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3 오전 9:28:02

▲ 다문리 전경
◆ 프롤로그
다문리(多文里)는 이름 그대로 문향이 짙게 배어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글을 읽고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한 선비의 깊은 학식과 더불어, 그의 며느리가 보여 준 지극한 효행이 온 고을에 알려져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정성과 음덕이 후손에게까지 이어져 마침내 영화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다문리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오늘 우리는 글 읽는 마을, 사람의 도리를 지켜 낸 마을인 다문리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 다문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다문리(多文里)는 원래 마진량현 다문촌이었다. 고려 초 마진량현이 구사부곡으로 강등될 때 구사에 속하였다. 이후 1018년 하양, 자인 등이 경주부의 속현이 될 때 구사부곡도 함께 경주부에 소속되었다. 고려 후기 하양현이 경주부에서 독립될 때 다문리 중 ‘옛 다문리’를 하양현에 귀속시키면서 ‘고다문리(古多文里)’라 하였다. 현재는 문천1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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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다문리(문천1리) 전경
고다문리 동남쪽 새로 조성된 마을도 다문리였는데, 이곳은 그대로 구사부곡에 속했다. 이후 자인현이 1637년 경주부에서 독립되고, 1653년 구사부곡도 경주부에서 자인현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자인현 북면 다문리가 되었다. 이후 북면이 상북면과 하북면으로 나뉘었을 때 하북면 북종동에 속했다. 1895년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될 때 그대로 자인군 하북면 다문동이 되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가 통치하던 1911년 동북쪽 자인평사와 접한 후곡리와 통합되어 자인군 하북면 다문동이 되었다. 1914년 진량면이 생기면서 진량면 다문동이 되었다가 1988년 진량면 다문리, 1997년 진량읍 다문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다문리 지적도
▲ 원다문리·자인다문리
다문1리, 2리, 3리를 통틀어 ‘원다문리’, 또는 ‘자인다문리’라 불렀다. 원래 하양다문을 ‘고다문리’라고 불렀는데, 하양으로 편입되고 남은 각단을 ‘원다문리’, ‘자인다문’이라 하였다. 옛날 글 읽는 선비가 많아서 다문(多文)이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 앞 멀리 보이는 금박산 봉우리가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여 문필봉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다문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한제들(다문1리), 후동(다문2리), 큰다문이(다문3리) 등 3개의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 다문3리 서쪽 솔비 쪽 등성이 밑에 ‘덤밑’, 동남쪽 시문리 삼거리와 접한 지점에 ‘웃삼거리’가 있다.
▲ 한제들·학교마을(다문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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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제들(다문1리)
이 마을 남쪽 들판은 동북쪽에 있는 영천의 한제지에 있는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고 하여 ‘한제들’이라 하였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한제들’로 불렀다. 1912년 당시 25가구 살았다. 조선 초기 여행자들을 위한 공공숙소인 다문원(多文院)이 이 각단 들판 너머 동남쪽 원골 입구에 있었다(경상도속찬지리지).

▲ 다문초등학교
밀양박씨들이 많았으며, 박치준의 예업소인 ‘괴정’과 김해김씨 재실 ‘만송정’이 있다. 그리고 길가에는 ‘김호두 시혜비’가 있다. 현재 다문보건진료소, 다문초등학교 등이 있는 다문리의 중심 마을이며, 다문1리다.
▲후동·후곡(다문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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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동(다문2리)
후동은 다문리 동북쪽 평사리와 접한 곳에 있다. 『호구총수』에는 ‘북동리’로 등재되어 있다가 『자인현읍지(1832)』에서 후곡리로 바뀌었다. 그 후 1895년 후동리로 바뀌었고, 1911년 다문동과 통합되어 다문동이 되었다. 한제들 마을 뒤쪽에 있다 하여 북동 또는 후동이라 하였다. 한제들의 밀양박씨들이 이사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1912년 당시 11가구 살았고, 현재는 다문2리에 속한다.
▲ 큰다문리·큰마을(다문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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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다문리(다문3리)
이 각단은 다문리에서 가장 큰 각단이라 하여 ‘큰다문리’, 또는 ‘큰마을’이라고도 부른다. 1912년 당시 10가구 살았다. 김해김씨들이 주로 살았다. 옛날 이 마을에 큰 불이 나서 김씨들이 서쪽 솔비와 의성 쪽으로 많이 이거하고, 현재는 몇 가구 살지 않는다. 현재 다문3리라 하며 새마을금고가 들어서 있다.
▲ 더밑·덤밑

