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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정 배필신 선생이 살던 신제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19) - 신제리
기사입력 2026-06-05 오전 9:20:37

▲ 진량읍 신제리 마을 전경
◆ 프롤로그
지금의 신제리는 지도에서조차 찾기 어려운 사라진 마을이다. 산업단지 조성으로 마을과 산, 골짜기는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어린이들에게 사람다운 삶의 도리를 가르치며 평생을 보낸 한 선비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오늘은 신제지 물가에 자리했던 신제리와 소학정 배필신 선생의 삶을 따라가 본다.

▲ 신제리 행정 지도
◆ 역사와 유래
신제리는 원래 압독국 마진량현 반포촌(反浦村)이었다. 신라에 복속된 뒤 압독주 마진량현에 속했고, 고려 초 구사부곡으로 강등되어 1018년 경주부 관할 부곡이 되었다. 조선 초기 신제지 안에 새로 마을이 조성되어 신제내리라 하고, 기존 마을은 그대로 반포리라 하였다. 1653년 경주부에서 독립한 구사부곡은 자인현 하북면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반포리는 반포리와 후반포로 분할되어 후반포리는 광석리에 편입되고, 기존 반포리는 신제내리와 통합되어 신제리로 바뀌었다(호구총수). 18세기 행정구역 명칭 개편 때 하북면은 북칠동∼북종동까지 4개 동으로 나뉘고, 신제리는 죽원곡리, 안촌, 속사곡리(속초) 등과 함께 북팔동에 속하면서 신제내리로 변경되었다. 1888년경 신제내리는 신제리로 바뀌었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하북면이 중북면과 하북면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신제동이 되었고, 중북면에 소속되었다.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신제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진량면 신제동이라 하다가 1988년 신제리가 되었다. 그런데 2005년 경산3일반산업단지 부지에 신제리 일부가 수용되는 바람에 ‘새못안’이라 부르던 신제내리와 ‘새못밑’ 각단이 공단에 수용되어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천수백 년 존속하던 마을은 사라졌다. 게다가 겨우 남아 있던 구룡골과 소포라 하던 반포리 마을도 2017년 경산4일반산업단지에 또 수용되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마을은 새못안(신제내리), 새못밑, 소포[반포리], 구룡골 등 네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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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제리 지적도(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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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 전 신제리 항공사진
▲ 신제내리·새못안

▲ 신제내리 터
‘신제내리’는 신제지 서북쪽 신상리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조성된 각단이었다. 조성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된다. 신라 때부터 있던 신제지[봉제지] 안쪽에 있다고 하여 신제리, 신제내리, 새못안 등으로 불렀다. 임진왜란 때 충주석씨 사촌(沙村) 석건행(石建行)이 밀양에서 왜군을 피해 신제리로 이거한 후 석씨들이 주로 살았다. 이후 석씨들은 자인현 향리 가문이 되었다. 또한 달성배씨 배이도(裵而度)가 대구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거하여 달성배씨들도 많이 살게 되었다. 1912년 당시 30가구 살던 신제리의 중심 마을이었다. 2005년 경산3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사라졌다.

▲ 개발 전 소포마을
◆소포·작은개
소포리(小浦里)는 원래 반포촌(反浦村)에 속한 각단으로 신제리의 원 마을이었다. 2011년 발굴조사 결과 석곽묘와 석실묘 등이 발굴되어 신라 때부터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포에는 다섯 개의 개[포(浦)]가 있었는데, 소포는 이 중 가장 작은 개여서 ‘소포’ 또는 ‘작은개’라 불렀다. 소포리가 있던 골짜기를 ‘작은개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신제 안에 마을이 조성되어 그곳에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어 1653년 신제리에 통합되어 공식적으로 마을 이름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계속 소포라 불렀다. 1912년 당시 17가구 살았다.

▲ 개발 후 소포마을 터
마을 입구 신제지 못가에도 몇몇 가구가 있었고, 소포 마을에는 천운사라는 사찰도 있었다. 이 사찰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인 사회복지법인 ‘정토마을 안락원’이 2002년 세워져 한때 ‘정토마을’이라고도 불렀다. 2017년 경산4일반산업단지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 시설은 남산면 경리 새못 옆으로 옮겼고, 마을도 완전히 사라졌다.

