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과 매화의 마을 북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5) - 북리

2025-10-24 오전 9:13:50

▲ 진량읍 북2리 전경 

 

▲ 진량읍 북1리 전경 

 

 

프롤로그

 

베틀의 북을 닮아 북동이라 하고, 매화가 떨어지는 형상이라 하여 매동이라 불린 마을, 북리. 이곳은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역사의 터전으로, 골짜기와 들판마다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무창제와 설못, 그리고 삼봉재와 영사재는 마을의 물길과 정신을 함께 지탱해 온 증표다. 이름과 풍경은 바뀌었지만, 북리는 여전히 베틀처럼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고, 매화처럼 곱게 향기를 전하는 마을이다.

 

▲ 북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북리(北里)는 신라시대 마진량현에 속한 각단이었다. 고려 초 하양에 속했다가, 조선 초기에는 하양현 남면 토산리 사동(梭洞) 각단이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재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마을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후 하양현 남면이 낙산면으로 바뀌면서 하양현 낙산면 북동리가 되었다.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바뀌면서 하양군 낙산면 북동이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진량면을 새로 만들 때 매동과 함께 경산군 진량면 북동이 되었다. 1997년 진량면이 진량읍으로 승격되면서 진량읍 북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동남쪽 무창지 옆에 있는 북동마을과 북서쪽 들판 가운데 조성된 매동마을 2개의 각단으로 되어 있는데, 두 마을 모두 마을의 지형을 따서 이름을 붙인 예사롭지 않은 마을이다.

 

▲ 북리 지적도(1912)

 

 

베틀의 북을 닮았다는 북동(2)

 

▲ 북동 

 

▲ 북동 지적도(1912)

 

북동(北洞)은 무창지가 있는 골짜기의 모양이 베를 짜는 북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졌다. 처음에는 북 사를 써서 사동(梭洞)이라 적고, 현실음은 북동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후 행정 구역 명칭 변경으로 북녘 북을 음차하여 북동리(北洞里)라 기록하였다. 북동리가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1789)이다. 그러다 보니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해하기도 한다.

 

▲ 큰골 

 

이 북동에는 북동 이외에 큰골, 신당골, 설못안골이라는 작은 각단이 있었다. 큰골마을은 무창지 남쪽 골짜기 16번지 일대에 있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 신당골 

 

신당골은 북동 서쪽 77번지 일대에 있었는데, 지금도 몇 가구 살고 있다. 예전에 신당(神堂) 또는 비구니 승방이 있어 신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심 각단인 북동과 큰골, 신당골을 합하여 북2리다. 1912년 당시 신당골에 5가구, 큰골에 3가구, 북동에 9가구 살았다. 원래 경주김씨와 창녕조씨들이 살았는데, 지금은 각성들도 살고 있다.

 

 

매화가 떨어진 형상이라는 매동(1)

 

▲ 매동 

 

매동(梅洞)은 북동에서 서북쪽으로 1.2km 떨어진 들판 가운데 있다. 매동이라 명명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형이 매화꽃이 연못에 아름답게 떨어지는 매화낙지(梅花落池)형이며, 마을 뒤 291405433 번지 일대 옛날부터 마을만한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주위로 매화나무를 심어 절개를 숭상하였다고 매동이라 했다고 한다.

 

▲ 매동 지적도(1912)

 

▲ 매동숲

 

다른 하나는 가물 때 매가 날아와서 죽은 곳이라 하여 매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설 중 1912년 지적도를 참고하면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 이 매동은 조선 후기까지 정식 행정 마을로 등재되지 않다가, 화성지(1933)에 처음 등장한다. 1912년 당시 18가구가 있었으며, 현재는 많은 가구가 살고 있다. 현재 북1리다. 마을 동쪽에 코오롱 경산공장이 들어섰고, 주민들은 주로 포도농사를 많이 짓는다. 이 마을 도로명을 북리길이라 하는데, 마을의 유래를 담아내는 매동길내지는 매화길로 바꾸었으면 한다.

 

 

설못안골에 들어선 아파트단지

 

▲ 설못안골 

 

설못안골은 현재 매립된 적초지(입지·설못) 107번지 일대인데, 지금은 삼주봉황타운4차 아파트단지가 들어와 북3, 우림필유아파트단지가 들어와 북4리가 되었다. 1912년 당시 설못안골에 3가구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인하여 도시형 농촌마을이 되었다.

 

▲ 북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

 

▲ 무듬골 

 

북리는 진등말랭이라 부르는 원 북동과 매티미라 부르는 매동으로 나뉜다. 진등말랭이에 있는 골짜기는 마을 앞에 무동곡[무듬골], 설못안에 있는 설못안골, 북동 남쪽 신상동 쪽의 삼봉골, 북동 남쪽 솔밭골 등이 있었는데, 설못안골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 신당비알

 

산으로는 북동 동북쪽 전에 여승방이 있었다는 땡비알 또는 신당비알이 있고, 신상동 쪽 산은 삼봉이라 한다.

