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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처럼 늙어가는 ‘자인향교’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기사입력 2021-12-27 오후 2:17:53

선현의 자취를 좇아 묵향 속으로

 

▲ 경산시 자인면 교촌9길에 소재한 자인향교

 

 

자인향교로 향하는 감회는 남다르다. 언덕 위 고풍스러운 옛집은 향교 앞 초등학교에 다녔던 내게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미술 시간이나 실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화폭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오래된 은행나무가 우뚝 선 향교다. 어린 우리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근엄한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곳 명륜당에서 서예강좌가 열리고 있다기에 몇몇 벗과 견학 차 여성 유도인을 따라나섰다. 초등학교를 지나면 멀리서도 쉽게 보일 것 같았는데 주변에 새로 지은 집들에 가려 잎을 떨군 은행나무와 용마루만 조금 보인다. 민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니 입구에 하마비가 서 있다.

 

▲ 하마비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원개하마)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이곳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라고 한다. 戊戌二之日縣監洪樂恒立(무술이지일현감홍낙항립) 1778년 현감 홍낙항이 세웠다는 글이 함께 새겨져 있다. 성현의 제사를 모시고 유생들이 공부하는 향교는 그만큼 예우했던 모양이다. 하마비의 위치를 보니 처음부터 그곳에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을 초입쯤에서 옮겨오지 않았을까. 왠지 향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를 멈추고 걸어가야 할 것 같다.

 



 

 

198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106호로 지정된 자인향교는 마을의 집들과 이웃해 있어 친근하게 다가온다. 향교가 있는 여느 마을의 이름처럼 교촌리(校村里) 주소를 달고 있다. 추억에 이끌려 몇 차례 가보았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열린 문이 반갑다. 이층누각, 모성루(慕聖樓)의 아래층이 외삼문을 대신한 출입문이다. 모성루에 들어서니 정면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좌우로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뒤쪽 내삼문(內三門)을 지나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에 이르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다. 명륜당의 앞뒤 문과 내삼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모성루에서도 대성전 내부가 보일 것 같다.

 

▲ 자인향교 명륜대학 서예강좌 모습

 

 

명륜당 앞에 놓인 여러 켤레의 신발이 지금 강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조심스럽게 명륜당을 기웃거리니, 생각보다 젊은 전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10여 명이 붓글씨를 쓰고 있다. 해서로 쓰는 천자문(千字文)이다. 김상도 전교가 지난 3월부터 명륜대학 서예강좌를 열고 매주 목요일 오후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하려는 지역 유림이 있어 그나마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자인향교의 건립

 



 

 

자인향교는 명종 17(1562)에 자인의 주읍인 경주의 부윤 이정(李楨)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때 건립된 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인조 15(1637) 자인에 현이 설치되어 현감이 파견된 뒤 현종 13(1672)에 와서야 이춘암(李春?) 등이 중건을 소청하여 숙종 1(1675)에 도천산 아래에 설치하게 되었다. 자인향교 흥학 활동의 본격적 시작은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 후 영조 4(1728)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원래의 위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관상리(현 신관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1754년에 완산(完山) 이윤항(李胤沆) 현감이 농업 권장과 흥학에 힘써 지역민의 존경을 받았다고 찬한 조선적(曺善迪)이 쓴 <흥학기문(興學記文)>이 자인향교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게판기문(揭板記文)이다. 1802년에 민백훈(閔百勳)이 찬한 <동서재문루중수기문(東西齋門樓重修記文)>1735(영조 11)에 동서 양재를 세운 것과 1749(영조 25)에 문루를 건축한 일을 알려주고 있다. 영남읍지, 자인읍지에 의하면 고려조(高麗朝) 구기(舊基)에 건립 기록이 있어 자인의 첫 향교가 이미 고려 때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조선 시대 주읍은 향교가 설치된 반면 속읍은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설립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 속읍이었던 이곳에 향교가 세워졌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2018년 추기 석전대제 모습

 

 

자인향교에 전하는 <청금록><교생안>에는 1813~1945년까지 중복된 사람과 향교의 사역을 맡았던 노비들을 빼면 교생들이 492, 오횡묵의 자인총쇄록에 따르면 1888년 당시 향교에 보관 중이던 서책의 목록이 논어, 맹자, 대학, 춘추, 예기, 중용, 시전, 주역을 비롯 두시, 이백시, 오륜행실, 향약집 등 72종류 591권으로 보아 당시 향교의 규모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오래된 고가가 그러하듯 자인향교도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이지러져 수차례 보수와 중수를 거듭했고 그때마다 교생들이나 교임, 지역민이 부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지역의 교육을 담당했던 자인향교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과거제도 폐지와 함께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향사만 해왔다. 지금도 봄과 가을 두 차례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있다.

