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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깃든 고장 용성면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용성면 편(1)

기사입력 2023-04-28 오전 10:20:33

용성의 유래

 

용성면은 조선 시대 자인현 상동면과 하동면 지역이었다. 자인현청의 동쪽에 있어 동면이라고 하였고, 동서로 흐르는 관란천을 경계로 북쪽은 상동면, 남쪽은 하동면으로 구분하였다. 용성이라는 행정 명칭은 조선 시대까지 존재하지 않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당시 자인군의 상동면과 하동면을 합하여 용성면이라 하였다. 용성이라는 명칭은 여러 설이 있지만 용산산성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을 지닌다.


 

▲ 용성면 전경(구글어스)
 

 

마을 현황

 

▲ 용성면 행정지도 

▲ 면소재지 전경


 

현재 용성면은 20개의 법정리와 28개의 행정리가 있다. 이 중 덕천리·대종리·용천리·매남리·도덕리·고죽리·미산리·고은리·일광리는 각각 주변 촌락과 합쳐서 하나의 행정 마을이 되었다. 이 촌락들은 조선총독부 내무장관 우사미 가쓰오가 지시하여 작성된 조선지지자료(1911)조선총독부관보(1911)에서 통폐합 관련 내용이 처음 보이고, 그 후 1914년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공식적으로 하나로 통폐합되었다. 그래서 망덕동과 도전동이 덕천동으로, 대종동과 괘일동이 대종동으로, 용천동과 도산동이 용천동으로, 독곡동이 매남동으로, 도덕동과 금곡동 일부가 도덕동으로, 고죽동과 천북동이 고죽동으로, 사미천동과 오산동이 미산동으로, 고방동과 은곡동이 고은동으로, 어일동과 쟁광동이 쟁광동으로 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동의 명칭이 전부 리로 바뀌었고, 기존하던 각 촌락은 1, 2리라는 행정리로 편성되었다.

 

▲ 매남마을 전경 

 

 

특히, 매남리에는 이암동(耳巖洞), 구룡동(九龍洞), 매남동(梅南洞), 입암동(立巖洞), 장재동(長才洞, 장령) 등 다섯 개의 소규모 촌락이 있다. 촌락마다 520호의 집들이 있어 조선 시대에는 가구 수가 제일 많은 이암동의 별칭인 독곡동(獨谷洞)이라 하다가 1911년 매남동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기존 5개 촌락은 매남1(매남·입암), 매남2(장재), 매남3(이암), 매남4(구룡)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 매남1·2리를 매남1리로, 매남3·4리를 매남2리로 통합하였다. 이처럼 매남리는 넓은 지역이면서 골이 깊고 산이 높아 옛날부터 접근하기 힘든 오지였다. 자인현감 오횡묵도 자인현 관내 모든 촌락을 순시하면서도 이곳만은 험준하여 포기하면서 정거즉사(停車卽事)라는 한 편의 시로 순시를 대신하였다.

 

수레를 멈추고 즉흥시를 짓다.

 

정거즉사(停車卽事)
 

흉년의 재해를 거의 다 살피려 동서로 샅샅이 찾아가니

내 말은 슬피 울고 발굽은 닳으려 하네.

귀방우 가는 길은 얼마나 험하다고 하는지

우습도다, 왕양이 길을 잃고 물러난 것이여.
 

 

▲ 이암마을, 구룡마을, 입암마을, 장재마을(좌에서부터)


 

 

그리고 쟁광리는 어일리와 쟁광리를 합친 것이어서 2007년 이 두 촌락의 한 글자를 따 일광리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과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마을 이름은 바뀌고 있지만, 그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과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사연이 생겨나고 있다.

 

 

삶의 터전

 

용성은 옛 자인현 관할 영역 중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기도 하면서 구룡산·용산·반룡산·동산(일찍 온 고개박산(금박산), 독곡·대흥곡·간라곡·암곡(방우골무정곡, 용오계·장재계·내촌계·천북계·관란계·송림계·용천계·고방간·어일간 등 산과 계곡이 깊어 풍광이 좋았다.

