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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군 사당이 있던 삼거리 주막 마을 시문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5) - 시문리
기사입력 2026-04-17 오전 9:15:04

▲ 진량읍 시문리 전경
◆ 프롤로그
문화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전승된다. 과거에는 중요한 삶의 모습이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현대적으로 변용되어서 전승되기도 한다. 시문리에는 과거 삶의 문화가 어떻게 사라져 갔고, 또 현대적으로 어떻게 변용되어 계승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두 가지가 서려 있는 마을이다. 그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시문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시문리(柴門里)는 신라 때 마진량현 시문촌이었다. 고려 초 구사부곡으로 강등되면서 일명 구사촌 시문이라 하였다. 1018년 인접한 자인현과 함께 경주부에 속하였다. 1653년 자인현은 구사촌을 돌려받으면서 북면을 상북면과 하북면으로 나누었는데, 구사촌 지역은 하북면이라 하였다. 18세기 행정구역 명칭 개편 때 하북면은 북칠동∼북종동까지 4개 동으로 나뉘고, 시문리는 다문(다문1리)·후곡(다문2리)⋅평사리(평사2리)와 함께 북종동에 속하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시문리는 하북면에 소속되고, ‘리’가 ‘동’으로 승격되어 자인군 하북면 시문동이 되었다. 1911년 동리 통폐합 때도 그대로 자인군 하북면 시문동이라 하다가,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시문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진량면 시문동이라 하다가 1988년 시문리가 되었고, 1997년 진량읍 시문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마을은 시문과 삼거리 두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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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문리 지적도(1912)
▲ 시문

▲ 시문마을
시문(柴門)은 ‘사립문’이란 뜻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개척 당시 가시나무가 많아 이 가시나무로 울타리와 문을 만든 마을이라 하여 ‘시문’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은 1650년경 김녕김씨들이 개척하였다고 전하지만,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이미 시문리가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깝게는 조선 초, 멀리는 압독국 마진량현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후반 영천 조곡리에서 김해김씨들이 이주하여, 1912년 당시 22가구가 살았다. 일제시대 이후 마을 동남쪽 상곡지 아래로 주거지가 형성되어 현재 약 35가구가 살고 있다.
▲ 나그네의 노랫가락이 퍼지던 삼거리 마을

▲ 삼거리마을 터
삼거리는 부제지 서북쪽 자인 영천 간 도로에 다문·아사, 시문, 신제, 현내리로 가는 길목이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교차하는 곳이다 보니 이곳에 주막이 3개 있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이곳에 주막집이 3개가 있어 ‘삼려점(三閭店)’이라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이 삼려점이 어느 순간 ‘삼거리’로 바뀌어 이곳을 ‘삼거리마을’이라 불렀다. 길이 세 갈래라서 삼거리라 했다고 하는데, 1912년 지적도상에는 길이 4개가 보인다. 또 마을 동쪽 아사 쪽 원골 앞에는 원곡주막도 있었는데, 이 주막은 일제시대 이후에 생겼다. 현재 이 삼거리마을 터는 폐가 하나만 있고, 나머지는 율산서원 부지에 수용되었다.
◆ 삶의 터전과 흔적

▲ 시문리 지명지도
▲ 산·골·재

▲ 아사고개
시문리는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다 보니 골짜기와 고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고개로는 시문 북쪽에서 아사리로 넘어가는 아사고개, 용오골[용호골]에서 신제리로 넘어가는 용오고개, 후포골에서 광석리로 넘어가는 후포고개 등이 있었다. 현재 아사고개에는 공장이 들어섰고, 용오고개와 후포고개는 공단 토목공사로 사라졌다.

▲ 안골
등성이로는 태봉골 서쪽의 갓등, 갓등 아래의 갓등골, 갓등 서쪽 신제리 쪽 진량골, 진량골 동쪽 시문 안쪽에 있는 안을골, 안을골 서남쪽 광석리 후포동 위의 후포골, 후포골 동쪽 전에 여씨가 살았다는 의기골, 시문 북쪽 옛날 여행자 공공숙소였던 다문원이 있던 원골, 원골 서쪽 미너리못[부제]의 매래가 있던 매랏골, 매랏골 남쪽 나만골, 나만골 남동쪽 웃골[상곡], 웃골 남쪽 소를 잡아 먹었다는 소장골, 소장골 남쪽 안골, 안골 남쪽 태봉지가 있는 태봉골 등이 있었다.

