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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헌 한동유 선생의 문향(文香)이 서린 사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8) - 사동

기사입력 2024-05-18 오전 9:36:09

▲ 사동 전경 

 

▲ 사동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사동은 15세기 경산현 동면 동을산리(冬乙山里)에 속한 작은 촌락이었다. 18세기경 교하노씨가 개척했다고 알려졌지만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동을산리(冬乙山里)로 기록되어 있어 그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동을산리는 들에 있는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 들미를 차자표기한 것으로 평산동의 옛 지명이었다이 동을산리 안에 여러 촌락이 있었는데그중의 한 촌락이 사동(뱀골)이었다. 1518세기경 초계정씨청주한씨달성서씨 등이 차례로 이거하여 마을이 확장되면서 경산현 동면 백양동이 되었다가, 19세기 중반 경산현 동면 사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부군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압량면 사동이 되었다그러다가 1987년 다시 경산읍에 편입되었다가 현재 경산시 동부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 사동 전경(큰사동과 동산 일대)
 

 

▲ 백양동·사동

백양동(白羊洞)은 사동의 옛 이름이다백양동으로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경산현지(1786)와 호구총수(1789)이다경산현읍지(1832)까지 백양동으로 기록되다가 경산현지(1871)에서 사동리(巳洞里)로 바뀌었다. ‘백양의 어원은 확실치 않은데현재 전하는 바로는 골짜기가 뱀처럼 생겨 뱀골이라 부른 데서 백양이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사동이란 이름은 1871년 마을 이름으로 등재되었지만그 이전부터 사동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한경조가 쓴 산천재기에 따르면 현의 손사방에 있어 사동이라 했다고도 하고산봉우리가 꿈틀거리는 뱀이 서리고 있는 모양이라서 사동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1911년 사동 지적도(초록색-마을, 노란색-저수지)
 

 

▲ 큰마을·큰사동·뱀골·말매못안

큰마을은 사동의 여러 각단 중 가장 커서 큰마을 또는 큰사동이라 하였고 사동의 중심 마을이었다이 각단은 흔히 뱀골(큰뱀골)이라고도 부른다또 말매못 안에 있어 말매못안이라고도 하였다. 1911년까지 이 마을에 20여 가구 살고 있었다산천재기에 따르면 1632년 큰사동 남쪽 골짜기에다 청주한씨 문중에서 산천재라는 재실을 건립하였다고 한다지금은 여러 차례 중수 과정을 거쳐 냉천골에 있다현재 뱀골(큰사동)에는 전원주택단지사동고등학교동부동행정복지센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작은사동·웃각단

작은사동은 웃각단 또는 작은뱀골이라고도 하는데큰사동에서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11년 당시 14가구 정도 살고 있었다현재 웃각단(작은사동)은 폐촌되고거기에 평산초등학교와 전원주택단지아파트단지 등이 들어서 있다.


 

▲ 평산초등학교와 작은사동 일대 
 

 

▲ 아랫각단

아랫각단은 웃각단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11년 이곳에 약 6가구가 살고 있다가 마을이 확장되면서 가구 수가 늘었다현재 평산동 지역으로 바뀌었다이곳 역시 아파트단지 등이 들어서 있다.

 

▲ 바래미마을삼거리마을깐치못밑마을숲안마을피란사택마을

 

▲ 삼거리마을과 깐치못밑마을 일대 

 

일제시대 이후 북쪽 자인가는 도로변 깐치못밑들이라 부르는 들판에 마을이 조성되면서 바래미마을그 동쪽에 삼거리마을삼거리마을 동쪽 까치못 옆의 깐치못마을또 북쪽 숲안마을숲안마을 남쪽 6·25 때 피란민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조성된 피란사택마을 등으로 확장되었다현재 이 지역은 주택단지로 변했고자인가는 도로변에 있던 깐치못마을에는 법원세무서우체국이 들어서 있고까치산에는 경산시립박물관이 들어섰다바래미마을 동쪽에는 사동중학교사동초등학교 등이 있고그 외 논밭이었던 곳은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사동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주거 단지로 변하였다.

