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최대 저수지가 있는 문천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1) - 문천리

2025-12-19 오전 9:13:38

▲ 진량읍 문천리 전경 

 

 

프롤로그

 

물이 있어야 삶이 있고, 저수지가 있어야 들판이 산다.” 이 말처럼 문천리는 수백 년 동안 물과 함께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다. 조선 초기 다문리에서 비롯된 이름은 선비가 많아 글이 흥성했다는 뜻을 품고 있으며, 이후 솔비와 장천을 품어 오늘의 문천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경북 최대의 저수지, 문천지를 안고 금호평야를 적셔온 고장이 되었다. 마을을 가른 고속도로와 산업단지 개발, 저수지 건설로 인한 수몰의 아픔도 있었지만, 문천리는 늘 물과 사람의 이야기를 품으며 새로운 길을 열어왔다. 이제 물길 따라 이어진 문천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

 

▲ 문천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문천리(文川里)는 조선 초기 하양현 동면 고다문리(古多文里)였다. 이후 동면이 와촌면과 죽림면으로 분리되면서 죽림면 고다문리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장천, 솔비가 정식 마을로 승격되어 다문리, 장천리, 송비리로 나뉘었다.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이 되면서 송비리는 다문리에 병합되어 하양군 중림면 다문동과 장천동이 되었다. 1911년 동리 통폐합 때 다문동과 장천동이 다시 통합되어 문천동이 되었다. 1914년 진량면이 생기면서 진량면 문천동이 되었고,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경산군 진량면 문천리가 되었다. 1997년 진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진량읍 문천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다문동, 송비[솔비], 장천동 등 3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고다문리 지적도(1912)

 

고다문리·하양다문[문천1]

 

▲ 고다문리(문천1리)

 

다문리(多文里)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등재되어 있어 유래가 깊다. 원래 다문리였는데, 바로 남쪽에 새로 마을이 조성되면서 원래 마을은 옛날 다문리라는 뜻에서 고다문리(古多文里)’라 칭하였다. 행정구역상 고다문리는 하양현, 새로 조성된 다문리는 자인현에 속하였다. 그래서 하양의 다문리를 하양다문·하다·하양다글·다글·다갈등으로 불렀다. 옛날 이곳에 선비가 많아서 다문(多文)’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서는 김해허씨의 만취재, 박능정의 묘소재인 송암재 등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재실이 2개나 있었다. 1912년 당시 15가구 살았다.

 

▲ 문천리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그런데 경부고속도로가 문천리에 있는 고다문리제(다문제)와 다문리 뒤쪽을 가로질러 생기면서 수백 년 된 고다문리제는 매립되고 장천동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다문리 몇몇 가구는 고속도로에 수용되었지만, 대부분의 집은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원래는 문천3리였는데, 문천1리인 솔비가 폐촌되면서 이곳이 현재 문천1리가 되었다.

 

▲ 송비동(솔비) 지적도(1912)

 

솔비·송비

 

▲ 솔비마을 터 

 

송비(松扉)는 다문동에서 서남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을 입구에 소나무가 사립처럼 늘어서 있어 명명되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송비(松扉)라 적고, 일상생활에서는 솔비라 하였다. 다문리에 속한 각단으로 존재하다가 19세기 중엽 정식 마을이 되었다가 1895년 다시 다문리에 병합되었다. 1912년 당시 18가구 살았다.

 

▲ 폐촌 직전 솔비마을 위성 사진(출처:카카오맵)

 

그런데 이 마을은 2018년 경산4일반산업단지로 지정되어 공단에 수용되었다. 그 바람에 수백 년 동안 생활하던 터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에 따라 솔비 주민들은 고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마음속에서만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 장천(문천2리) 지적도(1912)

 

장천·장칭이[문천2]

 

▲ 장천리

 

장천(長川)은 마을 남북으로 길게 흘러가는 시내가 있어 장천이라 명명되었다. 호구총수에는 등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장하동(長下洞)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오기로 보인다. 이 장천이 현지에서는 사투리 장칭이로 발음한다. 1912년 당시 24가구 살고 있었다.

