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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고택과 종갓집 레시피가 전하는 곡란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용성면 편(3)

기사입력 2023-05-30 오전 9:04:25

미국의 사회학자 에드워드 쉴즈(Edward Albert Shils)전통이란 책에서 한 도시의 명성은 낡은 건물들을 가진 데 달려 있으며, 옛것에 대한 존경은 과거의 위대한 과거성을 전통 인식으로 바꾸어 놓고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과거에서 이어오는 것 중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변하는 것은 전통이 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 된다고 하였다. 또 변하지 않는 것 중 돌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유물이며, 이것이 전통이 되려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 계승이란 과거의 것을 원형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향유하면서 전승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과거의 것을 복원하고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새 전통을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을 용성면 곡란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용성면 곡란리 전경 

 

▲ 용성면 곡란리 행정지도 

 

 

역사와 유래

 

곡란리(谷蘭里)는 조선 시대 자인현 상동면 동칠동 곡란리였다. 1895년 자인현이 자인군으로 되면서 자인군 상동면 곡란동이 되었다. 그 후 마을의 규모가 커서 18961911년 사이 산대동(山垈洞), 수동동(水東洞), 남역동(南域洞), 북역동(北域洞), 두곡동(頭谷洞) 다섯 마을로 행정 구역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5개 마을은 다시 자인군 상동면 곡란동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자인현이 해체되고 용성면이 새로 생기면서 이 지역은 경산군 용성면에 속했다. 이 행정 구역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다가 1988년 동리 명칭 변경 때 곡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곡란리 수동 촌락

 

▲ 곡란리 남역 촌락
 

▲ 곡란리 북역 촌락 

 

▲ 곡란리 두곡 촌락 
 

▲ 곡란리 산대 촌락 
 

 

곡란은 골 안에 있다고 하여 골안, 고란이라 부르다가 한자음 곡란으로 굳어졌다. 또는 골짜기 안에 희귀한 난초가 자생하여 명명되었다고도 한다. 남역은 곡란의 남쪽에 있어서 명명되었는데, 현재 용산서원과 경로당이 있는 곳이다. 북역은 곡란 북쪽 용산 아래에 있는 촌락으로 옛날 용강서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산대는 곡란 동쪽 산기슭에 터를 잡았다 하여 명명되었는데, 200여 년 전 영천 최씨들이 살았다고 한다. 수동은 수리라고도 하는데 곡란의 가운데 촌락으로 영천 최씨 집성촌이다. 냇물의 동쪽에 있어서 명명되었다. 난포고택이 있는 주변 촌락이다. 두곡은 청도군 소천 쪽에서 오면 제일 먼저 있는 촌락으로 원래 꼽도리라 하였다가 한자로 첫머리에 있다 하여 두곡으로 명명되었다. 이외에도 구전으로 용산리도 과거 고란7이라 불렀다고 한다.

 

▲ 곡란리 지명 지도 
 

 

삶의 터전과 흔적

 

곡란리는 마을 동쪽 산대 앞에 갓두(갓디)라 부르는 산과 서쪽 용산성이 있는 용산 사이, 그리고 남쪽 회곡지(1786년 이전 축조)에서 내려온 물이 곡란천을 따라 북으로 흐르는 주변에 길게 자리하고 있다. 골이 깊다 보니 고개와 골짜기, 산등성이가 많다. 산대 앞 말림갓 뒤의 갓두산, 진등 서쪽 두곡 앞 돈대미, 서쪽 용산 등의 산이 있고, 청도군 소천리 쪽으로 여러 산굽이를 돌아서 가는 고개라 하여 꼽도리재, 옛날 비단장수가 비단을 모두 털렸다고 하여 붙여진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로 넘어가는 고개 비단재가 있다. 옛날에는 꼽도리재로 가는 길목에 꼽도리주막도 있었다. 이외에도 곡란 동쪽 산대 앞 배남골, 배남골 남쪽 등잔 모양의 등잔골, 회곡지 서남쪽 선달등, 회곡지 뒤쪽 우붕골(현재 석재 채취장으로 훼손됨), 우붕골 서쪽 고랑골, 우붕골 동쪽 옛날 여승이 살았다는 싱골(승골), 싱골 북쪽에 길이 나 있는 등성이라 하여 질등, 질등 북쪽 영험하여 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다는 불썬방우, 불썬방우 북쪽 수동 난포고택 뒤쪽 큰 박처럼 생긴 산등성이라 하여 한박등, 마을 입구 진사래들 북쪽 누에머리처럼 생긴 골짜기라 하여 잠두곡(잔당골) 등 많은 골짜기와 등성이에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진 상태다. 그리고 회곡지 뒤쪽은 돌이 많아 석산이라 불렀는데, 이름이 정보를 노출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약 20여 년 전부터 골재 회사가 들어와 우붕골 전체를 마구 파헤쳐 산과 골짜기, 숲이 없어져 허옇게 맨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 갑두골 

