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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읍성을 찾아서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경산현 읍치 이야기(1)
기사입력 2023-09-27 오전 8:23:06

▲ 100년 전과 현재 경산의 전경
* 위 사진 : 성암산 아래 현재 현충공원 근처에서 찍은 1920년대 후반 경산면 일대이다. 사진 중앙 검은 세로선 바로 왼쪽 흰 건물은 경산군농회 창고(1927년 준공)이고, 그 왼쪽이 경산역이다. 그 아래로 원래 사정동 촌락이 보이고, 역 주변으로 새로 조성된 정거동(停車洞)이 보인다. 사진 중앙 가로로 경산 남천이 가로지르고 있고, 중방동 가운데로 신작로가 생겨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옛 군청이 있던 자리는 숲(금포공원)이다. 사진 중앙 오른쪽 산 밑이 당시 읍내였던 삼북동과 삼남동이다.
* 아래 사진 : 2023년 위와 같은 장소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경산 읍내 모습.
◆ 경산의 고대 성(城)과 경산읍성
경산현에는 과거 4개의 성이 있었다. 고대 성 3개와 조선 시대 성 1개였다. 고대 성은 경산현 서북쪽 9리에 있었던 고포성(古浦城), 남쪽 7리 금성산에 있었던 금성(金城), 북쪽 6리에 있었던 궁곡성(弓谷城)이다. 이 세 개의 성은 삼한 시대부터 있었는데, 신라 지마왕 때 합해져서 압량군에 속했다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 경덕왕 때 장산군(현 경산)에 속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때 모두 폐철되었다고 전한다(『동국여지승람(1530)』, 『동국문헌비고(177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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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남여도(출처-교토대학)

▲ 과거 성이 있던 고산, 남천 산전, 임당, 삼남, 삼북 일대
고포성은 『대동지지(1864)』에 현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 외 자료는 모두 현의 서쪽이라 한다. 그런데, 성의 이름과 지리적 특성을 고려할 때 경산 북서쪽 금호강 근처 봉수대가 있던 성산(城山·고산)으로 추정된다. 고산에 성동(城洞, 현 수성구 성동)이 있고, 이 지역에 토성 및 삼한 시대 고분이 발견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포국(古浦國)은 삼한 시대 마한에 딸려 있던 54개 소국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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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조영동 일대(일본 학습원대학)
*1930년대 현 영남대학교 박물관 길 건너 조영동 일대를 찍은 사진이다. 왼쪽 위에 지금은 매립된 조영못이 보이고, 그 아래로 조영동 민가와 사당이 보인다. 사당이 1939년 지어졌으니 이 사진도 그즈음 찍은 것으로 보인다.
궁곡성은 현재 우곡성(于谷城)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자 궁(弓)을 초서 형태인 ‘亐’로 썼는데, 이를 ‘우(于)’의 변형자로 오독하여 생긴 결과이다. 그리고 이 성은 여러 자료에 현의 서쪽에 있었다고 했는데, 임당동의 옛 이름이 궁당동(弓堂洞)이었고, 또 임당동과 조영동 일대에 고분이 발견되는 점 등으로 보아 현의 북쪽인 임당동에 궁곡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한자 울·우(亐), 우(于), 궁(弓)은 잘 구분해야 함).
금성은 현재 남천면 산전리 서쪽 금성산 정상에 있었다. 성의 서북쪽 일부만 돌로 쌓고 나머지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다. 이곳에 삼한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금성산은 일명 ‘시리봉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조선지지자료』).
경산읍성은 고려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나 사실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후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전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142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동국여지승람(1530)』 ‘경산현 편’에 읍성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객관(객사) 동쪽에 망북루가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나온 자료는 『여지도서(1765)』인데, 여기서 경산읍성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후 곧이어 나온 『동국문헌비고(1770)』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1587년(선조 20) 왜군이 침략할 징조가 있어 동래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주요 도로 근방의 주와 군에 성과 해자를 축조하라고 선조가 명을 내린 적이 있다(『선조실록』). 그에 따라 1590년(선조 23) 청도읍성이 2년여 기간에 축조되었는데, 경산읍성도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동국문헌비고(1770) 참고』).
