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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광산의 비극적 이야기를 품은 평산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9) - 평산동
기사입력 2024-05-28 오후 2:08:56
▲ 평산동 전경

▲ 평산동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평산동은 15세기 경산현 동면 동을산리(冬乙山里)였다. 18세기 경산현 동면 평산리(坪山里)로 이름이 바뀐 후 1914년 경산군 압량면 평산리가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선돌배기로 알려진 각단은 평산1동, 동을산 내지는 들미라 부른 마을은 평산2동으로 분리되었다. 1987년 경산읍에 편입되었고, 1989년 경산시 평산동을 거쳐 1995년부터 경산시 동부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평산은 흔히 경산평산과 자인평산으로 구분된다. 원래는 동을산리 또는 평산동이 하나의 마을이었는데, 19세기 중반 들미라 부르던 마을의 양지길을 기준으로 동쪽은 자인현, 서쪽은 경산현으로 분리되면서 자인평산(현 점촌동)과 경산평산(평산2동)으로 나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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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동 지적도(1911년)
평산동은 크게 세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산동 마을 이름이 유래된 동을산리(들미), 마을에 길쭉한 돌이 서 있어 붙여진 선돌배기마을, 들미 북쪽 숲 안에 조성되어 붙여진 숲안마을 등이다. 이외에 일제시대 탄광이 개발되면서 조성된 상동이라는 마을도 있었다.
▲ 들미·동을산리·평산
▲ 들미마을 전경
동을산리는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는 조선 초, 멀리는 8세기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들판과 산이 붙어 있다고 하여 처음 순우리말로 ‘들미’라 불렀다. ‘들메’라 하지 않고 ‘들미’라 한 것은 특이한 음운변화 현상이다(「음운 규칙의 예외에 대한 연구」, 『지명학』 2호). 동을(冬乙)은 ‘들’의 우리 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고, 산(山)은 우리말 ‘메’ 또는 ‘미’에 해당하는 한자를 따온 것이다. 이는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8세기 신라 때 방식이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동을산이라는 한자를 버리고 ‘들미’를 한자로 다시 표기하게 되었는데, 그때 ‘들’을 의미하는 평(坪)과 ‘미’를 의미하는 산(山)을 써서 ‘평산’이 되었다. 이는 남산면 평기리(坪基里)가 원래 ‘들기’라 불렀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 마을은 1911년 22가구 있었다. 현재는 평산2동이다.
▲ 선돌배기마을
▲ 선돌배기마을 전경
선돌배기는 들미 동북쪽 자인 가는 도로 가까이 있는 마을이다. 한자로는 입석리(立石里)라 하였는데, 정식 행정구역 명칭은 아니다. 마을 앞에 흐르는 내를 기준으로 동쪽은 점촌(옛 자인평산)이고, 서쪽이 선돌배기마을이다. 지금은 대구한의대 사거리에서 자인가는 도로까지 왕복 6차선 삼성현로가 개통되었다. 선돌배기는 ‘선돌’과 ‘배기’의 합성으로, 선돌은 ‘돌이 서 있다’의 뜻이고, ‘배기’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돌배기는 돌이 서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 마을 67번지와 59번지 사이에 각이 진 긴 돌이 서 있다. 67번지는 원래 밭이었고, 57번지에 집이 있었다. 나중에 67번지에도 집이 들어서서 선돌은 집과 집 사이에 걸쳐 있다.

▲ 선돌
돌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청동기 시대 지석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경계를 구분하는 경계석이라는 것이다. 이 돌이 청동기 시대 지석묘라면 이 지역에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고, 경계석이라면 평산이 자인현과 경산현으로 나뉘던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는 증거가 된다. 어찌 되었든 이 돌이 서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겨 선돌배기라 하였고, 행정구역은 경산현 동면 평산동에 속했다. 1911년 당시 이 마을은 총 13가구 살았다. 현재는 평산1동이다.