 

▲ 갓두(산)

 

▲ 새청(숲)

 

▲ 한박등 

 

▲ 갓두, 등잔골, 부엉더미 

 

▲ 고랑골, 선달등, 석산

 

▲ 우붕골 

 

▲ 꼽도리재
 

 

옛날부터 주 수입원이 농사이다 보니 들판, , , 저수지들도 많았다. 들판은 강낭이 부리의 물을 대는 강낭이부릿들, 두곡 남쪽의 기시미와 꼽도리, 북역 북쪽의 나븐들, 북역 동쪽 사량지 아래 사량골과 진사래, 새골못 밑의 새골못밑, 수동 앞의 수동들 등이 있고, 논은 진사래에 말을 탈 때 딛고 타는 돌이 있었다 하여 마찻돌배기, 남역 남쪽의 번답 등이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잊혀졌다. ()는 사량골 밑에 모양이 강냉이를 닮아 강낭이부리, 숲부리에 있던 개사릿부리, 기시미에 있던 기시미부리, 연자방앗간이 있던 돌방아실부리, 강낭이부리 서쪽의 숲부리, 수동 앞의 장사랫보(장삿보), 용산동 잿골배기 밑 회곡지 아래 잿골배기부리, 남역 앞 주막이 있던 주막부리, 주막부리 북쪽 곡란숲 근처 숲이 울창하고 놀기가 좋았다는 광대정부리 등이 있었고, 저수지는 갓디에 있어 관후지(갓디못, 갑두지), 꼽도리에 있어 회곡지(꼽도리못), 새골에 있어 새골못(새골지), 버드나무가 있어 유천지(버들못) 등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흔히 곡란숲이라 부르는 마을 입구 곡란천에 이팝나무, 왕버들,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30여 그루가 늘어 서 있다. 이중 느티나무 외 414본이 경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곡란숲은 풍수상 곡란리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었다.

 

▲ 곡란숲

 

▲ 회곡지 

 

▲ 관후지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3,000여 년 전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곡란 들판과 촌락 여기저기에는 청동기 시대의 돌무덤인 지석묘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농경지 정리를 하면서 이 돌들은 모두 땅에 묻혀 버리고 수동이라 부르는 난포고택 안에 현재 하나만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마을 앞 용산 중턱에 용산성이 축조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이곳에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시대 1320년경 밀양 손씨가 마을에 들어왔고, 조선 개국 후에는 임진왜란 전 흥해(곡강) 최씨 최순동(崔順潼)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그는 지금의 청도인 밀성군 풍각에 살다가 자인현 구화리(용전)에 들어와 살았다. 그러다가 다시 이곳 곡란으로 이거하여 사량지라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일명 진사들이라는 들판도 개척하였다. 이후 영천에 살던 영천 최씨들이 자인의 울곡(현 울옥), 현내(현 진량읍 현내리), 신도 등지로 이거하였는데, 그중 최철견(崔鐵堅)1546년경 최순동의 딸과 혼인하면서 곡란으로 들어와 살면서 영천 최씨 곡란 문중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곡란 마을에는 흥해 최씨 문중은 남역과 북역에, 영천 최씨 문중은 수동과 산대에 살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흥해 최씨 문중은 오산리 동쪽에 있던 모정리라는 촌락이 없어지면서 새로 조성된 곡신으로 이거하고, 곡란에는 영천 최씨만 남게 되어 이 마을이 영천 최씨 판서공파 집성촌이 되었다.

