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집 세 자매가 살던 너븐돌마을 광석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8) - 광석리

2026-05-28 오후 3:33:15

▲ 진량읍 광석리와 후반포 마을 전경 
 

 

프롤로그

 

진량읍 광석리는 이제 지도 위에서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마을이 되었다. 북쪽의 낮은 구릉을 등지고 남쪽으로 너른 들판을 바라보던 너븐돌마을. 마을 어귀의 넓은 바위는 주민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석이었고, 앞거랑의 냇물은 논과 들을 적시며 마을의 핏줄처럼 흘렀다. 이곳은 압독국 시절부터 이어온 오래된 터전이자, 해방 이후 정미소의 기계 소리가 울려 퍼지던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특히 비석걸에 자리 잡은 한 집안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디며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켜낸 시간을 이어왔다. 방앗간집이라 불리던 그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고, 그들의 삶은 이 마을의 흥망과 함께 흘러갔다. 그러나 산업단지 조성이라는 변화의 물결 속에 광석리는 2017년 폐촌되었고, 이제는 공장 건물들 사이로 옛터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너븐돌의 전설과 정미소의 소리, 그리고 한 가족의 110년에 걸친 삶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 광석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광석리는 원래 압독국 마진량현 반포촌이었다. 신라가 압독국을 정복하고 압독주를 설치하면서 압독주 마진량현 반포촌이 되었다. 고려 초 마진량현이 구사부곡으로 강등되면서 구사촌에 속한 촌락이 되었다가 조선 초 반포리에 속한 너븐돌촌이 되었다. 1653년 구사부곡이 경주부에서 자인현에 속하면서 반포리는 신제리와 광석리로 분리되었다. 이때 광석리는 자인현 하북면 광석리가 되었다. 18세기 행정구역 개편 때 광석리는 광석리와 후반포리 2개로 분리되어 현내·영청곡·가제곡·마라·효곡 등과 함께 자인현 하북면 북구동에 속하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광석리와 후반포리는 광석동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광석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진량면 광석동이라 하다가 1988년 광석리가 되었고, 1997년 진량읍 광석리가 되었다. 2017년 경산4일반산업단지가 생기면서 마을은 폐촌되어 사라졌다. 이 마을은 광석(너븐돌), 후반포(후븐개·후포), 감정곡, 앞거랑, 비석걸 등 다섯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010KTX 경부선 2단계가 개통되면서 광석동과 감정골이 철길로 분리되었다.

 

▲ 광석리 터 

 

광석리·너븐돌·너은돌·광식리

마을 입구에 넓은 돌이 하나 놓여 있어 너븐돌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광석(廣石)’이라 기록하였다. 이 돌은 마을을 지켜주는 바위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호구총수인데, 원래 마진량현에 속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멀리는 압독국, 가까이는 조선 초부터 존재했다. 1911년 북쪽의 후반포동[후포]과 통합되었다. 조선시대부터 나주임씨, 김해김씨가 주로 살았고, 1900년대 초반 영천최씨도 이주하였다. 특히, 나주임씨는 세조 때 승의교위(承義校尉)를 역임한 임부(林阜)의 아들인 임항(林?)이 나주에서 광석동으로 이거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 광석리 골목길 

 

1912년 당시 17가구가 살았고, 일제 이후 점차 가구가 늘어나 2017년 폐촌될 때는 34가구 살았다. 마을이 공단에 편입되면서 원래 마을 터는 빌라, 다세대주택 등을 건축할 수 있는 제2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조성되어 놀이터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대부분 떠나 버리고 새로 입주하는 사람은 없어 현재 빈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 후포리 터 

 

후반포리·후포리·후븐개

후반포리는 광석리 북쪽 신제리와 접한 지점에 있었다. 신제리 신제지 동쪽에 다섯 개의 작은 개[]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후반포 또는 후포였다. 광석리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가 18세기 독립된 마을이 되었다.

 

▲ 후포리 골목길 

 

그 후 후포, 후븐개 등으로 불려지다가 1911년 광석동과 통합되어 마을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1912년 당시 11가구 살았다. 2017년 공단 조성으로 폐촌되었다. 현재 DMS와 일홍테크라는 회사가 들어선 곳이 후포리 주거지다.