▲ 숲안마을
▲ 숲안마을 전경
숲안마을은 들미마을과 후신지(준신지) 사이에 있는 각단이다. 후신지 남쪽 351번지 구릉에숲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 숲의 안쪽에 있다고 하여 ‘숲안’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 동북쪽과 선돌배기마을 사이 당바래기라는 들판 104번지에는 사당(당집)도 있었다. 이곳에서 주민들이 매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는 도로에 편입되어 흔적도 없다. 이 마을 또한 조선시대부터 존재했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911년 당시 이 마을에 15가구 살고 있었다. 현재 평산1동에 속한다.

▲ 평산동 지명지도
◆ 삶의 터전과 흔적
▲ 저수지
▲ 풍락지(동을산제)
평산동 저수지는 과거 동을산제(冬乙山堤), 하동을산제(下冬乙山堤), 작제(鵲堤), 후신지(後新池) 등 4개가 있었다. 동을산제는 평산리의 원래 이름인 동을산리 들미마을 바로 옆에 있는 저수지라서 이름이 그렇게 명명되었다. 이 저수지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자료는 『여지도서』인데, 16세기경 축조되었다. 당시 둘레는 538척, 수심이 4척 5촌이었다. 『조선지지자료』에서 평산지(坪山池)로 바뀌었다가 현재 풍락지(豊樂池) 또는 들방못으로 부른다.
▲ 갈지(하동을산제)
하동을산제는 동을산리 아래에 있다 하여 명명되었다. 이 또한 『여지도서』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 16세기경 축조되었다. 당시 둘레는 500척, 수심은 5척이었다. 『경산군지(1933)』에서 가내지(家內池)로 바뀌었다가 현재 갈지(葛池)로 부른다.

▲ 작지 지적도
작지는 까치못이라 부르는데, 원래 평산리에 속하였다가 현재 사동에 편입되었다. 이 또한 『여지도서』에 처음 보이며, 16세경 축조되었다가 1990년대 말 매립되어 현재 경산시 법원, 우체국 및 주거 단지 등이 조성되어 있다.
▲ 후신지 전경
후신지(딧못·준신지)는 19세기 말경 축조되었다. 경산현읍지나 기타 자료에 보이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마을 뒤에 새로 조성했다고 하여 후신지라 명명했다.
▲ 산과 골 및 들판
▲ 백자산, 대은골, 코발트광산, 골프장 일대
▲ 대은산
평산은 남쪽으로 해발 486미터의 백자산이 가로막고 북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나지막한 산들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백자산 능선이 북쪽 사동과 평산동 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멈춘 대은산(안산)이 있다. 대은산 골짜기를 예전부터 대은곡(大隱谷)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대원골로 부른다. 이 골짜기에 일제시대 광산이 있었다. 현재는 백자산과 대은산 골짜기에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이외 평산 서남쪽 딸박골, 딸박골 서남쪽 부들이 많이 있다 하여 늘버리, 상동 서쪽 샘이 있다 하여 새암골, 새암골 바깥 바끄새암골, 새암골 남쪽 범이 살던 굴이 있다 하여 버뭇골, 안산 서남쪽 물방아가 있다 하여 물방골, 물방골 서쪽 참꽃이 많아서 꽃밭딩이, 꽃밭딩이 서쪽에 있는 큰골, 큰골 서쪽 부엉이 집이 있던 바위 더미가 있어 부엉디미, 숲안마을 서쪽의 어븐골 등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개발로 거의 사라지거나 잊혀졌다.