◆ 읍성의 규모

▲ 경산읍성 외곽 경계도
*1911년 작성된 지적도를 바탕으로 그린 경산읍성 외곽 경계도(붉은 선)이다. 각 모서리 튀어나온 부분은 망루가 있던 흔적이고, 성벽 사이 튀어나온 부분은 치성이 있던 흔적이다. 선이 끊어진 부분은 문과 수구가 있던 곳이다. 노란색은 옛길이다.
경산읍성 관련 자료는 『여지도서(1765)』를 필두로 『동국문헌비고(1770)』, 몇 차례 발간된 『경산현읍지』, 『대동지지(1864년)』, 토지조사사업(1911) 지적도, 일본 자료 『文祿慶長の役 別編(1936)』 등이다. 이들 자료는 비교적 읍성이 어느 정도 보존된 당시에 작성된 것이어서 신뢰성을 준다. 또 조선 시대 발간된 몇몇 지도에서 경산읍성은 정사각형이었음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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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지도의 경산읍성(자료출처-서울대규장각)
『여지도서』를 비롯한 문서 자료는 모두 읍성의 규모를 주(周) 1,200척, 고(高) 10척, 여첩은 없고, 동·서·남·북문이 있고, 서문에 누각이 있다고 하였다. 자료에 기록된 둘레 1,200척은 지적도를 바탕으로 실측한 결과 네 변의 합이 아니고 한 변의 길이였다. 그래서 실제 길이는 동서남북 각 약 314m(약 1,200척), 전체 둘레 1.3km, 면적 약 30,000평이었다(포백척이 아님).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다. 김정호는 경산읍성을 실측한 후 4,800척이라 하였다. 높이는 현재 실측 불가능한데,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약 3m 정도였다고 한다. 동시대에 축조된 청도읍성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 성의 재료는 석성이라 하였는데, 화강암과 기타 돌을 손으로 깨어(할석) 결에 맞춰 쌓아 올렸다. 그 흔적이 지금도 몇 군데 남아 있다.
◆ 읍성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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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남여도에 그려진 경산읍성의 사대문과 문루(출처-교토대학)
* 위 고지도는 18세기 정조와 순조 연간에 그려진 경산읍성이다. 현재 국내에는 없고 일본 교토대학에 있다. 사대문과 누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경산읍성에는 동·서·남·북 사대문과 암문(暗門)이 있었다. 사대문에는 문호(門號)가 있었고, 문 위에는 누각과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문호와 누호는 서문 한 곳이다. 몇몇 경산현 고지도에는 동·서·남문만 있고 북문이 없는 반면, 『산남여도』에는 북문까지 그려져 있다. 문서와 그림 자료를 교차·비교해 볼 때 처음부터 북문이 있었는데, 몇몇 자료에서 누락한 것으로 보인다.

▲ 경산읍성 사대문이 있던 곳
남문은 청도로 가는 관문으로 삼남동 110번지와 28번지 사이에 있었는데, 문호는 전하지 않는다. 서문은 대구로 가는 관문으로 삼남동 67번지와 삼북동 173번지 사이에 있었는데, 문호는 용금문(湧金門), 누호는 진옥루(鎭玉樓)라 하였다. 이 진옥루는 초기 이름이고, 후에 옥산제일관(玉山第一關)으로 바꾼 듯하다. 1889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서문을 구경하고 ‘성문은 용금문 또는 옥산제일관이라 한다’라 하고, 진옥루라는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자인총쇄록』). 동문은 자인으로 가는 관문으로 삼남동 32번지에 있었는데, 문호는 전하지 않는다. 북문은 삼북동 231번지에 있는데, 이 또한 문호는 전하지 않는다.
