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5 오전 9:00:18
▲ 당음리 전경
◆ 프롤로그
경산 압량읍 당음리는 신라 압독국 시절,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던 군막지가 있는 곳이다. 말과 병사들이 들판을 달리던 마사리, 그리고 그 군막의 흔적을 간직한 금막제는 오늘날까지도 마을의 뿌리를 전해준다. 지금은 마사리와 금학동 두 각단이 어우러져 당음리를 이루고 있으며, 지명 속에는 고대의 삶과 지형, 그리고 세월이 남긴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제 그 터전과 유산을 따라, 잊힌 역사의 조각들을 따라가 보자.

▲ 당음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당음리는 압독국 시대 노사화현(자인) 마사리였다. 마사리의 존재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서 처음 확인되는데, 조선 초기 자인현 서면으로 편입되어 당음리(唐音里)로 바뀌었다. 당음리는 『호구총수(1789)』에서 이름이 처음 확인된다. 그 후 1800년대 초반 자인현 서면 서삼동 당음리가 되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자인군 서면 당음동이 되었다. 『조선지지자료(1911)』에는 면음동이라 등재되어 있는데, 당음의 오기인 듯하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압량면이 신설되었는데, 이때 경산군 압량면 당음동이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다가 1988년 압량면 당음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면이 읍으로 승격하자 압량읍 당음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마사리와 금학동 2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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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음리 지적도(1912)
▲ 마사리
▲ 당음리(마사리) 전경
마사리(馬沙里)는 압독주 시절부터 있던 마을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말을 타고 훈련하던 들판이라서 마사리라 불렀다. 당시 마사리는 서쪽으로 갑제동, 북쪽으로 현흥리, 동쪽으로 의송리, 남쪽으로 당리 등을 아우르는 큰 마을이었다. 이후 압독주가 장산현과 자인현(노사화현)으로 분리되면서 갑제, 현흥, 의송, 내리 등은 장산현에, 가일, 당음, 신월, 당리, 강서, 백안 등은 자인현으로 편입되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줄곧 경산현에서도 마사리라 하였고, 자인현에서도 마사리라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초 행정구역 개편 때 마사리는 여러 마을로 분리되고 당음리 한 마을만 마사리라 하였다. 이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분리되면서 또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이때 마사리는 당음리로 바뀌었다. 이후 공식적인 이름은 당음리로 유지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마사리라 계속 불렀다. 1888년 20가구 살고 있었고, 마을 대표는 공재우(孔在佑)였다. 1912년에는 가구가 늘어나 36가구 살고 있었다.
▲ 금막·금학동
▲ 금학동 전경
금학동은 마사리 동남쪽 갑제동과 경계를 이루는 411∼513번지 일대에 형성된 각단이다. 정식 행정 마을로 승격하지 못하고 마사리에 속한 작은 각단으로 존재했다. 이 각단은 신라시대 군사들이 군막을 쳤다고 하여 금막(今幕)이라 하였고, 그 근처 저수지를 금막제(今幕堤)라 하였다. 이후 금막동이 금학동으로, 금막제는 금학제(金鶴堤)로 바뀌었다. ‘금막’이 ‘금학’으로 바뀌자 마을 뒷산이 학처럼 생겨 금학동이 되었다는 역 유래설이 나타났다. 1912년 당시 16가구 살고 있었다. 현재도 거의 비슷한 가구 수가 살고 있다.
▲ 당음리
▲ 당음리 전경
당음리(唐音里)는 마사리와 금학동을 합친 마을이다.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하나 모두 추측성 유래설이다. 그 이유는 마을 이름이 한자로 전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당음(塘音)이 간략화되는 과정에서 당음(唐音)이 되었다고 한다. 당(塘)이 ‘방죽’이나 ‘제방’, ‘담’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여기에 이두음 ‘ㅁ’을 의미하는 음(音)을 붙여 우리말 어떤 소리를 당음(塘音)이라고 적었던 것이 당음(唐音)이 되었다고 본다. 1912년 지적도를 보면 실제로 당음리는 동쪽 백안리와 경계를 이루며 둑을 쌓고 긴 내[川]가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긴 방죽이라는 의미의 ‘당음’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또한 언어학적 추정에 불과하다. 단지, 당리 남쪽 해발 80m의 산을 볼록하다고 하여 ‘덤’이라 불렀는데, 이 ‘덤’의 차자표기가 ‘더’에 더할 가(加), ‘ㅁ’에 소리 음(音)을 써서 ‘가음(加音)’이라 하였다. 그래서 ‘당음(唐音)’ 또한 ‘담’의 차자표기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 당음리 지명지도
◆ 당음리의 산골
▲ 모개만당이 전경
▲ 서낭딩이 전경
▲ 배산 전경
당음리에는 윗골 서쪽에 모과나무가 많아 ‘모개만딩이’라 불리는 산도 있고, 금학동 남쪽 원효와 설총을 배향하는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딩이라는 산도 있다. 지금은 당음지로 바뀐 금학지 서쪽에 배씨 산이라 하여 배산도 있고, 당음 북서쪽과 동쪽 끝에 60m 정도의 등성이가 있는데 모두 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 산상등 전경
또 금학동 동북쪽 지형이 산상금학(山上金鶴)의 명당이라 하여 산상등(山上嶝)으로 부르는 해발 30m 정도의 등성이가 있다. 현재 밭과 숲으로 되어 있다.
