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상림재활산업단지가 들어서는 상림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9) - 상림리

2025-11-21 오전 8:53:29

▲ 진량읍 상림1리 전경 

 

 

프롤로그

 

상림리는 금호강 들판에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 중림리에서 시작되어 외상동과 외하동을 거쳐 지금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온 마을에는 죽림사와 죽림원의 흔적이 전하며, 일제시대에는 상림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민족교회로서의 자부심을 지켜냈다. 현재는 경산상림재활산업단지가 조성될 예정으로, 전통적인 농촌 마을이 산업과 교육의 중심지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상림리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상림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상림리(上林里)는 조선시대 하양현 동면 중림리(中林里)였다. 임진왜란 후 동면이 와촌면과 중림면으로 분리되면서 중림리는 하양현 중림면 외중리와 내중리로 나뉘어졌다. 이때 외중리는 외리, 내중리는 내리로 불렀다. 19세기 중엽 죽림리(竹林里)로 바뀌었다가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바뀌면서 외중리는 다시 외상동과 외하동 2개의 마을로 분리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마을을 통폐합할 때 2개의 마을은 외상의 과 죽림의 을 따 상림동으로 통합되었고, 1914년 진량면에 편입되어 경산군 진량면 상림동이 되었다. 1988년 상림리가 되었고, 1997년 진량읍 상림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상림리 지적도(1912)

 

죽림·중림·외상동

 

▲ 외상동 

 

외상동은 처음 마을 입구에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이 있어, 죽림리라 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오래되어 죽림이 음운변화를 일으켜서 중림으로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중림으로 기록되어 있어 죽림사가 있던 시기는 신라나 고려 때로 추정된다. 그 후 18세기 중림리는 현재 내리리와 분리되면서 외중리로 바뀌고, 다시 죽림리로 바뀌었다가 외리 위에 있는 동네라 하여 1895년 외상동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에 의해 상림동으로 바뀌었다. 현재 상림리 북쪽 마을인데, 상림리 마을 회관 앞 삼거리 골목을 기준으로 북쪽은 외상동, 남쪽은 외하동이다.

 

외하동·아랫마을

 

▲ 외하동 

 

외하동은 외중리가 확장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1895년 외하동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1년 외상동과 다시 통합되어 상림리가 되었다. 외상리 아래에 있다고 하여 아랫마을이라고도 한다.

 

뒷동매

 

▲ 뒷동매 

 

뒷동매는 외하동이라 부르는 아랫마을 동쪽에 있는 들을 아랫말이라고 하였는데, 이 들판 뒤에 있는 마을이라서 명명되었다. 1912년 지적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35번지 일대인데 현재 카센타와 전원주택 등이 있다. 그 동쪽으로는 원룸단지가 들어서 있다.

 

▲ 상림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

 

▲ 봇갓새 들판 

 

상림리는 금호강 넓은 충적평야 가운데 있어 산과 골짜기는 없고, 논과 들판이 펼쳐져 있다. 대표적인 논과 들판으로는 상림 서쪽 두 개의 보 사이 보를 수축하기 위한 말림갓인 두 봇갓 사이에 있는 봇갓새들, 봇갓새 서쪽 지형이 황새를 닮은 황새배미, 봇갓새 북쪽 지형이 멍에처럼 생긴 멍애배미, 상림 동쪽의 욋고말리, 욋고말리 서쪽의 개똥바리미들, 상림 북쪽 심번 등이 있었다.

 

▲ 개똥바리미 들판 

 

이들 논과 들판 이름은 1960년대 경지정리로 잊혀졌다가, 최근 이 일대가 경산상림재활산업단지부지로 선정되면서 조만간 들판도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죽림사 터

 

▲ 죽림사 터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 옛날 이 마을에 죽림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마을 이름도 죽림리였다고 한다. 죽림사는 구 번지로 상림리 365번지에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학성빌라와 기타 원룸이 들어서 있다. 죽림사가 있었던 시기는 신라나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경산과 영천을 잇는 주요 교통로여서 고려시대부터 여행자 공공숙소인 원()이 많았다. 당시 원은 반드시 사찰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그래서 원이 있던 곳은 사찰이 있어 흔히 사원(寺院)이라 칭하였다. 이 근처에 죽림원(竹林院)이라는 여행자 숙소가 있었고, 그것을 관리하던 사찰을 죽림사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상림교회 신사참배거부 운동

 

▲ 상림교회 

 

이 마을에 있는 상림교회 또한 유서가 깊고 사연이 있다. 이 교회는 1922년 봉회리 봉회교회에서 분립하였다. 때는 1943년 일제가 경산 지역의 기독교 신자들을 모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진량 지역 봉회·상림·평사 교회 신자들과 교역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일제는 이 지역 전도사 강만조가 작성한 일제 저항 문서가 있다면서 봉회교회 장로였던 김종철의 집을 수색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에 상림교회 간부였던 김종만, 현용주, 현영조 등을 체포하여 1년간 구금하여 갖은 고문을 하였다. 이들 중 김종만은 8번지, 현용주는 317번지, 현영조는 117번지에 살고 있었다. 현용주와 현영조는 형제지간이었다. 이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 넘겨져 194411월 재판을 받은 후 혐의없음내지는 공소권 없음으로 풀려났다. 해방 후 이들의 신사참배거부 활동이 알려져 건국포장을 받았다.