또 성벽 사이사이 암문과 수구의 흔적도 발견된다. 암문은 평시 주민들이 드나들다가 유사시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좁은 문을 말한다. 지적도를 바탕으로 암문의 위치를 추정한 결과 동서남북 각 모서리 망루가 있던 곳에 암문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남쪽 성벽 치성 옆에 1개소, 서쪽 성벽 연당 서쪽에 1개소, 북쪽 성벽 읍내장 북쪽에 1개소, 동쪽 성벽 삼북동 지역에 1개소 등 모두 8개의 암문이 있었다. 물을 빼는 수구는 삼남동 연당에 2개소, 삼북동 사창웅딩이 부근 1개소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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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에 그려진 경산읍성의 옹성(출처-서울대규장각)
성벽에 볼록하게 튀어나와 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던 치성(雉城)도 그림 자료에는 없지만, 지적도에는 그 흔적이 나타난다. 이 치성은 동·서·남·북 성벽 사이에 각 1개소가 있었다. 또 성문 앞에 둥글게 쌓아 올렸던 옹성(甕城)의 흔적이 지적도에는 4개 문 모두에 나타나는데, 그림 자료에는 남문에만 옹성을 그려 놓았다. 고증이 필요하다. 특히, 남문 옹성이 있던 자리에는 옹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사당을 세운 흔적이 있다. 각 네 변의 모서리에도 망루[장대]를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다.
이외 성벽 위에 담장처럼 쌓은 성가퀴라는 여장(여첩)과 성 주변에 방어 목적의 물길을 판 해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 성벽의 축조 방식은 알 수 없지만, 조선 세종 때(1438) 각 읍에 내려준 『축성신도(築城新圖)』에 근거해서 쌓은 것으로 보이며, 같은 시기에 축조된 청도읍성과 유사하게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망북루(望北樓)는 성벽 모서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의 동쪽 청우동(현 계양동 경찰서 근처) 산에 있었다. 1786년 이전에 없어졌는데 기록으로만 전하다 보니 조선 후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자인총쇄록』 참고).
◆ 읍성 내 유적
다른 지역 읍성과 마찬가지로 경산읍성도 그 안에 각종 공청과 객사 등 주요 기관과 주거 공간이 집중되어 있었다. 공청과 객사는 따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유적지 및 주거 공간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 연못

▲ 연당과 사창웅딩이
*읍성 안에 있던 두 개의 연못과 물길이다(하늘색). 연당은 남쪽 남천의 물을 끌어왔고, 사창웅딩이는 동쪽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왔다.
연못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삼남동 서남쪽 연당(蓮塘)이라 부르는 곳(삼남동 74, 77번지)과 다른 하나는 삼북동 서북쪽 사창이 있던 곳에 흔히 ‘사창웅딩이’라 부르는 곳(삼북동 185번지)이다. 이 두 곳은 읍성 안에 있다 보니 경산읍민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연당은 1773년(영조 49) 경산현령 김병선(金炳先)이 축조하였다. 『경산군읍지』에 의하면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물길을 돌려 연을 심었다 하여 연당이라 했다고 한다. 김병선은 1889년 경상도 감사를 역임한 김명진(金明鎭)의 조부이다. 그리고 연못 북동쪽에 ‘군자정(君子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이 군자정을 ‘연정(蓮亭)’이라고도 하였다. 연당은 원래 700여 평에 이르렀고, 가운데로 길을 내어 다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북쪽 연못(77번지)이 매립되어 대지(현 미륵대도 경산선원)로 바뀌었고, 남쪽 연못과 군자정은 일제시대 경산의 유지이자 갑부였던 안병길(安炳吉)의 소유가 되었다(현재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통용되나 필자는 일제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함). 그 후 군자정은 훼철되고, 연당은 1970년대 말에 매립되어 채소밭, 공터로 남아 있다가 현재 ‘청년문화마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현대식 연못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이왕 복원하는 사업이라면 옛 이름과 정자도 함께 복원했으면 바람이다.
▲ 공사 중인 연당 터
‘사창웅딩이’는 150여 평이라 연못이라 부르기에 적절치 않아서 이름도 부여되지 않고 그냥 웅덩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사창웅딩이는 사창 옆에 있었는데, 이곳에 관한 정보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곳 또한 매립된 후 현재 건물이 들어서서 옛 사연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 읍내장과 서문장
*초록색으로 된 곳이 시장 터이다. 읍내장은 성안에 있었고, 서문 내장은 서문 안에, 서문 외장은 서상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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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시장에서 가마니 짜는 모습(출처-국사편찬위원회)
* 일제시대 읍성 서문에 있던 서문장에서 가마니를 짜는 경산면민의 모습이다. 당시 조선흥업주식회사가 사정동에 있었는데, 여기서 소위 은사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주면서 면민들에게 일본의 규격에 맞는 가마니를 짜게 했다.