 

▲ 미산리(좌), 고죽리(우) 지석묘 




그러다 보니 고죽·곡신·미산·일광리 등지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수많은 지석묘를 남겼다. 그리고 열부 양씨의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사량지를 비롯하여 약 69개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남아 있다. 또한, 고죽리·곡란리·곡신리·당리리·덕천리·외촌리·용전리·용천리에는 수백 년 된 노거수가 당목이라 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추앙받으며 주민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 고죽리 노거수 

 

 

한편, 상동면 지역에는 하사주막, 상사주막, 은곡주막, 쟁광주막, 어일주막 등이 있었고, 하동면 지역에는 꼽도리주막, 땅거리주막, 위딴주막, 재너머주막, 들돌거리주막 등이 있어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한 잔의 술로 피로를 덜게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거기에 얽힌 갖가지 사연들도 사라졌다.

 

 

사회문화

 

▲ 난포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80호)

 

 

관란천과 그 상류 계곡에는 관란대, 맹구대, 구연대, 요호대, 학천대 등을 조성하여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고, 곡란리 수동에는 수백 년 된 고택이 난포고택이라 명명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용이 승천하다 머리를 박았다는 용암(좌)과 용의 새 

 

 

각 마을에는 설화, 민요 등 서민의 문학인 구비문학을 제일 많이 보존하고 있는 설화의 고장이기도 하다. 특히, 송림리의 개미산 이무기’, 곡신리의 걸어오다 주저앉은 용산’, 곡란리의 용산 무지개샘’, 매남1(장재)승천하지 못한 용이 남긴 용암과 용딩이’·‘용의 새()’, 매남2(구룡)용왕의 딸과 아홉 룡’, 부제리의 용당지 이야기’, 미산2(오산)용두지 이야기’, 용산리의 용구렁 골짜기’, 가척리의 용림잇재등 용과 관련한 전설이 많은 용의 고장이다.


 

▲ 관란서원 
 

 

교육기관으로 미산2(오산리)에 관란서원이 있어 조선 시대 교육과 유교 제의를 담당하였고, 근대에는 송림교회 안의 당리학교를 비롯하여 곡란리의 유신학교(1912), 당리의 용성공립보통학교(1922), 용천리의 용강간이학교(1935) 등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용성중학교의 전신인 용성고등공민학교와 용성국민학교 송림분교(1956), 구룡분교(1957) 등이 연달아 개교하여 이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현재는 용성초등학교와 용성중학교만 남아 있다.

 

▲ 반룡사 전경 

 

 

종교기관으로 원효와 관련한 고죽리의 대흥사, 용전리의 반룡사 등 유명한 사찰이 이곳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매남과 구룡을 통하여 천주교가 제일 먼저 들어와 큰골공소·구룡공소·부붓골공소가 생겨나 용성성당의 모태가 되었다. 기독교회는 송림리의 송림교회(당리교회, 1905)가 제일 오래되었다.


 

▲ 대종리 진충묘, 가척리 진충묘, 송림리  장군덤(좌로부터)

 

 

가척·대종리에는 자인현의 수호신인 한장군을 배향하는 사당이 현재까지 남아 있고, 송림·당리에도 한장군 사당이 있었는데 현재는 훼철되어 없다. 각 성씨 문중에서 조상을 추향하기 위하여 지은 덕천리 경주 김씨의 남천서원, 곡란리 흥해 최씨의 용산서원, 가척리 경주 이씨의 추모재, 고은리 진주 강씨의 덕간재, 고죽리 천안 전씨의 전일재와 김해 허씨의 광일재, 매남리 밀양 박씨의 은암재와 경주 이씨의 갑봉재, 부일리 경주 김씨의 첨모재 등 재실과 누대가 약 47개나 되었는데, 현재 몇몇을 제외하고는 훼철되었거나 남아 있는 것도 훼손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중 차원을 넘어서 정부에서 보존·관리가 필요하다.

