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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 배극소 선생의 문향이 서린 읍소재지 신상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2) - 신상리
기사입력 2025-09-09 오전 10:16:40

▲ 신상리 전경
◆ 프롤로그
출세란 원래 향리에 머물다가 세상이 부르면 나아가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을 의미했다. 요즘에는 이 출세가 돈을 많이 버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고향을 떠나 자신의 뜻을 펼치든, 돈을 많이 벌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는 것을 출세라 하고, 그렇게 하여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이라 한다. 반면 출세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안반낙도의 삶을 살면서 평생 학문 탐구에만 열중한 사람들을 ‘은자’라 하였다. 이 은자의 대표적인 사람이 한 때 신상리에 살고 있었다.

▲ 신상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신상리(新上里)는 조선시대 하양현 낙산면 토산리(吐山里)였다. 토산리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등재되어 있어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 중기 토산리는 내토리와 외토리로 분리되었고, 19세기 말 내토리는 내상리, 외토리는 내하동으로 바뀌었다. 19세기 말 외토리와 내토리 사이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마을을 신기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내상동, 내하동, 신기동 이렇게 세 개의 마을이 있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동리를 통폐합할 때 이 3개 마을을 합쳐서 신기의 ‘신’과 내상동의 ‘상’을 따 ‘신상동’이라 명명하여 하양군 낙산면 신상동이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진량면에 편입시켜 진량면 신상동이 되었고, 1997년 진량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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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리 지적도(1912)
▲ 토산리
토산리(吐山里)는 산을 토해 놓은 듯한 곳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토산은 진량 서남쪽 골프장이 있는 산인데, 도천산이 입을 벌려 한 움큼의 산을 토해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그렇게 명명되었다. 이 산 아래 일대를 조선 초기 토산리라 하였다.
▲ 외토리·내하리·신상1리

▲ 신상1리
외토리(外吐里)는 15∼18세기 토산리가 분리되면서 토산지 바깥쪽에 있다고 하여 외토리라 하였다. 1895년 하양현이 하양군으로 바뀌면서 안골 아래에 있다고 하여 내하동(內下洞)이 되었다가 1911년 신상동이 되었다. 1912년 당시 25가구 살았다. 해방 후 신상1동이 되었다가 현재는 신상1리라 한다. 1914년 진량면이 생기면서 진량면사무소가 들어서서 진량면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현재 원래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빌라, 아파트, 상가 등이 들어서 있다.
▲ 신기동·새태·신상2리

▲ 신상2리
신기동(新基洞)은 내토리 북쪽에 새로 형성되었다고 신기(新基) 또는 새태라 하였다. 원래 외토리에 속한 작은 각단이었다가 1800년대 정식 마을이 되었다. 1911년 마을 통폐합 때 내하동, 내상동과 통합하여 신상동이 되었다. 1912년 당시 28가구 살았다. 해방 후 신상2동이 되었다가 현재 신상2리라 한다. 진량초등학교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현재는 번지수도 바뀌고 마을은 빌라 등이 들어서서 원래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청도김씨 집성촌이며, 1911년 낙산면사무소가 이곳에 있다가 1914년 외토리로 이전하였다.
▲ 내토리·내상리·내곡리(안골)·안낙산·신상3리

▲ 신상3리
내토리(內吐里)는 토산리가 분리되면서 토산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졌다. 낙산 안에 있다고 하여 안낙산 또는 안골[내곡·안곡]이라 불렀다. 신상리에서 가장 오래된 삶의 터전이다. 1895년 내상동(內上洞)이 되었다가 1911년 신상동이 되었다. 1912년 당시 42가구 살았다. 해방 후 신상3동이 되었다가 현재는 신상3리라 한다. 주변에 진량읍행정복지센터와 아파트, 빌라 등이 들어서서 원래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이 마을 골짜기 안에 신선이 베를 짜던 곳과 거문고를 타면서 노닐던 현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덕골

▲ 덕골 터
덕골은 덕곡(德谷)으로 표기하며 신상리 314번지 일대 골짜기를 가리킨다. 이 골짜기에 몇몇 가구가 모여 살면서 골짜기 이름을 각단 이름으로 불렀다. 지대가 높았다고 한다. 1912년 당시 3가구가 살고 있었다.
▲ 솔못안

▲ 솔못안 터
솔못안은 신상리 244번지에 있던 솔못이라는 저수지 안쪽에 있던 각단이었다. 솔못 안에 있다고 하여 솔못안이라 하였다. 1912년 당시 2가구 살고 있었는데,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에 수용되어 사라졌다.