경산현의 시장은 읍성 안 삼북동에 있던 내시(읍내장, 삼북동 222번지 일대)와 서문에 있던 외시(서문장, 삼남동 66∼67, 서상동 55번지 일대) 두 곳이었다. 읍내장은 5·10일에 장이 열렸고, 서문에 있던 시장은 서문 안과 서문 밖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서문 안은 5일, 서문 밖은 10일에 장이 열렸다. 읍내장은 1920년대까지 존속하다가 점차 서문장으로 상권이 넘어갔고, 일제시대에 폐쇄되었다. 그 후 서문에 있던 외시도 경산의 중심지가 중방동으로 이동하면서 1956년 중방동에 새 시장이 들어서서 점차 폐쇄되었다.
▲ 주거지
1895년 경산읍성 안에는 상북동, 하북동, 상남동, 하남동이 속해 있었다. 이 4개 마을은 1911년 일제가 전국의 마을을 통폐합할 때 상북동·하북동과 읍성 동문(자인가는 길)에 있던 동상리(동밖)를 합쳐 삼북동이 되었고, 상남동·하남동과 성곽 남문 아래에 있던 남성리(南城里)를 합쳐 삼남동이 되었다(현재 상남·하남 등을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하는데, 옛날에는 ‘상(上)’은 ‘동(東)’, ‘하(下)’는 ‘서(西)’와 통했다. 그래서 ‘상·하’는 각각 ‘동·서’로 구분하면 된다).

▲ 1911년 경산읍성 안의 마을
*1911년 성벽이 훼철된 후 읍성 안 주거지다. 170여 호가 있었는데, 이는 오횡묵이 1889년 200여 호가 살았다는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숫자이다. 파란색이 주거지고, 노란색은 길이다.
▲ 2023년 경산읍성 안의 마을
*2023년 드론으로 촬영한 삼남동과 삼북동 일대이다. 완전히 도시화가 이루어져 성벽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나 사업이 어려운 상태다.
정사당과 기타 공청 등은 상남동에, 연당과 대동고 등은 하남동에 있었다. 서민의 주거지는 하남동과 하북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 성벽 안을 따라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성벽을 허물면서 그 자리에 택지가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객사와 형리청, 군기청은 상북동에, 시장과 사창웅딩이 등은 하북동에 있었다. 1911년 당시 읍성 안에는 하남리에 30여 가구, 상남리에 30여 가구, 하북리에 70여 가구, 상북리 40여 가구 등 170여 호의 가구가 있었다. 상북동 동쪽 동상리에 11가구, 남문 남쪽 남성리에 12가구가 하나의 마을로 독립되어 있던 것에 비교하면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누정
읍성 내 누각과 정자로는 차군헌(此君軒)과 군자정(君子亭)이 있었다. 차군헌은 1465년 경산현령으로 부임한 채신보(蔡申保, 1420∼1489)가 세웠다. 채신보는 현령으로 부임한 지 한 달이 못 되어 자식을 잃었다. 우울하게 지내는 터에 정사당 동쪽에 우거진 대나무숲 사이로 허물어진 집이 있어 가 보니 옛 경산현 동헌이었다. 깨어진 기왓장을 살펴보니 1320년(고려 충숙왕 7)에 지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집을 중수하여 대나무가 많은 집이라는 의미에서 왕자유(왕희지 아들)의 글을 인용하여 차군헌이라 이름 짓고 가족을 데리고 와 기거하였다(『여지도서』 참고, 군(君) 또는 군자(君子)는 대나무를 의인화한 표현으로 많이 썼음). 그 후 이 차군헌은 1765년경 훼철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 차군헌과 군자정 위치
* 초록색으로 칠한 곳이 차군헌과 군자정(연정)이 있던 곳이다.