 

▲ 사동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산과 골 및 들판

사동은 남쪽 대은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4개의 등성이와 골짜기 사이에 마을과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동쪽 등성이는 평산동과 경계를 이루고서쪽 등성이는 경산읍과 경계를 이룬다경산읍과 경계를 이룬 등성이는 동산이라 하는데이 동산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경산읍 쪽에 있는 것은 동산(정수장 있는 곳), 사동 안쪽으로 뻗은 등성이는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율산(말매못공원 있는 곳)이라 불렀다이 동산에서 경산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산고개백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지고개라 하였다또 사동 동쪽 평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웃각단에 있어서 웃고개라 하였다지금은 개발로 등성이가 거의 평지로 변했지만사동과 대은산 사이에 개통된 삼성현로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이유가 바로 이 4개의 등성이를 가로질러 길이 났기 때문이다.

 

▲ 산막골과 안삼지 전경 
 

 

그리고 동산 동쪽 차가운 샘이 있어 냉천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 골짜기를 냉징이골산막지 안의 안삼골서낭지마을 안쪽의 서낭지안골동산에 있는 작은 골짜기를 작은골짝두못 안쪽에 있는 골짜기를 짝두못안골 등이라 불렀는데지금은 개발로 모두 잊혔다들판은 저수지 아래에 펼쳐져 있었는데깐치못(작지밑의 깐치못밑들냉징이못밑의 냉징이못밑들말매못밑의 말매못밑들안삼못밑의 안삼못밑들짝두못밑의 짝두못밑들 등이 있었는데 이 또한 택지 조성으로 모두 사라졌다.

 

▲ 저수지

 

▲ 말매못공원 전경 
 

 

조선시대 저수지로는 뱀골 북쪽 말을 매어 놓고 물을 먹였다는 데서 유래한 말매못(마관지)이 있는데이 저수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마관제(馬館堤)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현재 말매못은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여 말매못공원이 되었다또 경산시립박물관이 있는 산은 까치를 닮았다고 하여 까치산이라 하였다이 산 옆에 있던 작지(까치못)는 여지도서에도 등재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인데현재 매립되었다또 동산 북쪽 계양동 600번지에 장산제가 있었는데마을에서는 반징이못이라 불렀다이 저수지는 여지도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는데계양동이 개발되면서 매립되었다.

 

▲ 냉징이골과 냉천지 전경 
 

 

일제시대 이후 축조된 저수로는 뱀골 남쪽 냉천골에 늘 차가운 물이 솟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냉천지(냉징이못)가 있다특히냉천은 삼복더위일수록 더욱 차가워서 피부병 환자가 목욕하면 효험을 얻었다고 전한다(경산군지(1971)). 이외 작은사동 남쪽 산에 막을 치고 제당으로 이용하는 곳에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산막지(山幕池), 산막골 안쪽에 있다 하여 안산막지(안삼지), 동산 북쪽의 반징이못말매못 서쪽의 짝두못서낭지마을 옆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서낭지 등이 있었으나모두 개발로 매립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말매못냉천지안삼지 3곳이다.

 

▲ 유교문화의 상징재실

사동에는 조선시대부터 한 마을에 재실이 3개나 있었다바로 이 마을의 토착 성씨인 청주한씨의 산천재초계정씨의 이유재달성서씨의 대원재이다.

 

▲ 산천재 전경 

 

▲ 산천재기게판문 

 

청주한씨는 원래 서울에 살았는데한만손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피해 성주로 내려왔다또 그의 증손 고봉 한순은 성주에서 1592년 상방동으로 이거하여 청주한씨 경산 입향조가 되었다그의 사후 아들 한경기와 한경조가 1632년 부친의 산소 옆에 초가집 재실을 짓고 재호를 산천재라 하였는데이것이 산천재의 시초이다이때 산천재를 짓고 남은 부재로 한순이 기거하던 집을 중수하였는데그것이 상방동에 있던 고봉당이다산천재는 현재 사동 냉천골에 있다. 1632년 산천재 건립 당시 한경조가 쓴 산천재기한계원(1814~1882)이 쓴 산천재중건기, 1989년 한응유가 쓴 산천재재중건기산천재 현판낙유루 현판 등이 걸려 있다.