 

▲ 감정골 마을 

 

감정곡·감정골

감정곡 또는 감정골은 광석리 앞거랑 건너 마곡리와 접한 골짜기에 있다. 우물의 물이 달다고 하여 감정(甘井)’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일설에는 감나무가 많다고 하여 감정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1912년 당시 4가구 살았다.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광석 비석걸·비석골


 

▲ 광석 비석걸에 있던 주택 

 

광석 비석걸은 광석리 동쪽 현내리 비석걸과 접한 지점에 있다. 원래 길거리에 현감들의 선정을 찬양하는 송덕비가 즐비하여 비석이 있는 길이라는 뜻의 비석걸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70대 자인현감 강휘옥이 이임할 때 이 마을에 살던 임강(林綱, 17491805)이 선정비를 1799년 이곳에 세운 뒤부터 비석걸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석걸이 사투리화되면서 비석골이라고도 하였다. 1912년 당시 영천최씨 1가구가 살다가 일제시대 이후 점차 가구가 늘어났다가 폐촌 당시 13가구 살았다. 현재는 비석이 있는 현내리 쪽만 비석걸이라 한다.

 

▲ 앞거랑 마을터 

 

앞거랑

앞거랑은 광석리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내의 이름이다. 이 냇가에 마을이 조성되었는데, 그냥 앞거랑이라 불렀다. 1912년 당시 2가구 살았다.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앞거랑 물길도 바뀌고, 마을은 폐촌되었다.

 

▲ 광석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 안골짝 

 

광석리는 북쪽으로 낮은 구릉을 등지고 남쪽으로 광석들판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논과 들판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골짜기로는 후포 북쪽 원 광석동이 있었다는 구광석골’, 비석걸 남쪽 매가 잘 앉았다는 맷골짝’, 비석걸 동쪽 새탯골’, 들판너머 마곡리 쪽에 있는 감정골 남쪽 안골짝’, 안골짝과 감정골 사이에 있는 샛골짝등이 있었다.

 

▲ 장구배미 

 

대표적인 논으로는 마곡리 먼못 밑에 지형이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장구배미 동쪽 구석에 있던 귀시배미’, 장구배미 남쪽 마당처럼 펀펀했다는 마당배미’, 장구배미 서쪽 마을 옆에 외따로 떨어져 있어 마치 정랑[변소]을 지어놓은 것 같다 하여 생긴 정랑배미’, 비석걸 남쪽 솔대구미등이 있었다.

 

▲ 광석리 너븐들 

 

또 광석리 남쪽 들판은 넓다고 하여 너븐들이라 하였고, 남쪽 먼못 밑 북쪽 들은 높은 곳에 있다고 하여 높은들이라 하였다. 또 광석 동남쪽 마곡리의 먼못 물을 받아 농사를 지은 들은 머못바지라 하였다. 머못바지 남쪽 상보의 물을 대던 상봇바지’, 중들보의 물을 대던 중들모바지’, 상보바지 남쪽 중보의 물을 대던 중봇바지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경지정리와 개발로 거의 잊혀진 상태다.

 

이러한 마을에 해방 후 정미소가 설립되면서 멀리 자인이나 진량까지 가던 이 지역 주민들이 편리하게 도정을 할 수 있었고, 해방 공간에는 금박산에 숨어 지내던 공비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방앗간집이라 불리는 영천최씨 집안에는 딸이 셋이 있었는데, ‘방앗간집 세자매라 불리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일화가 전하고 있다.

 

 

광석리 최씨 집안의 정미소

 

▲ 일제시대 경산 하마자키 인접공장 

 

디딜방아나 연자방아, 물레방아로 쌀이나 보리를 찧던 조선 시대의 도정(搗精)1800년대 후반 도정 기계의 도입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였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기계식 정미소는 1892년 미국인 월터 타운센드(W. D. Townsend)가 일본인 오쿠다(奧田直次郞)와 합작하여 인천에 설립한 타운센드 정미소였다.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조선의 농촌을 접수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도정공장을 설립하였다. 일본인들이 세운 도정공장은 벼를 현미로 만드는 매갈이공장’, 모미스리공장(?摺工場)’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으로 반출하는 과정에서 부피를 줄이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현미를 일본에 가져가서 정미소에서 백미를 만들었다.