 

▲ 빈대굼들(매동)

 

▲ 바래미들(매동)

 

매동 주변에는 논과 들판에 관한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매동 서북쪽에 있는 복사들[뻑새], 뻑새 서쪽 지형이 멍에처럼 생긴 멍애배미, 멍애배미 남쪽 지형이 지게처럼 생긴 지게배미, 매동 서쪽 지형이 물고기를 잡는 반두처럼 생겼다는 반댓굼, 갈대가 많았다는 갈밭구미들, 매동 남쪽 바래밋들, 바래밋들 서쪽 지형이 횃대처럼 생긴 횃대배미, 매동 북쪽 개울가에 있는 갯들, 매동 서남쪽 봉회리 작새마을에 딸린 마을 근처에 있던 작새만리들 등이 있었다.

 

▲ 설못밑들(매동)

 

북동 근처에는 무창지 서쪽 둔덕에 있던 돈대미들, 설못 밑에 있던 설못밑들 등이 있었지만 경지정리와 개발로 지금은 거의 잊혀진 상태다.

 

 

저수지와 보

 

▲ 무창지(북동못)

 

산골짜기 안에 있는 북동에는 저수지, 들판 가운데 있는 매동에는 보가 많았다. 북동의 대표적인 저수지는 무창제(茂昌堤)와 적초제(赤草堤)가 있다. 이 둘은 모두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재되어 있어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창제는 당시 토산리 영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관개(灌漑) 20결로이었다. 흔히 북동못이라고도 부른다.

 

▲ 적초제(설못) 지적도

 

▲ 적초제(설못) 터 

 

적초제는 북동 서쪽 산 너머 봉회리 쪽 골짜기 입구에 있었는데, 이 역시 조선 초기에는 토산리 지역에 속했고, 관개 15결로 무창제보다는 조금 작았다. 이 저수지는 현지음으로는 설못’, 한자로는 입지(立池)라고도 하였다. 하양현읍지에 줄곧 빠져 있다가 조선지지자료(1911)에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저수지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 공사로 인하여 현재 매립되어 논밭으로 바뀌어버렸다.

 

▲ 삼봉지 

 

이외 북동 큰골마을에 있던 큰골못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는데 현재 매립된 상태이고, 삼봉골 삼봉재 아래에 있는 삼봉지는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어 현재 방치된 상태다. 이 삼봉지의 물을 받아 아래에 연밭을 조성하였다.

 

 

삼봉재와 영사재

 

이러한 마을에 경주김씨의 영사재와 창녕조씨의 삼봉재 등 유교문화의 상징인 재실이 2곳이나 있다.

 

경주김씨의 영사재

 

▲ 영사재

 

영사재(永思齋)1960년 경주김씨 문중에서 만취(晩翠) 김세관(金世觀) 선생을 추향하기 위해서 중건한 재실이다. 김세관은 전라도 남원에 살다가 병자호란으로 이곳 사동(2)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자신의 집을 만취당(晩翠堂)’이라 하였다.

 

▲ 만취당 현판 

 

처음에는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그의 사후 재실이 되었다. 후손들이 중건을 거듭하면서 영사재라 이름을 붙이고 1991년 서향으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영사재 현판

 

영사재현판은 석천(石泉) 정재호(丁宰鎬)가 섰고, 당호 만취당(晩翠堂)은 중건 당시 감역을 맡았던 후손 김정헌(金正憲)이 썼다.

 

창녕조씨의 삼봉재

 

▲ 삼봉재 

 

삼봉재(三峯齋)는 송담(松潭) 조학봉(曺學鳳) 선생을 기리는 재실로 1967년 조봉호(曺奉鎬)와 조기출(曺琪出)이 건립했다. 북리 남쪽 삼봉골의 삼봉지 남쪽에 있다. 원래 왼쪽 방에는 정훈당(庭訓堂)이라는 현판이, 조기출이 쓴 삼봉재기게판문 등이 걸려 있었다.

 

▲ 삼봉재 현판 

 

현재는 국한문으로 된 삼봉재기와 대구의 서화가 죽농(竹?) 서동균(徐東均)이 쓴 삼봉재현판만 걸려 있다.

 

 

에필로그

 

베틀의 북을 닮아 북리라 하였던 북2, 그리고 매화의 형상을 닮아 매동이라 하였던 북1리는 북녘 북이라는 한자로 대체되고, 또 일제의 마을 통합 정책으로 인하여 마을의 원래 이름은 사라져 버렸다. 이 마을 또한 법정동은 북리라 하더라도 행정명이라도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렸으면 한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북동마을
 
▲ 북동마을
 
▲ 매동마을
 
▲ 매동숲
 
▲ 무등골
 
▲ 설못안골
 
▲ 솔밭골
 
▲ 적초제(설못) 터 
 
▲ 북1리회관
 
▲ 북2리 마을회관
 
▲ 삼주봉황4차아파트
 
▲ 우림필유아파트
 
▲ 영사재 
 
▲ 영사재 
 
▲ 삼봉재 입구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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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 (2025-10-26 오전 11:11:54)   X
    상세한 동.리 역사 큰 지식과 감동을 받습니다 . 멋진기획 취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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