▲ 붕디미절벽
▲ 평산들판
▲ 후신지와 비둘재
또한, 옛날 자인현과 경산현의 경계 역할을 하던 고개가 있었는데, 형상이 비둘기를 닮아서 비둘재라 하였다. 한자로 구현(鳩峴)이라 한다. 이 비둘재에 새말냉이주막을 비롯한 주막이 몇 개 있었다. 들판으로는 선돌배기마을 돌이 박혀 있던 돌빼기들, 후신지 밑에 있는 딧못밑들, 선돌배기 서쪽 길다 하여 진배미들, 갈못 밑에 있다 하여 갈못밑들, 숲안마을 동쪽 옛날 사당집이 있던 당바래미들, 들방못 밑에 있다 하여 들빵못밑들, 비들재 동쪽 장승이 있어서 장승배기들 등의 들판이 있었는데, 이 또한 경지정리를 하면서 모두 잊히고, 현재는 그냥 평산들이라 부른다.
▲ 기타 삶의 흔적
▲ 대구미래대학 일대
일제 말기 평산동에 뜬금없이 지금의 파출소격인 평산주재소가 들어섰다. 당시 경산군 지역 주재소는 하양·자인·용성·진량·압량·남천·고산·와촌 등 각 면 단위에 하나씩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평산동은 마을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평산주재소’를 설치하고 오노에 키에치로라는 일본인 순사 1명을 배치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후술하게 될 코발트광산과 관련있다.
▲ 선돌배기와 남성초등학교 일대
이외에도 평산동에는 남성초등학교가 있고,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대구미래대학교가 있었다. 대구미래대학교 자리에는 현재 경북권역재활병원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평산 남쪽 대은골 일대에는 인터불고 경산컨트리클럽 골프장이 온산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마을의 대은골에 근대와 현대 두 시대에 걸쳐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 일제의 자원 수탈 현장이 된 평산동 대은골 보국코발트광산
▲ 코발트광산 일대
대은산 동쪽 골짜기를 대은골이라 하는데, 여기에 일제시대 금과 은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뒤 전국의 지하자원 채굴권을 일본인과 조선인들에게 허가했는데, 이곳 평산동 대은골에 금과 은이 난다고 소문나서 광산이 들어섰다. 그런데, 금과 은은 별로 나오지 않고 코발트라 부르는 광석이 대량 채굴되었다.
코발트는 합금에 사용되는데 높은 온도에도 잘 견디고 부식과 마모에도 강하기 때문에 현재는 가스터빈 날개, 제트기 엔진, 수술용 의료 기구 등으로 많이 사용된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유리나 도자기의 안료로 많이 사용되었고, 일제시대에는 군수물자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코발트 광산은 일제 때 주로 개발되었는데, 경남 함안군 여항면의 함안동광산, 함북 회령군 팔을면의 굴륵광산, 강원도 금화군 원동면 장연리의 원동금산, 경북 경산군 압량면 평산동의 보국코발트광산(이궁코발트광산) 등에서 채굴되었다. 이중 평산동 보국코발트광산이 규모가 제일 컸다.
▲ 평산동 코발트 광산의 역사
평산동 코발트광산(이하 보국코발트광산)은 일제시대 경산군 압량면 평산동과 사동에 걸쳐 있었다. 1914년 후지타치 요타로가 이곳에 금은비석 광산을 설립한 것이 최초였다. 1918년 미야케아 키타로우가 역시 이 지역에 금 아연 광산을 또 설립하였다. 그 후 이 광산은 방치되었다가 1937년 6월 대구 덕산동에 살던 박춘길이 평산동 대은산 대은골 일대 38만 평에 금과 은을 채굴하기 위하여 광업권을 다시 설정하고, 그해 8월 춘길광업사무소를 개소하였다. 그러다가 여기에 코발트가 채굴되자 일본인 광산업자 니노미야 타이조오에게 광업권을 이전했다.