▲ 태봉산
또, 삼거리마을(현 율산서원) 서쪽 신제리와 걸쳐 있는 산은 용오산[용호산]이라 하였고, 길 건너 동남쪽 봉우리는 크다고 하여 큰봉 또는 태봉(太峰)이라 한다. 이 산은 어떤 왕의 태를 묻어서 태봉(胎峰)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는데,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신제리와 다문⋅시문의 경계에 있으면서 용을 닮았다고 부른 용오산은 현재 공단으로 거의 깎여져 율산서원 있는 곳인 율산 자락만 겨우 남아 있다.
▲ 저수지

▲ 부제지
시문리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는 미너리못이라고 하는 부제지(婦堤池)이다. 이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부제(婦堤)로 등재되어 있어 가까이는 조선 초기, 멀리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관개 면적이 8결이었는데, 이후 확장하여 현재의 크기가 되었다. 부제는 옛날 어느 집 며느리가 빨래를 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하여 부제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안쪽에 있는 못은 시어머니가 파고, 바깥쪽은 며느리가 팠다고 한다.

▲ 시문리제 터
또 15∼18세기 축조된 시문리제(柴門里堤)는 부제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부제안못’, 또는 시제지라고도 불렀다. 이 저수지는 『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있다. 현재는 매립되어 밭으로 변했고, 일부만 웅덩이 형태로 남아 있다.

▲ 상곡지

▲ 태봉지
또 상곡에 있는 상곡지와 태봉골에 있는 태봉지는 조선 후기에 축조되었다. 태봉지(太峰池)는 원래 태봉골 18번지에 있었는데, 일제 시대 그 아래에 새로 못을 조성하여 옛날 태봉지는 구태봉지라 하고, 새로 축조한 못을 태봉지라 하였다. 구태봉지는 현재 매립된 상태이다.

▲ 원곡지
이외 원골에 있는 원곡지(院谷池), 나만골에 있는 나만골못, 용오골에 있던 용오골못, 후포골에 있던 후포골못 등은 모두 일제시대 이후 축조된 저수지다. 현재 용오골못과 후포골못은 매립되었다.
◆ 성심도인 박재호를 배향하는 율산서원

▲ 율산서원 전경
밀양박씨 규정공파 17세 박경태의 5세손인 춘강(春崗) 박재호(朴在鎬, 1896∼1967)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다문리(현 문천1리)에서 박치윤(朴致潤)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7세 때 선도산 신모의 계시를 받고 명산대천을 떠돌며 도를 닦다가 용성 구룡산 아래 구룡연(九龍淵)에서 깨달음을 얻고는 유불선 3교를 바탕으로 한 성심도(聖心道)라는 종교를 창시하였다. 대구 내당동 반고개에다 백화정(百華亭)을 세우고 구세제민의 종교활동을 하다가 1967년 사망했다.

▲ 율산서원 숭정당
그에게는 박순화(朴淳和), 박성형(朴城亨), 박준형(朴埈亨) 세 아들이 있었다. 이중 둘째 아들은 1953년 명호직물(신라섬유)을 창업하였고, 셋째 아들은 신라교역(현 신라홀딩스)을 창업하여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삼 형제는 시문리 동쪽 율산[栗山·용오골]에다 부친 박재호와 윗대 조상 5위를 배향하는 율산서원을 1977년 10월 3일 창건했다. 서원이라는 칭호는 자인향교 및 경상북도 유림의 도움으로 받았다. 서원은 묘우로 상현사(尙賢祠)와 혜성사(慧成祠)가 있고, 그 앞에 강당인 숭정당(崇正堂)과 정문인 경행문(景行門)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은 청기와로 장식했다.

▲ 상현사
상현사에는 밀양박씨 중시조인 밀성대군 박언침을 가운데로 하여 규정공파의 파조인 무열공 박현, 충간공 박눌생, 충양공 박경신, 밀양박씨 규정공파 자인 입향조 요산(樂山) 박운달(朴雲達, 1491∼1554) 등 4위를 양쪽에 배향하고 있다. 혜성사에는 삼 형제의 부친 박재호를 배향하고 있다.

▲ 혜성사
상현사에는 매년 10월 3일 5위에 대한 향사를 올리고, 혜성사에는 5월 15일 성심도 신도회원이 모여 박재호를 기리는 춘향제를 올린다. 1983년 후손들이 박눌생, 박경신, 박운달의 글을 모아 고향 대원리에서 제목을 딴 『원리세고(院里世稿)』를 출간하였다.

▲ '원리세고'와 '춘강박선생실기'
그리고 박재호의 둘째 아들 신라섬유 창업자 박성형(1929∼2014)은 1987년 부친의 호를 딴 춘강교육재단을 설립하여 대구 동구에 신라여자종합고등학교(현 동부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 박재호 신도비
또 성심도 회원들이 1997년 율산서원 입구에 「성심도인 밀양박선생 신도비」를 세웠고, 1999년 경산대학에서 『춘강 박선생실기(春崗 朴先生實記)』를 간행했다. 박재호는 다문리 괴정의 희암 박치준 선생한테 11촌 조카가 된다.