▲ 더밑마을터
다문리 서쪽 789번지 덤 밑 개울가에 있던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있었다. 옛날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 이 바위에 앉아 쉬어 갔다고 하여 문경암(文境岩) 또는 ‘문정바우’라 하였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덤 밑에 있다고 하여 ‘덤밑’ 또는 ‘문정바우덤’이라 하였다. 1912년 당시 4가구 살다가 현재는 터전만 남아 있고, 문정바우가 있던 곳은 허물어져 바위를 확인할 수 없다.
▲ 웃삼거리

▲ 웃삼거리
웃삼거리는 시문리 삼거리 위에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1912년 1가구가 살았는데, 이 집은 주막이었다. 일제시대 이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마을이 조성되었다. 지금은 민가는 몇 가구밖에 없고 공장이 많이 들어와 있다.

▲ 다문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산골, 논들

▲ 마을 앞 금박산
다문리는 금박산 서북쪽 줄기 끝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동북쪽에는 평사들판, 서쪽과 남쪽으로는 다문들판이 펼쳐져 있다.

▲ 무내미고개
큰다문이에서 신제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지형이 낮아서 신제리의 물이 이 고개로 넘어온다고 하여 ‘무내미고개’라 불렀다. 현재는 신제리가 공단에 편입되어 토목공사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신제리 쪽의 지대가 높다.

▲ 원골과 원곡지 부제
또 후동 북쪽 옛날 부처를 묻었다는 ‘불맷골’, 후동 동쪽 ‘새탯골’, 남쪽 ‘신당골’이 있다. 원다문이 서남쪽은 ‘새낭골’, 동쪽 여승방이 있던 곳은 ‘싱당골’, 원다문이 동남쪽 조선시대 여행사 공공숙소였던 다문원이 있던 ‘원골’ 등이 있었다.

▲ 당갓
또 원다문이 북쪽 산은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가 있어 ‘당갓’이라 하였다. 이 당갓 동쪽 부도가 있었다는 등성이는 ‘부짓등’이라 한다. 다문3리와 솔비의 경계에 있는 더미는 ‘문경암’ 또는 ‘문정바우덤’, 원다문이 남쪽에 이팥을 심었다는 더미는 ‘이팥덤’이라 하였다.

▲ 광어배미들
이러한 산과 골짜기 외 다문리 사람들의 먹거리를 해결하던 논과 밭에도 각각 이름이 있었다. 원다문이에는 서쪽 지형이 광어처럼 생긴 ‘광어배미’, 광어배미 밑에 지형이 가오리처럼 생긴 ‘가불도가리’, 북쪽 ‘사래도가리’ 등의 논과 남쪽 민지새보의 물을 대던 ‘민지새들’, 북쪽 상보의 물을 대던 ‘상보바지들’, 상보 서쪽 하보의 물을 받던 ‘하보바지[생길보바지]’, 상보 북쪽 물대기가 쉽다 하여 ‘수샛들’, 원다문이 앞에 있는 ‘한제들[대제평]’, 남쪽 시문리의 미너리못 밑에 있는 ‘미너리못밑들[부제지하]’, 미너리 북쪽 황토가 많았던 ‘주황들’ 등의 들판이 있었다.

▲ 용암들
후동에는 북쪽 평사리 용암비알 근처 있던 ‘용암들’, 용암들 북쪽 지형이 마당처럼 펀펀한 ‘마당배미’, 용암들 남쪽 지형이 멍에처럼 생긴 ‘멍애배미’, 용암들 동쪽 길게 펼쳐진 ‘진배미’ 등이 있었다.

