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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승적과 승과부의 애틋한 사연이 깃든 삼풍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7) - 삼풍동
기사입력 2024-05-08 오전 9:10:53
▲ 삼풍동 전경
▲ 삼풍동 전경

▲ 삼풍동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삼풍동은 조선시대 경산현 동면 삼천동(三川洞)이었다.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재된 자료는 『호구총수(1789)』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와 『경산현지(1786)』에는 등재되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독립된 행정단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당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자료가 있어 적어도 16세기 후반부터 삶의 터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00여 년 후 발간된 『경산현읍지(1832)』에는 삼덕동(三德洞)으로 이름이 바뀌어 등재되어 있는데, 삼천동의 오기로 보인다.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바뀌면서 삼풍동(三豊洞)으로 바뀌었는데, 1911년 『조선지지자료』와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동면 통폐합을 할 때도 다른 마을과 통합되지 않고 그대로 삼풍동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부군현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이 새로 생겼는데, 이때 압량면에 편입되어 경산군 압량면 삼풍동이 되었다. 1987년 경산읍으로 다시 편입되었고, 1989년 경산시 삼풍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삼풍동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삼풍동은 16세기경부터 달성서씨, 김해김씨, 영천황보씨, 영일정씨 등이 들어와 삶의 터전으로 조성되어 큰마을, 못채마을, 서당골마을, 삼거리마을 등 네 개의 각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마을 분포는 400여 년 동안 이어지다가 1969년 영남대학교가 대구에서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마을 일부가 폐촌되고 현재는 번지수마저 없어진 상태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와 계양동 일대가 확장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마을 터도 아파트단지에 수용되어 원래 삼풍동의 모습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1911년 삼풍동 지적도
▲ 삼천동·큰마을
삼천동은 삼천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세 갈래의 냇물이 한 데 합수하면서 저수지를 이루어 삼천제(三川堤)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과 저수지의 선후관계는 알 수 없다. 이칭으로는 삼천동(三千洞)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에 있던 절에서 수확하는 곡식이 삼천 석이어서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민간어원설로 보인다. 이 마을은 삼풍동에서 규모가 제일 커서 ‘큰마을’이라고도 불었다. 1911년 당시 큰마을에는 33가구가 살고 있었다. 현재는 원룸이나 빌라,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원 마을 유래와는 다르게 학생들의 젊음과 사랑과 꿈, 이 세 가지가 풍성한 마을이 되었다.
▲ 못채마을
못채마을은 삼천지 못둑 매래(무넘기) 옆에 조성된 각단이다. 1911년 당시 8가구가 살았다.현재는 영남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관과 섬유관이 들어서 있다.
▲ 서당골마을
서당골마을은 삼풍동 동북쪽 서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각단이다. 1911년 5가구가 살았다. 현재는 영남대학교 민속관이 들어서 있다.
▲ 삼거리마을
삼거리마을은 1911년까지는 없었는데, 나중에 조성된 각단이다. 영남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서당골과 큰말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계양동, 사동, 삼풍동의 경계에 삼거리가 조성되었는데, 그곳에 있다고 삼거리마을이라고 불렀다. 사동의 삼거리 마을과는 길 하나를 두고 있다.
▲ 삼천동고개와 치어동고개, 삼천지
▲ 기타 삶의 흔적
삼천동 서남쪽 도롯가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었다. 현재는 산을 허물고 태왕드림하이츠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아파트와 영남대학교 부지 사이 삼풍로 5길이 있는데 옛날에는 고갯길이었다. 이 고갯길은 삼천동 큰마을에서 청우동(현 경산경찰서 일대)을 거쳐 경산읍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고개를 ‘삼천동고개’라고 불렀다. 그리고 삼천지 북쪽에도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을 치어동고개라 불렀다. 현재 영남대학교 부지에 편입되어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삼천지와 밤정골못 2개의 저수지가 있다. 삼천지(三川池)와 밤정골못은 『여지도서』에 각각 삼천제(三千堤)와 율정제(栗亭堤)라 등재되어 있어 15∼18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둘 다 영남대학교 안에 있다. 수백 년 된 저수지니 잘 보존했으면 한다.

