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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6-22 오후 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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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바람에 실려 간 경산현 공청과 객사
[경산곡곡 마을이야기] 경산현 읍치 이야기(2)

기사입력 2023-10-10 오전 9:32:25

경산현의 공청과 객사

조선 시대 군·현의 공공기관은 크게 공청과 객사로 구분되었다. 이 기관은 외삼문 안과 밖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외삼문 안에는 내삼문을 따로 만들었다. 내삼문 안에는 흔히 동헌이라 하는 정사당과 가족이 기거하는 내아가 있었다. 내삼문 밖과 외삼문 안에는 아전들이 근무하는 이청, 주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잔심부름하던 구실아치들이 있던 통인청, 사령들이 기거하는 사령방 등이 있었다. 기타 공청은 외삼문 밖에 설치하였는데, 대원군 집권기에 설치한 별포군청, 병장기를 보관하던 군기청, 세금을 거두던 수조소, 죄인을 가두던 감옥, 형사 사건을 담당하던 형리청, 관노들이 기거하던 관노방, 관아의 군무와 치안을 담당하던 장교들이 기거하는 장교청, 호구 장적 및 부역을 담당하는 호장이 있던 현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향인들의 자치 기구였던 향청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인 객사도 외삼문 밖에 있었다. 이외 사창과 대동고도 있었는데, 사창은 외삼문 밖이나 둔전이 있던 곳에 설치하였다.

 

 

 

경산현은 읍성이 있던 삼남동과 삼북동에 이러한 공청과 객사가 집중되어 있었다. 아쉬운 점은 이 기관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느냐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단지, 몇몇 자료와 구전으로 시설 관련 지명이 남아 있고, 1911년 지적도에 공공기관이 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어 개괄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 * 경산현 공청과 객사 중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가 파악된 곳은 옥산정당, 형리청, 사창, 객관, 군기청, 대동고이고, 나머지는 조선 시대 공청 위치 원칙에 따라 추정하였으므로 이후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면 수정하겠다.

 

 

경산현 동헌 옥산정당

 

동헌의 위치와 편액

신라 시대 경산현 동헌의 위치는 알 수 없고, 고려 시대에는 삼남동 39번지에 있었다. 1320(고려 충숙왕 7)에 지었는데 조선 개국 후 42번지로 옮겼다. 동헌을 옮긴 후 원래 동헌은 방치되었는데, 1425년 현감 채신보가 부임하여 자식을 잃은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아전을 시켜 원래 동헌을 복원한 뒤 자신의 거처로 삼고 차군헌이라 명명하였다. 이 차군헌은 300여 년 동안 존속하다 없어졌다.

 

조선 시대 경산현 동헌의 당호는 옥산정당이었고, 양쪽 방에는 역우당, 시여당이라는 편액을 하였다. 또 양쪽 누마루는 찰미루와 시교루라는 편액과 견월헌과 일오헌이라는 편액도 달아 모두 7개의 현판이 있었다. 그리고 동헌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아 놓았다(자인총쇄록).

 

鳥啼花落訟庭空(조제화락송정공)

四面靑山圖?中(사면청산도화중)

小吏欄前眠忽赴(소리난전면홀부)

錯驚鈴索語東風(착경영색어동풍)

 

새 울고 꽃 지니 송사하는 뜰은 비었고

사면의 푸른 산은 한 폭의 그림이네.

아전이 난간 앞에 조는데 갑자기 다가가니

설렁줄 방울 소리에 깜짝 놀라 동풍이라 말하네.

*설렁줄 : 방안에서 사람을 부를 때 당기던 방울이 달린 줄

 

 

위 시는 옥산정당 주련으로 1889년 자인현감 오횡묵이 경산현을 방문하고 그의 책에 옮겨 놓은 것이다. 주련의 수는 4개이지만, 기둥은 자인현 정사당인 시중당과 같은 규모인 6개로 된 정면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헌의 폐철과 군청으로의 전환

이 옥산정당은 19143월 경산군, 자인군, 하양군이 경산군으로 통폐합되면서 경산군 청사가 되었다. 군청사는 100여 평의 대지에 기존 현청 건물과 신축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관(동헌) 1개 동(28), 회의실 1개 동(15), 숙직실과 소리실 1개 동(9)은 기존 동헌과 부속 공청 건물을 이용했는데, 모두 1869년 건축된 것이었다. 창고 1개 동(7)1915, 사소(使所) 1개 동(2)1914년 일본식으로 신축하였다. 곳간은 3개 동(10)이 있었는데, 1869년 건축된 기존 현청 안에 있던 건물을 활용하였다.