군자정은 앞서 언급한 경산현령 김병선이 1773년 연당이라는 연못을 축조하고 동북쪽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정자가 바로 군자정이다. 숲에 대나무가 많아 군자정이라 명명하고, 별칭으로 연못에 연꽃이 많아 연정(蓮亭)이라 불렀다. 1888년 경상감사 김명진이 경산현에 들러서 구휼하고 조부가 지은 이 연정을 방문했다고 한다(『자인총쇄록』 참고).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이 군자정과 연당은 경산 갑부 안병길의 소유가 되었다가 1970년대에 매립되었다. 이외에도 동·서·남·북 대문 누각도 있었고, 객사 동쪽 성 밖에 망북루와 옛 군청 근처 금포동에 금포정(金浦亭)도 있었지만 오래전 훼철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 읍성 훼철 과정과 성돌의 행방
둘레 1.3km, 면적 3만 평, 동·서·남·북 대문의 옹성과 누각, 치성, 망루, 암문 등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던 경산읍성은 임진왜란 발발 전후 읍치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초기 모습이다. 풍마우세에 성벽이 무너지면 현령이 책임지고 보수할 의무가 있었다. 1889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경산현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에도 성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서문의 문호와 누호를 기록하였을 정도로 온전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왕권이 약해지면서 경상도 벽촌까지 현령이 부임하는 것을 꺼렸고, 혹 부임하더라도 갖은 핑계를 대 얼마 있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임한 현령들은 성벽을 제대로 보수하지 않아 1890년대부터 서서히 훼손되고 있었다.
게다가 1907년 7월 구한국 정부와 일제 통감부가 내부차관 기노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를 회장으로 한 「성벽처리위원회」를 반포함에 따라 경성을 비롯한 전국의 성벽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이 위원회는 1908년 해체되고 그 임무는 지방토목국으로 이관되었는데(황성신문 1908.9.6.),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이 토목국 주관 하에 전국의 성벽이 본격적으로 철거되었다.

▲ 1911년 경산읍성과 1912년 청도읍성 지적도
*사진에서 노란색은 당시까지 성의 흔적이 있던 부분이고, 빨간색은 성벽 윤곽만 남은 부분이다. 경산읍성은 거의 철거된 반면, 청도읍성은 온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경산읍성은 이러한 공식적인 성벽 철거가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 철거되었다. 1911년 작성된 지적도를 보면 경산읍성 서문이 있던 삼남동 67번지와 삼북동 173번지 일대, 삼남동 76번지만 겨우 성벽이 남아 있고, 그 외는 대지로 바뀌었다. 성벽이 있던 곳이 대지로 바뀌어 집이 들어섰다는 것은 오래전에 성벽이 철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1912년 4월 작성된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와 서상리 일대 지적도에는 성벽과 치성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청도읍성은 온전했지만, 경산읍성은 완전히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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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인 진옥루가 보이는 경산읍 전경
* 위 사진 : 1916년경 경산읍내 전경. 사진 중앙에 희미하게 보이는 높은 건물(붉은 원)이 경산읍성 서문인 진옥루(옥산제일관)이다. 1916년경 성암산에서 당시 경산 읍내인 삼남동과 삼북동 일대를 찍은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로 남천이 뚜렷이 보인다.
* 아래 사진 : 2023년 드론으로 촬영한 서문이 있던 삼북동 삼남동 일대.
1911년 이전 경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빠르게 성벽이 철거되었을까? 필자는 그 의문의 사건을 경부선 철도 부설 사업으로 보고자 한다. 1901년 경부철도주식회사가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석재가 많이 필요했는데, 그 석재는 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석축이나 성벽을 헐어 사용하였다. 실제로 1908년 철도감리국이 임진성벽을 훼철하여 평안북도 경의선 철도개축공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성벽처리위원회에 신청한 바 있다(황성신문 1908.7.8.).

▲ 경부선 성현 구간 스위치백 철로(출처-조선철도사, 일본회엽서)
* 위 사진 : 1904년 한반도 최초의 스위치백 철로. 경부선 성현 구간 스위치백 철로는 당시 일본에서도 해본 적 없는 어려운 공법이었다. 성현이 높아 터널(현 와인터널) 공사를 하는 도중에 경산과 대구 등지에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청도 쪽과 경산 쪽에 각각 임시로 스위치백 철로를 깔아 성현을 넘어갔다. 터널이 완공된 후 스위치백 철로도 철거했다. 경산 쪽에서 청도를 바라보며 찍었는데, 최초로 공개된다.