 

▲ 난포고택 안 고인돌
 

 

한편, 188811월 청도에 사는 17세의 서씨라는 젊은이가 자인장에 와서 쌀을 사서 돌아가는 도중 곡란리 꼽두리재를 넘을 때 짐이 가벼워진 것 같아 살펴보니 쌀자루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청년은 마을 앞에 돌아와 길가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쌀자루를 보지 못하였냐고 묻자 노인은 쌀자루는 어떻게 생겼으며, 몇 되의 쌀이 들어 있는가?”라 물었다. 청년이 다섯 되라고 답하자 그 노인은 현감의 교화가 사람들의 피부에 스며들어 도적이 없고, 흉년에도 굶주리지 않으니 흘린 물건을 보관하는 사람은 있지만 주워가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면서 쌀자루를 돌려주었다. 청년이 노인의 이름을 묻자 그냥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다.”라고만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한다. 당시 자인현감 오횡묵은 이 선행을 듣고 한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인심 넉넉한 마을에 영천 최씨 삶의 흔적인 난포고택과 종갓집 음식 레시피가 전하고 있어 전통 계승의 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 난포고택 전경 

 

▲ 난포고택 사랑채와 누마루 

 

▲ 난포고택 안채 

 

▲ 난포고택 사당 

 

 

영천 최씨 문중의 오백 년 난포고택

 

곡란에 처음 들어온 최철견은 수동이란 촌락에 살면서 1546년 조선 초기 가옥을 기본으로 하고, 경상도 주거 방식을 반영한 집을 짓게 된다. 이 집이 바로 현재 난포고택이라 부르는 가옥의 원형이다. 건축 당시에도 현재의 구조였는지를 알 수 없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고택은 17세기를 전후한 가옥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가옥 부재가 주로 나무와 흙이다 보니 기껏해야 2백 년을 유지하는 데 비하면 난포고택은 오백 년 가까이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승되어 왔다. 이는 집 자체의 구조적 견고함도 있겠지만,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의 전통 계승에 대한 애착과 정성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풍수지리적 특성

사실 풍수는 중국에서 전해와 조선에서 꽃을 피운 삶의 한 방식이다. 주로 집터와 묫자리를 정하는 방식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사고 개념이다. 그래서 집터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터전이며, 묫자리는 죽은 사람의 터전이다. 중국이나 한국에서의 공통적인 명당은 배산임수, 즉 북으로 산을 등지고 남으로 물을 바라보며 좌우로 산이 보호하는 형국을 최고의 길지로 쳤다. 그런데 난포고택이 위치한 마을과 방향은 이러한 기초적인 명당 이론에는 맞지 않다. 그런데도 난포고택이 위치한 곳을 명당이라고 한다. 일제시대 조선의 풍수를 조사연구한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라는 일본인은 1931조선의 풍수전 조선의 길지라는 항목에서 한국의 길지 36군데를 선정하고 22번째로 곡란 최한구의 집을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이 집이 부용화(芙蓉花) 형상이어서 15대에 걸쳐 자손이 번창한다고 하였다. 특히, 그가 기록한 자료에는 이곳이 길지로 유명하여 대한제국 때 정부에서 특사를 파견하여 시찰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村山智順, 朝鮮風水, 841). 부용화는 목부용(木芙蓉)으로 부르는 무궁화꽃의 일종인데, 난포고택 주변 사면의 산이 사신사(四神砂) 역할을 하여 부용화의 꽃잎에 해당하고, 용산에서 내려온 지맥이 꽃대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것 같다.