 

▲ 장천리 원래 마을 터 

 

그런데 1950년 문천리 북쪽과 내리동 골짜기에 문천지가 축조되면서 이 마을이 수몰 지역에 들어가 주민들은 남쪽 유너리골 있는 곳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문천2리다.

 

▲ 문천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

 

▲ 두리봉 

 

문천리의 산은 솔비 동북쪽 모양이 둥그렇게 생긴 두리봉이 대표적이다. 이외 솔비 서남쪽 건답이 있던 등성이인 건덜배기, 솔비 북쪽 뒤의 뒷등, 서쪽 옛날 막을 짓고 살았다는 막등, 솔비 앞쪽의 앞등, 문천, 신상, 다문, 북리 경계에 긴 등성이인 진등 등의 등성이가 있다.

 

▲ 오밭골 

 

또 솔비 서쪽 못이 있던 못골짝, 동쪽 밑에 있다고 하여 밑골짝, 솔비 북쪽 삼밭이 있던 삼밭골, 솔비 남쪽 안에 있던 안골짝, 하양 다문 동쪽에 있던 오밭골, 하양 다문 북쪽의 욋골, 두리봉 동쪽 초당이 있었다는 초당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 달봉고개 

 

고개로는 솔비 서남쪽 신제동 신제지의 물이 넘어왔다고 붙여진 무내미고개, 솔비 남쪽 신제지로 넘어가며 여러 굽이를 돌아갔다는 돌고개가 있었는데 공단이 조성되면서 모두 없어졌다. 장천에는 서쪽 길게 이어진 진등재, 북쪽 양기리로 넘어가던 달봉고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공장이 들어와 구분이 어렵다.

 

▲ 다갈못들 

 

문천리 주민들의 먹거리를 제공해 주던 논과 밭으로는 장천 남쪽 욋골에 있던 욋골논, 장천 동쪽 길게 펼쳐져 있던 진골새, 유너리못 안쪽의 유너리못안, 다갈못 근처 다갈못들이 있다.

 

▲ 문정바웃들 

 

솔비마을에는 생밑골짝 동쪽과 문정바우 밑에 있던 문정바웃들, 밑골짝 남쪽 미너리못바지 등이 있었다.

 

▲ 오밭골못밑들 

 

하양다문에는 오밭골못 밑의 오밭골못밑, 문정바웃들 동쪽 밭두둑 밑의 밭덤, 밭덤 남쪽 수싯들, 밭덤 아래의 아릿밭덤, 밭덤 위쪽의 웃밭덤 등이 있었다.

 

▲ 송암재 전경 

 

임란 의병장 박능정과 그의 아들 박붕을 추향하는 송암재

 

송암재(松巖齋)는 문천2리 송비산 아래 울산박씨 의병장 박능정(朴能精)을 추향하는 묘소재이다. 박능정은 하양에서 창의하여 1597년 울산 서생진(西生鎭)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아버지는 동래 수성장(守城將)으로 순절한 박안세(朴安世)이다. 그의 아들 박붕(朴鵬)도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여 당시 하양현 고다문리 솔비각단의 송비산 서쪽 기슭에 모셨다. 박붕의 호는 관학암(觀鶴庵)으로 하양의 의병장 신해(申海) 장군이 권응수 진영에 합류하였을 때 아버지 박능정을 대신하여 수성장이 되어 하양을 지켰다.

 

▲ 송암재 현판 

 

이러한 두 부자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1968년 후손 박수경 등이 송암재를 지어 추향하였다. 송암재기는 영천 청통 애련리 천곡 출신의 중재 이호대가 썼다. 그는 영천의 한학자 낭산 이후 선생의 아들이다. 한편, 하양읍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하양 출신의 의병장 8인을 기리는 임란 창의 하양 제공 사적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두 분이 배향되어 있고, 울산에서도 박능정을 배향하고 있다.

