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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6-22 오후 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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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담 전설과 구연정의 풍류가 대학교로 승화된 내리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0) - 내리리

기사입력 2025-12-10 오후 1:30:32

▲ 진량읍 내리리 전경 
 

 

프롤로그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라는 공자의 말처럼, 내리리의 땅에는 옛 전설과 선비들의 풍류가 스며 있고, 오늘날에는 학문의 전당으로 승화된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모아담의 신비로운 전설과 구연정의 풍류, 그리고 직재 김익동 선생의 학문과 시가 어우러진 내리리. 이곳은 오랜 세월 역사와 전통을 품어온 마을이자, 이제는 대구대학교를 중심으로 지식과 교육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지금부터 내리리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내리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내리리는 고려시대까지 하양현 동면 죽림리(竹林里)였다.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도 죽림리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하양현 동면 중림리(中林里)로 바뀌었다. 1518세기 동면이 와촌면과 중림면으로 분리될 때 중림리는 하양현 중림면 외중리(外中里)와 내중리(內中里)로 나뉘었다. 외중리는 바깥에 있다고 하여 외리, 내중리는 안쪽에 있다고 하여 내리로도 불렀다. 19세기 중엽 대곡리(臺谷里)로 바뀌었다가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바뀌면서 하양군 중림면 내리동(內里洞)이 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중림면 내리동으로 유지되었다. 1914년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하면서 진량면이 생겼는데, 이때 하양에서 진량면으로 편입되어 경산군 진량면 내리동이 되었다. 이 행정 체제는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다가 1988년 동리 명칭 개편 때 내리리가 되었고, 1997년 진량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경산시 진량읍 내리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대곡이라 부르는 각단 1개로 구성되어 있다.

 

▲ 내리리 지적도(1912)

 

대곡·댓골

 

▲ 대곡(댓골))

 

대곡(大谷)은 내리리의 별칭이다. 신라나 고려 때부터 대제(大堤)라는 큰 저수지가 있어 대곡으로 칭하기도 했지만, 정식 마을 이름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모아산(毛兒山) 용더미 금호강가에 소나무 여덟 그루가 서 있어서 팔송대(八松臺)라 칭한 돈대와 포금대(抱琴臺)라는 돈대가 있어서 대곡(臺谷)이라고 했다. 또 일설에는 대나무가 많아 댓골로도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대나무가 많이 있다. 경주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각성 마을이 되었다.

 

▲ 내리리 지명지도 

 

 

삶의 터전

 

··바위

 

▲ 모아산 

 

내리리는 동쪽으로 깊은 산골과 서쪽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금호강과 내리리, 영천 남성리에 걸쳐 있는 산은 노은산(老隱山)이다. 이 산 서북쪽 두 물길이 한 데 모이는 곳의 산은 모아산(毛兒山)이고, 이 산에 있는 절벽은 모아애(毛兒厓)이다.

 

▲ 고사애 

 

동쪽 영천 남성리 쪽 모랫가에 있는 연못 입구는 옛날 절이 있어서 고사애(古寺厓)라 하였다. 모아애와 고사애 가운데 커다란 절벽이 강 가운데 솟아 있는데 마치 거북이 엎드려 있는 형상을 하였다고 하여 구대(龜臺)라 하였다. 이 구대 남쪽 골짜기는 얕고 좁은데, 마곡(麻谷)이라 하였다.

 

▲ 용더미 

 

또 내리리 북쪽 금호강가에 용처럼 생긴 바위는 용덤, 그곳의 산을 용더미라 한다. 또 서쪽 들판은 상림리 왓고말리와 이어져 왓고말리들이라 하였다.

 

▲ 내골(안골)
 

내리리 동쪽 대구대학교 기숙사가 있는 깊은 골짜기는 안쪽에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곡(內谷)이라 하였다. 이 외 현 대구대학교가 들어선 곳은 옛날 산과 골짜기였는데, 그곳의 이름은 전하는 바가 없다.

 

저수지
 

▲ 내리리에서 바라본 문천지 

 

조선 초기 대제(大堤)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관개 80, 중림리 저수지로 등재되어 있다. 이 저수지는 일제시대까지 보존되다가 1950년대 확장 공사를 하여 현재는 문천지로 부르고 있다.

 

▲ 내곡지 

 

그리고 조선 후기 370번지 내곡지와 상림리 쪽 401번지 연화지, 388번지, 382번지 등에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388번지와 382번지 저수지는 대구대학교가 이전하면서 매립되었고, 내곡지와 연화지는 현재 대구대학교 안에 보존되어 있다.