 

또한, 옥산정당이 있던 자리 이외 42번지에는 1926년 경산군농회가 들어섰다. 경산군농회는 1921년 조직되었지만 허가는 1926년에 받았다. 1927년 경산역 구내에 경산군농회 창고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아의 일부였던 삼남동 41번지는 1914년부터 경산면사무소로 이용하다가 1921년 경산경찰서 자리였던 삼북동 250-1번지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1931년 경산향교 재산으로 대지 78, 건평 23평의 서양식 건물에 기와를 얹은 경산도서관을 개관하였다(조선사회사업요람,1933).

 

 위 사진 :1916년 경산현 정당 옥산정당을 경산군청으로 활용할 당시의 모습. 삼남동에 있었다.

   아래 사진 : 1936년 이전한 후 1970년대 경산군청의 모습. 중방동(금포동)에 있었다.

 

▲ 1980년대 경산시와 통합하기 전의 경산군청사의 모습이다.
 

 

그 후 1936430일 경산군 청사는 경산교 다리 옆 금포공원(錦浦公園, NC백화점) 일대 대지 1,400, 건평 89평으로 새로 지어 이전함으로써 삼남동 시대를 마감하고 중방동 시대가 되었다. 군청사를 금포공원으로 옮긴 이유는 1910년대 대구-경산-자인 간 신작로가 중방동을 가로질러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작로를 개통한 이유는 1905년 개통된 경부선 경산역과 자인에서 오는 길이 청우동(현 경산시청 사거리)에서 일직선 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작로가 개통되자 경산의 상권도 중방동 신작로를 따라 새로 형성되고, 시장도 중방동에 새로 생겨 경산의 중심지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삼남·삼북동에서 중방동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군청사를 새로 지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기존 삼남동 군청사를 확장하자는 읍내 주민 중심의 유지파와 이전하자는 중방동 주민 중심의 이전파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동아일보 1935.7.16.). 갈등이 지속되자 오카자키 데츠로 도지사는 마츠모토 코오조오 경산경찰서장과 유시환 경산군수를 도지사실로 불러 극비리에 회의한 후 경산역과 가깝고 또 새 중심지로 부상하던 금포공원과 그 일대 1,400평을 매입하여 옮기기로 하였다(부산일보 1935.8.15.). 이 과정에서 원래 옥산정당 건물은 해체되어 건물 부재는 각 문중의 재실을 짓는데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되고, 1995년 경산시와 경산군이 통합되어 경산시로 되면서 중방동 군청사는 민간에 매각하고 시청사는 현재 남매지 옆으로 옮겨 수백 년 동안 유지되던 경산현청과 경산군청의 맥은 끊어졌다. 이외 현감이 기거하던 내아의 편액은 청풍당, 정사당과 내아가 있던 내삼문의 편액은 장산아문이라 하였다.

 

 

경산현 객사

 

경산현 객사의 위치와 게판문

경산현 객사는 객관이라 하였다. 삼북동 250번지에 있었고, 당호는 장산관이라 하였다. 외지에서 객이 오면 이곳 객관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하룻밤을 유하는 나그네들이 문필력을 뽐내기 위해 시를 써서 벽에 붙여 놓기도 하였다. 여기를 방문한 자인현 출신의 조선 초 학자 사가정 서거정과 회재 이언적의 시는 편액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慶山題詠(경산제영)

古縣大於斗(고현대어두)

使君才似江(사군재사강)

賢名曾第一(현명증제일)

治化定無雙(치화정무쌍)

山色濃低檻(산색농저함)

秋聲細入窓(추성세입창)

斯文佳會盛(사문가회성)

題詠筆如?(제영필여강)

 

경산을 읊다

오래된 고을 현판은 말보다 큰데

사군의 재주는 강물과 같도다.

어진 명성은 일찍이 제일이었고

백성 다스림은 정히 둘도 없구나.

산빛은 짙어 난간에 깔려 있고

가을 소리는 가늘게 창에 들어오네.

선비의 아름다운 모임 성대하니

제영 쓴 붓들은 긴 장대 같구나.

