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진량 항일운동의 발원지 봉회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4) - 봉회리

2025-10-15 오전 8:58:06

▲ 진량읍 봉회리 전경 

 

 

프롤로그

 

봉회리는 본래 참새가 모여드는 들판이라는 뜻의 작사리에서 비롯된 마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농촌 마을을 넘어 진량 지역 기독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봉회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가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이후 영남신학대학교와 진량성당이 들어서면서 오늘날까지 종교와 신앙의 터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새 떼가 날아들던 벌판은 이제 역사와 신앙, 그리고 항일의 기억을 간직한 마을로 자리 잡았다. 봉회리의 이야기는 마을의 유래를 넘어 경산 사람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의지를 보여준다.

 

▲ 봉회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봉회리(鳳會里)는 조선시대 하양현 낙산면 작사리(雀沙里)였다. 조선 초기까지 토산리 영역이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작사리가 되었다. 19세기 작사리(회동) 서쪽에 사람들이 살면서 각단을 형성했는데 이 마을을 작사리라 하고, 원래 마을을 구작사라 하였다.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이 될 때 작사리는 봉동, 구작사는 회동이라 하여 2개의 마을이 되었다.

 

▲ 봉회리 지적도(1912)

 

1911년 조선총독부의 동리 통폐합에 따라 봉동과 회동은 통합되어 하양군 낙산면 봉회동이라 하였고, 1914년 진량면이 생기면서 경산군 진량면 봉회동이 되었다. 1997년 진량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진량읍 봉회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봉동(봉회1)

 

▲ 봉동 

 

봉동(鳳洞)은 원래 작사리였는데, 한자 참새 작봉황 봉으로 바꾸어 봉동이라 하였다. 과거 참새가 모래알만큼 많이 날아들어 작새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벌판을 가리키는 한자이므로 새가 많이 날아드는 벌판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듯하다. 구작새(회동)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새로 각단이 조성되었다. 1912년 당시 48가구가 있던 큰 마을이었다. 현재 영남신학대학교와 진량성당이 있으며, 봉회1리다. 도로명은 봉회1길로 명명되어 있는데, ‘작사길내지는 회동의 도로명처럼 봉황길로 바꾸었으면 한다. 그래야 마을의 유래가 살아난다.

 

회동·구작새·구작사(봉회2)

 

▲ 회동 

 

회동(會洞)은 봉동 동쪽에 있던 작은 각단이었다. 봉회동의 원 마을이다. 그래서 구작사(舊雀沙) 또는 구작새로 불린다. 마을 이름은 이곳에 교회당(봉회동교회, 현 진량제일교회)이 세워져서 회동이라 했다지만, 이 마을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인 1895년 이미 회동이라 하였고, 또 교회당은 봉동 160번지에 있어 잘못된 유래로 보인다.

 

▲ 봉황초등학교 

 

현재 진량제일교회가 있는 대평골 동쪽 산이 황새를 닮아 황새등이라 하는데 이 산에 참새가 많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 이름과 마을 이름이 관련 있어 보인다. 1912년 당시 7가구가 살았다. 현재 봉회2리이며, 삼주봉황타운과 봉황초등학교가 있다.‘

 

▲ 봉회리 지명 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 덕골과 덕골고개 

 

▲ 월령산 

 

봉회리는 남쪽으로 봉우리가 세 개인 신상리의 삼봉산, 북쪽으로 금호강의 넓은 충적평야를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산골과 들에 관한 이름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고개로는 작새 남쪽에서 신상리로 넘어가던 덕골고개, 월령골[月嶺谷]에서 신상리로 넘어가던 월령고개가 있었다.

 

▲ 대평골-삼밭구미-속등 

 

골짜기로는 작새 동쪽에 있는 대평골, 대평골 동쪽 깊은 골짜기로 삼밭이 있었던 삼밭구미, 대평골 남쪽 신상동으로 넘어가던 월령골 등이 있었다.

 

▲ 황새등과 대평골 

 

등성이로는 대평골 동남쪽 산속에 있는 속등, 속등 남쪽 긴 등성이인 진등, 대평골 동쪽 지형이 황새처럼 생긴 황새등 등이 있었다.

 

▲ 봉동 봉답들 

 

▲ 봉동 월비구당이 돈대미 들판 

 

북쪽으로 펼쳐진 논과 들로는 작사 서북쪽 있는 고랫들, 고랫들 남쪽 말무덤이라는 고분이 있던 돈대미 또는 말무덤, 고랫들 서쪽 잉어가 많아서 마치 잉어가 초가집을 지어놓은 것 같다 하여 잉어초당구미, 작사 북쪽 높은 곳에 있던 마릿가리, 작사 동북쪽 부들이 많았던 부들강, 봉동 북쪽 올방개가 많아서 월비구디이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저수지는 한 곳이 있었는데, 대평골못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동과 회동 사이 덕골고개에 왕복 6차선 도로가 개통되면서 매립되어 현재 빌라가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정월대보름날 달집태우기가 유명하였다.