▲ 새못밑 마을 터
◆ 새못밑
새못밑은 신제지 서쪽 지애산 아래에 있던 각단이었다. 새못 밑에 있다고 하여 ‘새못밑’이라 불렀다. 새못안이라 부르는 신제내리와 구분하기 위해서 ‘새못밑’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2년 당시 3가구 살다가 일제시대 이후 여러 가구가 생겼지만, 정식 마을로는 승격하지 못했다. 2005년 경산3일반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사라졌다.

▲ 개발 전 구룡골
◆ 구룡골
구룡골은 신제지 북동쪽 다문리로 넘어가는 용호산(龍狐山) 용고개 밑에 조성된 마을이다. 용호산은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겨 처음 용두산 또는 용재라 하였다. 이후 용과 여우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되어 용호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2년 당시 구룡골에 2가구 살았다.

▲ 개발 후 구룡골 터
이후 사람들이 점차 이주하여 폐촌되기 직전에는 10가구 정도 살았다. 이 마을 또한 2017년 경산4일반산업단지 공사가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 신제리 지명 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산골재

▲ 개발 전 두리봉

▲ 현재의 두리봉
신제리는 신제지 안쪽에 위치하다 보니 산과 골짜기, 고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다. 대표적인 산은 신제지 동쪽 봉우리가 둥그렇게 생긴 ‘두리봉’이다. 한자로는 원봉(圓峰)이라 한다. 이 산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한 밀양박씨 박응득의 묘가 있었다. 신제지 동북쪽 산은 새못안과 소포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리산(中里山)이라 하였다. 현재는 완전히 깎여 공장이 신축되고 있다.

▲ 지애산
신제지 서쪽 산은 못가에 있다 하여 ‘지애산(池涯山)’이라 하였다. 현재는 절반 정도만 남아 있다. 지애산 서북쪽에 있는 산은 막등 위에 있다 하여 ‘막등산’이라 하였다. 신제리 북쪽 집너매골 서쪽 산은 ‘등말되배기’라 하였다.

▲ 아나리고개 터
고개로는 신제지 동쪽 다문리 다갈[다글]로 넘어가는 ‘다갈고개’, 문천동으로 넘어가는 ‘돌고개’, 다문리 무내미로 넘어가는 ‘물남곡’, 신제지 동쪽에서 시문리와 현내리로 넘어가는 지형이 기러기가 알을 안은 형국이라는 ‘아나리고개’, 새못안에서 구룡골로 넘어가는 ‘등말고개’ 등이 있었다.

▲ 용고개 터
골짜기로는 새못안 서쪽의 ‘갓골’, 새못안 서남쪽 ‘개밭골’, 구룡골 남쪽 신제지의 매래[무넘기]가 있던 ‘매랏골’, 매랏골의 작은 골짜기인 ‘작은매랏골’, 매랏골 북쪽 신제지 서쪽의 갓 너머에 있는 ‘갓너매골’, 구룡골 동남쪽 건답이 있던 ‘건덜골’, 구룡골 동남쪽 바닥이 깊숙한 ‘께뭇구미’와 ‘배방골’, 몽달못 안쪽의 ‘몽달못안골’, 구룡골 북쪽 집 너머에 있던 ‘집너매골’, 구룡골 서북쪽 집 위에 있던 ‘집우엣골’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과 골짜기, 고개는 산업단지로 인하여 모두 깎이고 메워져 지금은 흔적도 없다.
◆ 저수지

▲ 신제지
신제리에서 제일 오래된 저수지는 신제지이다. 이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관개 34결로 기록된 이후 지금까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멀리는 신라시대, 가까이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5∼18세기에 축조된 저수지는 247번지 몽달제(夢達堤)와 403번지 용담제(龍潭堤)다. 이 두 저수지는 『여지도서』부터 등재되어 있다. 몽달재는 둘레 480척, 용담제[갓골못]는 400척이었다. 그리고 18세기 자인현읍지에 처음 등재된 422번지 신평제(新坪堤)는 달평제로 바뀌었다.