▲ 삼천지 전경
◆ 의병장 승적(承迪)과 손부 승과부의 사연
이러한 마을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승적(1567∼1616)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원래 경기도 교하(交河, 현재 파주)에 살았다. 본관은 해남, 자는 희고(希古), 아버지는 충순위 승종인, 형은 훈령원정 승진(1567∼?)이다. 형과 생년이 같은 것으로 보아 쌍둥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상세히 전하지 않고, 형 성진은 자가 응길(應吉), 1599년(선조32) 무과 정시 을과 8위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워 『선무원종공신록』 2등에 등재되어 있다. 대대로 무인 입안이었던 승적은 과거 응시 전 임금의 호위와 궁궐 수비를 맡았던 내금위 소속 군인이었다.
▲ 1592년 임진왜란 당시의 경산현 상황과 승적
승적의 의병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592년 임진년과 1597년 정유년 당시 전투 상황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1592년 음력 4월 고니시 유키나와가 이끄는 왜군 제1군은 밀양과 청도를 거쳐 남성현을 통하여 경산현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현령이 도망을 가 버렸다고 하지만 조선시대 자료 그 어디에도 현령이 도망을 갔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1594년 피폐해진 경산현을 하양현에 합병시키려 하자 경산현 백성 세 명이 상경하여 비변사에 현령 고충경을 유임시켜 달라고 상소한 것으로 보아 당시 현령은 최선을 다해 경산을 방어한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1594년 6월 23일자). 개전한 지 불과 10여 일 만에 당한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관군이나 백성이 체계적으로 방어할 여유도 없이 밀양(4월 18일), 청도에 이어 경산현(4월 19일)도 점령당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제2군은 울산(4월 19일), 영천(4월 22일)을 차례로 점령한 후 연이어 하양현도 점령하였다(『선조실록』 1593년 6월 5일자). 백성들의 체계적인 의병 활동은 왜군이 훑고 지나간 1592년 5월 무렵이었다. 이후 경산현과 주변 현의 의병들은 영천성 전투(1592.7.), 경주성 전투(1592.8.) 등에 참여하면서 1593년 휴전기까지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양에서는 1594년(선조27) 갑오 무과 단독별시를 시행하였다. 금위군으로 있던 승적은 여기에 응시하여 병과 3등 69위로 합격한 후 피폐해진 경산현의 군관으로 내려왔다.
▲ 1597년 정유재란 당시의 경산현 상황과 승적
경산현 지역의 체계적인 의병 활동은 정유년 때였다. 임진왜란 협상의 결렬로 1597년 왜군은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당시 경남 사천에 있던 왜군은 두 갈래로 나눠 청도와 경산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 소식을 접한 경산현민 중 안심 반계동(현 율하1동) 최응담(용성 곡란의 최팔원·최팔개 형제와 3종간), 고산 내매동(현 신매) 박응성, 상방동 진섬·진엽 형제, 백천동 정변함, 옥곡동 정변호, 동계동(현 계양동) 정변문, 하양 율촌 남중옥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관군이었던 승적도 이에 합세하였다. 경산현 출신 의병 부대는 김응서, 권응수, 한명련 등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명나라 군대의 비협조로 패하였다(『선조실록』 1598년 8월 3일자). 그 후 승적은 화왕산에 주둔하고 있던 망우당 곽재우의 막하에 들어가 왜군과 싸웠는데, 그 행적이 『용사세강록』에 기록되어 있다.
▲ 1598년 종전 후 승적의 행적
임진년과 정유년에 일어난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남 고흥의 사도진(蛇島鎭) 첨사를 지냈다가 다시 경산으로 돌아와 살다가 1616년 별세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 삼풍동이다. 1594년 경산현에 내려올 때 28세였던 그가 가솔을 거느리고 왔는지, 아니면 이후에 데리고 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경산 삼풍동에 살고 있었다. 그의 묘는 삼풍동에 있다가 영남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이장하여 현재 점촌동에 있다. 그런데, 오래전 종손이 강원도로 이거하면서 가보와 보첩을 가져가 버려 남은 후손들은 힘 미치는 대로 가승보를 정리하였다고 한다. 11세손 승천호가 자인면 남신리에 이거하여 얼마 전까지 4가구 있는데, 현재는 3가구만 살고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유는 그가 경산 출신이 아니었고, 남아있던 몇몇 후손들도 경산에서 세를 떨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의병에 참여한 사실을 가문의 큰 영광으로 인식하였고, 그것을 신분 상승의 활로로 이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각 향촌에서는 의병에 참여한 조상의 행적을 부각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문중의 세력에 따라 조상의 행적이 더해지기도 하고, 빠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한 현상이 극에 달한 자료가 조선왕조가 망한 후 1933년 발간된 『경산군지』 3∼5권 인물과 성씨 편이다. 이 자료 발간에 참여한 사람은 당시 경산, 자인, 하양 지역의 유지였고, 이들은 자기 문중의 인물을 현양하는데 성심을 다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병 양란 때 의병에 참여한 몇몇 인물은 왜곡·축소 또는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이 작용하여 승적은 여타 의병장과는 달리 이름만 겨우 전하고 있다.
