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5 오전 9:36:47
▲ 압량읍 신월리 전경
◆ 프롤로그
압량읍 신월리는 ‘달이 구슬처럼 빛난다’는 의미의 빈주에서 유래한 마을로,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주둔시킨 진군제가 자리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제비산 전설처럼 풍요와 고난을 함께 겪으며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온 신월리는 초승달처럼 아름다운 지형 속에 영모재와 여러 저수지를 품은 압독국 후손들의 삶의 터전이다. 신월리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신월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신월리는 조선 초 자인현 마사리에 속한 각단이었다. 19세기 초반 마을 북쪽 진군제(鎭軍堤, 현 구지) 옆 빈지설이라는 산 북동쪽에 각단이 생겼는데 이 각단을 ‘달이 구슬처럼 빛난다’라고 하여 빈주(彬珠)라고 하였다. 마을이 처음 생길 때는 당음리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 그 후 가일리의 신전리 섶밭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오면서 마을이 확장되자, 1880년대 자인현 서면 서삼동 ‘빈주리’라는 마을로 승격되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승격하면서 자인군 서면 신월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압량면이 신설되자 압량에 편입되어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이 체제가 유지되다가 1988년 신월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압량읍 신월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빈주라 부르는 하나의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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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월리 지적도(1912)
▲ 빈주·빈지
▲ 빈주마을 전경
빈주(彬珠)라는 마을 이름이 처음 보이는 자료는 『자인총쇄록』이다. 자인현감 오횡묵이 1888년 9월 이 마을을 순시하면서 ‘빈주’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 이전과 이후에 나온 『자인현읍지』에는 마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주민들 사이에서만 ‘빈주’라고 불렀고, 정식 마을로는 승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빈주’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전하는데, 하나는 옛날 몹시 가난한 곳이라 하여 빈지(貧地)라 했던 것이 빈주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 뒷산에 달이 뜨면 구지(진군제)에 비친 산의 모습이 구슬처럼 밝게 빛난다고 하여 ‘빈주’가 되었다는 설이다. 옛날 가난한 마을이 이곳뿐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빈주’가 사투리화하면서 ‘빈지’가 되고, 이 ‘빈지’가 가난할 ‘빈’과 연상되어 가난한 마을이었다는 유래가 생긴 듯하다.
▲ 새달·신월
▲ 신월 전경
‘새달’이나 ‘신월’은 모두 초승달과 관련 있다. 마을의 서쪽 구릉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 능선 아래 일렬로 집들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그 모양이 초승달과 닮은 꼴을 하고 있어서 1895년 정식 마을이 되면서 ‘빈’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피해 ‘신월’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원래 ‘새달’이 있어서 신월이 된 것이 아니고, 신월이 생기면서 ‘새달’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912년 당시 39가구가 살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 신월리 지명지도
◆ 산과 등성이
▲ 가게만댕이 전경
신월리에는 북쪽 마사리 경계에 해발 60m 정도의 둔덕이 있었다. 이곳을 가게가 있었다고 하여 가게만댕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길게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이 등성이 가운데로 길이 나서 밭이나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많이 깎여져 있다. 이곳에 신라 때 고분 10여 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가게만댕이에 가게만댕이라는 주막도 있었다.
▲ 호두산과 진군제
또, 지금은 구지로 바뀐 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동서쪽에 해발 80m의 산이 세 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동쪽의 산은 호랑이 머리가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호두산(虎頭山) 또는 호산(虎山)이라 한다. 또 높다고 하여 ‘높은등’이라 부르기도 하고, ‘디이산’이라고도 한다. 이 호두산은 신월리 남쪽에서부터 경산 신천동 진못까지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흔히 ‘진등’이라도 한다. 그래서 이 산 아래로 난 길을 ‘진등길’이라고 경산시에서 명명하였다. 그런데 이 산에 통신부대가 들어와 온산을 깎아 버렸다.
▲ 빈주설산
또 밭전 동쪽에 지형이 못의 무넘기[매래]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매래비알도 있다. 지금은 구지라 부르는 군제(軍堤) 서쪽은 산 위의 초승달이 마치 구슬처럼 빛나 ‘빈주’라는 마을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해발 80m 정도의 빈주설산도 있다. 지금은 밭과 묘지가 들어서 있고, 남쪽에도 80m 정도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현재 개발로 완전히 깎여진 상태다. 또 지금은 거의 매립된 율곡지 양옆도 해발 80m 정도의 산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이곳을 신천동에서는 명미기라 부른다.
◆ 골짜기와 논들
▲ 새못안골
▲ 숫거리
▲ 우묵다리부리
신월동에는 새못 안을 새못안골이라 하였고, 신월 서쪽 큰 말림갓이 있는 곳을 큰갓골이라 하였다. 또 구지를 굴못이라고 부르는데 이 못 안에 있는 논을 굴못안이라 하고, 신월 남쪽 숲이 있던 곳을 숫거리라 하고 이 숫거리 아래에 있는 논을 아릿숫거리, 위에 있는 논을 웃숫거리라 하였다. 또 숫거리 동쪽 개울에 작은 보가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논을 우묵다리부리라 불렀다.