 

▲ 산천재 현판

 

이중 산천재 현판에 쓰인 상원경신유두절(上元庚申流頭節)’이라는 날짜 표기는 주역과 관련 있다갑자 앞에 붙은 상원(上元)은 삼원(三元중의 하나인데삼원은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으로 나뉜다서력으로 환산하면 상원은 18641923중원은 19241983하원은 19832043년이다이 사이 경신년은 1920, 1980, 2040년인데상원경신은 1920중원경신은 1980하원경신은 2040년이다그러므로 현판은 1920년 6월 15()에 제작하였다.

 

▲ 이유재 사진(출처 : 경산의 문화유적 기문)
 

 

이유재는 고려말 초계정씨 경산 입향조 양헌 정연(족보상 정인)을 배향하는 묘소재이다정연은 1357년 청주목사로 있을 때 채하중이 공민왕의 반원 개혁에 반발하여 역모를 일으켰는데여기에 연루되어 경산으로 귀양 왔다가 이듬해인 1358년 사망했다고려사에서 정연은 사람됨이 음률에 정통하고 예에 밝다고 기록되어 있다상방동에 살던 후손은 남천면 협석리(협석파), 백천동(천동파), 옥곡동(옥곡파), 계양동(동계파), 압량읍 인안리(인각파등 여러 소문중으로 나뉘었다임란 때 경산의 의병장 정변함·정변호·정변문은 그의 후손이다이유재는 사동으로 이거한 천동파에서 1879년 건립했다가 1971년 중건하였는데, 2005년 사동 전체가 택지로 수용되고, 2010년 사동에 삼성현로가 개설되면서 폐철되었다정면 4측면 1칸에 현판과 1905년 순국한 애국지사 송병선이 쓴 이유재기가 있었다.

 

▲ 대원재 사진(출처 : 경산의 문화유적 기문)

 

대원재는 달성서씨 서문태의 후손이 사동으로 이거하여 지은 묘소재이다사동 336번지에 있었는데이 또한 사동 지역 개발로 폐철되었다정면 5측면 1팔작기와지붕에 기문은 없었고대원재 현판만 있었다현재 대원골 사동문중 묘지에 대원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놓았다.

 

▲ 아들 낳기를 바라는 전설이 서린 사동

사동에는 기자신앙인 아들 낳기를 바라는 전설이 둘이나 전한다하나는 당말래이 전설이고다른 하나는 삼형제 바위 전설이다당말래이 전설은 사동에서 백천동으로 넘어가는 서낭지고갯길에 암당과 수당이 있었는데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기도를 올린 후 떡을 놓고 갔다그러면 여기에 사는 토끼와 여우두꺼비가 나타나 서로 먹으려고 다투었다하루는 꾀 많은 토끼가 먼저 이 떡은 잘생긴 사람이 먹어야 하는데지금 잘생긴 사람이 없으니귀가 잘생긴 내가 먹겠다.”라고 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여우가 나는 쓸개가 하나 더 있으니 내가 먹겠다.”라고 했다그러자 또 옆에 있던 두꺼비가 나는 배에 황금을 가지고 있고등에는 험한 태산을 지고 있으니 내가 먼저 먹겠다.”라고 하면서 다투었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 셋은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삼형제 바위 전설은 사동 남쪽  냉천골에 있는 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산위에 크고 작은 세 바위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동쪽에 있는 것이 가장 커서 큰바위가운데 있는 것은 바위 한 개에 작은바위 하나가 얹혀 있고서쪽에는 큰바위 하나에 작은바위 두 개가 얹혀 있었다그래서 이 바위를 삼형제바위라 하였는데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리면 효험을 본다고 한다(이상 경산의 전설과 민담』 참고).