▲ 신상리 지명지도
◆ 삶의 터전
▲ 산골재

▲ 두락산 터
신상리의 대표적인 산으로는 신라 때 병영유적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락산을 들 수 있다. 낙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산 이름에서 낙산면이 유래하였다. 신기동과 내상리 사이 외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깎여져 신상중학교와 공장이 들어섰다. 또 덕골 동쪽 옛날 하양현 사창이 있었다는 사직봉[새직봉], 신상동과 북리에 걸쳐 봉우리가 세 개 있었다는 삼봉(三峰) 등이 있다.

▲ 사직봉과 삼봉
고개로는 낙산에서 대원리로 넘어가던 낙산고개, 신상리에서 봉회리로 넘어가던 덕골고개, 선화리 선항으로 넘어가던 선항고개 등이 있었다. 골짜기로는 지대가 높았던 내상리 동북쪽에 있던 덕골과 지형이 베틀의 북처럼 생긴 뜬북골, 내상리 동남쪽 묘비가 있었다고 하여 비선골, 내상리 서남쪽 이락재라는 서당이 있어서 서당골, 안골 남쪽 지형이 여섯 마리 양처럼 생긴 육양골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골재는 개발로 현재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 저수지
▲ 토산지
신상리의 저수지로는 토산제(吐山堤)가 대표적이다. 이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넓이는 관개(灌漑) 165결(結)이었다. 마을 이름이 토산리라서 토산제로 명명되었다. 일명 토담(吐潭)이라고도 한다. 한때 이 저수지를 매립하여 시장을 만들려고 했으나 다행히 아직 보존되어 진량읍의 명소가 되었다. 또 송제(松堤)라 기록된 솔못도 신상리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 축조되었고, 근처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제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신상리 244번지에 있었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공장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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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골못(성덕지)
이외 조선 후기 축조된 덕골 274번지에 있던 덕골못(성덕지), 안골 동쪽 165번지 줄이 많았던 줄못이 있었는데 줄못은 매립되었다. 내하동 북쪽 854번지 얼룩못은 아직 남아 있다.
◆ 삶의 흔적

▲ 신상리 고분군
신상리 968번지 월령산 일대 경산휴게소 옆에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고분이 여럿 있다. 현재 신상리 고분군으로 알려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 이 마을은 조선시대 하양현 낙산면의 중심 마을이었다. 낙산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1911년 면제가 시행된 후 설치되었다.

▲ 영모재
토담(土潭) 신기리에는 1822년 건립된 사산정(社山亭)이 있었다. 청도인 각헌(覺軒) 김용(金溶)이 머물던 곳으로, 지금은 청도김씨의 영모재(永慕齋)로 바뀌었다. 이 재실 안 수령 167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는 경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낙산재
신상3리 낙산 아래에는 인천채씨의 우모소 ‘낙산재(洛山齋)’가 있다. 현판은 성주에 살던 극암 이기윤 선생이 섰다.
▲ 낙산재

▲ 낙산재 현판
또 청도인 식송 김사총의 강학소인 취송정(翠松亭)도 토담에 있었다. 이외 배응남의 우모소인 효양사(孝養祠)는 낙산에, 장지한의 강학소였던 이락재(二樂齋)는 서당골에 있었다. 채병원의 강학소 하락재(河洛齋)는 효양산(효산) 아래에 있었는데, 진량공단 조성으로 폐철되고, 그 유허비를 신상3리 낙산재 옆에 세워 놓았다.
▲ 진량읍 행정복지센터
일제시대인 1914년 진량면이 생기면서 진량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들어섰다. 현재는 신상3리 토산지 주변으로 이전하여 진량읍행정복지센터라 부르고 있다.