 

▲ 만취재(경산의 가문)

 

 

군수 허보를 추향한 만취재

 

만취재(晩翠齋)는 문천2518번지에 있던 군수공 허보(許輔)를 추향하던 재실이었다. 허보는 본관이 하양, 자는 찬지(贊之), 부친은 허충(許忠)으로 1486년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한 후, 1516년 식년시 을과 4위로 급제하였다. 식년시에 급제할 당시 전력은 종6품 잡직 기술직인 교수(敎授)를 역임하였다. 그 후 의성현령과 초계군수를 역임하여 군수공이라 부른다. 그의 아들 허량(許亮)1540년 식년시 병과 8위로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9세손 허준(許焌)도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허보를 추향하기 위하여 허씨문중에서 재사를 건립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터만 남은 곳에 후손 허동범을 비롯한 문중에서 1959년 장천에 재사를 건립하고, 만취재라 이름하였다. 만취재기는 안동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한 이상호가 썼다. 최근 개발로 폐철되었다.

 

▲ 김창항 효자각 
 

 

개발로 이전한 김창항 효자각

 

솔비마을 산31번지에는 순조 연간에 선원각 참봉을 지낸 김창항(金昌恒)의 효자각이 있었다. 그는 김해김씨 탁영 김일손의 후손으로 초휘는 시항(時恒), 자는 기채(奇彩), 부친은 김태식(金泰植)이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 박씨를 정성껏 모셨다.

 

▲ 김창항 효자각 정려 현판 

 

노모가 70세에 이르러 병이 들자 그는 울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이에 하늘이 감동하여 겨울에는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오르고, 여름에는 뜰 안에 꿩이 날아들어 그것으로 모친을 간호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구전하다가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928년 서울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록에 실리자 1933년 후손 김봉달과 김해김씨 문중에서 정려각을 세웠다. 효자각기19335월 경산 사동의 갈헌 한동유 선생이 썼다.

 

▲ 김창항 효자비 

 

선원각 참봉 김해김공 효행비라 제목을 붙인 비석은 1976년 하양인 허대원이 짓고, 김해인 김종일이 썼다. 그런데 이 효자각이 솔비마을에 들어선 경산4일반산업단지에 수용되는 바람에 후손들이 용성면 고죽리 선산에 이전해 놓았다.

 

 

조선시대 문천리 저수지

 

▲ 다문제 터 

 

문천리의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재된 고다문리중제(古多文里中堤)가 가장 오래되었다. 당시 관개 50결의 크기였고, 문천리 149번지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중제였는데, 여지도서에서 고다문리지(古多文里池)로 바뀌었고, 영남읍지(1871)에서 다문제(多文堤)로 바뀌었다. 이후 줄곧 다문지 또는 다갈못으로 불리다가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매립되어 일부는 도로에, 일부는 논으로 바뀌었다.

 

▲ 오복지 

 

조선 후기에 축조된 오복지(五福池)도 있다. 오밭골에 있어서 오밭골못 또는 접시처럼 작다고 하여 접시못으로도 불렀다. 처음 오박지라 부르다가 와전되어 오복지로 변했다. 문천리 26번지에 있다. 또 장천 서남쪽 골짜기 안 520번지에 유너미못 또는 미너리못도 조선 후기에 축조되었는데, 현재 매립되었다. 이외 솔비에는 못골짝에 있던 못골짝못, 안골에 있는 안골못은 모두 일제시대 이후 축조되었는데, 공단 조성으로 사라졌다.