 

 

진량 지역 크리스트교의 중심지 봉회리

 

가정교회로 시작한 봉회교회

 

▲ 진량제일교회 

 

봉회교회는 대구·경북 지역 선교 담당자였던 미국 북장로회 소속 안의와(安義窩, 미국명 James E. Adams) 선교사가 1901년 봉회리에서 조직한 가정교회에서 시작하였다. 1904년 봉동 160-4번지 가옥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1905년에는 기독사립도명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진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자 폐교했다. 1905년 와촌교회, 1908년 하양교회, 1911년 평사·당곡·의송·남하·덕촌·영덕 교회, 1922년 상림교회 등이 봉회교회에서 분립했다. 1927년 봉동 160번지를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73년 신상리로 이전하였고, 1981년 진량제일교회로 명칭을 변하였다. 2009년 다시 봉회리 대평골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봉회교회는 진량과 하양 지역 교회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영남신학대학교

 

▲ 영남신학대학교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진량의 기독교 발상지인 이 마을에 1989년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들어섰다. 바로 영남신학대학교이다. 이 학교는 1913년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한 보통성경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후 1937년 고등성경학교, 1957년 대구장로회신학교, 1970년 영남신학교로 변경하였다. 장소는 대구시 동산동 현 대구제일교회 자리였다. 그러다가 1989년 대구제일교회 이상근 목사, 하양 한정근 장로 등 진량의 몇몇 신자들이 학교 부지를 모색한 결과 마침 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이 봉회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게다가 영남신학대학교 부지인 월령산은 일제시대 봉회교회 신자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부활절 예배를 드리던 곳이어서 신의 계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량공소로 시작한 진량성당

 

▲ 진량성당 

 

1985년 하양성당의 이임춘 신부는 진량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활동 공간인 진량공소를 이 봉회리에 건립하였다. 이후 1997년 환상공소와 평사공소를 통합하여 현 위치에다 진량성당을 건립하였다.

 

 

경산 14인 항일사건 이야기

 

항일사건의 전말

 

▲ 대구형무소 

 

진량 지역 크리스트교 중심지인 봉회리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른바 경산14인항일사건의 발원지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전국 곳곳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일부 기독교인들과 단체는 신사참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량 봉회교회 신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교회 안에 조선독립만세, 일본타도, 영미만세, 비밀엄수라는 내용이 적힌 조천기도회 강령이라는 문서를 몰래 갖다 놓은 뒤 19431117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 신자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봉회교회 전도사로 있던 강만조가 작성했다고 하면서 그가 전도하던 평사동 평사교회와 상림동 상림교회 간부들도 함께 체포했다. 경산경찰서에 체포된 이들은 거의 1년간 구금을 당하면서 매일 밤 고문을 당했다.

 

▲ 대구지방법원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기소된 이들은 194411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받고 혐의없음내지는 공소권 없음으로 풀려났다. 이들의 이러한 행적이 광복 후에 알려지게 되어 1996년부터 연차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건국포장을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

 

▲ 대구형무소 

 

당시 신사참배거부로 체포된 사람들은 봉회동 봉회교회 6, 상림동 상림교회 5, 평사동 평사교회 6명 등 모두 17명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14인보다 3명이 더 많다. 기존 알려진 14인 중 19961, 19974, 20043, 20181, 20221명 등 13명은 건국포장을 받은 상태이고, 1명은 아직 받지 못했다.
 

▲ 신사참배거부자 중 6명의 애국지사(AI리믹스)

 

14인에서 누락되어 알려지지 않았던 상림동 상림교회의 여사보(呂師輔), 평사동 평사교회의 강선이(姜先伊), 하양 금락동에 살던 봉림교회의 안상흠(安相欽) 3명은 이번에 필자가 찾아내었다. 아직 추서 받지 못한 이들 4명도 후손을 찾아 독립유공자로 신청할 예정이다. 아래는 신사참배거부로 체포되어 법원에서 재판받은 17명 명단이다.

 

▲ 진량 신사참배거부 기독교인 명단 

 

 

에필로그

 

처음 참새가 많이 날아드는 곳이라서 작사리라 명명되었던 봉회리는 20세기 들어서 하양 지역 기독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영향인지 아닌지 몰라도 지금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천주교 성당까지 들어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 되었다. 진량이 점점 도시화·공단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옛날 주민들이 지게를 지고 넘나들던 고개는 큰 도로가 개통되고, 대단지 아파트도 들어서서 주민들이 급증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봉회리에 숨겨진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봉회리 마을 
 
▲ 봉동 마을 전경 
 
▲ 회동 마을 
 
▲ 속등 
 
▲ 황새등 
 
▲ 삼밭구미
 
▲ 덕골고개
 
▲ 돈대미
 
▲ 대평골
 
▲ 봉회1리 회관
 
▲ 봉황초등학교 
 
▲ 봉회경로당 
 
▲ 영남신학대
 
▲ 진량성당
 
▲ 진량제일교회
 
▲ 진량새마을금고
 
▲ 진량농협 중앙지점
 
▲ 진량시장 

 

김진홍 기자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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