 

경산에 최초로 설립된 매갈이공장은 카토 오린하치(加藤林八)1913년 중방동에 개업한 카토인접공장(加藤?摺工場)이었다. 이후 하마자키 모리지(濱崎森二)1915년 개업한 하마자키인접공장(濱崎?摺工場), 마루타 오토시(丸田乙市)1927년 개업한 마루타인접공장(丸田?摺工場)이 뒤를 이었다. 조선인으로는 박석규가 1938년 경산 갑부 안병규와 함께 세운 경일정미(慶一精米)가 최초였다. 하양에는 1919년 하마자키 요시츠구(濱崎喜丞)가 금락동 3번지에 세운 하마타인접공장(濱田?摺工場)이 최초였고, 이후 가와이다 야노스케(川井田彌之助)1923년 금락동에 세운 가와이다인접공장(川井田?摺工場), 조선인 정기찬(鄭基燦)1924년 금락동에 세운 정기찬인접공장(鄭基燦?摺工場)이 뒤를 이었다. 자인에는 1925년 동부동 김수승(金壽昇)의 김수승인접공장(金壽昇?摺工場), 이종래(李鍾來)의 이종래인접공장(李鍾來?摺工場), 서부동 최기팔(崔基八)의 최기팔인접공장(崔基八?摺工場)이 같은 해에 설립되었다.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르면 이들 매갈이공장 외에도 여러 곳에 인접공장과 정미소가 설립되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소유의 인접공장은 모두 조선인들이 인수하여 정미소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 광석정미소 

 

광석동에 있던 광석정미소는 광석 비석걸에 살던 최현조(崔玄祚)가 일본 탄광으로 징용되어 갔다가 번 돈으로 1946년 광석동 앞거랑 개울가에 처음 세웠다. 이 정미소는 과거 자인현 하북면 지역이었던 현내, 영청, 마곡, 속초, 신제, 안촌 지역의 곡물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정미소는 1948년 남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에 저항하던 남로당 공비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정미소가 물에 잠기자 현내리 비석걸 620번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1979년까지 최씨 집안에서 운영하였다. 이후 압량 사람에게 매도하였다가 시대 변화와 함께 폐쇄되고, 식당 등으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한편, 광석리에는 양조장도 있었다. 1960년대 광석리 비석걸 대창 가는 쪽에 김장홍이 설립했다고 한다. 광석리 양조장은 물이 좋아 진량에서 막걸리 맛이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 진량탁주공동제조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 1930년대 최동이 집(AI 복원 이미지)

 

 

사라진 지적도 위로 흐르는 110년의 기록: ‘너븐돌 152번지세자매 이야기

 

경산시 진량읍 광석리 비석걸 152번지. 지금은 지적도에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은, 한때 한 가문의 삶이 110년 동안 이어지던 자리였다. 제국의 몰락, 식민의 수탈,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한 가족. 영천최씨 최동이 일가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 광석 비석걸 최씨네 육남매 

 

척박한 땅에 박은 생존의 말뚝

나라 잃은 비탄이 온 나라를 뒤덮던 1910, 최동이(최희주)는 아내 김이숙과 함께 고향 영청동을 떠나 광석리 비석걸에 새 터를 잡았다. 불신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 그가 붙잡은 것은 오직 가족이었다. 1914년 장남 현조(일성)가 태어나며 집안의 기둥이 세워졌고, 이어 복조, 명암, 남이, 일근, 일호로 이어지는 육 남매가 그 울타리를 채워갔다. 담장 밖 세상은 점점 거칠어졌지만, 집 안에는 세 딸이 만들어 내는 온기와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맏딸 복조는 살림을 챙기며 집안을 받쳤고, 명암은 형제자매 사이를 잇는 조용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막내 남이는 웃음으로 집안을 밝히는 존재였다.

 

세 자매의 혼례, 난세 속에서 이어진 삶

중일전쟁의 기운이 짙어가던 시절에도 금박산 자락에는 해마다 진달래가 피어났고, 그 꽃길을 따라 맏딸 복조가 가장 먼저 혼례를 올렸다. 흉흉한 시대였지만, 최동이와 장남 현조는 집안의 첫 혼례만큼은 무너지지 않게 지켜냈다. 이어 명암도 자인 일언리 청주 한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두 번째 혼례는 첫째 때보다 조용했지만, 그 속에는 서로의 삶을 지켜내려는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 광석 비석걸 최씨네 세자매 

 

1942, 태평양 전쟁의 광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가운데 막내 남이의 혼례는 더욱 서둘러 치러졌다. 처녀들이 끌려가던 시절, 집안은 막내를 지켜내기 위해 혼사를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세 자매는 각기 다른 시기에 시집을 갔지만, 그 혼례 하나하나에는 난세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려는 가족의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세 사위 모두가 출중한 인물로 알려지면서 너븐돌 최씨 집안은 한동안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사지에서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정미소