 

 

◆ 은거 시인 갈헌 한동유 선생

 

이러한 마을에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이자 시인인 갈헌 한동유(18851961) 선생이 살고 있었다그는 성주에서 살다가 상방동으로 이거한 청주인 한순의 후손이자한시승의 장남으로 사동 뱀골에서 태어나 어릴 적 산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밀양의 한학자 소눌 노상직성주의 한학자 공산 송준필영천 청통의 한학자 낭산 이후 등에게서 사사하였다한일합방이 되자 세상과 담을 쌓고 학문 수양과 후학 양성 및 시를 쓰면서 고향 마을 사동에 은거하였다별세 후 1966년 스승 송준필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송수근 선생이 행장을 쓰기도 하였다.

 

▲ 노년의 갈헌 한동유 선생(출처 : 갈헌한시선)
 

 

그가 태어난 때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특히그가 10세이던 1895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져 조선 500년 동안 관리 등용문으로 인식되던 과거제가 폐지되고추천과 관리양성기관을 통하여 관리가 되었다그에 따라 어릴 적부터 과거 중심의 학문을 하던 수많은 지방의 유생들은 중앙이나 지방 고위직의 추천을 받아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고그렇지 않으면 한양의 신식교육기관을 통해야 가능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에서 한학을 공부한 갈헌 선생은 일찌감치 벼슬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학문 수양에만 힘썼다시대는 급변하고 있었지만성리학 경서를 탐독하고 사라져가는 조선의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지켜내고 있었다.

 

▲ 한동유의 문학 세계

그의 이러한 처세는 성리학자들이 갖는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었다세상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고물러나서는 자연에 은거하면서 시문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그런데갈헌 선생이 살던 시기는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였으나나라의 부재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펼칠 수 없던 시대였다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는 전원에 은거하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우국지정의 시사계절의 경치를 노래한 경물시눈앞의 사물을 즉흥적으로 노래한 즉사시마음속에 품은 갖은 생각을 노래한 술회시수연이나 재실 중건의 축시향촌의 경치를 노래한 즉경시벗들의 안부를 묻는 기증시추모하는 만시 등 다양한 내용의 시를 창작하였다그의 사후 후손과 지인들이 유작을 묶어 한문본 갈헌문집(1966)으로 출간하였다또 이 문집을 국역하여 손자 한탁근이 갈헌한시선(2008)으로 출간하였다.

 

▲ 갈헌문집 

 

그의 삶과 시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부의 전원생활이란 시를 김백호가 번역한 그대로 인용한다.

 

장부의 전원생활

 

장맛비에 숲은 저녁 기운 찬데

벌레의 넋 새소리가 천 가지로 나니,

오래된 돌이 있는 청산은 정이 깊어 흡족하고

박꽃 핀 띳집은 산업하여 편안하네.

구름 인 하늘엔 솔개가 천천히 날고

세월을 지낸 소나무는 올곧게 서 있는데

장부가 세속의 번거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가슴 속엔 한 조각 붉음이 밝구나.

 

이 시는 전체적으로 화자의 감각적 심상이 두드러져 있다. 1, 2행에는 청각, 3, 4행에는 시각, 5, 6행에는 원경과 근경, 7, 8행에는 외부와 내부 세계의 대조를 이룬다. 1행의 숙우(宿雨)’는 장맛비로 번역했지만어제부터 내린 비로 나뭇가지가 촉촉하게 젖어 밤기운이 차가운 분위기를 뒷받침한다그 속에 온갖 소리로 지저귀는 벌레와 새 소리는 화자의 복잡한 심경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그러면서 화자는 자기가 사는 주변의 산과 집을 둘러보며 푸른 산과 그 속에 있는 온갖 돌들에게서 그윽한 정을 느끼고자신이 처한 초가집 지붕에 핀 박꽃만으로도 안분지족하는 모습을 보인다여기서 화자의 시선은 하늘로 올라가 유유히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솔개를 보고다시 아래로 내려와 오랜 세월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에 머문다이는 자유롭고 지조가 있는 갈헌 선생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그러면서 속세의 온갖 부귀영화는 막아버리고가슴 속엔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 어두워져 가는 밤에 빨갛게 빛나고 있다는 삶의 자세를 다잡는 것으로 시를 마감하고 있다계절로 봐서 늦여름이나 초가을로 짐작되는데시가 정갈하다.