 

▲ 현용주 지사

 

그런데 상림교회 출신 중 신사참배거부로 재판에 넘겨진 사람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 바로 여사보(呂師輔)라는 신자이다. 당시 51세로 상림동 353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4411월 김종만 등 다른 신자들과 함께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후 대구지검에서 혐의없음으로 처리되었다. 다른 신자들은 해방 후 건국포장을 받았는데, 이분은 후손과 연락이 끊겨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상림교회는 이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민족교회로 거듭나서 지난 2022상림교회 100년사를 발간하였다.

 

 

창녕조씨 문중의 죽원재

 

▲ 죽원재 

 

▲ 죽원재 

 

한편 이 마을 중림에는 창녕인 조몽필(曺夢弼)을 추향하는 죽원재(竹源齋)가 있다. 조몽필은 경주 갑산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죽원재는 처음 서당으로 이용되다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퇴락해진 것을 1941년 중건하여 조몽필 이하 창녕조씨 상림문중 재실로 이용하고 있다. 여러 차례 중건을 거치고, 2002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 특히, 마당에 깔린 박석과 소나무, 마루로 올라가는 섬돌은 고아한 풍미를 느끼게 한다.

 

▲ 죽원재 현판 

 

재실은 정면 4, 측면 1칸 반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정면에 조봉환이 쓴 죽원재 현판과 마루에 상량문’, ‘수리기게판문이 걸려 있다.

 

 

기타 삶의 흔적

 

상림리에는 원래 창녕조씨와 밀양박씨가 주를 이루었다. 창녕조씨 상림 입향조는 조몽필로 알려져 있고, 밀양박씨 상림 입향조는 대구에 살다가 상림으로 들어온 박상욱(朴尙郁)이다. 지금은 각성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상림리에는 해마다 화전놀이를 하였고, 마을 입구 271번지에 있던 떡버들나무 밑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 자손 번창을 기원하던 동제는 사라진 지 오래다.

 

▲ 갯주막 터 

 

그리고 외상동 금호강가에는 영천이나 하양으로 가던 길손에게 시원한 막걸리나 따뜻한 국밥을 제공하던 갯주막[浦店(포점)]이라는 주막도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조차 사라져 버렸다. 또 이 마을 서북쪽 내리리와 경계한 금호강에는 정응지가 축조했다는 만세량보가 있다. 일제 때 금호보로 바뀌었다(만세량보에 관해서는 압량읍 현흥2리 편을 참조할 것).

 

 

경산상림재활산업단지가 들어설 상림 들판

 

▲ 상림리 원룸촌 

 

상림리는 전통적으로 농촌 마을이었다. 1980년대 상림리 동쪽 문천지 안에 대구에 있던 대구대학교가 들어오면서 학생들이 기거하는 숙소가 많이 생겼다. 농사로 경제 활동을 하던 주민들은 원룸과 가게 등으로 수입을 창출하면서 마을 전체가 원룸촌일 정도로 많이 변하였다.

 

▲ 상림리 들판 

 

이러한 상황에서 총사업비 2,167억이 투입되는 재활산업단지가 들어설 계획이어서 마을이 한 번 더 획기적으로 변모할 예정이다. 재활산업단지의 정식 명칭은 경산상림재활산업단지이다. 이 산업단지는 대구연구개발특구 지식서비스 R&D 사업의 일환으로 대구·경북 지역 재활의료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여 초고령 사회에 대비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이 재활산업단지가 상림리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대구·경북 특수교육과 재활교육의 선구격인 대구대학교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대구대학교와 산업단지, 그리고 연구기관 등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연구 결과 상림리 들판이 부지로 선정되었다.

 

▲ 재활산업단지 계획도 

 

재활산업단지는 상림리 마을을 제외한 북쪽 상림들판 전체 179,000평의 부지에 산업시설 용지, 복합시설용지, 주거시설, 지원시설, 공공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단독주택과 공동주택(아파트)을 동시에 분양하는데, 단독주택은 기존 마을의 북쪽과 서쪽에 68세대, 아파트는 3개 단지에 2,970세대를 짓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로 인하여 유입될 인구는 7,200여 명으로 보고 있다.

 

 

에필로그

 

진량의 기존하던 마을이나 들판은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있다. 특히,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주변 지역의 마을이나 들판, 산골은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농업을 생업으로 하던 주민들은 산업단지의 직원이 되거나, 삶의 보금자리를 상실하고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물리적인 삶의 질은 나아졌을지라도 그들이 정신적으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인문학의 영역이다. 과거 새마을운동으로 전통적인 삶의 문화들을 없애버린 아픔을 잊지 말고, 보존하면서 개발하는 혜안을 가졌으면 한다. 아무튼 상림재활산업단지도 여천동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상림리 앞 도로 
 
▲ 상림리 입구 
 
▲ 외상동 마을
 
▲ 외상동 
 
▲ 외하동 마을
 
▲ 외하동 
 
▲ 상림교회 
 
▲ 상림리 마을회관 
 
▲ 죽원재 
 
▲ 죽원재 내부 
 
▲ 죽림사 터 
 
▲ 개똥바리미들판 
 
▲ 내리리 모아산 
 
▲ 떡버들나무 터 
 
▲ 만세량(금호보)
 
▲ 배암구미보 
 
▲ 봇갓새
 
▲ 상림리 들판 
 
▲ 심번
 
▲ 윗고말리
 
▲ 황새배미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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