그러나 시대는 결국 사람을 집어삼켰다. 1942, 막내 사위 종술이 일본 큐슈 탄광으로 끌려갔고, 이듬해에는 맏이 현조마저 징용 길에 올랐다. 그 뒤로 집안에는 매일같이 기도의 시간이 이어졌다. 정화수를 떠 놓고 가족의 무사 귀환을 빌던 시간이었다. 1945년 가을,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두 남자의 손에는 700원의 돈이 들려 있었다. 그 돈은 목숨값이었지만, 동시에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광석정미소였다. 정미소 발동기 소리는 앞거랑 물소리와 어우러져 너븐돌 마을에 다시 삶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정미소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이 집안이 다시 일어섰다는 증표였다.

 

▲ 1960년대 광석정미소(AI 복원 이미지)

 

가장이 된 아들, 그리고 멈춘 소리

1966, 평생 가족을 지켜온 최동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자식들을 끝까지 먹여 살린 삶의 시간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장남 현조였다. 그는 정미소 발동기를 돌리며 동생들과 조카들을 책임졌다. 장날이면 자인 장터를 찾아 동생을 챙기고, 가족의 빈자리를 묵묵히 메워갔다. 그러나 1979, 어머니 김이숙의 별세와 함께 정미소의 발동기도 멈췄다. 그 소리가 끊기던 날, 한 가문의 시간 또한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세 자매, 시대를 견뎌낸 마지막 등불

이 가문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루는 것은, 세 자매의 삶과 그 끝에 놓인 시간이다. 복조와 명암, 남이. 이들은 단순히 혼례를 치르고 떠난 딸들이 아니었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가문을 이어온 또 다른 축이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복조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며 깊은 상실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어 명암 또한 평생을 함께한 남편과 사별하며 삶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막내 남이는 징용으로 남편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긴 뒤에도 평생을 불안과 상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갔다. 이 세 자매에게 삶은 늘 기다림과 견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현조를 중심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끝까지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켜냈다.

 

▲ 영청골 최씨네 묘지 

 

그러나, 세월은 결국 이들마저 하나둘 데려갔다. 1997년 장남 현조가 세상을 떠났다. 몇 년 뒤인 2001년 맏딸 복조가 눈을 감았고, 이어 명암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2018년 아흔넷의 나이로 막내 남이가 마지막으로 삶을 내려놓았다. 2019년에는 막내 일호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110년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그들의 삶은 전쟁과 가난, 상실을 견디며 끝내 가족을 놓지 않았던 조용하지만 단단한 생존의 기록이었다.

 

▲ 비석걸 전경 

 

아스팔트 아래 묻힌 시간,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것

지금 비석걸 152번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세 자매가 걷던 길도, 정미소의 소리도, 아이들의 웃음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110년 전, 척박한 땅에 심어진 한 가족의 삶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땅이 아니라 어떤 시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힘이었다.

 

 

에필로그

 

광석리의 시간은 2017년에 멈추었다. 마을 사람들은 흩어졌고, 정미소의 쌀겨 냄새와 양조장의 막걸리 향은 산업단지의 기계음 뒤로 자취를 감췄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과 방앗간 소리가 넘치던 자리에는 이제 새 주인을 기다리는 빈터와 적막한 놀이터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시간과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흔적인지도 모른다. 마을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지형이 바뀌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유년이 깃든 논둑길이 사라지고, 한 세대가 지켜온 삶의 이야기가 함께 묻히는 일이다. 비록 너븐돌 광석리는 지도에서 지워졌지만, 그곳에서 이어졌던 삶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미소의 소리와 세 자매의 웃음, 그리고 가족을 지켜낸 시간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비석걸에 홀로 남은 선정비처럼, 사라진 마을의 이야기도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란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광석리 마을 전경 
 
▲ 광석리 
 
▲ 광석리 
 
▲ 광석리 
 
▲ 광석리 
 
▲ 감정골 터 
 
▲ 감정골
 
▲ 구후반포지 
 
▲ 신후반포지 
 
▲ 너븐들
 
▲ 머못바지
 
▲ 비석보 
 
▲ 새보
 
▲ 장구배미
 
▲ 정랑배미
 
▲ 안골짝
 
▲ 앞그랑
 
▲ 경산시 제3어린이공원 

 

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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