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의 수호신 한장군 사당과 오리정이 있던 당리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17) - 당리리

2025-07-04 오전 8:58:28

▲ 압량읍 당리리 마을 전경 
 

 

프롤로그

 

자인의 수호신 한장군을 모셨던 사당과 길손을 맞이하던 오리정이 자리했던 이곳은 자인현의 신앙과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산과 들, 저수지와 골짜기마다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깃들어 있고, 지금은 사라진 사당과 정자 속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당리리의 옛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 당리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당리는 고려시대까지 마사리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 조선 초기 행정구역 개편 때 자인현 남방동에 속하였다.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할 때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그때 자인현 서면 산역동이었다. 그러다가 1880년대 정식 마을로 승격되어 자인현 서면 산역동 당리가 되었다. 당시 서면에는 서초동, 서이동, 산역동, 서삼동이 있었는데, 산역동에는 산역리와 당리 2개의 마을이 속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인군 서면 당리동이 되었다. 1914년 압량면이 신설되면서 자인군에서 분리되어 압량면 당리동이 되었다. 1988년 압량면 당리리가 되었고, 2020년 압량읍 당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당리와 자인교 2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 당리리 지적도 

 

당리·당마

 

▲ 당리리 전경 

 

1637년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산역이 생겼는데, 당리는 이 산역에 딸린 각단이었다. 당리라 한 이유는 이 마을에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당은 마을 바로 뒤 남북으로 길쭉하게 펼쳐진 작은 산 언저리에 있었다. 이 산을 사당이 있어서 당산 또는 뒤에 있다고 하여 뒷산이라고도 하였는데, 일설에는 자인현의 수호신인 한장군을 기리는 사당이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사당이 있어 당리라 하였는데, 1912년 지적도에는 사당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이 산 전체가 국유지로 되어 있어 자인현에서 관리하던 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자인교

 

▲ 자인교 마을 

 

▲ 자인교 마을과 당리교, 자인교 

 

자인교라는 각단은 1910년까지 전부 논과 밭이었다. 1910년대 일제가 경산 자인 간 도로를 이쪽으로 내면서 당리로 들어가는 입구라서 정거장이 생겼다. 그리고 이 일대에 사과 과수원이 생기면서 한두 집 이주하게 된 것이 10여 가구가 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부터 이곳을 자인교라 불렀다. 자인교 이외에 남방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오목천에 합류하기 전 당리를 통과하는데 이곳에 다리를 놓아 당리교라고 부른다.

 

▲ 당리리 지명지도 

 

 

산과 등성이

 

▲ 가음산 

 

당리에는 서남쪽 볼록한 덤처럼 생겼다 하여 의 차자표기로 기록되다 산 이름이 된 해발 80m의 가음산(加音山)이 있다. 마을에서는 가뜸산이라고도 한다. 또 가음산 바로 동쪽 산도 해발 80m 정도 되는데, 마을에서는 공동산이라고 한다. 지금은 묘지와 주택, 밭 등이 들어서 있다.

 

▲ 공동산 

 

또 당리 서쪽에도 해발 80m 정도의 산이 있는데, 깎여져 밭이 되었고, 신월리에서 호두산이라 부르는 산도 일부는 당리리에 속하는데, 이 산에 1986년 통신부대가 들어와 온산을 깎아 부대 용지로 사용하고 있다.

 

▲ 공동산 골짝 

 

▲ 트럭못안골 

 

당리리에는 공동산에 있는 공동산골짝, 옹탕못안에 있는 옹탕못안골, 당리 서북쪽의 원배밋골, 당리 서쪽 장골새, 트럭못안의 트럭못안골 등의 골짜기도 있다.

 

 

경산에서 제일 먼저 경지정리를 한 마을

 

▲ 1970년대 경지정리 이후 당리리 모습 

 

당리리는 196465일 경산군에서 제일 먼저 경지정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착수한 지 1개월 후 천수백 년 동안 여러 모양을 하고 있던 약 18정보의 농경지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어 농사를 짓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경산군지). 그렇지만 천수백 년 동안 당리 주민들이 붙인 논과 들판 이름은 사라져 버렸다.

 

▲ 당리리 들판 

 

그래도 1980년대까지 남아 있던 대표적인 논과 들판은 자인단옷날 한장군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이 논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사용했다는 단오사래, 당리 동쪽 큰 들이라는 의미의 한살들, 한살들 서쪽 장구 모양으로 되어 있던 장구배미, 당리 남쪽 남방동 중보의 물을 대는 중봇들, 중봇들 복판에 횃대처럼 길게 생겼다는 횟대배미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 기지 

 

 

저수지

 

당리리의 저수지는 기리제와 옹탕못 2개가 있었다. 기리제(其里堤, 462번지)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있는데, 1518세기 사이에 축조한 저수지로 추정된다. 같은 이름의 저수지가 자인면 원당리에도 있는데, ‘기리(其里)’의 어원은 알 수 없다. 현재는 기지(其池) 또는 트럭못이라 부른다. 옹탕못은 일제시대 이후 축조된 작은 저수지로 현재 매립된 상태다.