 

▲ 자인향교 명륜당

 

 

일제에 의해 서양식 교육이 들어올 무렵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1906년 사립 포명학교 설립 자금을 지원하고, 19076월에는 명륜당에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 후 1908년 배의학교 설립에도 향교 자금을 지원했고 교원들의 월급을 향교에서 부담했다. 배의학교는 자인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합쳐지고 이후 자인초등학교로 이어진다.

 


향교 역사의 증인 은행나무

 

▲ 자인향교 은행나무

 

 

대성전 동쪽 담장 옆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이 향교의 역사를 알려주는 듯하다. 멀리서는 세 그루로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암수 두 그루다.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행단(杏壇)이라는 말은 공자가 은행나무로 만든 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된다. 벌레 먹지 않는 은행잎처럼 세태가 변해도 혼탁한 세상에서 녹슬지 않는 공자의 가르침을 은행나무는 말없이 보여준다. 온갖 어려움 속에도 지구상에 터를 잡고 살며 충실한 열매를 맺고 퍼뜨리며 살아왔기에 수억 년을 견뎌왔을 것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물을 길어 자신을 닦고 때가 되면 버릴 줄 아는 실천 때문이리라.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고 유학을 학문의 근간으로 삼았던 향교나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사람보다 오래 살아서 지난 일들을 고스란히 보아왔을 이나무들은 지금 모든 것을 버리고 참선에 든 수도승 같은 모습으로 의연히 서 있다.

 



 

 

향교에 우뚝 선 은행나무를 보니 옥상에 있는 분재 생각에 이른다. 마흔 살이 넘었어도 키는 1미터를 넘지 못한다. 거칠한 몸이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언뜻 보기에는 어린나무다.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가 겨우 새잎을 움 틔우고 있을 때도 따뜻한 곳에 있으니 잎의 성숙이 빠르다.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큰 잎을 달고 있다. 깊이가 얕고 입만 넓은 화분에서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가지도 마음껏 뻗어가지 못한다. 어쩌다 뻗어나가는 가지는 여지없이 잘리고 만다.

 

▲ 자인향교 대성전

 

 

수령 20, 원산지 대한민국, 품명 은행나무라고 적힌 목걸이를 달고 집으로 온 때가 아이들이 유치원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20여 년을 함께 살아왔다. 날짜에 맞춰 물에 담가주고 때때로 노란색 영양제도 먹여주며 정성껏 보살핀다.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이삿짐 차에 짐짝처럼 실어 오지 않고 승용차에 실어 특별 대접하며 옮겨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쑥쑥 뻗어가고 있을 때도 양지바른 곳에서 몸의 성장을 속으로만 키워가며 외로운 삶을 지탱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의 1차적 가치는 생존이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번식이라지만 오랫동안 열매를 달지 못했다. 토심이 깊고, 배수가 잘되는 비옥한 땅에 심어졌더라면 맘껏 자랄 수 있을 텐데, 어쩌다 화분에 심겨 성장을 저지당하며 살고 있는지. 참 고달픈 생이다. 나무도 어디에 터전을 잡느냐에 따라 이렇듯 달라진다.

 



 

 

향교에서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요즈음의 교육이 부모의 욕심을 앞세워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큰 잎을 달아준 것은 아닌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착한 본성을 살려 저마다의 재능을 찾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 교육의 첫째 목표가 아닐까 깨닫는다. 향교의 역할을 보니 향사와 유교 경전 교육 외에 인성교육과 향토사회의 문화를 향상하고 풍속을 순화하는 사회 교육을 담당한다. 덕업(德業)을 권장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제하며 예절과 습속을 교환하고 걱정과 재난이 있을 때는 구휼(救恤)에 앞장선다. 지식 전달에만 급급해 방과 후 학원을 전전하며 잎사귀만을 키우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향교와 아랫동네의 학교를 번갈아 보게 된다. 은행나무가 서 있는 담장 너머 관리사 처마에 걸린 무청이 햇살을 받으며 말라가고 있다. 전교님이 뽑아준 텃밭의 배추 한 포기를 받아들고 돌아서는데 은행나무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참고자료>

-자인향교 자인향교지2002

-자인역사편찬위원회 자인의 역사2021

 

<글 / 천윤자 수필가>
< 사진 / 무철 양재완>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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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애
    2021-12-27 삭제

    자인의 향교 시간내서 들러 보아야겠습니다향교 건물의 이름도 새로 알게되었습니다 분재에 심겨진 은행나무의 가지를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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