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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이 장관을 이루는 황제지가 있는 황제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진량읍 편(23) - 황제리
기사입력 2026-07-27 오전 9:52:21

▲ 진량읍 황제리 전경
◆ 프롤로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설도 시대가 바뀌면 쓰임새가 달라진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는 농업 환경이 변하면서 본래의 역할을 잃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공간을 주민들이 함께 걷고 쉬는 문화공간으로 되살린다면 그것 역시 전통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진량읍 황제리의 황제지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 황제리 지명지도
◆ 역사와 유래
황제리는 원래 압독국 마진량현 가야지리에 속한 노적촌이었다. 마진량현은 경덕왕 때 여량현으로 바뀌고, 고려 초 부곡으로 강등된 뒤 1018년 경주부에 속하였다. 1653년 구사부곡이 자인현으로 편입되면서 자인현 하북면 노적리가 되었다. 이 노적리 안에는 노적리 원 마을과 당곡, 신기, 황제 등 4개의 촌락이 있었다. 18세기 행정구역 명칭 개편 때 황제지 북쪽에 작은 각단으로 있던 황제촌이 황제리가 되었다. 행정구역은 자인현 하북면 북칠동 황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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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리 지적도(1912)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바뀌면서 중북면 황제동이 되었다. 1914년 부군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량면에 편입되어 진량면 황제동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진량면 황제동이라 하다가 1988년 황제리, 1997년 진량읍 황제리가 되었다.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 노적리 터
▲ 노적리·노적골·노적곡리[폐촌]
노적리(露積里)는 18세기까지 현재의 당곡리와 황제리를 아우르는 마을이었다. 19세기 중엽 노적리는 신기리, 노적리, 황제리로 분리되었다. 신기리는 현재 당곡리 남쪽 새태라는 마을이었고, 노적리는 당곡 동북쪽 노적골에 있었다. 그러다가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서쪽 당골로 이주하면서 마을은 폐촌되었다.
전설에는 부자가 곡식을 산처럼 쌓아 두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세곡을 임시로 쌓아 두던 곳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대원, 속초, 안촌 등지에서 수확한 곡식을 가야지리 강을 통해서 가져가기 전에 이곳 노적리에 쌓아두었다.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살던 김해김씨 김은국이 들어와 살면서 김해김씨들이 살고 있었다. 마을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곳은 『호구총수(1789)』이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경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마을이 폐촌되면서 주민들은 당곡과 황제리로 이거하였다. 1911년 1가구가 살았다. 현재 진성초등학교가 있다.

▲ 황제1리
▲ 황제내리·황제리·황제1리
노적리 동북쪽 황제가 있는데, 이 황제 북쪽에 있는 마을이 황제리(荒堤里)다. 『호구총수』에는 등재되지 않았다가, 『자인현지(1832)』에 등재되어 있다. 황제 안쪽에 있다고 하여 황제내리라고도 하였다. '황(荒)'이 황폐하다는 의미를 지녀 마을 이름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여겨 지금은 봉황의 뜻을 지니는 황제(凰堤)라 표기한다. 노적리에 살던 김해김씨, 대원리에 살던 밀양박씨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김씨와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 1911년 당시 14가구 살았다.

▲ 황제2리
▲ 황제2리·창신황제타운
창신황제타운은 1996년 지었다. 총 17층∼20층의 7개 동, 1,112세대이다. 1990년도부터 시작된 진량공단과 경산제3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신상리와 대원리 등의 마을이 없어지면서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후 안촌리, 광석리, 신제리 주민들도 고향마을과 가까운 이 아파트에 이주하여 살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는 가구도 많다. 특히, 8·90년대 분양권만 당첨되면 차익을 보던 시기에 도시가 아닌 농촌 지역에 대단지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였다는 점에서 농촌형 아파트의 선구적 사례에 해당한다.

▲ 황제리 지명 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산골재, 논들

▲ 선산만딩이
황제리는 진량 토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토산이, 동쪽으로 대원리, 서쪽으로 당곡리, 남쪽으로 안촌리가 있다. 대부분의 들판은 당곡과 안촌에 있고 황제리는 황제지 남쪽에 약간의 들판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산은 황제 북쪽 수목이 울창하여 선선했다는 선산만딩이, 황제 동남쪽 황제타운이 있는 개골만딩이, 황제 서남쪽 긴등성이인 진등 정도가 있다. 개골만딩이는 1996년 황제타운이 들어서면서 거의 깎여 버렸다.

▲ 서찻골
골짜기로는 진등 서남쪽 황제지 서쪽에 있는 서찻골, 서찻골 서남쪽 지형이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아서 노적골, 황제 서쪽 안에 있는 안통골, 황제 동남쪽 개골, 개골 서남쪽 어귀는 좁고 안은 넓게 벌어진 희시미, 황제지 남쪽 돌부처가 있었다는 부챗골 등이 있었다.

▲ 진배미
논은 부챗골 남쪽 논배미가 길었다는 진배미, 진배미 동남쪽 지형이 쐐기를 닮았다는 쌔기뱀, 쌔기뱀 동북쪽 황제 아래에 있다고 하여 아릿골논 등이 있었다.

▲ 녹수남뱅이
또 황제 동북쪽 세 아름가량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황제리 주민들이 음력 정월 보름날 당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서북쪽에 있는 숲은 노간주나무가 많아서 녹수남뱅이라 하였다.