 

 

 

사가정 서거정(14201488)의 윗대는 자인현 서면 아방곡에 살았다. 현재 남방동과 내동이다. 그래서 그의 증조부 및 조부모 산소가 아방곡 안 신제지 기슭에 있다. 서거정의 형 서거광은 언양현감을 지낸 후 이곳에 낙향하여 살다가 조졸하였다. 서거정은 한양에서 형수와 조카들을 걱정하면서 경주부윤에게 각별하게 부탁하는 등 형제애가 남달라 자인현민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거정의 가족이 살던 마을을 사가촌이라 하고, 그의 윗대가 묻힌 산소를 거정대라 하였다. 이 시는 서거정이 고향 선산을 방문하고 경산현 객관에 머무를 때 쓴 것이다.

 

위의 시를 보고 회재 이언적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차운하여 쓴 시가 아래 한시다.

 

慶山客館次徐剛中韻(경산객관차서강중운)

?短宜迎月(첨단의영월)

山橫?望江(산횡애망강)

鳴鳩枝上七(명구지상칠)

飛燕雨中雙(비연우중쌍)

境靜聊觀物(경정료관물)

心閑穩倚窓(심한온의창)

題詩?眞興(제시화진흥)

那用筆如?(나용필여강)

 

경산 객관에서 서강중의 시에 차운하다

처마 낮아 달맞이를 하기 좋으나

산이 막아 강물은 보이지 않네.

가지 위엔 일곱 마리 비둘기 울고

빗속에는 한 쌍의 제비가 나네.

고요 속에 사물을 관조하다가

마음이 한가해져 창에 기대네.

시를 지어 참된 흥취 그려 보나니

장대 같은 붓을 쓸 게 무에 있으랴.

 

이 시는 회재 이언적이 1531(중종 26)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자 고향인 경주로 낙향하다가 경산 객관에 머무를 때 쓴 시다. 위 두 편의 시는 여지도서를 비롯한 경산현읍지에 모두 실려 있는데, 두 사람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유명하여서 객관에 걸려 있는 여러 게판문을 대표하여 읍지에 등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 경산현 객관에 관한 자료는 현재 찾을 길 없다.

 

객관에서 경산면 사무소로의 변경

객관은 1910년 국권이 상실되고, 조선총독부에서 군수를 임명하는 체제가 되자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1914년 경산군이 자인·하양까지 관할하는 경산군으로 바뀌면서 원래 있던 현청은 군청으로 사용되고, 삼남동 41번지에 있던 면사무소는 1921120일 삼북동 객관 자리로 옮겼다(조선총독부 관보). 이 자리는 경산경찰서가 있던 곳이었다. 조선 시대 삼북동 250번지 전체가 객관이었는데, 1910년대 가운데로 신작로가 생기면서 250-1, 250-2번지로 나뉘었다. 면사무소는 바로 경산경찰서가 있던 250-1번지로 옮겼다. 250-2번지에는 경산금융조합이 들어섰다가 1927년 금포동 경산군청 길 건너편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956년 경산면은 경산읍으로 승격하고, 1959년 읍사무소를 일제 시대 일본인 소학교가 있던 서상동 24번지로 이전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경산공립국민학교(현 경산중앙초등학교)는 중방동으로 이전하였다. 1989년 경산시로 승격하고, 1995년 경산군과 통합하여 경산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경산면은 경산역이 있고 대구와 인접하다 보니 재화와 물류가 집중되어 로의 단계적 발전과정을 겪었다.

 

 

경산현 형리청

 

경산현 형리청의 변화

경산현의 형리청은 형방청이라 하였고, 당호는 알 수 없다. 삼북동 62번지에 있었다. 다른 공청들은 일제가 행정 체계를 바꾸면서 모두 경산군청과 경산면에 흡수되었지만, 이 형방청만은 치안을 담당하는 부서로 바뀌어 경산분파소, 경산순사주재소, 경산경찰서로 이어졌다.

 

경산현 형리청에 뿌리를 둔 경산경찰서

 

 위 사진 : 1909년 신축한 대구경찰서 모습.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다. 사진은 1910년대 찍은 모습인데, 경문당에서 발행하였다(출처 : 차경환 제공).

  아래 사진 : 1916년 경상북도헌병대·경무부·대구헌병분견소로 사용된 포정동(병무청 자리)에 있던 건물. 뒤쪽에 경상감영 선화당이 보인다. 사진 안의 인물은 당시 헌병대장이자 경무부장이었던 핫토리다.
 