 

이외에도 난포고택 자리는 쌀을 이는 조리 형상이라고도 한다. 고택 마당을 향해 곧게 뻗어 내려온 용산 줄기가 조리 자루, 집터는 조리 바닥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조리는 쌀을 한 번에 담아 올리기도 하지만 엎으면 다 쏟아지게 되므로 한 세대에서는 재산을 모으고, 또 다음 세대에서는 다 써버리는 과정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러한 예가 최기일(최철견 12대손, 1841년생) 대에서는 천석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살림이 늘어났다. 그런데 어느 해 천 석에서 한 섬이 모자라는 999석을 하자 천석꾼 소리를 듣고 싶어 한 섬을 인위적으로 채웠는데, 그 뒤부터 재산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최한구(14대손, 1948년졸) 때인 1942년 일본인 채권자가 사랑채를 뜯어가는 비운을 당하였다고 한다(이상 백영흠, 난포고택에 대한 복원적 연구참고). 이처럼 난포고택은 조선 시대에 유행한 풍수학을 바탕으로 하여 길지에 지은 고택이다.

 

- 사람과 집, 전통 계승과 전승 과정

이렇게 풍수학적으로 길지에 자리 잡은 난포고택은 지난 500여 년 동안 크게 다섯 번에 걸쳐 큰 변화를 겪으면서 계승과 전승을 반복해 왔다. 이를 15기로 나눠 볼 수 있다. 1기는 창건기라 할 수 있는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약 백여 년 동안이다. 이 집은 난포 최철견이 1546년 처음 지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때는 최철견이 영천에 있다가 혼인하면서 곡란으로 들어온 시기이므로 들어오자마자 큰 규모의 집을 지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최철견이 곡란에 들어와 처음 집을 지은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집을 지으면 반드시 집의 이름인 당호를 지어 처마 밑에 걸어 놓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당시 당호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당호 명명 방식을 바탕으로 추정한다면 최철견의 호 난포가 곧 당호였을 것이다. 이 기간 난포고택에 거주한 사람은 청주목사 최철견, 청주교수 최심(崔?),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인수(崔仁壽), 포도대장 최준립(崔竣立, 15621640) 등이다. 최철견은 임진왜란 때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에 참여했다. 그의 의병 활동 이력은 자인현읍지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되어 있다. 한편, 전라도 도사와 광주목사를 역임한 동명이인 최철견(1548년생)이 있는데, 난포 최철견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손자 최인수도 의병으로 참가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등재되었고,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에는 정로위(定虜衛)라 하여 3등급에 등재되어 있다. 그의 증손자 최준립은 선조 때 참봉으로 무과에 합격하여 포도대장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최인수와 함께 선도와 단석(현 경주 북토리 일대), 아견진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록에는 부장(部將)으로 3등급에 올라 있다.

 

2기는 발전기라 할 수 있는데,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다. 현재 집의 형태는 조선 초기의 가옥 형태가 아니고 17세기 전후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살던 최계위가 기존의 집을 대규모로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구조가 현재 난포고택의 고형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는데 1809년 기와를 다시 이었고, 1816년 건물 전체를 중수하였지만, 집 전체의 기본적인 틀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완성형의 가옥 구조가 되었다. 복원 배치도를 참고하면 전체적으로 처음에는 일()자형이었는데, 사랑채를 기준으로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구분되어 있었고, 바깥마당에는 대문과 행랑채, 중사랑채, 고방채, 누마루 등이 있었다. 안마당에는 정침인 안채와 아래채, 방아실채가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2대에 걸쳐 충효로 정려를 받아 정려각이 건립되면서 공간이 확장되어 전체적으로 목()자형으로 바뀌었다. 이 정려각은 현재 훼철된 상태다. 이 기간 난포고택에 거주한 사람은 장사랑 최계위, 최종윤, 최수우, 최남익, 최경원, 최억, 조산대부 최승엽, 최기일, 최문석 등이다. 이들 중 최기일은 1883년 자인향교 도유사(현 전교)를 역임하였는데, 18892월 자인현감 오횡묵에게 2대에 걸쳐 충효로 정려를 받아서 그 기쁨을 시로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자인현감 오횡묵이 시를 써 주었는데 아래와 같다.

 

곡란의 최기일에게 주다

들으니 이미 여러 해 전에 군의 선조는

뛰어나고 아름다운 행실을 타고났다 하네.

공로가 태적에 올라서 집안을 이름나게 하고

은혜를 대함에 베풀어 자리를 빛나게 하였네.

정려가 문에 이르는데 충과 효가 아우르고

가업이 집에 이어짐에 자손이 전하였도다.