▲ 구룡골과 물암지
35번지에 있던 물암지는 조선 후기에 축조되었는데, 일제시대 그 아래 다시 새로운 못을 축조했다. 또 53-1번지에 있던 용방지는 일제시대 이후 축조했다. 이외 웅덩이 수준의 저수지가 신제지 서북쪽 골짜기마다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신제지 하나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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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제리 삼국시대 석곽묘(출처:한빛문화재연구원)
◆ 기타 삶의 흔적
신제리에는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그 흔적이 2011년 한빛문화재연구원에서 신제리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석곽묘와 석실묘 등이다. 이 묘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 지수인산(智水仁山)의 삶을 살다 간 소학정 배필신 선생
배필신(裵必新)의 자는 일보(日甫) 또는 천보(天甫), 호는 소학정(小學亭), 본관은 달성이다. 1700년대 영·정조 때 살았다. 달성배씨 신제리 입향조 배이도(裵而度)의 증손이다. 그는 현재 진량으로 바뀐 자인현 하북면 신제내리에서 소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제49대 자인현감 김방(1706∼1778)이 1760년 ‘소학정’이라는 집을 짓게 하고 아이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이때 언양에서 활동한 서석린(徐錫麟, 1710∼1765)이 “소학정 서, 배필신이 사는 곳(「소학정서(배필신소거)」)”이라는 글을 썼다. 자인현읍지에는 호가 소학정이라고만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후손으로는 경산 사동에 살던 배덕암(裵德岩), 중방동에 살던 배광원(裵光源) 등이 있다.
그에 대한 당대 선비들은 교남(문경새재 이남)의 은일 선비이고, 강좌(낙동강 왼쪽)의 심오한 학자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나라에서 『훈의소학』을 반포하자 소학정을 지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 집에는 삼단으로 된 단을 쌓고 입교, 명륜, 경신으로 이름을 짓고 지수인산(智水仁山)의 삶을 살았다. 또 노자와 주돈을 흠모하고, 진나라 도잠이 자신의 집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도를 닦은 것을 본받아 자신도 연못에 연꽃을 심고 소나무 차를 마시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즐겼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삶의 기본 원리인 『소학』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데 있었다. 심지어 나무를 해 돌아오는 어린 나무꾼들과도 『소학』에 나오는 인의예지의 도리를 놓고 토론할 정도였다.

▲ 배필산 통문
한편, 그는 1767년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이 부친 회재 이언적의 강계 유배 때 7년여 동안 배종한 효행으로 강계의 경현서원과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통문과 상소문을 작성할 때 이름을 같이 올리기도 하였다.
그가 죽은 후 1856년 사림과 후손들은 신제리에 봉담사(鳳潭祠)라는 사당을 지어 그를 추향하였다. 봉담은 신제지의 또 다른 이름 봉제(鳳堤)에서 땄다. 이때 내토리(신상2리) 직재(直齋) 김익동(金翊東, 1793∼1860)이 쓴 「봉담사상량문(鳳潭祠上樑文)」이 『직재문집(直齋文集)』에 실려 있다. 김익동은 배필신이 쓴 시에서 운자를 빌려 아래와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삼가 배필신의 운을 차운하다 (근차소학정배공필신운)
수많은 물줄기 가운데 초연하게 우뚝 서 있으니 (초연흘립중류중)
뛰어난 시문을 감추고 고풍을 흠모하네. (감각사화모고풍)
임금이 책 한 권을 반포하여 가르치니 (일부초반선정훈)
삼단을 지어 어린이를 가르친 공이 있네. (삼단애축양몽공)
푸른 연못 가득한 연꽃은 가을 용태 깨끗하고 (연화벽소추용정)
오동의 달과 맑은 창은 밤기운이 서로 통하네. (오월청창야기통)
나무꾼들은 한자 토를 전하며 숭상하니 (초목상능전구결)
행인은 봉제 동쪽에서 말을 멈추네. (행인주마봉제동)

▲ 배씨 신제문중 묘지
그런데 이 사당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후 다시 중건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제리나 그 근처 광석리 사람들은 그곳에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현재 경산4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마을 전체가 공단에 편입되어 주민들은 외지로 흩어지고 마을 터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그후 이 마을 배씨문중은 조상 묘를 모두 진량 아사리로 이전하였다.
◆ 에필로그
마을은 폐촌되고 산과 골짜기 등 삶의 터전은 중장비로 완전히 파헤쳐진 신제리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소학정 선생이 외치던 삶의 기본 교육이 땅속에 묻힌 현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대가 변하고 인간이 바뀌어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삶의 원리는 잊어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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