 

마을길 이름에 얽힌 불편한 진실

내리리 마을 서쪽 앞에는 금호강변에서 문천지까지 가는 도로가 2010년 개통되었다. 이 도로를 경산시도로명주소선정위원회에서는 부림로라 명명하였다. 사유는 봉회1, 1, 양기1, 상림리, 내리리의 대부분이 부림초등학교의 학군으로 포함되어 부림로로 명명함.”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내리리 마을 골목길은 진량내리길로 명명되어 있다. 사유는 다중 이용과 지명도가 높은 법정 명칭을 활용 부여라 적혀 있다.

 

그런데 부림로진량내리길은 내리리의 정체성과 역사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내리리는 조선 초기까지 대나무가 많아 죽림리라 하였고, 그후 중림리’, ‘대곡리로 바뀌었다. 모두 대나무와 관련한 마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마을 앞 큰 도로는 죽림로’, ‘중림로라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진량내리길은 압량 내리와 구분하기 위해서 명명한 것 같은데, 마을의 분위기와 전통을 살려 대곡길로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길 이름 하나를 명명하는 데도 마을의 유래를 알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했으면 한다.

 

 

모아담 전설

 

▲ 모아산과 모아담

 

내리리에는 옛날부터 모아담(毛兒潭)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하양현읍지에도 군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온몸에 털이 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금호강가에 있는 연못에서 놀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연못을 우리말 에 해당하는 한자 모아(毛兒)’를 써서 모아담이라 하였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하양현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모아담 전설은 경산군지(1971)까지 전하는 내용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최근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30년대까지는 구체적인 장소가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1912년 내리리 지적도를 참고한 결과 내리리 금호강가 모아산 아래 있는 조그마한 연못이 바로 모아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연정에 서려 있는 직재 선생의 풍류

 

이러한 마을에 조선 후기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하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 고향에 머무르면서 학문 수양과 후진 양성, 그리고 금호강가에 구연정을 짓고 풍류를 즐기다 생을 마감한 직재 김익동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직재 김익동

 

▲ 신상리 영모재 

 

김익동(金翊東, 17931860)은 본관이 청도이며, 호는 직재(直齋)이다. 하양현 낙산면 내토리 동쪽에 있는 신기(신상2)라는 각단에 살았다. 그는 유치명의 문인으로 1806년 안동향시에 합격하고, 1819년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정시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자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과 개인 수양을 하였다. 1847년 금호강가 내리 노은산에 노은정사를 건립하여 벗들과 소요하고, 1851년 지금은 영모재로 바뀐 사산정에서 같은 마을에 살던 배극소와 함께 상제의집록(喪祭儀輯錄)을 발간하였다.

 

▲ 상재의집록 표지 

 

이후 영천 용전(龍田)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60년 별세했다. 그의 사후 1908년 손자 김희교가 김성로, 김성호 등과 함께 직재문집을 발간하였다.

 

구연정

 

▲ 구연정 

 

구연정은 직재 김익동이 1847(정미년) 공사를 시작하여 3년 뒤 1849(기유)에 완공하였다. 지금은 구연정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식 명칭은 노은산에 있다 하여 노은정사(老隱精舍)였다. 3칸으로 지었는데, 왼쪽은 중용의 구절 돌이켜 구한다.’는 구절을 따 반구라 하였고, 오른쪽은 강서(彊恕)’라 하였는데, 이 둘을 합하여 노은정사라 하였다. 그러면서 노은정사에 관한 시 한 편을 썼다.

       
       노은정사에서                                 
精舍(정사)

 

굽이굽이 푸른 절벽 푸른 물을 두르고                   曲曲蒼屛?碧洲(곡곡창병요벽주)

난간에 오르니 넓어 더욱 깊고 그윽하구나              登臨軒豁更深幽(등임헌활갱심유)

땅 이름(노은)은 우연히 내 심회와 일치하니            地名偶與吾心會(지명우여오심회)

이제부터 숲속 오두막에서 흰머리를 의탁하려네        從此林廬寄白頭(종차임려기백두)

 

▲ 구연정 현판 

 

집은 기둥이 4개인 4량가인데, 동편은 직방재(直方齋), 서편은 낙완재(樂玩齋)라 칭한 편액을 걸어 놓았다. 또 이 편액이 있는 집을 구대연못에서 각각 한 글자를 따 구연정(龜淵亭)이라 하였다. 그가 지은 구연정이란 시가 있다.


