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3 오후 12:15:01
▲ 가일리 전경
◆ 프롤로그
가일리는 오랜 시간 동안 순천이씨가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이다. 멍에처럼 생긴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임진왜란 의병장 이지효의 세거지이자, 한국 최초의 민간 시중은행인 신한은행을 만든 이희건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옛 지명과 고개, 골짜기, 정자에 깃든 이야기들이 지금도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 가일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가일리는 신라 압독주 시절 노사화현(자인) 마사리(馬沙里) 영역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인현 서면이 되었다. 15세기경 마을이 형성되면서 자인현 서면 개일리(介日里)가 되었다. 마을 이름이 등재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1789)』이지만, 그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다. 19세기 초반 개일리 남쪽에 새 각단이 형성되면서 광곡리(廣谷里)가 추가되어 자인현 서면 서삼동 개일리와 광곡리 2개의 마을로 분리되었다. 19세기 중반 개일리는 가일리(駕日里)로 바뀌고, 1888년 광곡리가 가일리에 편입되어 자인현 서면에 귀속되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이 되면서 자인군 서면 가일동이 되었다. 1914년 전국 부군현 통합에 의해 압량면이 신설되면서 압량면 가일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읍 가일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가일, 광곡, 갓골새, 아랫말 등 4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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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일리 지적도(1912)
▲개일·개나리·가일
▲ 개일 마을 전경
가일리(駕日里)는 원래 개일리(介日里)였다. 오목천 가에 마을이 형성되어 개나리 또는 개일로 불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순천이씨 이선(李瑄)이라는 분이 15세기경 처음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888년 『자인총쇄록』에 가일리(駕日里)로 바뀌었는데, ‘개일’이 부정회피현상에 의해 가일로 바꾼 듯하다. 마을 남쪽 야산이 소의 멍에를 닮아서 ‘멍에 가(駕)’ 자를 써서 ‘가일’이라고 했다는 마을 유래설은 한자를 바탕으로 한 역 유래설이다. 1888년 당시 22가구 살고 있었고, 마을 대표는 이호현이었다. 그 뒤 가구 수가 점차 늘어나 1912년 33가구가 되었으며, 현재는 마을 주변에 공장이 많이 들어와 있다. 500년 동안 이어진 순천이씨 집성촌이다.
▲ 개일 골목길
▲ 광곡리·강골
▲ 광곡리 전경
광곡리(廣谷里)는 가일 남쪽 생골 또는 광골이라는 넓은 골짜기 아래에 각단이 형성되어 골짜기 이름을 따 광곡 또는 사투리화하여 강골이라 불렀다. 마을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자인현읍지(1832)』인데, 18∼19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871년까지 마을 이름이 존재하다가 1888년 가일과 하나로 통합되어 이름이 사라졌다. 1912년 당시 4가구 살고 있었다. 현재는 대여섯 집이 있고, 가일리 중 유일하게 공장이 들어서지 않은 곳이다. 현재 이 각단 도로명이 ‘강골길’이다.
▲ 신전리(薪田里)
▲ 신전리(섶밭) 전경
가일 동남쪽 광곡 남쪽에 신전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섶밭이라 불렀다. 『호구총수』에도 등재되어 있어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자인현지(1871)』까지 등재되어 있다가 1888년 오횡묵이 마을을 순시할 때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엽 병자년 흉년 때 폐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답은 신월리 편에서 찾을 수 있다.
▲ 아랫말
▲ 아랫말 전경
아랫말은 개일에 속한 각단이었는데, 개일 동북쪽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아랫말이라 불렀다. 개일에 속하여 정식 마을로 승격되지 못하였다. 1912년 당시 13가구 살고 있었고, 76번지에는 당집도 있었는데, 현재는 집 주변으로 공장이 들어와 있다.
▲ 갓골새
▲ 갓골세 전경
가일리 동쪽 오목천가에 낮은 더미 두 개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갓골이라 불렀다. 이 갓골 사이에 각단이 형성되어서 갓골새라 불렀다. 이 각단도 정식 마을로 승격되지 못하였다. 1912년 당시 2가구 살고 있다가 일제시대 이후 집이 점차 늘어나 1990년대 15가구가 살고 있었다. 현재는 서너 가구 살고 있고 나머지는 빈집이거나 공장이 들어와 있다.

▲ 가일리 지명 지도
◆ 마을 이름이 유래한 멍에산과 자인현 선비의 풍류 장소였던 강정(江亭)
▲ 공동산과 멍에산
광골 북쪽 마을 공동산으로 해발 80m의 공산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반 이상 깎여 공장이 들어와 있다. 이 산은 봉우리가 두 개인데,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고 하여 멍에산이라 하고 한자로는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현재 가일의 ‘가’가 여기서 유래했다. 또 광골 동쪽 참나무가 많아 참남배기라 부르는 해발 60m의 산도 있다.
▲ 강정 전경
그리고 가일리 갓골새 북쪽 산더미는 오목천가에 있어서 옛날부터 경관이 좋았다. 게다가 ‘답웅덩이’라 부르는 자연 연못도 있어 풍류를 즐기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자인현 선비들이 이 더미에 정자를 짓고 강정(江亭)이라 하였다. 이 강정에서 해마다 유생들이 모여 시회(백일장)를 개최하고 풍류를 즐겨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런 사연으로 이 더미도 강정이 있는 곳이라서 강정덤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정자도 풍류도 연못도 사라지고 삭막한 공장만 들어서 있다.