더욱이 지금 난초 골짜기 봄물이 흐르니

싹들은 뿌리가 기름져 성장하기 좋으리라.

 

*이 시의 원문은 자인총쇄록에 있고,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3기는 쇠퇴기라 할 수 있는데, 1900년대 초반 근대화로 인한 시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각종 사업을 펼치다가 가세가 기울어 결국 일제 말 건축물 일부까지 빼앗겨 주거지가 축소되고, 그러한 상태에서 1975년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다. 이 기간 난포고택은 전체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1975년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사진과 1991년 실측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바깥마당 대문이 있던 행랑채, 고방채, 중사랑채, 누마루가 딸린 사랑채 등은 완전히 헐려 논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안마당에 속한 정침과 아래채만 겨우 남고 담장을 허물어 출입구로 이용하였다. 이 기간 난포고택에 거주한 사람은 최한구, 최해근, 최연수 등이다. 특히, 최한구는 집안의 형 최한주(崔澣周)와 함께 1912년 용산 아래 북역 촌락에 있던 용강서당 용강재 안에 유신학교를 건립하여 음성군에 살던 이은영이라는 교사를 초빙하여 용산의 참나무숲에 산누에를 치는 작잠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 학교는 구습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가르치는 일종의 혁신학교였다. 이 학교가 몇 년 동안 운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폐교된 후 남은 건물을 난포고택 앞에 있던 논 오른쪽에 이건해 놓고 담장을 쌓았는데, 이것이 현재 재실로 사용하는 수오당(守吾堂)’이다. 수오당 현판은 영덕 창수면 인량리 출신의 영양 남씨 추호산인(秋湖散人) 남구락(南龜洛)이 썼다. 이외에도 최한구는 1927년 이 지역의 특산품 판매를 위주로 한 용성산업조합이 송림리에 설립될 때 감사로 참여하는 등 용성의 유지로 활동하였다.

 

▲ 수오당 전경 
 

▲ 수오당 현판 
 

 

4기는 복원기라 할 수 있는데, 1975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다. 이 기간 난포고택은 지방 정부와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현재 명칭인 난포고택이라 명명되어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안채 뒤에 사당을 지은 후 1988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었고, 1991년 난포고택의 실측 조사 및 복원 작업, 1996년 보수공사 착공, 2002년 보수 공사 완료의 과정을 거쳤다. 솟을대문은 제일 나중에 복원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다시 목()자형 구조가 되었는데, 바깥마당 영역에는 솟을대문과 좌우 각 1칸의 행랑칸, 모양의 누마루가 딸린 사랑채,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과 협문이 있다. 중문은 과거 안채로 들어가는 수오당 재실 옆 골목길 끝에 설치해 놓았다. 그래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안채와 수오당이 담장 하나로만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안마당 영역에는 안채와 아래채가 있고, 장독대 뒤로 돌아가면 일각문(一脚門)이라 하는 협문이 딸린 사당 영역이 있다. 이 기간 난포고택을 문화재로 등재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종손 최해근과 종친들이었고, 복원 작업은 최용근, 최연태를 비롯한 문중 종친들이 주도하였다. 특히, 종손 최연수는 1970년대에 모친 김술교(金述嬌)의 구술을 바탕으로 집안에서 전해오는 향토 음식, 행사 음식, 제사 음식, 세시 음식의 종류 및 토속주 제조법을 상세히 적어 놓았는데, 이 자료가 현재 전하고 있다.

 

▲ 1991년 난포고택 

 

▲ 1996년 난포고택 
 

 

5기는 재도약기라 할 수 있는데,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다. 난포고택은 재실 수오당을 제외하고 약 1,000여 평의 면적에 주차장과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재 최연수의 아들 최원규가 상주하면서 지난 오백 년을 넘어 앞으로의 오백 년을 기약하기 위하여 부용화의 명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 집이 아니라, 전통 계승 차원의 문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길가는 나그네까지도 소통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인문학,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적 요소를 가미하여 고택을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창조하려고 한다. 한 예로 미술을 전공한 친척이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손자의 조각상을 제작해 안채 기단에 설치해 놓기도 하고, 모 방송국에서는 고택 음악회도 개최하였다. 또 복원된 대문에는 문호, 누마루에는 누호와 이 집안의 충효를 칭찬한 자인현감의 한시를 주련으로 제작하여 건물에 혼을 불어넣을 계획도 하고 있다.