* 아래 사진 : 1905년 경부선개통기념으로 발행한 회엽서 사진. 공사 중인 성현 터널과 스위치백 철로에서 경산으로 가는 기차가 보인다. 이 터널은 19년 동안 이용되다가 고도가 너무 높아 새 터널을 뚫은 후 폐쇄되었다. 현재는 청도 와인터널로 사용하고 있다. 이 또한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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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경산역전(출처-일본 회엽서)
* 1910년 정월 일본인이 운영하던 대구의 성도사진관에서 촬영한 경산역 앞 정거동 일대의 회엽서(그림엽서) 사진이다. 제작은 1910년 정월이고, 사진은 그전에 찍었다. 누군지 모를 경산군민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경산 역전 사진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이런 정황을 참고로 하면 1901년 시작하여 1905년 완공한 경부선 경산 구간은 읍성이 있던 삼남동과 불과 600여 미터여서 읍성의 성돌을 철도 부설에 사용하기에 별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청도 구간도 개통되었는데, 이 구간은 청도읍성이 있던 서상동과 직선으로도 4km 떨어진 관계로 읍성이 보존될 수 있었다.

▲ 현재 남아 있는 성돌의 흔적
결국, 경산읍성은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인 1904년경 철거되었고, 1911년에는 서문 옥산제일관[진옥루]과 그 양옆의 성벽 일부, 그리고 삼남동 76번지 일대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작로 공사를 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성벽과 서문도 철거하면서 남은 성돌을 민간 주택 기단석과 담장, 남천 제방 축대 등 일정한 사용처에 무상 또는 매각했다. 현재 미륵대도경산선원 돌담, 4대종갓집식당 옆 돌담, 동문 밖 돌담, 길거리, 남천 시내 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돌은 경부선 철도 부설에 사용하고 남은 것으로 보인다.
◆ 읍성 복원을 위한 시민의 움직임
경산읍성 복원에 관한 화두는 2013년 경산도시연구회, 경산도시건축문화포럼, 경산시청 도시디자인팀이 고지도를 바탕으로 현장 조사를 한 결과 읍성 터를 발견했다고 향토 신문에 보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2016년 경산시도시재생위원회(현 지원센터)에서 ‘성돌모으기운동’을 시작하고, 2018년 서상길 역사문화마을 주민협의회에서 ‘성돌찾기운동’을 시작하여 숨겨진 몇몇 성돌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이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읍성이 있던 지역의 급속한 도시화, 읍성 복원에 필요한 자료의 부족, 남아 있는 성돌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로 어렵게 시작한 읍성 복원 운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읍성 복원은 경산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시 당국의 결단과 시민의 중지를 다시 모을 필요가 있다.
한 편의 시로 마무리한다.
경산읍성 터를 거닐며
가을 햇살 옆구리에 끼고
경산읍성 터로 달려가니
몸은 일백 년 후인데
마음은 일백 년 전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 옛날
북문 밖 돌 깨던 장부의 소리는
먼지처럼 시간 속에 갇힌 채
스러진 망북루 처마보다 아득하고
서문 옥산제일관문 시장 터
주막집 아낙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최신식 카메라로도 잡을 수 없다.
왜적 막아내던 남문 옹성의 돌은
왜적이 깐 철로를 아틀라스처럼 떠받치고
동문 밖 자인가는 옛길에서 만난 노파는
성돌 이야기를 끄집어내니
전설처럼 반백 년 전 시집온 얘기를 한다.
그래도 군자정 풍류는 남아 있어
부처님 언약처럼
연당으로 환생하는 경산읍성 터는
성암산 짊어지고 구름처럼 떠 있는
드론보다 상큼하다.
글·사진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다음에는 경산현의 동헌을 비롯한 각종 공청과 객사 현황 및 폐철 과정에 관한 글을 게재합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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