▲ 진성초등학교 전경
▲ 진성초등학교
진성초등학교는 1962년 진량국민학교 진성분교로 개교하였다. 1960년대 급격한 학령 인구 증가로 경상북도 대부분의 학교가 2부제 수업을 하였고, 상당수 학교는 3부제 수업을 할 정도였다. 이에 당곡, 안촌, 대원, 황제 등 옛 구사부곡 마을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황제리에 학교를 설립했다. 진성(眞城)이라는 교명은 마을 서남쪽 길다란 등성이가 마치 성처럼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를 진등이라 하였다. 그래서 진등에서 ‘참 진’을 따고, 등성이는 ‘성(城)’으로 바꾸어서 진성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 김해김씨와 달성배씨 재실
이러한 마을에 진량공단 조성과 도로 개설 등 개발로 인하여 기존하던 삶의 터전과 조상 분묘 등이 수용되면서 조상님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 2개가 있다.

▲ 황지재
▲ 김해김씨 경파 안경공 황제문중의 황지재(凰池齋)
김해김씨 안경공파는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 1437∼1509)을 파조로 하고 있다. 김영정의 넷째아들 김세준(金世準)은 1501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07년 정란공신(靖亂功臣)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 지평, 해주 목사,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특히, 1520년 종성부사(鐘城府使, 함경도) 시절에는 무지개가 해를 겹쳐 싼 기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나자 중종에게 일변도(日變圖)를 그려 보내기도 하였다.
이 김세준의 증손자 김은국(金殷國)이 충주에서 살다가 노적리(현 황제리)로 들어와 살면서 김해김씨 자인 황제리 입향조가 되었다. 동생 김언국(金彦國)은 안촌에 살았다. 후손들은 진량공단과 황제타운이 조성되면서 땅이 수용되자 현 위치에다 황지재를 지어 조상을 추향하고 있다. 3칸의 솟을대문, 정면5칸 측면 2칸의 재사,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에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재호는 황지재(凰池齋), 문호는 돈화문(敦花門)이다.

▲ 후인재
▲ 달성배씨 병판공파 후인문중의 후인재(厚仁齋)
달성배씨 병판공파는 달성군 배운룡의 11세손 배경덕(裵敬德, 1376~1464)을 파조로 하고 있다. 배경덕의 자는 군범(君範), 호는 극재(克齋)로 세종 때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후인재는 24세 배후인을 추향조로 하는 재실이다. 대구에 살던 배병기(裵炳基)가 하양 두인동으로 이거하면서 세계가 형성되었다. 1996년 진량 자인 간 69번 도로가 개통되면서 황제리에 있던 문중 땅이 편입되면서 그곳에 있던 묘지를 용성과 남산 등지로 이장하고, 2005년 황제리에 후인재를 건립하여 조상을 추향하고 있다. 후인재는 30평의 재사와 부속건물 1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멘트 골조의 한옥으로 건축되었다. 대문은 삼칸의 솟을문이고, 문호는 경안문(敬安門)이다.

▲ 서차지
◆ 사계절 볼만한 경치로 변신한 황제지
황제리에는 조선시대까지 황제지, 서차지, 안통골못 등 크고 작은 저수지가 3개 있었다. 황제지는 날이 조금만 가물어도 못 물이 말라버려서 ‘가물 황’을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황제(荒堤)라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가 오래되었다. 당시 크기는 관개 9결이었다. 이후 『여지도서』에서는 둘레가 2,040척, 수심이 8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2022년 비상방수문 작업을 하였다. 서차지는 서찻골에 있는 저수지라서 서차골못이라고도 불렀다. 또 안통골에 있는 저수지는 안통골못이라 하였다. 이 두 저수지는 자인현읍지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 황제지
이중 대표적인 저수지는 단연 황제지(荒堤池)다. 1996년 이 저수지 동쪽에 창신황제타운이 들어서면서 아파트 입주민들의 근린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봄이 되면 저수지 주변 산책로를 따라 심어 놓은 벚나무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주변 복숭아밭에는 붉은 복사꽃이 만발하여 별유천지비인간의 세계가 펼쳐진다. 또 여름이면 붉은 연꽃이 저수지를 가득 메워 푸른색의 연잎과 붉은색의 연꽃이 조화를 이루어 장관을 이룬다. 가을이면 조경수로 많이 심는 남천이 빨간 열매를 뽐내고, 콩다닥냉이는 가을바람에 산들거리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겨울이면 잎을 떨군 나무와 잔잔한 수면이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어 또 다른 정취를 선사한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저수지의 역할만 했던 이 황제지가 이제 아름다운 풍광을 제공하여 주민들의 정서 안정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에필로그
과거 논에 물을 대던 저수지가 주민들의 정서 함양 공간으로 탈바꿈한 사례가 비단 황제지뿐만 아니다. 계양동의 남매지, 사동의 마관지, 부적리의 마위지, 신상리의 토산지, 자인 서부리의 삼정지, 남산 반곡의 반곡지 등 여러 곳이 있다. 경산시 곡곡마다 있는 저수지는 모두 다 각각의 깊은 사연을 담고 있다. 이 사연을 현대화하여 주민들과 호흡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전통 계승이고, 문화 발전이다. 효용성이 떨어졌다고 무조건 매립하여 공장을 짓거나 아파트를 지으면 경산시 조상님들의 삶의 역사를 묻어버리는 것과 같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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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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