◆ 저수지
▲ 구지(진군제)
신월리는 압량읍에서 저수지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가장 오래된 저수지는 지금은 구지로 바뀐 진군제(鎭軍堤)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등재되어 있어 가깝게는 고려시대, 멀리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저수지를 자인에서는 성언리(成彦里) 진군제라 하였고, 경산에서는 마사리(馬沙里) 군제(軍堤)라 하였다.
▲ 신지
자인현읍지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축조된 저수지로는 265번지 신지, 256번지 원주지(은배미 못), 258번지 무명지 등이 있었다.
▲ 갓골못
일제시대 이후 축조된 저수지로는 249번지 갓골못, 307번지 호산못, 325번지 일대 신풍지, 346번지 선항지, 316, 317번지 율곡지 등인데, 율곡지는 거의 매립 상태에 있다.
◆ 제비산 전설
▲ 제비산
이 마을 서쪽 나지막한 뒷산은 제비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제비산이라 하였다. 원래 마을은 서당골이 있는 빈지설산 아래였는데, 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워 제비산 쪽으로 마을을 이전했다. 그러자 마침 그곳이 제비 부리에 해당하는 곳이라서 먹을 것이 많아 마을이 풍족해졌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그 산을 훼손하고 묘를 썼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마을이 점차 또 가난하게 되어 묘지를 없애고 원상 복구를 하자 다시 잘살게 되었다. 이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제비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무거운 것을 올려 놓으면 제비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마을이 다시 가난해질 것을 염려하여 이 산을 소중하게 관리했다고 한다(『압량면지』 참고). 현재는 거의 깎여져 각종 공장이 들어서 있다.
◆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주둔시킨 진군제
▲ 진군제(구지)
신월리 구지(狗池·굴못)는 원래 진군제(鎭軍堤) 또는 군제(軍堤)라 하였다. 이 저수지를 진군제라 명명한 이유는 이 지역에 군사들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마침 신월리 근처는 신라 때부터 군사들이 말을 타고 훈련하던 곳이어서 마사리라 하였다. 또 당음리에 존재하는 원삼국시대 고분이나 주거지 등은 압독주 시절부터 이곳에 고위 계층이 살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신월리 진군제는 바로 압독주 시절 신라군이 주둔하면서 축조한 중요한 군사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음리의 금학제(金鶴堤)도 군사들의 군막이 있었던 곳이라서 군막제(軍幕堤) 또는 금막제(今幕堤)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당음지로 바뀌었다.
▲ 당음리 당음지(금학제)
그런데, 신라군이 주둔하면서 저수지를 축조했는지, 아니면 철군 후 축조하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어서 이름을 명명했는지 그 선후 관계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신월리의 진군제 근처는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주둔시킨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진군제 또는 군제로 부르던 저수지는 『여지도서』에서 군제(軍堤) 하나로 명칭이 통합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줄곧 ‘군제’로 불리다가 『조선지지자료(1911)』에서 갑자기 구지(狗池)로 바뀌었다. 게다가 한자도 개 구(狗)로 바꿨는데, 여기서 ‘굴못’이라는 새 이름이 생기기도 하였다. 군지가 구지로 바뀐 경위는 알 수 없다. 이후 일제시대 준설공사로 원래의 크기보다 훨씬 확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밀양박씨 재실 영모재
▲ 영모재
구지 못둑 서쪽 골짜기에는 밀양박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백헌 박란과 율원 박춘발을 추향하기 위해서 1927년에 건립하였다가 1975년 후손 박호천이 유사를 맡아 중수하였다.

▲ 영모재 현판

▲ 영모재기 게판문
「영모재기」는 1927년 광주인 이채진이 썼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정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온돌방 1칸을, 우측에는 온돌방 2칸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대청 앞 처마에 ‘영모재’ 현판과 기둥에 초행서로 된 주련을 걸어 놓았다.
◆ 신월리 행복달빛센터
▲ 신월리 행복달빛센터
신월리 입구에는 2004년 준공한 ‘신월리 행복달빛센터’가 있다. 신월리 기초생활거점 조성 사업으로 준공한 회관은 지상 2층에 다목적실, 건강관리실, 어르신방, 행복창작소, 엘리베이터, 주차장 등을 갖춘 최신 시설로 꾸며져 있다.
◆ 에필로그
초승달처럼 아름다운 지형에 자리 잡은 신월리는 빈주라는 옛 이름처럼 소박하고 빛나는 역사를 품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군사 주둔지였던 진군제, 제비산에 얽힌 전설, 그리고 압량읍에서 가장 많은 저수지를 간직한 이 마을은 오랜 시간 풍요와 고난을 함께 견뎌왔다. 때로는 잘못된 전승으로 진짜 모습을 가리기도 했지만, 신월리는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품어왔다. 신월리에 스며든 역사의 숨결과 사람들의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이 작은 달빛 마을이 오래도록 빛나기를 기대해 본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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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