▲ 갓골 전경
당음과 신월 경계 당음지 남쪽 골짜기를 갓골이라 한다. 갓골에는 큰갓골과 작은갓골이 있다. 또 당음리 서쪽 카페가 있는 골짜기를 윗골이라 하는데, 그 윗골 서남쪽 큰 골짜기를 큰골 또는 대곡(大谷)이라 한다. 또 윗골 서남쪽을 잔골이라 하고, 윗골 서쪽은 산대(山垈)골이라 한다.
◆ 당음리 전설의 실상
당음리에는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지만 운문사 터라고 칭하는 곳이 있다. 마을에서는 청도의 운문사가 원래 당음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가일리 생골 안에 운문지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그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 마사리 서북쪽 산에서 원효대사가 태어났다고 하여 ‘원효대사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신월리 율곡지 근처에도 전해오고 있다. 운문사 터나 원효대사 터 등의 전설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근거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농촌 진흥운동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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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의 농촌진흥운동(당음리)
당음리는 1950∼60년대 경산 신천동에 설립된 메노나이트 직업학교가 실시한 농촌진흥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당시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은 선진 농법을 당음리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보급하고, 우물, 생활환경 개선 등의 사업을 펼쳤는데, 신천리 깐치밭골과 가까운 당음리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 당음리 고분군과 주거지
당음리에는 원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 고분군과 주거지가 있었다. 현재 이름은 ‘고분’, ‘고분군Ⅰ’, ‘고분군Ⅱ’, ‘유물산포지’라 부르고 있다.
▲ 당음리 산상등 고분
‘고분’은 당음리 446-1, 446-2 산상등이라는 등성이에 있는데, 직경 15m, 높이 3m의 타원형 고분이다. 현재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남동쪽에 도굴의 흔적이 보인다.
▲ 당음리 고분군
‘고분군Ⅰ’은 마사리 서쪽 138번지 모개만댕이라는 산 동남쪽에 10여 기가 분포하는데, 직경 7∼10m, 높이 1m 내외의 타원형 고분이다. 이 주변에 삼국시대 경직토기편이 채집되었다.
▲ 당음리 고분군
‘고분군Ⅱ’는 마사리 바로 북쪽 332번지 구릉에 10여 기가 있었는데, 영남대학교 조사로 6기가 확인되었으나 1997년 영남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할 때는 1기도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경지정리를 하면서 고분을 전부 밀어버렸다고 한다. 주변에서 토기편이 확인되어 고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당음리 유물산포지
‘유물산포지’는 마사리 서쪽 윗골이라 부르는 123번지 구릉 일대에 있는데, 여기서 다수의 토기편과 자기편이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이 일대가 주거지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마사리 주변 일대는 원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고분 수십 기가 집중적으로 산재해 있어 이 일대가 당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고분과 주거지는 모두 도굴이나 개발로 인해 발굴 조사가 어려워 어느 시대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문헌 자료에 남아 있는 저수지 이름을 통하여 이 일대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과 군사들이 주둔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신라군 군막이 있던 당음리 금막제
▲ 당음지
당음리 391번지에는 오래된 저수지가 하나 있다. 현재 당음지로 바뀌었는데,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금막제(今幕堤)로 등재되어 있어 가깝게는 고려시대, 멀리는 신라 때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여지도서』에서 금학제(金鶴堤)로 이름이 바뀐 후 경산현읍지에 줄곧 금학제로 등재되다가 『경산군지(1933)』에서 당음제(唐音堤)로 바뀌어 현재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당음지의 최초 이름인 ‘금막(今幕堤)’이 저수지의 유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단서이다. ‘금막’은 군사들의 ‘군막(軍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당음리를 포함한 압량 전 지역은 압독국 또는 신라시대 군사들이 막을 치고 주둔하면서 말몰이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 일대를 ‘말몰기’ 또는 ‘말몰이’의 차자표기인 마사리(馬沙里)라 하였다. 이 마사리의 중심 지역이 현재 당음리 마사리 각단이다. 그러므로 이 마사리에 군사들이 군막을 치고 주둔하던 흔적이 저수지 이름인 금막제로 남아 있었다. 그 후 풍수지리설이 유행하던 조선 중기에 이르러 ‘금막’이 ‘금학’으로 바뀌면서 각단 이름은 금학동, 저수지 이름은 금학제로 바뀌었다. 이곳이 신라시대 군사 주둔지였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당음리의 고분 및 유물 산포지가 뒷받침한다. 이렇듯 역사적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저수지 이름과 유적지를 통하여 당음리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압독주 군주로 있을 때 군막이 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당음지 일대 전경
현재 부적리의 마위지가 신라 때 군사와 말들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에 불과하다. 오히려 당음리의 당음지가 각종 자료가 뒷받침하는 군사와 말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축조한 저수지로 추정된다.
▲ 정상지 전경
이외 당음리에는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2개의 저수지가 있었다. 하나는 당음지(금학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지이다. 일제시대 이후 443-2번지와 452-2번지에 저수지 3개를 더 축조했는데, 현재는 452-2번지 저수지는 매립되어 3개의 저수지만 있다.
▲ 당음리 느티나무
◆ 에필로그
당음리는 단지 지명의 기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여온 기억의 층위다. ‘군막’이란 단어 하나에 스민 무수한 이야기들이 저수지 물결 위를 떠돌며, 오늘도 마을을 감싸고 있다. 고분이 사라지고, 저수지가 이름을 바꾸었어도, 땅은 기억하고 있다. 모개만댕, 산상등, 갓골, 윗골 등 골짜기마다 불리는 이름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역사이자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다. 그러나 현재 마을은 점점 빈집이 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우뚝 선 두 그루의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굳건하게 존속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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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