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되고 싶은 염원이 서린 부기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7) - 부기리

2025-11-07 오전 9:03:50

▲ 진량읍 부기리 전경 

 

 

프롤로그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막히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소통하며, 소통하면 오래간다는 뜻으로 세상의 이치를 풀어낸 말이다. 부기리가 걸어온 길은 이 구절과 잘 맞아 떨어진다. 예로부터 금호강 충적평야를 터전 삼아 논농사와 과수원으로 생업을 이어온 마을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산공장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농업만이 아니라 산업과 함께 호흡하는 마을로 바뀌며, 삶의 풍경 또한 달라졌다. 오늘날 부기리는 여전히 넓은 들을 품은 채, 산업과 농업이 함께 어우러진 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그 속에 담긴 부기리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자.

 

▲ 부기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부기리(富基里)는 조선시대 하양현 중림면 부기리였다. 마을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이다. 19세기 초반 금호강가 넓은 초지에 조동리(棗洞里)가 새로 생겼다.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바뀌면서 중림면 조동리는 부상동, 부기리는 부하동이 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동리를 통폐합할 때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하양군 중림면 부기동으로 환원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합하면서 진량면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경산군 진량면 부기동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부하동은 부기1, 부상동은 부기2구가 되었다가 해방 후 부기1, 부기2동이 되었다. 부상동 북쪽 금호강가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부기3, 4리가 생겨 현재 부기1부기4리까지 있다.

 

▲ 부기리 지적도(1912)

 

부기·부태·부하동

 

▲ 부기1리 마을 

 

부하동(富下洞)은 부태라고도 하는데, 부기리의 원 마을이다. 부태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한양조씨 조여훈이라는 사람이 영천 용산리에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 와 살면서 부자가 되기를 빌었다는 뜻으로 부태(富泰)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양기리에서 부기리에 걸친 땅의 모양이 베틀의 부티와 같다고 하여 부태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 마을에 옛날부터 쌔부리, 참남부리, 점부리 등 보()가 많았는데, 이 보를 부리라 하였다. 그래서 보가 있던 곳이라서 부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1241가구가 살았고, 현재 부기1리다.

 

▲ 진량에덴타운 

 

그리고 이 마을에 진량 최초의 아파트인 진량에덴타운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조동·부상동·대초마

 

▲ 부기2리 마을 

 

부상동(富上洞)은 원래 금호강가에 있어 잡초가 무성하여 큰 초지가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대초(大草) 또는 대초마을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부태마을과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들어와 숲을 개간하여 대추나무와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대추나무가 많아졌는데, 그래서 대초가 대추가 되고, 대초마가 대추마 또는 한자로 조동(棗洞)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 초기까지 양잠업이 성행하면서 뽕나무를 많이 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인들이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1970년대까지 사과밭이 많았다. 이와 더불어 환상, 대조 등과 함께 종묘 사업도 성행하였다. 1912년 당시 18가구가 살았고, 현재 부기2리다. 이 마을은 금호강가에 있다 보니 비가 많이 내리면 늘 마을이 물에 잠겼다. 1933년 하양 지역에 장마가 졌을 때도 강가에 있던 집이 물에 잠겨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렸다고 동아일보에 보도된 적 있다.

 

▲ 부상동 금호강가에 들어선 아파트단지 

 

또한 진량이 점점 확장되어 하양과 인접하게 되면서 대추마을 북쪽 금호강가에는 창신무학타운, 휴먼시아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 부기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

 

▲ 부기1리 무창지들판 

 

부기리는 금호강가 충적평야에 자리한 마을이다 보니 예로부터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논과 들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부태의 대표적인 논과 들로는 북동 무창지의 물을 대던 무창지들, 그 들판 복판에 지형이 멍에처럼 생긴 멍애배미, 동북쪽 쌔부리의 물을 대던 쌔부릿들, 북쪽 참남부리의 물을 때던 참남부릿들 등이 있었다.

 

▲ 부기2리 말앞들 

 

대추마을의 논과 들판으로는 동남쪽 지형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동북쪽 개울 옆 하양으로 가는 옛 길가 갯주막이 있던 갯주막들, 서쪽 하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중나들이들, 중나들이 서북쪽 바닥이 깊은 구매들, 구매들 서쪽 둑을 막아 물막이를 하다가 장마로 터졌다고 한 터진매기들, 구매들 뒤쪽 뒷구매들, 동남쪽 마을 앞에 있던 말앞들, 동쪽 말뚝을 박아 만든 물막이가 있던 매기통들, 동남쪽 새로 된 작은 보가 있던 새불들 등이 있었는데, 경지정리와 개발로 거의 잊혀진 상태다.