▲ 큰다문이 들판
큰다문이에는 서북쪽 지형이 분새이(계집애들이 소꿉장난할 때 만드는 삼각형으로 된 바늘꽂이)처럼 생긴 ‘분새이도가리’, 남쪽 지형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서남쪽 지형이 주걱처럼 생긴 ‘주개배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과 들판의 이름은 경지정리 및 세월의 흐름으로 현재는 거의 잊혀지고, 마을 이름을 딴 다문들로만 통용되고 있다.
◆ 희암 박치준 선생의 문향과 며느리 김씨의 효행이 서린 마을
이러한 마을에 조선 후기 자인의 마지막 선비 희암 박치준 선생의 문향과 그의 며느리 김씨의 효행이 세월 흐름에도 불구하고 도도하게 서려 있다.
▲ 희암 박치준 선생의 삶
박치준(朴致準) 선생은 1838년(헌종4) 자인현 하북면 대원리에서 부친 문암(文岩) 박기환(朴奇煥)과 모친 문화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자인입향조 요산(樂山) 박운달(朴雲達)의 12세손이다. 부인 천안전씨와 혼인하면서 다문리(한제들)로 이거하였다. 자라면서 신상리의 묵암 배극소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스승 배극소 선생과 같이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영남 남인 출신이라서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호 희암은 스승 묵암 선생에게서 취하였다. 당시 진량은 자인현 하북면이었는데, 선생은 하북면을 포함한 자인현을 대표하는 선비였다.
▲ 자인향교
1881년 43세 때 자인향교 도유사(현 전교)를 맡았다. 그 후 1888년 1월 자인향교 반수(班首), 9월 시문리와 다문리의 두인을 역임하였다. 1888년 10월 자인현감 오횡묵이 현민들을 위하여 진휼을 설치할 때 선생에게 하북면 기구도감(飢口都監)을 맡도록 하였다. 또한 현감 오횡묵이 선정을 베풀자 자인현민을 대표하여 박진헌과 함께 수산(繡傘)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1889년 4월 자인현 향청(현 면사무소 자리)이 낡아 중수하였는데, 이때 향인을 대표하여 「향청게판문」을 써서 달았다. 또 9월 자인향교 교궁을 중수하였는데, 이때도 「교궁중수게판문」을 써서 달아 놓았다. 1893년 자인현감 이만윤이 부임하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생에게 자인향교 교장을 맡겼다. 이렇듯 그는 자인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회갑 때인 1898년 별세했다. 1953년 그의 손자 박순기가 선생이 남긴 글을 엮어 『희암유집』이라 제목한 유고집을 발간하였다. 발문은 경산 사동의 갈헌 한동유 선생이 썼다.
▲『희암유집』에 나타난 희암 선생의 문학 세계

▲ 희암유집
『희암유집』에 실린 글은 그가 학문을 닦는 과정에서 쓴 글이나 만사가 대부분이다. 이중 시는 46편 실려 있는데, 주로 늙음에 대한 회한, 경물에 대한 감상, 벗들과의 풍류 등이다. 이 중 늙어감에 따른 감회를 노래한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초가을의 느낌
일월의 내왕으로 우물가 오동은 마지막 잎새만 남았고
안개와 구름 걷히니 이슬 속 봉우리 층층이 드러나네.
세월은 나그네 기다리지 않음을 이제야 알겠으니
때때로 경전을 쥐고서 종일토록 책을 보누나.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선경후정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두련과 함련에서는 계절이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서 한때 무성하던 오동잎 한 잎만 남아 있는 쓸쓸함과 멀리 보이는 금박산 봉우리가 외로움을 더하고 있는 자연의 경치를 노래했다. 경련과 미련에서는 이렇게 저물어 가는 계절이 인생의 나그네에 불과한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음을 수용하면서 삶이 남아 있는 동안 학문 수양을 다 하겠다는 학자의 전형적인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괴정에 앉아 멀리 보이는 금박산을 바라보면서 시를 쓴 선생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작품이다.
▲ 회화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괴정

▲ 괴정

▲ 괴정 현판
다문리 한제들에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괴정(槐亭)이라 현판을 단 재실이 하나 있다. 이 재실은 희암 박치준 선생이 1891년 학문 수양과 후학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강학소였다. 삼괴정(三槐亭)의 삼괴에서 착안하여 성리학의 상징적 나무인 회화나무 2그루를 심고 괴정이라 명명하였다. 그의 사후 후손들은 묘사재로 이용하다가 1987년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팔작기와지붕에 솟을대문으로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장병규의 「괴정상량문」, 이원윤의 「괴정기」, 김형진의 「근차괴정운」, 장회식의 「괴정중건운」, 이원윤의 「근차괴정중건운」, 장병규의 「차괴정낙성운」, 이채진의 「괴정중건운」, 김병철의 「근차괴정운」 등의 게판문이 걸려있다. 오른쪽 방은 ‘청금헌’이라 제하였다. 이중 재실을 통하여 후손 번창을 기원한 장병규의 작품을 소개한다.