 

대한제국(이하 구한국)은 통감부의 지시로 1907630내무부령 3를 통해 대구에 경상북도경무서를 설치하고 경무관 1, 총순 1, 권임 1, 순검 30명을 배치하였다. 또 그 산하에 경산분파소(삼북동), 자인분파소(동부동), 하양분파소(금호동) 14개 분파소를 설치하고 순검 각 4명을 기존 형리청에 배치하였다(구한국 관보). 이것이 수도 한성부를 제외한 최초의 일본식 근대 지방 경찰서였다. 1908년 구한국이 경찰권을 통감부에 이관하면서 치안권은 일본 헌병대로 넘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감부는 190910월 경상북도경무서를 경찰부로 개칭하고, 그 산하 대구경찰서에는 일본인 경무관, 경감, 순사를 배치하였다. 이때 대구경찰서 산하인 경산·자인 분파소순사주재소로 바뀌었고, 일본인 순사 12명과 한국인 순사 4명이 배치되었다. 한국인 순사는 거의 형리청과 장교청 아전들이었다. 19107월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헌병분대가 설치되고, 대구헌병분대장이 대구경찰서를 통제하면서 여러 곳에 헌병분견소가 설치되었지만, 경산·자인·하양은 기존의 순사주재소가 유지되면서 헌병만 파견하였다.

 

1914227일 경산군이 자인군, 하양군을 통합하자 경산순사주재소는 경산경찰서로 승격하여 자인순사주재소와 하양순사주재소를 관할하였다. 이때 삼북동 62번지에서 삼북동 250-1번지 삼북동교회 앞 객관 터로 이전하였다.

 

▲ 사진 상 : 1916년 삼북동에 위치한 경산경찰서 모습. 지붕 위로 보이는 흰 건물은 망루(사이렌)로 추정된다. 누군지 모를 경산군민 2명이 경찰서 앞에 앉아 있다. 담장과 건물은 옛 방식이고, 정문은 시멘트 기둥으로 되어 있다.

  사진 중 : 1990년대 계양동으로 이전하기 전 서상동에 있던 경산경찰서. 1971년 개축한 모습이다. 현재 옥산장례식장이다.

  사진 하 : 1999년 계양동(청우동)으로 이전한 후부터 2023년 현재 경산경찰서의 모습. 사진 왼쪽 산에 잡귀를 위로하는 여제단이 있었고, 산 아래 길은 경산읍성에서 자인으로 가는 주 도로였다.
 

 

1917929일 경산경찰서 관내 용성면 당리동에 용성순사주재소, 안심면 동호동에 안심순사주재소가 설치되었다. 19188월 자인·하양·안심·용성 순사주재소경찰관주재소로 변경하였다. 19198월 경산경찰서 및 자인·하양·안심·용성 경찰관주재소에 있던 헌병은 경찰로 전직하였다. 19206월 고산남산·남천·압량·진량·와촌 경찰관주재소가 생겨 총 10개의 직할 주재소를 관할하였다. 19211월 삼북동에 있던 경산경찰서를 서상동 18번지로 이전하였고, 경찰서 자리에는 경산면사무소가 들어섰다(조선총독보 관보). 1925년 남산경찰관주재소를 폐지하였다(시대일보). 이후 경산경찰서는 서상동에 줄곧 위치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시대 경산을 비롯한 자인·하양 주재소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경산경찰서에서 재조사를 받았고, 여기서 기소된 사람들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특히, ‘3·8 자인만세운동의 주동자인 황기식 선생과 일본 밀정 살해 조직 다물단의 자인 서부리 출신 서동일 선생은 모두 이 절차대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위 왼쪽 : 1908년 대구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 안에 있던 대구감옥 현관.
  
위 오른쪽 : 1909년 포정동 경상감영 안에 있던 대구감옥 감방.'
  
아래 왼쪽 : 1910년 삼덕동에 지은 대구형무소 전경. 처음 3,800평이었는데, 나중에 7,800평으로 확장했다고 한다. 사진은 1924년경 찍은 것이다.
  아래 오른쪽 : 1922년 증축한 대구형무소 청사. 1970년대부터 시립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2·28 기념 중앙공원으로 바뀌었다.
 