 

 

토산품

 

조선 후기에는 반룡사 사찰 내에서 생산하는 한지가 유명하여 전국적으로 팔려나갔다. 그러자 스님들이 불도는 등한시하고 경제 활동에만 집중한 나머지 절이 쇠퇴해 버렸다고 자인현감 오횡묵이 자인총쇄록에 기록해 놓았다.

 

▲ 송림리 전경 



또한, 송림리 송림사라는 절에서도 닥나무를 심어 한지를 생산하였는데, 그 질이 좋아 관청에 진상하였다. 오횡묵은 1888년 송림리를 시찰하면서 종이 만드는 지통(물통)이 무려 36좌나 있었다 하고, 상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돈이 많았다고 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만주의 길림봉천까지 판로가 확대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유명하였고, 원료를 감당하지 못하여 일본에서 수입하는 등 송림리 주민 전체가 한지 생산에 종사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그러다 보니 경제도 발전하여 조선 시대에는 송림사창(동창)이 설치되어 자인현 동면(현 용성면)과 남면(현 남산면)의 환곡을 모두 이곳에 쌓아두었고, 일제 시대에는 용성산업조합(1927)이 송림리에 설립되기도 하였다. 오횡묵은 송림의 경제가 번창하는 것을 보고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송림촌에서 즉석으로 읊다

 

순시하다 송림에 이르니 눈이 갑자기 뜨이는데

인산의 중심이 이곳으로 온 듯하네.

종이 만드는 사람은 생산하는 지통을 넓히고

돈 많은 사람은 벌어들인 재물로 앉아서 재미있어하네.

규례에 의거하여 관의 일용품을 갖추어 채우고

세금 내어 작년의 흉년을 넉넉히 준비하네.

만약 종이가 서한 때보다 앞서 나왔다면

삼장의 재물을 늘리는 인재가 왔을 것이네.

 

*인산 : 자인의 별칭임.

*삼장 : 재주, 학문, 식견을 가리킴.

 

 

이외에도 고죽리 알밋잔()에 있는 밭에는 고사리가 많이 생산되었다. 외촌과 내촌 두 마을에서는 조선 시대 황포(黃布)를 토산품으로 생산하였는데 지금도 삼나무를 기른 삼밭골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쟁광리에도 삼이 많이 생산되었다. 곡란리에는 영천 최씨 문중에서 전하는 음식과 토속주가 유명하다.

 

▲ 이암(귀방우)




매남 새깃등에는 석이(石茸)가 많이 났으며, 귀방우에는 옛날부터 제피가 유명하여 제피 농사로 자식들을 공부시켰고, 사근달이라 부르는 독곡에는 옹기가 유명했다. 용전리에는 반룡산골의 개구리알이 유명하여 경칩 날 보양하려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부일리 후리난골과 송림리 후롱골에는 봄나물인 백도라지꽃 비슷한 후루래기(후롱초)가 많았다. 이처럼 용성에서는 과거부터 토산물품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생활 방식과 문화의 변화로 지금은 거의 사라졌거나 잊혀지고 있다.

 

 

사람과 행적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인물로 고죽리의 전극창, 곡란리의 최철견·최인수·최준립, 곡신리의 최팔개·최팔원, 미산리의 김붕, 외촌리의 이승증 등이 있다. 특히, 관란 이승증은 경주에 거주하다 이곳으로 와서 오목천 가에 관란대와 맹구대를 세우고 회재 이언적을 추모하면서 학문과 풍류를 즐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구의 사림에게 통대구사림문이란 격문을 보내어 경상도 지역의 초기 의병 활동을 주도하였다. 관란서원과 관란천은 그의 호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곡신리의 남원 양씨는 열부로 이름이 나 나라에서 효열각을 세워주었고, 용천리의 밀양 박씨 박정우는 효자로 이름이 나 역시 나라에서 효자각을 세웠는데 아직 있다.

 

근대 이후의 인물로는 일제 말 대왕산 죽창의거 독립유공자인 내촌리의 이종태(19162000)와 용천리의 조영모(조태식, 19241951) 등이 있고, 하양 무학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하양 지역의 예수로 불리던 이임춘(19261994) 신부는 구룡 출신이다.