              구연정                               龜淵亭(구연정)

 

바위 위에 작은 집 지으니 푸른 숲에 싸였고            巖頭小築擁靑林(암두소축옹청림)

긴 여름 맑고 서늘하여 속된 소리 끊어졌네.            長夏淸冷絶俗音(장하청냉절속음)

먼 봉우리는 평야를 두루 꿰어 광활하고                遙峀彌縫平野闊(요수미봉평야활)

맑은 강은 절벽을 휘감아 돌아 깊어지네.               澄江??斷厓深(징강료요단애심)

늙어 감에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老去非關當世事(노거비관당세사)

고요한 가운데 모름지기 내 마음을 수양하네.          靜中須養自家心(정중수양자가심)

오직 낡은 책이 있어 고즈넉함을 위로하니             惟有殘編慰幽?(유유잔편위유격)

아름다운 손님이 이따금 멀리서 찾아오는구나.         嘉賓時復遠來臨(가빈시복원래임)

 

▲ 유행대 

 

노은정사 주변 절경 곳곳에는 이름을 정해 놓았다. 구연정의 오른쪽 절벽은 층층이 높은데, 운곡선생의 시를 따 유행대(留行臺)라 하였고, 이 유행대 동쪽 곧은 절벽은 평평하여 평포(平鋪) 또는 영시대(永矢臺)라 하였다.

 

▲ 영시대 

 

그리고 구연정의 서쪽 깎아 놓은 절벽은 무서울 정도로 두려워서 외애(畏厓)라 하였고, 이 절벽 서쪽 우뚝 솟은 바위가 맑은 연못(모아담)을 안고 있어 연어대(鳶魚臺)라 하였다. 노은정사 동쪽에는 시원하고 차가운 샘이 있는데, 수한천(漱寒泉)이라 하였다. 모아산 위에는 기우단이 있는데 기수(沂水)와 무우(舞雩) 고사를 취하여 풍영대(風詠臺)라 하였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시도 각 한 편씩을 써 놓았다.

 

한편, 이 노은산에는 소나무가 여덟 그루가 있어 팔송정이라 칭한 곳과 포금대가 있었다고 한다. 팔송정의 위치는 내리 북쪽에 있었다고만 전하고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포금대(抱錦臺)는 연어대 서쪽 작은 언덕이 동쪽으로 고개를 숙여 금호강을 안고 돌아가는 듯하여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경암 허조 선생이 거닐면서 시를 쓴 곳이라 한다. 그러면서 포금대에 관한 시 한 편도 써 놓았다.

 

▲ 포금대 


           포금대에서                               抱琴臺(포금대)

 

큰강 금호는 빙 둘러 바위 벼랑을 안았는데              巖厓回抱大江琴(암애회포대강금)

흐르는 물소리 예나 지금이나 청량하구나.                       流水??自古今(유수령령자고금)

좋을시고 가을밤 포금대 위의 달이여                    好是秋宵臺上月(호시추소대상월)

주인옹이 와서 앉으니 그대만이 벗이로구나.                   主翁來坐獨知音(주옹내좌독지음)

 

*주인옹 : 화자의 마음을 의인화한 표현

 

 

대구대학교가 들어선 노은산 일대

 

▲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모아담 전설과 직재 김익동 선생의 풍류가 곳곳에 서린 노은산 일대에 1982년 대구 대명동 대명시장 근처에 있던 대구대학교가 이전하였다. 이 학교는 처음 대구맹아학교를 시작으로 한국사회사업대학, 한사대를 거쳐 대구대학교가 되었다. 학교의 뿌리가 장애인들을 교육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현재도 특수교육 분야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직재 김익동 선생과 하양 선비들의 풍류가 학문의 전당인 대구대학교로 승화되어 대은산 골짜기마다 공부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앞으로 상림재활산업단지가 들어서면 대구대학교의 역할이 더 무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에필로그

 

모아산과 금호강이 품어온 전설과 풍류는 오늘날 대구대학교 캠퍼스와 함께 학문의 울림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선비의 풍류와 주민의 삶이 이어져 내려온 터전 위에 젊은 학도들의 열정이 더해져 내리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배움의 고장이 되었다. 앞으로 이곳에 들어설 상림재활산업단지와 더불어, 내리리의 이야기는 더욱 확장된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 내리리 마을 전경 
 
▲ 내리리 마을 
 
▲ 내리리 마을회관 
 
▲ 구연정 입구 
 
▲ 구연정 
 
▲ 모아산 
 
▲ 노은산 
 
▲ 문천지 
 
▲ 대창천 
 
▲ 연화지
 
▲ 용더미
 
▲ 풍영대 
 
▲ 영시대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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