▲ 율산서원 현판 모음
한편, 이 율산서원이 건립되자 언론과 국회에서는 ‘경산의 불국사’라는 별칭을 붙이면서 호화 재실이라고 비판을 할 정도였다.(경향신문, 1977. 1. 19. 조선일보, 1977. 10. 23.)

▲ 모선정
◆ 김해김씨 모선정
시문리 상골에는 김해김씨 삼현파 진사공파 재실인 모선정(慕先亭)이 있다. 시문리 김해김씨는 18세기 후반 김현담(金顯談)이 김재흥(金再興), 김수석(金秀奭) 등과 함께 영천 대창면 조곡리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 모선정 현판
모선정은 2007년 준공하였고, 전면에 모선정 현판과 첨선재(瞻先齋) 현판이 걸려 있다.
◆ 자인현 수호신 한장군사당이 있던 시문리
이러한 마을에 조선시대부터 자인현의 수호신인 한장군 사당을 짓고 매년 단옷날 한장군제를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실을 주민들조차도 모른 채 먼 과거의 일로 사라져 버렸다. 시문리에 어떤 연유로 한장군 사당이 있었고, 어떤 사연으로 사라졌는지 알아보자.
▲ 시문리 한장군사당과 한 장군제

▲ 시문리 한장군사당이 있던 곳의 1912년 지적도
시문리에는 단오 전날 시문리 한당(韓堂)에서 한장군제를 지낸 후 단옷날에 제관이 자인현 한장군 사당 진충묘에 와서 또 제를 올렸다. 이러한 행사는 구사촌이 경주부로부터 독립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65년 자인현감 정충언이 부임하면서부터 행해졌다. 현감 정충언은 자인현민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자인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장군제를 적극 활용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굿의 형태로 전승되는 한장군제를 자신이 직접 유교식 제의로 바꾸고, 동생 정충빈은 한장군을 찬양하는 「영신사」라는 독특한 서사시를 창작하여 제의 때 노래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동면, 북면, 남면, 서면 등 자인 현청과 멀리 떨어진 각 면에 한장군 사당을 짓도록 하여 거기서 한장군제를 단오 전날 따로 지내고, 당일에는 각 면의 대표들이 자인 계림숲 진충묘에 모여 다시 한장군제를 지내도록 하여 자인현민의 단합을 꾀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은 1936년 일제가 한장군제를 폐지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유는 일본신사 참배와 왜군을 물리친 한장군의 업적 때문이었다.

▲ 태봉지 옆 한장군사당이 있던 곳
시문리의 한장군제는 바로 이러한 자인현의 수호신인 한장군에 대한 제를 올리는 하북면 북종동 지역인 다문, 시문, 후곡, 평사마을의 제의 행사였다. 일제가 한장군제를 금지하면서 시문리의 한장군제는 폐지되었고, 한당 또한 폐철되었는데, 해방 후에도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당이 폐철되기 전 1912년 작성된 지적도를 보면 한장군 사당이 있던 곳은 마을 안쪽 고개 너머 태봉지 옆 40번지로 추정된다.
▲ 시문리 동제로 복원된 한 장군제

▲ 동제를 지내던 시문리 당나무
그러다가 2000년경 한장군제는 동제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처음에는 마을 입구 109번지 밭둑에 있는 당나무와 상골 상곡지 옆의 조산(造山)에 있는 소나무 2곳에서 제를 올렸다. 당나무에서 지내는 동제는 정월 보름날 나무신에 대한 제사였고, 상골에서 지내는 제사는 단옷날 지냈는데 한장군제라 하지 않고 땅신[지신]에 대한 제사라 하였다. 그러다가 단옷날 제를 올리는 것을 폐지하고 동제만 올렸는데, 상골 소나무가 고사한 뒤부터는 마을에 있는 당나무에서 제를 올렸다. 그런데 이 동제 또한 4∼5년 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 시문리 보호수
한편, 율산서원 길 건너편에도 수령이 200여 년 된 회화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경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에필로그
시문리 서쪽에 있던 신제리와 광석리는 경산4일반산업단지에 수용되어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리고, 논과 밭, 산들은 모두 깎여져 지형이 완전히 변하였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시문리는 산업단지에 수용되지 않고 마을의 원형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인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과거의 전통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 그 옛날 오고 가는 길손들이 삼거리주막에서 한 잔의 막걸리에 목을 축이고 젓가락으로 상을 두들기며 부른 노랫가락 소리도 이젠 용오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공장 기계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율산서원은 학문적 스승과 선현을 모시고 학생들을 교육하던 서원이 시대 변화에 따라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문리를 한 바퀴 돌면서 잃어버린 것과 변화된 것을 생각하니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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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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