 

▲ 경산 곳곳에 있는 갈헌 한동유 선생의 흔적

그가 살아간 시대는 각 문중이 조상을 추향하기 위하여 재실을 창건하거나 중건하는 문중현양사업이 유행하였는데학문적 명망이 높은 선생에게 상량문이나 중건기축시비문 등을 많이 부탁하였다대표적인 곳이 경산 조영동 밀양박씨의 일감정자인 울옥리 함양박씨의 덕양재용성면 부일리 경주김씨의 첨모재대종동 경주최씨의 천석정남산면 하대리 도동서원의 홍유후단소남산면 조곡리 탐진안씨의 상경재와 이여정안심면 숙천동의 원모재와 사복동 경주이씨의 오우당압량읍 내리 김해김씨의 긍구정남천면 금곡리 청주한씨의 동강재와 충주석씨의 경재정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밀양박씨의 만화정대구시 연경동의 복현재 등이다이중 남산면 조곡리 조곡서원 안에 게판문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는 그의 작품을 필자가 번역하여 인용한다.

 

▲ 조곡서원 소재 게판문 
 

 

근차안씨상경재운

 

제를 지내던 터는 신선의 거처처럼 아름다우니

자인 남쪽 끝인 조곡의 시냇가이네.

충현사 사당에는 늙은 측백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안씨의 뜰에는 덕을 기리는 회화나무가 무성하네.

고요한 밤 물소리는 방 앞에서 거문고를 타는듯하고

맑은 새벽 새 발자국은 섬돌에 글자처럼 살아나네.

사대부들의 공론은 영원히 전해지니

해마다 제사를 올리며 감회를 펼치네.

 

각 재실의 상량문과 문중의 묘소에 세운 비문도 많이 있다대표적인 것이 자인 단북리 밀양박씨의 모현재에 있는 모현재상량문과 자인면 읍척리 양천최씨의 경의재에 있는 경의재기갑제동 나주임씨 문중 묘지의 나주임씨오세묘단비」 등이다자인면 단북리 모현재의 모현재상량문에 쓴 육위가 중 한편만 소개한다.

 

들보를 동쪽 저 너머로 던지니,

도천산의 빛은 푸른 하늘을 잡아당기고

아침 기운은 해를 이고 생기를 북돋우니

완연한 만물의 기운이 북쪽 하늘에 있네.

 

 

◆ 에필로그

 

이처럼 갈헌 한동유 선생은 경산 사동에서 한평생 시와 글을 쓰면서 은둔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시대가 바뀌어 가치관이 변한 지금 그가 창작한 수많은 작품은 문중 후손과 몇몇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억되고사동의 변화와 더불어 점점 잊혀가고 있다세상이 물질 만능으로 가득 차 정신적 허전함으로 고뇌하는 경산인들에게 가끔 사동 마을 터에 들어선 커피숍에 앉아 대은산을 바라보며 갈헌 선생의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 이홍우 : (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이홍우/정명환 작가


<자료 사진>
 

▲ 동부동 행정복지센터 전경 
 
▲ 사동초등학교 
 
▲ 사동중학교 
 
▲ 사동고등학교 
 
▲ 사동이주민 망향비 
 
▲ 청주한씨재실(산천재)
 
▲ 산천재 비문
 
▲ 냉천지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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