 

해방 직후 조선의 치안권은 아베 총독과 밀약을 맺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보안대 자원경찰대가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10월 미군정청이 보안대와 자원경찰대를 해산하고, 12월 경무국을 조직하여 국립경찰을 창설했다(미군정기 주한미군사). 이때 경산경찰서는 20구 경찰서로 재조직되었고, 초대서장에 일본 경찰 출신 윤갑달이 임명되었다(조선의 경찰). 그리고 산하 경찰관주재소지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남산면에 남산지서를 재개소하였다. 그 후 일본 경찰은 본국으로 떠났고, 여운형의 보안대 자원경찰대는 일명 좌익 공비가 되어 산속에 숨어 있다가 경찰서를 공격하곤 하였다. 194920구 경찰서에서 다시 경산경찰서로 환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1949년 박상호 경산경찰서장이 남산지서에서 좌익 공비에 의해 피살되었다(영남일보 1949.12.22.). 1971년 사정동 청사를 개축하였고, 1999년 계양동(구 청우동)에 남매지 일부를 매립하여 신청사를 짓고 이전하였다(항간에 알려진 1950년 중방동 신청사 신축은 중앙파출소 개소이고, 1971년 서상동 신청사 신축은 일제 시대 건물을 개축한 것임). 현재 경산경찰서는 산하 1개 지구대(서부)7개 파출소(중앙·자인·진량·하양·동부·압량·와촌)를 두고 있다. 그리고 서부지구대 산하에 남천·역전 치안센터를, 자인파출소 산하에 용성·남산 치안센터를, 하양파출소에 청천치안센터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는 상해 임시정부라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그에 따라 정부 산하 모든 기관이 상해 임시정부를 그 근원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 경찰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픈 역사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조선과 구한국, 일제 시대를 거쳐온 경산현 형방청경산분파소경산순사주재소경산경찰서의 흐름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기타 경산현 공청

 

외삼문 안의 공청

내삼문 바깥에는 외삼문과 담장을 설치하여 공청과 민가를 구분하였다. 경산현 외삼문은 누각을 설치하였는데, 삼산루라 하였다. 삼산루는 1871년 경산현령 이헌조가 세웠다고 한다. 이 안에는 책을 보관하던 책실인 수민당, 아전들이 근무하던 인리청, 잔심부름하던 어린 통인이 있던 소동청, 사령들이 있던 사령방 등이 있었다. 창고로는 병장기를 보관하던 군기고, 호적 장부를 보관하던 호적고, 물품을 보관하던 관청고 등이 있었다. 이 공청들은 모두 삼남동 41·42번지에 있었는데, 1914년부터 경산군청사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 외삼문 밖의 공청

외삼문 밖에는 향청 좌수가 있던 향사당, 장교들이 기거하던 장관청, 군관들이 있던 군관청, 호장이 근무하던 현사인 호장청, 형리들이 근무하던 형방청, 별포군이 근무하던 포청, 관기나 예능인, 무당 등 관노들이 기거하던 관노방, 사창, 대동고 등이 있었다. 이 시설들은 현청을 중심으로 삼남동과 삼북동 일대에 있었다. 빙고는 동문 밖에 있었는데, 1786년 폐쇄되었다고 한다.

 

 

에필로그

 

흔히 역사를 강물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흘러가는 강물을 한 줌의 바가지로 떠 놓은 것과 같다고 한다. 물을 뜨는 순간 그 자리에는 또 다른 물이 채워진다. 바가지의 물과 그 자리를 채운 물은 장소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물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바가지에 떠 놓은 물만을 바라보며 강물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경산은 바가지에 떠 놓은 물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아직도 경산의 역사 기술은 압독국 시대 고분과 장산에 얽매여 있고, 원효·설총·일연에 머물러 있고, 경산현읍지에 매달려 있다. 근대 역사는 몇몇 향토사가들이 구전과 풍문을 바탕으로 블로그나 언론에 게재하는 실정이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자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또 논문으로 주장을 밝히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사를 통해 근대 시기 경산현의 읍성과 공청·객사가 어떻게 사라져갔고, 그 자리에 어떤 문화가 들어서게 되었는가를 조잡하게나마 다룬 이유는 그 역사의 바가지에 물이라도 조금 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정확한 고증과 실증을 바탕으로 한 근대 경산의 역사 바가지가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사진 : 이홍우(자인의 역사저자)

 

다음에는 경산현의 공청과 객사가 훼철된 뒤 경산면에 들어온 일제시대 각종 유적에 관한 글을 게재합니다.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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