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6 오전 9:28:02
▲ 내리 전경
◆ 프롤로그
경산 압량읍 내리는 오랜 시간 속에서 역사와 삶이 켜켜이 쌓인 마을이다. 두룩산 자락 아래 김유신 장군의 연병장이 남아 있고, 김해김씨 한림공파가 터를 잡아 500년 넘게 이어온 긍구정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드미, 숲골, 안골 등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든 내리, 마을 곳곳에 남은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 내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내리(乃里)는 신라 압독주 시절 군사들과 말이 주둔한 마사촌(馬沙村)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경산현 동계 마사촌에 속한 각단이었다. 조선 초기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산현 동면 내동(內洞)이 되었다. 1871년 『경산현지』에서 내동리로 바뀌었고,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이 되면서 경산군 동면 내동이 되었다. 1914년 압량면이 신설되면서 경산군 압량면 내동이 되었다. 해방 후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내리가 되었다가 2020년 압량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압량읍 내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안골, 꽃드미, 숲골 등 3개의 각단이 모여 내리라는 마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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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 지적도(1912년)
▲ 안골·안골시·내동·내리
▲ 안골 전경
안골은 내리 북쪽, 두룩산 옆에 있는 각단이다. 안쪽에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안골시라고 불렀다. 이 안골이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내동(內洞)이라 하였다. 자인현의 내동(內洞)과 구분하기 위하여 1895년부터 ‘이에 내(乃)’ 자를 써서 내동(乃洞)이라 기록하기 시작했다. 구전에 의하면 주변의 산이 ‘이에 내(乃)’ 자를 닮아서 마을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고 하나, 기록에는 조선시대 줄곧 내동(內洞)으로 확인된다. 이 마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일본 텐리대 소장 『경산현지(1786)』인데, 여기서도 내동이라 기록되어 있다. 내동(乃洞)으로 기록된 자료는 『조선지지자료(1911)』부터이다. 김해김씨들이 주로 살고 있으며, 1912년 23가구 있었다. 현재는 기존 가구와 몇몇 공장이 들어서 있다.
▲ 꽃드미·드미
▲ 꽃드미마을 전경
꽃드미는 내리 두룩산 남쪽, ‘꽃드미’라 불리는 산의 북쪽에 형성된 각단이다. 꽃드미는 봄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꽃드미라 했다고 하는데, 이 산 아래 조성된 마을도 꽃드미라 불렀다. 일명 ‘드미’라고도 하였다. 1912년 36가구 살고 있었다.
▲ 숲골
▲ 숲골마을 전경
숲골은 내동 동쪽 가일리와 접한 각단이다. 원래 두룩산 남쪽 가일리 근처 구렁텅이는 울창한 숲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숲골’로 불렀다. 1912년 당시 18가구 살고 있었다. 현재는 가일리와 거의 맞붙어 있다.