 

▲ 마을회관과 기지 

 

그리고 이 기지 못둑에 20244월 마을회관을 새로 지어 준공식을 가졌다. 이러한 마을에 옛날부터 자인의 수호신인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과 나그네가 쉬어가는 오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장군 사당이 있던 당리리

 

옛 자인현 안에 당리마을은 용성면 당리와 압량읍 당리리 2곳이다. 용성면 당리는 자인현의 수호신이었던 한장군을 기리는 사당 또는 당나무가 있어 당리라 하였다. 압량읍 당리리는 사당또은 신당이 있어 당리라고 하였다면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모신 신당이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자인현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 자인계정숲 진충묘 

 

자인현에는 신라 때부터 자인을 왜구로부터 지켜낸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단옷날은 한장군제라 하여 현민 전체가 굿을 행하며 거대한 행사를 했다. 1763년 정충언이 자인현감으로 부임하여 한장군 사당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굿의 형태로 진행하던 한장군제를 유교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현민의 단합을 위하여 자인현 각 면에 사당을 별도로 짓게 하였다. 이때 자인현 상동면은 용성면 당리에, 하동면은 용성면 대종리에, 하북면은 현내리에 지었다. 이외 거리가 먼 용성면 가척리와 송림리, 진량읍 시문리 등에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간소한 사당을 짓고 한장군을 모셨다. 지금의 남산면인 상남면하남면은 원당리에 사당이 있어 따로 짓지 않았다. 이 각 면의 한장군 사당에서는 단오 전날 개별적으로 한장군제를 올리고, 단오 당일 다시 자인현 계정숲 한장군 사당인 진충묘에 모여 본 제사를 올렸다. 이렇게 한장군제를 통하여 자인현민은 하나됨과 단합을 추구하였다.

 

▲ 한장군 사당 추정지(지적도)

 

그런데 압량읍인 서면에는 한장군 사당을 지었다는 기록이나 구전이 없다. 추측컨대, 압량읍 당리리가 바로 한장군 사당이 있었던 곳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당리리의 한장군 사당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또 그 형태는 집을 지었는지, 당나무에 한장군 신을 모셨는지 확실치 않다.

 

▲ 한장군 사당 추정지 당산 모습 

 

그런데 다행히 1912년 지적도에 당리 마을 바로 뒷산 454번지(현 산1-2) 전체가 지목은 대지(垈地), 소유주는 국유지로 설정되어 있다. 지금도 숲인 이곳이 대지로 설정되어 있어 이곳에 집이 있었다는 증거이고, 국유지였다는 점은 자인현청에서 관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리리의 한장군 사당은 마을 뒷산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이 확실한데, 폐철 시기는 비교적 오래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리에서 한장군 본 사당이 있는 계정숲과는 육안으로 보이고 거리도 가깝기 때문에 굳이 이곳에서 단오 전날 따로 한장군제를 지내고 다음 날 다시 계정숲에 가서 제를 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당리리 당목 

 

한장군 사당을 폐철한 후 마을에서는 북쪽 당나무에서 동제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 당나무가 있던 곳을 마을에서는 당터라고도 하였는데, 이 당나무도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압량읍 당리리는 한장군 사당이 있어 마을 이름도 당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한장군 사당은 흔적도 없고 마을 이름만 당리리로 남아 있다.

 

 

길손을 맞이하고 배웅하던 오리정이 있던 당리리

 

▲ 오리정이 있던 곳(인흥리 3번지)

 

오리정(五里亭)이란 현청을 중심으로 주요한 길목 5(2km) 지점에 지은 정자였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는데, 보통 관아에서 5리 거리에 있어 오리정이라 하였다. 현감이 부임할 때 평복으로 왔다가 오리정에서 관복으로 갈아입고 아전들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관찰사가 오면 현감이 이곳까지 와서 절을 하고 맞이하였다. 이외 빈객을 맞이하거나 송별할 때도 오리정까지 나와 환영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실제로 1888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경산에서 자인으로 들어오면서 비둘재에서 속오군의 환영을 받고, 오리정에 이르러 관복으로 갈아입고 삼반관속의 영접을 받았다. 또 이임할 때도 삼반관속의 배웅을 이 오리정까지 받았다. 오횡묵은 떠나기 전날 밤 계정숲 이계정이라는 정자에 올라 오리정을 보며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이계정에서 달구경하며 피리소리를 듣다.

 

봄 달이 사람에게 흡족함을 알게 하니

여러 선비 이곳 이계정에 서로 몰려오네.

탁주 석 잔으로 살짝 취하여

멀리 오리정 갠 구름 향해 한 줄기 피리를 부노라.

고향 생각 견딜 수 없어 자주 북쪽을 보지만

벼슬길은 일이 많아 또 서쪽 함안으로 옮겨가네.

시를 지어 문득 보니 청산이 웃는데

오는 저녁 풍류는 또 누가 이어갈까?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묻어 있는 자인현 오리정이 바로 당리리에 있었다. 위치는 당리리 남쪽 당리교 근처였다. 현재 행정구역상 남산면 인흥리에 속하지만, 당시는 당리리에 속했다.

 

 

에필로그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빈객을 배웅할 때는 마을 입구까지 가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다가 골목까지, 대문까지 가다가 이제는 아예 방안에서 잘 가라고 한다.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손님을 배웅할 때는 1층 주차장까지 와서 배웅을 했는데, 요즘은 현관문 앞에서 인사하고 철문을 닫아 버린다. 점차 사람들 간의 정이 삭막해지는 모양이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당리리 마을 전경 
 
▲ 당리리 소재 경산시 치매안심센터 표지판 
 
▲ 마을 전경 
 
▲ 마을 전경 
 
▲ (구)당리리 회관 
 
▲ 가음산
 
▲ 공동산 
 
▲ 공동산 골짝 
 
▲ 당산
 
▲ 당리 경로당과 자인교 마을
 
▲ 자인교 마을 
 
▲ 당리교
 
▲ 기지(트럭못)
 
▲ 용탕못
 
▲ 용탕못 안골
 
▲ 트럭못 안골
 
▲ 장골새 
 
▲ 횟대배미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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