이라 하다가 한자로 ‘축안(築安)’으로 기록하였다. 1911년 축안에는 25가구가 살았다. 축안 북쪽에 각종 공장이 들어와 있다. 현재 인안2리라 한다.
▲ 윤성3차 아파트단지·인안3리
▲ 윤성3차아파트 전경
축안 동북쪽에 1996년 윤성3차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는 총 3개 동 453세대가 입주하고 있다. 이 아파트가 들어서서 인안3리라 하였다.

▲ 인안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이 마을은 오목천 건너 평야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는 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두 개의 등성이가 있고, 그 외 서쪽으로 넓은 건흥들판이 있다. 그래서 산과 등성이, 골짜기는 별로 없지만 두 개의 등성이가 각각 나름대로 이야기를 품고 있다.
▲ 인각산과 인각지
현재 인각과 의송 경계에 목마른 말이 입지의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渴馬飮水)’ 형국의 해발 60m의 갈말등대가 있다. 이 산을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인각산(麟角山)이라고도 한다. 인각리라는 마을이 여기서 유래했다.
▲ 연말등대
또 축안 북쪽에는 연말등대라는 곳도 있다. 이 연말등대는 어떤 부자가 밑에 연못을 파고 연을 캐 가지 못하게 움막을 치고 지켰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또 이 등성이를 오봉끝이라고도 하는데, 다섯 산봉우리의 줄기 끝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반이나 깎여져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입지(인각지) 전경
인각리 북동쪽에는 현재 입지라 부르는 저수지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선화리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인각리에 속하여 여기에서 소개한다. 이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사제(?堤)라 등재되어 있어 굉장히 오래된 저수지다. 조선시대 줄곧 사제라 하다가 어느 순간 입지로 바뀌었다. 마을 주민들은 인각리에 있다고 하여 인각지라 부른다.
▲ 인각리 들판
▲ 축안리 들판
인안리에는 과거 논과 들에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활배미 북쪽 갈모처럼 생긴 갈매배미, 버선배미 동쪽 둥그렇게 생긴 두룽배미, 두룽배미 북쪽 넓고 평탄한 마당배미, 마당배미 서쪽 멍에처럼 생긴 멍에배미, 인각 서쪽 밭밑논, 축안 동쪽 홈걸배미, 홈걸배미 서쪽 버선처럼 생긴 버선배미, 인각 남쪽 인각사에서 세운 비석이 있었다는 비선짓배미, 밭밑논 서쪽 새로 조성된 새논, 섶도랑 서쪽 옛길 위에 있던 질배미, 새논 위 콩논, 축안 서쪽 높아서 용두래로 물을 퍼 올렸던 파래배미, 축안 동쪽 홈통을 걸어 물을 대던 홈걸배미, 질배미 동쪽 연말등대에서 사태가 나 황토가 밀려 들어왔던 황토배미, 황토배미 서쪽 활처럼 생긴 활배미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경지정리로 인해 점차 잊혀졌다.
◆ 인각사의 존재

▲ 삼국유사 표지와 보각국사비명
인각사는 현재 군위군 삼국유사면(옛 고로면) 화북리에 있다. 이 절은 『삼국유사』와 「보각국사비명」에서 그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그래서 서기 1200년경부터 존재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인각사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그곳이 사찰 터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곳에 인각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인각사 터 추정지
그런데 군위 인각사가 원래 압량읍(당시 압독국) 인안리 옛 마을인 인각동에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 인각사에 고려국사 일연선사가 잠시 머물다가 군위로 가는 바람에 인각사도 같이 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마을 이름도 사찰 이름을 따서 인각동(麟角洞)이라 했다가 군위 인각사와 구분하기 위해서 ‘어질 인’으로 바꾸어 ‘인각동(仁角洞)이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호구총수』와 『경산현지』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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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 가마 출토 현장(사진 왼쪽 아래)
또 2004년 인각리 136번지 일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기와 가마터가 있다는 사실은 근처에 기와가 필요한 건축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당시 기와 가마는 기와가 필요한 사찰 주변에 임시로 만들어서 제작한 경우가 많았다. 점촌동에서 신림사 와편이 발견된 기와 가마터도 그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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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안리 가마터와 출토 와편(경북문화재연구원)
그러므로 인각리 인각산 주변에도 당시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전과도 일치한다. 설화가 진실을 담보한다고 할 수도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설화가 보충해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연이 탄생하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 당시는 장산군이었고, 현재는 경산시라서 인각리에 전하는 인각사의 존재는 그냥 동음현상에서 발생한 허황한 전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시사점이 너무나 많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국사 일연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국사 일연의 행적