 

▲ 문천지 

 

경북 제일의 저수지 문천지

 

이러한 마을에 마을 이름을 딴 경북 최대의 저수지 문천지가 있다. 이 문천지는 1950년 축조를 시작하여 5년 간의 공사 끝에 완공한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저수지다. 사실, 문천지가 축조되기 전 이곳에는 조선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대제(大堤)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당시 중림리(내리리)에 속한 저수지로 관개 면적이 80결로 상당히 컸다. 그런데도 대제 아래에 있던 양기리, 상림리, 부기리 등 금호강 주변 넓은 들판에 물을 공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1600년경 건흥리(현 현흥2)의 정응지가 상림리 금호강가에 만세량이라는 보를 축조하여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일제시대 들어 또 물 부족 현상이 심해지자 1928년 일제 수리조합이 만세량보를 확장하고 금호보로 이름을 바꿔 들판에 물을 공급했지만, 역시 물 부족 현상이 심했다.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메추리 두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왔다가 한 마리가 굶고 갈 정도로 황무지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일제 말기 내리리 대제를 확장하여 금호들판에 물을 공급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설계까지 마쳤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작업이 중단되었다.

 

▲ 박문기 공덕비 

 

해방 후 5년이 지난 1950년 경산수리조합장 박문기(朴文基) 씨의 주도로 대제 확장 공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경비는 외국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못둑은 대제 아래 상림리와 양기리에 걸쳐 축조되었고, 수몰 지구는 내리리 일부와 문천리 장천 마을 전체, 평사리 일부 골짜기가 해당되었다. 특히, 문천리 정천마을은 마을 전체가 수몰 대상이어서 마을을 서쪽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저수지 이름을 문천리 주민들의 희생을 기리는 차원에서 마을 이름을 따 문천지라 하였다.

 

▲ 문천지 전경 

 

이 저수지는 만수 면적이 130.4ha로 당시 경상북도에서 제일 큰 저수지가 되었다. 또 관개 면적도 970ha에 달해 우리나라 10대 평야 중의 하나인 금호평야 일부를 관개하면서 만성적인 물 부족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 주민들이 1982년 수리조합장 박문기 씨의 공덕을 기리는 공적비를 못 둑에 세워 놓았다. 또한 이 저수지는 어디에서 보아도 그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날씨가 좋은 날이면 5600여 명의 태공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기도 한다. 1980년대 대구대학교가 이 저수지 북쪽 내리리 노은산 일대에 들어왔고, 양기리 쪽에는 아파트단지, 동쪽 평사리 쪽에는 롯데주류경산공장이 들어와 있다. 게다가 경산의 아름다운 저수지 10선에 뽑힐 정도로 풍광 또한 아름답다.

 

 

에필로그

 

▲ 문천지 장박텐트족 

 

옛날 문천리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문천지 못 둑 아래에서 양기리를 거쳐 문천리 진량공단까지 도로가 뚫려서 접근이 쉽다. 게다가 솔비마을을 없애고 들어선 경산제4산업단지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문천지에 일명 장박텐트족이 알박기로 낚시터를 점령하고 있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텐트에는 취사, 난방 시설 등을 갖춰 놓고 장기간 전용 낚시터처럼 이용하고 있어 농어촌공사 담당자와 갈등을 벌이고 있다. 문천리, 내리, 양기리 등 진량읍민들이 손수 지게를 지고, 나무를 베어 만든 이 저수지는 현재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며 도감은 마을 주민이 맡고 있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문천1리 마을 전경 
 
▲ 문천1리 마을 
 
▲ 문천1리 회관 
 
▲ 문천2리 마을 
 
▲ 문천1리 마을 
 
▲ 문천2리 회관 
 
▲ 송암재 대문 
 
▲ 송암재 
 
▲ 문천지 
 
▲ 문천리를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 
 
▲ 솔비동 터 
 
▲ 다갈못들 
 
▲ 다문제 터 
 
▲ 문천1교와 삼밭골 
 
▲ 삼밭골 
 
▲ 오밭골 
 
▲ 오복지 
 
▲ 유너리못안들
 
▲ 진골새논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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