 

 

남북분단으로 남한과 북한에 각각 아들을 두게 된 할머니의 사연

 

▲ 문장순 할머니(AI)

 

일본 나고야에 살던 재일교포 문장순(文張順, 당시 71) 할머니가 1963년 부기리를 찾아왔다. 할머니는 1930년대 작은아들과 일본으로 갔다. 큰아들은 부기리에 남았다.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나고야에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1959년부터 시작한 재일교포북송사업에 속아 작은아들과 가족들이 북한에 가려고 했다. 이때 아들은 어머니도 함께 데려가려고 했다. 이에 할머니는 나는 죽어도 고국에서 죽겠다라고 하면서 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그 후 할머니는 재일거류민단의 주선으로 가산을 정리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한수환(韓水丸)

 

19631119일 시모노세끼에서 일본 국적 한일정기여객선 간스이마루[한수환(韓水丸)]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기자를 만난 할머니는 큰아들 김(당시 45)을 찾아가겠다면서 진량면 부기리로 쓸쓸히 길을 나섰다고 한다(조선일보. 1963.11.21.). 한 아들은 북한에, 다른 한 아들은 남한에 두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리워했을 할머니의 아픈 사연도 잊혀져 가는 부기리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기타 삶의 흔적

조선시대 이 마을에 조여훈(趙汝勳)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본관은 한양으로 고려 후기 용원부원군 양렬공 조인벽의 9세손이고, 임진왜란 영천 의병장 조종악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들 통정대부 조인도, 손자 훈련원 판관 조벽한을 두었다. 처음 영천에 살다가 하양 부기리로 이거하였다. 천성이 베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흉년으로 인해 곤궁하고 외로운 이들을 진휼하여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수직으로 가선대부로 제수되었다고 한다.

 

▲ 부태마을숲

 

▲ 부태마을 노거수 

 

그리고 부기리 158-1번지 부림초등학교 뒤쪽 개울가에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 167년 정도 되었는데, 20년 전까지 마을에서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 부림초등학교 

 

또 이 마을(부태)에 있는 부림초등학교는 19454월 진량북부국민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96년 부림초등학교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농촌 초등학교 대부분이 폐교 위기에 처한 상황과는 달리 이 학교는 금호강가 대단지 아파트로 인하여 전교생 870여 명이 있다.

 

▲ 새마을 표지 사진 

 

또한 부기리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범마을로 지정되어 새마을공장도 세워지고, 부기리 일대 항공 사진이 새마을표지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마을에 1970년대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산공장이 들어와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산공장이 들어선 부기리

 

부기리는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금호강 넓은 평야에 논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들어와 사과 농사를 많이 지었다. 해방 후에도 논농사와 사과 농사를 병행하면서 문천지가 축조되면서 고질적인 물 걱정도 들 수 있었다.

 

▲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산공장 

 

이러한 전통적인 마을에 1973년 한국의 나일론 생산의 대표적 기업 코오롱상사가 들어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 대기업 공장이 들어온 이유는 경부고속도로 진량 톨게이트가 생기면서 가능했다. 그래서 부태마을 넓은 농경지가 한순간 공장으로 탈바꿈하였다. 1957년 대구시 신천동(현 수성공원 일대) 한국나일론으로 시작한 코오롱은 1963년 한국 최초로 나일론 생산 공장을 준공하였다.

 

▲ 한국 나일론 원사 공장 준공식(1963)
 

 

이때 박정희 대통령권한대행과 박태준 최고회의상공위원 등이 참석하였다. 1968년 나일론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코롱상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코롱섬유로 불리며 19738월 경산군 진량면 부기동 부태마을(부하동) 농경지 5만여 평을 매입하고, 내자 20, 외자 450만 달러를 투입하여 코롱섬유 경산공장을 착공하였다. 1년 뒤 19748월부터 시운전에 들어가 9월 준공식을 가졌다. 당시 코롱섬유 경산공장은 폴리에스텔과 나일론의 직물, 저지, 메리야스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 직기 200여 대, 저지기 18, 환편기 38대 등을 갖추었다(매일경제 1974.6.12.). 1974년 일본 도래이그룹과 합자하여 1만여 평의 땅을 매입하여 폴리에스텔 필름 공장을 설립하였다. 1981년 나일론과 폴리에스텔이 합병하고, 1982년 코롱상사 경산공장을 인수하였고, 그 후 코오롱인더스트리로 사명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에필로그

 

부태마을에 코오롱 공장이 들어선 지 50여 년이 흘렀다. 처음 공장을 설립할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취직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 이외 공장에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주민의 수입은 농사와 월급 등으로 마을 이름처럼 부자가 많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기리는 논농사 이외 포도, 복숭아, 대추 등으로 농가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부기1리 마을 전경 
 
 ▲ 부기1리 마을
 
▲ 부기1리 마을회관 
 
▲ 부기2리 마을 전경 
 
▲ 부기2리 마을 
 
▲ 부기2리 새마을회관 
 
▲ 진량에덴타운 
 
▲ 창신무학타운 
 
▲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산공장 
 
▲ 부태마을 노거수 
 
▲ 부태마을숲
 
▲ 부림초등학교 
 
▲ 부기천
 
▲ 부기5교
 
▲ 부하교
 
▲ 말앞들 
 
▲ 메기통들 
 
▲ 무창지들판
 
▲ 장구베미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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