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자인현 역참이 있던 강서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16) - 강서리

2025-06-12 오전 8:55:33

▲ 강서리 전경 



프롤로그

 

경산 압량읍 강서리는 조선시대 자인현의 역참인 산역(山驛)이 자리했던 마을이다. 지금은 조용한 들판 가운데 논밭이 펼쳐진 농촌이지만, 이곳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사람과 말, 물자가 오가던 교통과 행정의 요지였다. ‘산역리라 불리던 마을은 역참 폐지와 함께 강서리로 이름을 바뀌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마을 곳곳에 남은 지명과 흔적들은 그 시절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 강서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강서리는 고려시대까지 자인현 마사리 지역이었다. 조선 초기 자인현 서면으로 편입되었다.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고려 때 있던 역()을 복설하여 산역(山驛)이라 하였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자인현 서면 산역리(山驛里)가 되었다. 산역리는 1800년대 중반까지 역이 있던 산역 각단, 한장군 사당이 있던 당리 각단, 북쪽 백안골 각단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1880년대 당리가 정식 마을로 등재되면서 산역리와 당리는 산역동에 소속되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이 되면서 산역리 안의 백안골 각단도 정식 마을로 승격되면서 서쪽에 새로 생겼다 하여 서신동(西新洞)이라 하였다. 동시에 이 시기 역참제도가 폐지되면서 산역도 폐철되었는데, 산역리는 오목천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강서동(江西洞)으로 바꾸었다. 1911년 일제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서신동만 백안동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마을 이름이 유지되었다. 1914년 자인군이 없어지고 압량면을 신설할 때 이 세 마을은 압량면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처음 산역리에서 출발한 이 지역은 당리리, 강서리, 백안리 3개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강서리 지적도 

 

산역·역촌·강서리

 

▲ 강서리 마을 

 

역참인 산역이 있다고 하여 산역동이라 하였고, 줄여서 역촌이라 하였다. 강서동은 산역동이 폐지되면서 오목천 서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12년 산역에는 12가구 정도 살았고, 주민들은 거의 산역에 소속된 역리였거나 다른 마을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1912년 당시 산역동 주거지 전체는 국유지였다. 이는 이 마을 전체가 역촌이어서 역이 폐지되면서 땅이 국유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땅은 대한제국이 1910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자하였고, 동척은 다시 일본인들에게 장기 저리로 매매했다가 해방 후 주민들에게 돌아왔다.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골목길을 중심으로 서쪽이 옛날부터 있던 주거지이고, 동쪽 느티나무가 있는 쪽은 거의 논밭이었는데, 일제시대 이후 주거지가 되었다. 느티나무가 있던 곳도 원래는 밭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차장이 있던 곳에는 기다란 연못도 있었다.

 

▲ 강서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 강서리 들판(비개산구)

 

강서리는 동쪽에 오목천을 끼고 사방이 논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구릉이나 골짜기는 없다. 대표적인 논으로는 지형이 베개처럼 옆으로 놓여 있다고 하여 붙인 비개산구가 있다.

 

▲ 강서리 들판(삼밭또가리)

 

남쪽에 깊은 논이라고 하여 붙인 굼논, 굼논 북쪽에 삼밭뙈기가 있어 붙인 삼밭또가리가 있는데, 지금은 주변으로 축사가 들어섰다.

 

▲ 강서리 들판(조산배미)

 

강서 북서쪽 논에서 나온 돌멩이를 조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하여 붙인 조산배미도 있다.

 

▲ 강서리 들판(비석거리)

 

밭으로는 강서 동북쪽에 옛날 비석이 많았다고 하여 붙인 비석거리가 있었다. 이 비석거리는 자인현청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이곳에 옛날 나무로 만든 목비(木碑)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밭들은 1960년대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지형이 바뀌어 지금은 구분이 어렵다.

 

▲ 강서리 느티나무 전경 

 

▲ 강서리 느티나무 

 

또 이 마을 128번지에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여기서 매년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태풍으로 쓰러지고 새로 심은 것이다.

 

 

희재 황기식 선생이 남긴 시 한 편

 

한편, 이곳은 땅이 기름져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들어와 과수원을 많이 경영하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헐값에 과수원을 조선인들에게 매매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1970년대까지 사과 농사를 많이 지었다. 자인 동부리의 독립운동가 희재 황기식 선생도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이곳 강서리 사과 농장에 들러서 농법을 배워 가기도 하였다. 마침 그때가 1951년 전쟁 중이어서 황기식 선생이 돌아오는 도중 나라를 걱정하는 한시를 즉흥적으로 짓기도 하였다.

 

오전 강서농원에 가서 시찰하고 돌아오면서 길에서 읊다

나라의 운명에 성함과 쇠함이 없으리마는

매번 이날에는 경사가 도리어 슬퍼지네.

대한독립 이름은 우선 좋지만

삼팔선 분쟁은 이유를 모르겠구나.

여러 나라가 우리를 얕잡아 보아서

저들에 맡긴 분단 강토로 자유는 더뎌지네.