▲ 승적의 손부 승과부가 쓴 유려한 문장의 의송장(議訟狀)
현재 평산동 풍락지 남쪽 골짜기와 백천동 동쪽에 백자산이 있다. 이 백자산의 북쪽이자 평산동과 점촌동 남쪽 골짜기에 지금 골프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 골짜기를 과거에는 대은동(大隱洞) 또는 대원골이라 하였다. 이 골짜기 안쪽 산은 원래 승씨 문중의 산이었고, 누대에 걸쳐 조상 묘가 있었다. 이 산에 얽힌 애절한 사연이 승적의 후손과 관련 있어 소개한다.
승적에게는 여업이라는 아들과 창원이라는 손자가 있었다. 승과부는 창원의 아내였는데, 본관은 전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아버지 여읍은 시를 잘 짓고 글이 뛰어나 주변 선비와 인근 유생들이 잇달아 글 배우기를 청하여 대은골에다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승씨골짜기’, 산을 ‘승씨산’이라고 하였다. 시아버지 여읍과 시어미가 죽자 그녀는 이곳에 장사를 치렀다. 시숙과 남편 창원도 일찍 죽어서 이곳에 안장하였다. 그래서 승씨 문중은 주변에 일가친척도 없이 오로지 과부가 된 승과부 본인과 어린 아들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업신여긴 천동(과거 백천1동)과 평산동 주민들이 서당을 강제로 매각해 버리고 산을 양분하여 한쪽은 천동, 다른 한쪽은 평산동 마을 재산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이를 억울하게 여긴 승과부는 경산현령이 부임하는 날 남장을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원통함을 알리는 소장을 작성하여 현령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승과부의 의송장(議訟狀) 또는 원정서(寃情書)이다. 그녀가 쓴 의송장은 문장이 유창하고 내용이 간절한 명문이어서 여러 집안에서 그 글을 베껴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도 세월의 흐름을 감내하지 못하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전혀 없고, 그녀가 빼앗긴 골짜기와 선산은 여러 주인을 거쳐 지금은 골프장이 조성되어 하루 종일 골프공만 휙휙 날아다니고 있다.(의송장 부분은 『경산지』 참고)

▲ 인터불고 경산CC 전경
◆ 에필로그
고향이 자인인 필자는 학창 시절 대구까지 통학하였는데, 그때 늘 삼풍동 삼거리마을 앞으로 지나갔다. 삼거리마을 도롯가 버스 정류소에는 정미소가 있었고, 그 동쪽에 작은 개울이 흘렀다. 아침마다 까만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 몇몇이 비포장길을 달려온 버스가 내뿜는 허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차에 오를 때, 필자의 눈은 늘 마을 안쪽 그 어딘가를 쳐다보며 ‘저 마을 안쪽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가,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경산에서 놀다 보니 자인으로 가는 막차를 놓쳐버렸다. 하는 수 없이 경산에서 자인까지 비포장길을 걸어서 가는데, 이 삼풍동 삼거리 마을 앞을 지나갔다. 하늘은 밤하늘 온통 까만데, 정미소 옆 선술집에서는 백열등이 노랗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아래 몇몇 남정네와 주모인 듯한 아낙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잠깐 쳐다본 후 이내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것이 필자가 기억하는 삼풍동에 대한 실루엣이다. 지금은 그 옛날의 정미소도, 개울도, 선술집에서 새어 나오는 술꾼들의 웃음소리도 완전히 사라져 세월의 무상만 느끼게 한다.

▲ 영남대 캠퍼스 전경
글 이홍우 : (『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정명환 작가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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