◆ 골짜기와 고개
▲ 생골과 생골고개
▲ 초성골 고개
대표적인 고개로는 생골(운문골)에서 신대리를 거쳐 부적리로 넘어가는 생골고개, 신대리의 초성골로 넘어가는 초성골고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또 강정덤 북쪽 자연 연못이 있어 옛날 여인들이 여기서 빨래를 했다고 하여 세답의 ‘답’을 따 ‘답웅덩이’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흔적도 없다.
▲ 운문지 전경
생골 서북쪽 내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운문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자인현읍지』에는 없고 『조선지지자료』에 처음 등재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골짜기에 옛날 운문사(雲門寺)라는 사찰이 있어 운문골이라고 하였고, 여기에 있는 저수지라서 운문지라 하기도 하고, 생골못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청도 운문사가 원래 여기에 있다가 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생골못 밑을 생골못밑들이라 한다.
▲ 생골못밑들 전경
이외 가일리의 논과 밭은 공장이 들어와 마을 전체가 공단화되었다. 이러한 마을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순천이씨 이지효 선생과 그의 후손 이호우 선생이 살고 있었고, 신한은행 창업자 이희건 회장이 태어나고 자랐다.
◆ 임란 의병장 이지효와 진사 이호우를 추향하는 모원정(慕遠亭)
▲ 모원정 전경
이지효(1539∼1631)는 순천인으로 자는 행원(行源), 호는 남헌(南軒)이다. 원래 서울에 살다가 영천 대창으로 이거하여 살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영천성 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군사를 직접 모집하여 화왕산 곽재우 장군의 막하에서 왜군과 싸웠다. 서애 류성룡이 그를 보고 그릇이 중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공적은 「영천회맹록」과 『용사세강록』에 기록되어 있다. 사후 사헌부감찰에 증직되었다. 이지효의 손자 이시형과 종손 이덕채가 영천 대창에서 자인 개일리로 이거하여 지금까지 500년 동안 순천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편, 이지효의 후손 이호우(1826∼1892) 선생도 이 마을에 살았다. 자는 치수(致壽), 호는 소산(素山)이다. 그는 자인향교 『청금록』에 1882년(고종 19년) 자인향교 도유사를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인현읍지』에는 그를 진사로 소개하고 있고, 『경산군지(1933)』에는 ‘문장이 웅건하고 행실이 바르고 돈독하다’고 하면서 문집 3권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 모원정 현판
이지효의 9세손 이정화(1839생)와 이철화가 가일리 꽃더미산 남쪽에 재실을 지어 ‘모원정’이라 이름 짓고, 경주에 살던 여강 이중구(1851∼?)에게 「모원정기」를 써달라고 하여 편액으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그 후 재실이 풍마세우에 견디지 못하자 1993년 신한은행 회장을 역임한 이희건(1917∼2011)이 사재로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때 영천인 이효봉이 「모원정중건기」를 써서 게판문으로 걸어 놓았다.
▲ 중수 이후의 모원정
이외 1791년 정조 때 수직 부호군을 역임한 이덕채, 이지효의 6세손으로 효우가 돈독하고 문장이 청건하여 사림으로부터 존중받은 기암 이충렴, 1882년 고종 때 가선중추로 증직된 이충헌의 아들 이옥, 그의 아들 이호직, 고종 때 성균사업을 증직받고 1892년 자인향교 도유사를 역임한 만재 이정화, 이호우의 아들로 덕망이 높았던 이철화, 이지효의 13세손 이석경 등이 모두 학식이 높고 문력이 뛰어난 순천이씨 가일문중 출신이다.
또 영천에서 가일리로 들어온 이시형의 현손 이호진의 처 달성서씨는 21세 때 시집와서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했고, 병자년(1876) 흉년 때 아들은 굶겨도 시어머니만은 조석으로 아이들 모르게 밥을 해 드렸다. 시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대변을 맛보아 가면서 간호했다고 한다. 1905년 자인향교 장의를 역임한 그의 아들 이민화도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에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 신한은행 이희건 회장

▲ 모원정과 이희건 회장
신한은행을 창업한 이희건 회장도 순천이씨 가일문중 출신이다. 그는 1932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노무자로 일했다. 1940년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오사카 쓰루하시 시장에서 사업을 했다. 이후 재일동포들의 금융 차별 해소와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하여 재일 한국인 상공인들과 함께 1955년 ‘오사카흥은’ 신용조합을 설립했다. 1974년에는 재일 상공인들의 모국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를 만들었고, 1977년에는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했다. 1982년에는 재일교포 341명의 주주로부터 출자금을 모집하여 한국 최초의 민간 시중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1993년에는 관서지방 5개 흥은과 합병하여 관서은행을 설립하였다. 1997년 IMF 때는 ‘일본 엔화 송금 캠페인’을 벌이는 등 일본에서 활동한 금융인이지만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매진하다 2011년 오사카에서 별세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의 금융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희건 회장이 바로 가일리 출신이다.
◆ 에필로그
필자의 동네에 가일리에서 시집와서 택호를 ‘가일댁[가일떠]’라 부르는 아지매가 계셨다. 늘 아침저녁으로 우리집에 들러서 모친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와서 같이 고민하고 들어주기도 하셨다. 제삿날 아침에는 꼭 아이를 보내서 선친을 모시러 와 제삿밥을 대접하셨다. 그 집 자식들도 자연 우리 형제와 친하게 지내 친형제처럼 지냈다. 자식들이 모두 건실하게 성장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아지매가 순천이씨 가일 문중 출신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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