▲ 차괴정낙성운 게판문
괴정 낙성 시를 차운하여
뛰어난 솜씨로 화려한 누각을 낙성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대의 순박한 정성을 칭송하네.
날개를 편 듯한 지붕은 새 모습 드러내고
아로새긴 들보의 제비는 축하하는 듯 정을 표하네.
어진 조상 당시의 자취 일찍이 배어 있으니
자손은 뒷날에도 조상 명예를 떨치리라.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후손이 계승하니
한 시대 칭송이 백세토록 영광이 되리라.

▲ 박해정 전 교통부장관
한편, 해방 전후 오랫동안 진량면장을 지내고 진량초등학교의 전신인 경산진량사숙(慶山珍良私塾)을 설립한 박순국(朴淳局)은 희암 선생의 손자이고, 제헌 국회의원을 포함한 4선 국회의원과 1960년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박해정은 희암 선생의 증손이다. 또 시문리 율산서원에 배향된 박재호(朴在鎬)와는 11촌 간이다.
▲ 평생 수절한 김씨의 사연

▲ 김씨효열각
희암 선생의 맏며느리 김녕김씨는 시집온 지 6개월 만에 남편 박규호(朴圭鎬)와 사별하였다. 이에 며칠 뒤 김씨도 자결하려 했으나 시부모의 만류로 이루지 못하고 평생 수절하면서 시부모와 시동생, 시누이를 보살폈다. 이러한 그녀의 행실이 자인현에 소문이 났다. 1888년 9월 자인현감 오횡묵이 부임하자 자인현 유생들이 제일 먼저 김씨의 효행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이에 오횡묵도 제김[題音]을 내려 복호, 즉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또한 1889년 1월 현감 오횡묵은 자인현 내 효부와 열부 73명에 대해 민전(緡錢⋅현금)을 보내 위로하였는데, 이때 과부였던 김씨에게도 아전을 보내 위로하였다(『자인총쇄록』).

▲ 효열부 유인 김녕김씨 여표비
이후 시아버지가 병이 들자 변을 맛보며 간호했고, 시어머니가 절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등 정성을 다해 모셨다. 이러한 그녀의 행적은 당시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라 오두적각(烏頭赤脚), 즉 정려문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1년 종손자(시동생의 손자) 박해정이 장관이 된 후 자인 유림 및 성균관의 검증을 거쳐 효열각을 세웠다. 이 효열각은 큰다문이 뒤쪽 당갓산에 있다. 단칸의 맞배기와집에 겹처마 2익공 3량가이다. 4면의 기둥 사이에 살창을 끼웠고, 담장은 돌담이다. 안에는 심산 김창숙이 쓴 「효열부 유인 김녕김씨 여표비」 비석이 있다.
◆ 에필로그
희암 박치준 선생의 문향과 그의 맏며느리 김씨의 효행이 서려 있던 다문리는 오늘날 개발의 물결 속에서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었다. 선생이 시로 노래하던 산과 들판에는 공장이 들어섰고, 평생 수절하며 시부모를 봉양했던 김씨의 서릿발 같은 한숨은 마을 앞 부제지 못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듯하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한 사람의 학문과 한 여인의 절개가 남긴 흔적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희암 선생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관직의 뜻이 증손자 박해정에 이르러 현실이 된 것 또한, 사람들은 그 음덕의 연장이라 말한다. 과학과 합리의 이름으로 과거를 쉽게 재단하는 시대이지만, 끝내 자신의 가치관을 굽히지 않고 도도하게 살아간 선조들의 삶의 태도만큼은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다문리는 바로 그 사실을 조용히 일러주는 마을이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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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