▲ 보각국사 비명 중 일연 소개 부분
국사 일연(이하 일연)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보각국사비명」이다. 이 비명에 따르면 일연은 1206년 6월 장산군(지금의 경산)에서 출생하였고, 부친은 전언필(全彦弼)이다. 속명은 전견명(全見明), 후에 일연(一然)으로 고쳤다(지금까지 경주김씨로 알려졌으나 비문 원문을 보면 전씨로 확인됨). 9세 때(1214년) 해양(지금의 밀양) 무량사에 가서 불교에 입문하고, 14세 때(1219년) 장로 대웅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22세 때 승과 상상과에 합격한 후 포산(지금의 현풍) 지역에 머무르며 불도에 정진하였다. 44세 때 남해로 가서 팔만대장경 간행 기관인 정림사(定林社)를 관장했다. 이후 대선사의 승계를 받고 56세 때 강화도 선월사, 59세 때 포항 오어사, 70세 때 달성 인흥사, 72세 때 청도 운문사, 77세 때 개경 광명사, 78세 때 국존으로 책봉된 후 고향 장산으로 귀향, 79세 때 모친 별세, 그해부터 84세 때까지 의흥(지금의 군위)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 집필 후 입적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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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선사 표준영정(정탁영 작,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캡쳐)
이를 공간별로 구분하면, 유년기는 장산(경산) 어느 마을에서 보냈을 것이다(일연의 출생 마을에 대해서는 이후 게재함). 청년기 13년은 해양(밀양)에 머물렀다. 장년기 20여 년간은 포산(17년)과 남해(3년)에 각각 머물렀다. 노년기 약 24년간은 강화도, 개경, 포항, 달성, 청도 등지에 머물렀다. 말년기 약 2년간은 고향인 장산, 그 후 5년간은 군위 인각사에 머물렀다.
◆ 국사 일연이 노모를 모시기 위해 내려간 구산(舊山)은 어디일까?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시기는 모친을 봉양한 노년기 약 2년간이다. 비명에는 모친이 연로하여 구산(舊山)으로 내려가기를 청했다고 한다.

▲ 보각국사 비명 중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부분
여기서 구산은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곳’이나 ‘고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산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곧 고향인 장산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
◆ 국사 일연은 장산 동계 인각촌에서 노모를 봉양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적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인안리에 전승되는 인각사 전설이다. 견강부회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추정 이외 국사 일연이 노모를 봉양한 2년간의 공백을 채울 공간이 없다. 군위에서는 일연이 군위 인각사에서 노모를 봉양했고, 현재 일연의 모친 산소는 인각사 주변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명의 문맥을 자세히 살피면 노모 봉양과 인각사 주지 주석은 선후 관계가 있고, 시·공간도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일연은 노모를 봉양하다가 장례를 치른 후에 인각사 주지로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모의 산소가 군위에 있다는 설은 그냥 이야기일 따름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일연은 인각리에 머물면서 노모를 봉양했고, 그 집을 인각사라 칭하다가 군위에 신라 때부터 있던 사찰을 중창하면서 인각사라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 에필로그
일연은 『삼국유사』 서문에서 ‘제왕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부명을 받아 도록을 받으니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민들 사이에 떠도는 신비스러운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인안리에서 내려오는 일연에 관한 전설 또한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는 괴이한 이야기도 아니다.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마을의 역사를 주민들이 구비전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 또한 일연이 이 마을에서 노모를 모시면서 잠시 머물다 군위로 갔다는 이야기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인안리에 가면, 본인도 79세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96세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국존 자리를 사양하고 낙향한 일연선사를 떠 올리면서 인간의 근본 행실인 효를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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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