만약 우리 민족이 마음과 혼을 결속한다면

올해는 눈물 드리우지 않고 행운을 얻으리.

 

이러한 마을에 조선시대 자인현 역참이었던 산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장수도 장수역(長水驛)

 

장수역(長守驛)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당시에는 경주 관할 신령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한자를 장수역(長水驛)으로 바꾸고 신령현청을 장수역 땅으로 옮겼다(태종실록). 이후 역참 제도를 정비하면서 장수도(長水道)라 하여 15개 역참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중 경산 지역의 압량역, 화양역, 산역은 모두 신령 장수도 관할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 그러다가 조선 후기 압량역은 청도 성현역이 있는 성현도(省峴道) 관할로 바뀌었고, 하양 화양역과 자인 산역은 장수도에서 그대로 관할하였다. 장수도에는 찰방 1, 5,785, 807, 상등마 14, 중등마 28, 하등마 115필이 있었다. 역의 책임자인 찰방은 종6품 외관직이었다. 조선 초기 장수도승이라 하다가 세조 때 장수찰방이라 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장수찰방은 1506년 배세륜이 가장 오래되었고, 그 이전 찰방은 확인되지 않는다. 마지막 찰방은 1895년 유태현이었다.

 

 

정몽주의 장수역 시 한 수

 

한편, 고려 정몽주가 1369년 고향인 영천에 와서 장수역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기유년 겨울 장수역에서 자면서 익양태수 이용에게

흰 구름은 푸른 산에 있는데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네.

해 저물고 눈서리 무거운데

어찌하여 먼 길 가는고.

역정에서 밤중에 일어나니

닭 우는 소리 꼬끼오 하네.

아침에 길을 떠나니

그윽한 회포가 서러운지고.

고인은 날로 이미 멀어졌거니

머리 돌리니 눈물이 가득하네.

 

*익양은 영천의 옛 이름이다.

 

 

자인현 역참 산역(山驛)

 

▲ 산역 고지도 

 

자인현 산역은 바로 신령 장수도 관할 역참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산역에는 중마(中馬) 1, 원복마(元卜馬) 1, 호복마(戶卜馬) 1필이 있었고, 역리 19(), 2(), 1()가 있었다(당시 관리는 원(), 아전은 인, 군졸과 노는 명, 비는 구로 기록했음). 그리고 영남역지(1895)에 등재된 산역이 관리하던 토지는 복호결 37488, 위토결 1750부였고, 관리하던 말은 공부상에는 상등마 10, 중등마 28, 하등마 95필이었지만, 실제로는 중등마 1, 하등마 2필 뿐이었다.

 

▲ 산역 터 전경 

 

산역이 있던 곳은 강서리 96, 97, 98, 132번지 일대였고, 관리 토지는 백안리, 당리, 북사리 등에 분포되어 있었다. 1896년 역찰방 제도가 폐지되고, 산역에서 관리하던 전답은 국유지로 편입되면서 산역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마을 이름도 강서리로 바뀌었다.

 

 

자인현의 역원

 

▲ 산역이 있던 곳 

 

조선 이전 자인현의 역과 원은 현재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1633자인현복설소이미 향교가 있고 또 객사가 여전히 남아 있고 옛 관아 터와 역관 터, 사직단과 빙고 터가 예전처럼 완연……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인현이 경주부 속현이었음에도 향교는 1562(명종17)에 설립되었다. 이외 현의 공공기관이라 할 수 있는 객사, 관아, 역관, 사직단, 빙고등은 터만 남아 있었다. 이 기관들은 자인현이 경주부의 속현이 되던 1018(고려 현종) 이전 자인현 공청 관련 터로 추정된다. 600여 년이 흘렀지만, 옛터전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를 근거로 조정에 자인현을 독립시켜달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인현복설소에 보이는 역관(驛館)’은 역원(驛院)의 따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자인현에는 고려 초기 역참이 있었고, 고려 중기 여행자 숙소인 원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이 역과 원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에필로그

 

강서리는 오목천 서쪽 들판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 마치 솟대처럼 큰 회화나무가 마을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그 주변으로 4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역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골목길과 논두렁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을의 품처럼 넉넉하다. 역사의 한 페이지였던 산역의 흔적은 오늘도 강서리 땅 아래 고요히 숨 쉬고 있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강서리 마을 전경 
 
▲ 마을 전경 
 
▲ 강서리 마을 앞 소공원
 
▲ 마을 전경 
 
▲ 마을 전경 
 
▲ 마을 앞 도로 
 
▲ 강서리 회관 
 
▲ 강서리 느티나무
 
▲ 굼논
 
▲ 비개산구
 
▲ 비석거리 
 
▲ 산역 터
 
▲ 삼밭또가리 
 
▲ 조산배미
 
▲ 오목천 전경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기사제보

의견쓰기

작성자
내용
스팸방지*  ※ 빨간 상자 안에 있는 문자
(영문 대소문자 구별)을 입력하세요!

홈으로

전체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