 

고택의 특징으로 본 삶의 방식

현재 복원된 고택은 자연석으로 허튼층쌓기를 한 흔히 죽담으로 부르는 기단, 우물마루 대청 바닥, 판목을 이용한 청방의 벽면 등 기본적인 구조는 조선 시대의 것을 그대로 잇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고택에서 보이지 않는 여막방, 안채의 지붕, 사당 등은 특이한 공간으로 난포고택만이 지니는 차별성이라 할 수 있다.

 

- 여막방에 깃든 육친에 대한 공경

사랑채에 있던 여막방(廬幕房)은 평소에는 병풍이나 제기 등을 넣어두다가 집에 상을 당하면 토감실(土坎室)로 이용하였다. 토감은 유가에서 유월장(踰月葬), 즉 달을 넘겨 장례를 치를 때 땅에 구덩이를 파고 관을 넣어 짚이나 풀로 덮어두었다가 일정한 날이 지나면 장지에 매장하는 장례 방식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유월장은 근대 이후에 사라졌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유가에서는 최근까지 시행되고 있다. 영천 최씨 난포공 문중에서도 1900년대 초반 최문석 장례 때까지 이 방식으로 치렀다고 한다. 사망한 지 3일 만에 부리나케 장례를 치러버리는 현재의 장례 절차에 비해 육친을 보내는 자식들의 공경심을 한 번쯤 되새길 만한 공간이다. 현재 복원이 안 된 상태다.

 

- 가적지붕에 나타난 구습 탈피의 사고방식

우리나라 전통 가옥 중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마감하는 형태는 팔작과 맞배 지붕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난포고택의 안채 지붕은 기본적으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양옆의 박공벽(지붕 양옆 삼각형으로 된 벽)에 내림마루로 가적지붕을 달아 공()자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기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새롭게 시도된 건축기법으로 조선 후기 지방 부호들이 일부 행하던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난포고택에 거주한 사람들이 기존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실생활의 편의를 위해 과감하게 기존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가치관도 엿볼 수 있다.

 

- 사당에 서려 있는 효 의식

또 하나의 특징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흔히 산 자는 집에 있고, 죽은 자는 사당에 모셔져 있다. 이 두 공간은 별도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종가에서는 주거지의 영역 안에 사당을 지어 산 자인 후손이 죽은 자인 조상을 추모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사대부 집안 종가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난포고택 또한 목자형의 집 구조 안에 죽은 자의 공간인 사당을 집의 제일 뒤쪽에 마련하여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니라 함께 한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영천 최씨 종갓집의 레시피

 

앞서 언급한 최기일(1841년생)의 현손(고손자)이자 최한구(1948년졸)의 손자 최연수(崔然洙, 1984년졸)1970년대에 모친 김술교(金述嬌)의 구술을 바탕으로 향토 음식 11, 행사 음식 4, 제사 음식 1, 세시 음식 7, 폐백 음식 1, 토속주 6종 등 제조법을 상세히 적어 놓았는데, 이 자료가 현재 전하고 있다. 이중 향토 음식인 국수와 전통주 중 약주 레시피만 소개한다.

 

- 향토 음식 국수 레시피

면발은 밀가루와 생콩가루를 체에 곱게 친 다음 계란 흰자를 넣어 반죽한다. 반죽은 오래 주물러서 얇고 고르게 민 다음 분가루를 조금씩 뿌리면서 말아 가늘게 썬다. 그후 끓는 물에 삶아 냉수에 두세 번 헹궈서 사리로 놓는다. 육수는 깻물에 햇병아리를 푹 고아 닭국을 만든 다음 준비한 국수를 말고 그 위에 교채를 얹어 낸다. 교채에는 정구지를 삶아 무친 것, 계란 황색 지단, 닭고기, 무장아찌, 애호박채 썰어 볶은 것, 김 구워 기름장에 무친 것 등이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석이 썬 것과 실고추로 고명을 한다. 그릇은 화그릇(질그릇)을 쓰며 상을 낼 때 곁그릇을 함께 내어 식성에 맞게 덜어서 먹을 수 있도록 한다.