 

▲ 김윤식 시집과 양춘대화 병풍 




4·19혁명 저항시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과 망덕리 고향 집을 망덕장(望德庄)’이라 명명하고 농촌시를 썼던 시인 김윤식(19281996)은 덕천리 사람이다. 마침 봄이어서 그의 대표작 중의 한 작품인 양춘대화를 인용한다.

 

陽春對話

 

요즈음은 九龍山 말일세

귀방우 맞은편 火田고개란 산에서 말일세

봄이 왔다기에 봄을 말일세

곱배기로 들이킨다 말일세

 

하여간

봄이다 말일세.

 

 

이외에도 부일리 출신의 국회의원 박주현(19231986)과 미산리 출신의 국회의원 윤영탁(19332000) 등 정···법조 등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많이 있다. 이처럼 용성에서 나고 자란 그들이 품고 간 삶의 이야기도 제각기 다 애틋하게 남아 있다.(인물 선정은 그 인물이 어떤 유의미한 행적을 남겼는가를 기준으로 하면서 생존 인물은 제외함.)

 

 

현 상황

 

현재 용성면 주민들은 크게 세 업종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제일 많이 종사하는 업종은 복숭아와 포도를 비롯한 과수업이고, 다음으로 축산업에 종사하는 농민도 많다. 특히, 옛날 동육동이라 불리던 육동 지역은 청정 지역이라 하여 미나리, 표고버섯을 가꾸는 사람들이 많은데 육동미나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용성은 경산의 중심지와 많이 떨어져 있는 관계로 환경 오염을 일으키는 공장이 거의 없어 외지인들이 들어와 전원주택을 많이 짓고 있다.

현재 용성에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과거 삶의 모습들이 풀잎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 위에 새로운 사연이 쌓이고 있다. 그러나 그 풀잎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조상님들의 애틋한 사연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는 용의 전설을 품은 용의 고장이다.

글을 마치니 흥이 일어나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용성 사람들

 

용산이 구룡산을 바라보면

용성 사람들은

용당못을 머금고 하늘을 보고

용산이 반룡산을 바라보면

용성 사람들은

용바우를 디디고 땅을 보았지요.

 

부제리 용당못 용이 머리를 내밀 즈음

왕재 소금장수 아낙네의 붉은 사랑은

비오재 너머 동산의 별을 낳고

귀방우 용왕 셋째 딸 파란 소망은

소랏골 건너 박산의 구름을 낳고

송림사 닥나무 찌는 처녀의 하얀 한숨 소리는

송림천 따라 오목천의 달을 낳았지요.

 

장재리 용바우 용이 미처 등천을 못 해

반룡사 석양으로 스러지자

사미천 선사의 돌무덤은 장군을 잃고

대흥사 병선의 부도탑은 부처를 잃고

맹구대 관란의 기러기는 둥지를 잃었지만

용산만은 산성을 끌어안고

무지개샘의 용을 잃지 않았지요.

 

용성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러한

용의 전설을 그리며 한숨 삼키고

용을 꿈꾸러 갔다가

용산에 별과 달과 구름이 한바탕 춤을 추면

용성으로 돌아와

용과 하나가 되었지요.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 최강근(용성면 이장협의회 회장)

 

다음 회에는 신라 고찰 대흥사를 품었던 고죽리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사진 자료>

 

▲ 관란서원
 
▲ 덕천리 남천서원
 
▲  대종2리 영모재
 
▲ 고죽리 광일재
 
▲ 고죽리 전일재
 
▲ 반룡사
 
▲ 용성성당
 
▲ 구룡공소
 
▲ 송림교회
 
▲ 고죽리 대흥사 부도
 
▲ 미산리 노거수
 
▲ 용산산성 
 
▲ 용성초등학교
 
▲ 곡란리 난포고택 
 
▲ 대종리, 가척리 한장군 사당
 
▲ 부제지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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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6 삭제

    사람과행적편에 부일리출신 국회의원 은 박재욱씨며 미산리출산의 박주현씨를 추가하여야 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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