▲ 내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두룩산 전경
내리에는 해발 40∼60m 정도의 산 3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첫 번째 산은 해발 40m의 두룩산인데,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하여 중턱에 원형 훈련장이 복원되어 있다.
▲ 꽃드미산 전경
두 번째 산은 해발 60m의 꽃드미산인데, 드미마을 남쪽 복숭아꽃이 많아 꽃무더미처럼 보여서 꽃드미라 붙여졌다. 현재 절반 이상이 깎여 전원주택단지로 변했다.
▲ 들누기산 전경
세 번째 산은 두룩산 서남쪽에 있는 들누기산이다. 압량리 들누기들 옆에 있다고 하여 들누기산이라 불렀다. 그런데, 두룩산과 꽃드미산은 누워 있는 젊은 여자의 젖무덤처럼 볼록하게 쌍을 이루고, 들누기는 여인의 음부처럼 볼록하여 벌거벗은 여인이 누워 있는 형상을 이룬다.
▲ 용드미 전경
또 오목천 가 용암리와 접한 지역에 용드미가 있다. 이 용드미 아래 깊은 연못이 있었는데, 여기서 용이 등천했다고 한다. 이 용드미에서 용암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 내리 들판
이외 내리에는 들누깃들 안쪽에 들누깃골이라는 골짜기와 내리 뒤에서 압량리로 넘어가는 귓고개, 내리 동북쪽 오목천 가에 갯밭들(앞개) 등이 있고, 경지정리로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43번지에는 초생달 모양의 저수지도 있었다.
▲ 내리 들판
◆ 경산병영유적 제2연병장
▲ 경산 제2병영유적지
압량 지역은 신라 압독주 시절 군사들이 주둔한 지역이었다. 수많은 군사와 말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마사촌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당시 압독주 군주는 김유신 장군이었는데, 마사촌 전체에 많게는 5개, 적게는 3개의 훈련장을 닦아 군사들을 주둔시키면서 훈련도 겸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훈련장은 압량리, 내리, 선화리 3곳인데,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 곳의 훈련장은 옛날부터 주민들이 두룩, 두락, 두루기 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곡식을 재는 도구인 말(斗)을 가리키는 두락(斗落)에서 유래하였다. 말처럼 산이 둥글고 평평해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내리의 연병장은 두룩산 서쪽 중턱을 평평하게 깎아 둥글게 평지를 조성하였다. 1912년 지적도에도 두룩산 중턱을 둥글게 표시해 놓았다. 압량리에 이어 두 번째로 확인되어 현재 제2연병장이라 부른다. 이 연병장은 내리(乃里) 389번지 일대에 있는데, 지표 조사 결과 구릉 자연 면에 약간의 토축을 하고, 지름 80m, 둘레 270m의 광장을 마련하였다. 동남쪽에 높이 15m가량의 토루를 쌓았으나 현재는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 내리의 김해김씨 한림공파와 김한손
▲ 한림 김해김공 보사단비(긍구정 내)
압량읍 내리 안골에는 긍구정(肯構亭)이라 명명한 재실이 있다. 김해김씨 한림공파 내리문중 재실로 추향조는 김용(1413∼1457)과 아들 김한손(1429∼1488?)이다. 김용은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낸 김해김씨의 중시조 김관의 6세손이다. 부친은 효자로 이름난 절효공 김극일로 여섯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큰형은 김건(1406∼1480)으로 김해김씨 용성 가척문중, 청도 백곡문중 군수공파 파조이다. 후손들이 자인 북사리에는 홍라재를, 청도 백곡리에는 백동사를 지어 제향을 올리고 있다. 둘째 형은 김맹(1410∼1483)으로 탁영 김일손(1464∼1498)의 부친이자, 삼족당 김대유(1479∼1551)의 조부이다.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이 세 사람을 일컬어 삼현(三賢)이라 하고, 그 후손들을 삼현파(三賢派)라 칭하고 있다. 또 둘째 형 김맹의 아들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려 이 삼 형제를 ‘김씨삼주(金氏三珠)’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김극일의 다섯째 아들이자 김용의 동생인 김인은 김해김씨 녹사공파의 파조로 자인 옥산리 삼락재에서 그를 추향하고 있다.
▲ 홍라재 전경(자인면 북사2리)
▲ 삼락재 전경(자인면 옥산1리)
이 문중은 원래 김해에 살다가 김관의 손자 김항(1326∼1382)이 개경으로 왕래하면서 도주(청도의 옛 지명)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들어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청도로 이거하였다. 그러다가 1498년 둘째 형 김맹의 아들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사초가 발견되어 연산군과 유자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건인 무오사화가 발생하였다. 이때 청도 성현역 찰방으로 있던 김용의 아들 김한손은 화를 피해 경산현 내동 골짜기로 숨어들어와 살면서 경산 김해김씨 내리 입향조가 되었다. 그 후 1504년 갑자사화가 또다시 발생하여 숙부 김맹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가족들이 몰살당하자 더더욱 세상에 나가는 것을 꺼렸다. 그때부터 후손들은 지금까지 530여 년간 내리에 살고 있다.
◆ 김한손의 우모소 긍구정
▲ 긍구정 전경
무오사화 때 내리에 숨어 들어온 김한손은 안골 북쪽에 집을 짓고 세상과 벽을 쌓고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세월을 달랬다. 그가 처음 지은 집의 당호는 전하지 않는다. 그의 사후 집은 김용과 김한손을 추향하는 재실 및 서당으로 이용하다가 세월이 흘러 허물어지자 1819년(기묘년) 내동 314번지에 중건하였다.

▲ 긍구정 현판
이때 ‘긍구정’이라는 당호를 붙였는데, 당호와 현판은 이휘재가 썼다. 1842년에는 김한손의 부친 김용의 묘갈명을 경산현령으로 부임한 이휘재가 썼다. 1852년(임자년) 긍구정을 중수하고, 경산현령이던 강희영이 「긍구정기」를 썼다.

▲ 경산현령 강희영이 쓴 긍구정기
그러다가 1888년(무진년) 재실이 다시 허물어지자 1921년(신유년) 후손 김병택, 김기열 등이 북쪽 313번지 밭에다 다시 긍구정을 짓고, 후손 김병택이 「긍구정상량문」을, 후손 김성렬이 「긍구정중건기」를 썼다. 다음 해 1922년 후손 김용복이 또 다른 「긍구정중건기」를 썼다. 1992년에는 긍구정 내에 묘단비를 세웠다. 이후 긍구정은 몇 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에필로그
내리의 산과 들, 오래된 집과 재실은 단지 옛것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두룩산 중턱 훈련장의 둥근 터와 긍구정의 서까래 아래에는 지난 시간을 견디며 지켜온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도 뿌리를 잃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 온 내리의 모습은, 마을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한 시대, 한 사람, 한 가문의 삶이 모여 만들어 낸 이야기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 옛이야기들은 오늘도 내리의 바람결을 타고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쉰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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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