 

- 전통주 제조 레시피

전통주로는 약주, 국화주, 송순주, 송실주, 인삼주 등이 있고, 과실주로 매실주, 다래머루주, 딸기주, 사과주, 포도주, 복숭아주, 오얏술, 오미자술, 밀감주, 모과주 등의 제조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중 약주 제조 방법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멥쌀로 백설기를 쪄서 누룩가루를 넣어 골고루 버무린 다음, 항아리에 빚어 넣고 봉하여 34일을 둔다. 밑술이 맑게 일면 찹쌀 고두밥을 지어 그릇에 담고 끓는 물을 끼얹어 솔잎과 함께 밑술에 섞은 다음 용수를 박아 삼칠일만에 뜬다. 술은 괴자마자 떠내야 맑은 술이 많이 떠지며 술을 뜰 때는 병을 더운물에 씻은 후 술을 조금 부어 흔들어 행군 다음 담아 냉암소에 보관한다.

 

 

현 상황

 

현재 곡란리는 주민등록상 가구 수 140, 주민 수 272명이다. 수동·남역·북역·산대에는 영천 최씨를 비롯한 타 성씨들이 혼재하며, 두곡에는 손씨, 김씨, 배씨, 정씨 등이 살고 있다. 주 수입원은 복숭아와 포도이며, 벼농사도 약간 짓고 있다. 마을 입구 오래된 당수나무에서 정월 보름날 할아버지라 하여 쇠고깃국을 끓여 동제를 지내고, 마을 남쪽 바위에서는 할머니라 하여 미역국을 끓여 제를 지낸다. 또한, 매년 3월 주민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고, 5월에는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그리고 수동에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0호인 난포고택이 있고, 남역에는 경산시농업기술센터가 선정한 경산시 농가맛집 1호 난향원이 있다. 이처럼 난향 가득한 곡란리는 전통을 유물의 차원에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계승하는 용성면의 한 마을이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곡란리

 

난초 내음 가득한 골짜기

난포공 옛집 선명한데

새벽녘 우붕골 돌 깨는 소리에

집 잃은 산새의 하소연이

실 끊긴 연처럼 바람 타고 날아와

한박등 진사래 들판까지 떨린다.

 

회곡지 흘러내린 살 에인 눈물은

잿골배기부리 돌방아실부리 광대정부리

두루두루 휘감고도 넘쳐흘러

장날 주정꾼처럼 온종일 구역질하고

꼽두리재 타고 오른 애끊는 한숨은

기시미 번답 마찻돌배기 나븐들

너풀너풀 살뜨리도 날아올라

초상날 만장처럼 온 마을을 덮는데

갓두에 떠오른 달은 밝기만 하다.

 

떠난 이들은 떠난 이들이고

갑두골 관후지의 물길은 아직 맑아

주막부리에 앉아 불썬방우 바라보며

기울이는 탁배기 한 잔으로도

쌀자루에 묻은 노인 인심 다 담아내니

고란이란 이름은 아득해도

두곡 수동 남역 북역 산대

사람 사는 마을이 아직 살아 있어

오늘도 새청의 뻐꾸기는

선달등 잔당골 배남골 골골이 휘돌면서

눈물 한숨 하소연

난향으로 다 쓸어 담아

숲부리 세상 너머로 보낸다.

 

글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사진 : 양재완 사진작가

감수 김영철(곡란리 이장최주근(곡란리 주민최원규(난포고택 종손)

 

<사진 자료>

 

▲ 곡란리 마을회관 

 

▲ 곡란숲 


 

▲ 난향원 
 

▲ 용산서원 

 

▲ 남역(촌락)

 

▲ 남역 들

 

▲ 번답 

 

▲ 장사랫보 

 

▲ 잿골배기부리(보)

 

▲ 주막부리(보)

 

▲ 회곡지(곱들지)

 

▲ 난포고택 

 

▲ 난포고택 사당 
 

▲ 수오당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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