▲ 신상리 주요 기관들~
또 진량초등학교, 신상중학교, 진량중고등학교, 진량우체국, 진량파출소, 진량농협 등 진량의 주요 기관이 모두 이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 묵암 배극소 선생의 삶의 흔적
이러한 마을에 조선 후기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오로지 성리학 탐구와 후진 양성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묵암 배극소 선생의 흔적이 서려 있다. 세월의 흐름으로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기에 그의 삶을 간략하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 생애
배극소(裵克紹) 선생은 1819년 11월 하양현 낙산면 내토리(신상3리)에서 부친 배상관과 모친 밀양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분성(김해), 자는 내휴, 호는 묵암이다. 7세 때 스스로 독서를 깨쳤다고 한다. 어릴 적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성장해서는 하양현 낙산면 신기리 직재 김익동과 안동의 정재 류치명 선생에게서 배웠다. 1850년 철종 즉위 기념으로 치러진 증광감시복시 제1소 생원시에 1등(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럼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하양현 낙산면 내토리 안골에 효산서사(孝山書社)를 지어 스승 익재 김익동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말년인 1869년 영천군 용산에 초옥을 짓고 살다가 1871년 3월 24일 별세했다. 그의 사후 범암 유연즙의 주도로 200여 명이 발기하여 유문을 모아 문집 『묵암집』을 발간하였다. 여기에 실린 그의 시는 150여 편이 넘는다. 그중 「우제」라는 시를 번역하여 인용하니 옆의 원문도 함께 보기 바란다.
비 갠 후 雨霽(우제)
봄날 연못에 날이 개어 남은 추위 물러가니 春塘晴日退餘寒(춘당청일퇴여한)
새소리 층층이 나무 끝에 쌓이네. 禽語層層上樹端(금어층층상수단)
버들눈 매화 뺨은 미세한 뜻을 지니니 柳眼梅?微有意(유안매시미유의)
천지의 소식이 이 가운데 보이네. 乾坤消息此中看(건곤소식차중간)
그의 묘소는 처음 자인현 신제리(진량 신제리) 몽달지 옆 달지산에 마련했다가 이후 영천군 대창면 용전리 약목곡으로 이장했다.
▲ 활동
배극소는 퇴계 이황의 맥을 잇는 남인 계통의 학자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시기는 남인이 몰락하여 정계 진출이 막힌 상황이었다. 스승 김익동도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포기할 정도로 영남의 남인이 홀대받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55년 스승 류치명이 사도세자의 추존을 상소하는 글을 올렸다가 전라도 신안 지도(智島)에 유배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스승 김익동과 함께 지도에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당시 류치명은 79세, 김익동은 63세, 배극소는 37세였다. 또 대구부 해동촌면 칠동(옻골, 동구 둔산동)의 지헌 최효술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대구 화원의 임재 서찬규 등과도 교유했다. 1851년 스승 김익동과 함께 하양 사정(社亭, 사산정)에 모여서 『상제의집록(喪祭儀輯錄)』을 편찬하였다. 1862년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자 책문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또 1863년 철종이 승하하면서 부친의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되자 스승 최효술에게 상례 변경 절차를 묻기도 하였다. 1866년 어버이 산소에 석상을 세우기도 하였고, 고을 사람으로부터 훈장으로 추대되어 봄⋅여름에는 과거를 가르치고, 가을⋅겨울에는 경전을 강론하였다.

▲ 상제의록집 표지
▲ 직재 김익동과의 관계
배극소의 대표적인 업적은 스승 김익동과 함께 편찬한 『상제의집록(喪祭儀輯錄)』이다. 이 책은 고금의 상례 및 제례와 관련한 내용만을 채집하여 편찬했다. 특히, 선현들의 학설 중에서 번잡한 것을 생략하고 요긴한 것만을 골라 실생활에 쓰일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영남 지역의 상장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자는 김익동으로 되어 있지만, 배극소가 대부분 집필하였다고 김익동도 밝히고 있다. 이 두 학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지만 그 이상의 친분을 유지하며 서로 의지하고 그리워했다.
한편, 배극소는 『상제의집록』의 교정을 마치고 자신이 기거하는 효산서사에서 한가롭게 거문고를 연주하며 「효산서사」라는 한 편의 시를 썼다. 번역이 부족하면 옆의 원문으로 감상하기를 바란다.
효산서사에서 孝山書社(효산서사)
효산을 마주하고 강사에서 거문고 연주하니 講舍絃歌對孝山(강사현가대효산)
봄날 연못에는 물고기와 새들 한가롭구나. 春塘魚鳥占餘閒(춘당어조점여한)
속세의 어지러운 한 가지 일 막 끝내고 俗臼初除塵一事(속구초제진일사)
서책 놓인 삼 칸 집에 돌아와 심신 추스르네. 床書歸護屋三間(상서귀호옥삼간)
버들은 청풍을 보내어 울화를 식혀주고 柳送淸風消熱?(유송청풍소열두)
물결은 고운 달빛 머금고 안색을 펴주네. 波涵佳月助新顔(파함가월조신안)
밤낮 경영한 일 실추시킬까 두렵지만 夙宵恐墜經營業(숙소공추경영업)
천심이야 정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인 것을. 猶有天心也好還(유유천심야호환)

▲ 사례간요 서문
그 후 1860년경 그는 자신만의 책인 『사례간요』를 집필한다. 내용은 『상제의집록』에서 다룬 상례와 제례를 포함하여 관례와 혼례 등 관·혼·상·제로 확대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가례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에필로그
현재 신상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명 진량공단이 점점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관계로 물류에도 편리함이 있어 많은 기업이 진량공단에 입주하고 있다. 그래서 진량의 중심 마을인 신상리에는 고층아파트와 상가 등이 들어서서 완전히 도시화가 되었다. 반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보니 신상리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개발이 곧 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지만, 그래도 토산지를 거닐면서 그 옛날 배극소 선생의 남긴 시 한 편을 읽고 신상리의 정체성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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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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