니노미야는 1918년 오사카시 니시구 인나카초에서 광산용 기계 공구와 석탄을 판매하던 이궁상회를 운영하였다. 1930년대 조선으로 건너온 그는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전문 광산업자로 변신하였다. 처음에는 경북 선산군 무을면 상송동에 소림광업주식회사와 충북 대전 구직면에 금병산금산사무소를 개설하고 일대 광업권을 얻어 채굴하였다. 1940년 대구 칠성동으로 이사하여 경산군 안심면 일대 719만 평에 달하는 면적에 금은 광업권을 얻어 금과 은을 채굴하였다. 그러다가 박춘길 소유였던 춘길광산에 코발트가 발굴되자 1941년 2월 그에게서 광업권을 이전받아 그해 7월 보국코파르트사무소(報國コパルト事務所)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코발트를 채굴하였다. 이후 그는 대구 동운정(현 동인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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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광산 삭도(사진은 일립광산의 삭도임 - 일본회엽서)
보국코발트광산의 갱도는 평산과 사동 쪽 2곳에 있었는데, 1943년 사동 쪽 갱도와 가까운 제련소에서 상방동 경산선광소와 경산역을 연결하는 가공삭도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944년 1월 완공된 후 경산선광소를 보국코발트광산제련장으로 명칭을 바꿔 허가받았다. 이후 약 1년 6개월에 걸쳐 코발트를 채굴·제련하여 삭도를 통하여 사동-제련장-경산역으로 이어지는 운반 경로를 이용하여 일본으로 반출했다. 이후 해방과 더불어 이 광산은 폐광되었다. 해방 후 이곳은 30여 년간 방치되었다가 1977년 대한중석광업(현 대구텍)이 채굴권을 획득하였다가 포기하였다.(이상 조선총독부 『관보』, 「報國コバルト鑛山産含コバルト砒鐵鑛」, 경산신문 참고)
▲ 자원 수탈의 장이 된 대은골 보국코발트광산
평산동 대은골 보국코발트광산은 초기 금과 은을 채굴하기 위한 광산으로 개발되었으나 이곳에 코발트가 채굴되자 일본인이 채굴권을 획득하여 대량으로 지하자원이 채굴되어 일본으로 방출했다. 이곳에서 채굴되던 코발트가 전국에서 생산되던 그 어떤 코발트보다 양과 질의 측면에서 우수하다 보니 일제가 개입하였다. 특히, 보국코발트광산 사장 니노미야는 자신의 광산을 군수업체로 지정받아 경상도 지역에서 동원된 징용자들을 노무자로 활용하였다. 징용자들은 주로 현재 평산2동에 살았는데, 이곳이 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어 일명 ‘광산사택’이라는 촌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징용자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오치이시 시게사부로 경산경찰서 서장이 이곳 마을 단위에 평산주재소를 설치하였다. 여기서 사망한 징용자들은 평산동과 사동 사이 갈지라 부르는 못 북쪽 산 중턱 23번지 일대에 묻었는데, 그 수가 많아 공동묘지처럼 조성되어 있다.
▲ 일제시대 징용자 집단 무덤 추정지(갈지 안쪽)
현재 평산동 보국코발트광산은 수직과 수평 갱도가 보존되어 있고, 상방동의 제련장은 방치되어 있다. 일제가 지하자원을 수탈한 전국 유일의 유적인 제련장은 경산시에서 보존이나 관리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코발트 광산에 얽힌 제련장을 잘 보존하여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제련장과 관련한 이야기는 상방동 편에서 다루겠음).
◆ 비극적 사건 현장이 된 대은골 보국코발트광산
일제시대 자원 수탈의 현장이 되었던 평산동 보국코발트광산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 현장으로 바뀌었다. 전쟁 전 박헌영의 남로당원 및 여운형의 보안대자원경찰대 등 좌익 세력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공비가 되어 전국 곳곳에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이에 정부는 좌익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는데, 이중 미전향자는 사형이나 교도소에 수감했고, 전향자는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관리하였다. 그러나 남은 세력들은 지속적으로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선동 및 게릴라전 등을 펼쳤다. 당시 경산 지역에서도 경찰서가 공격을 당하였는데, 일례로 1949년 남산면 남산지서에 좌익 공비들이 습격하여 경산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관 5명이 전사하고, 진량면 현내동에도 나타나서 민간인을 학살하다가 경찰관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영남일보). 그러자 남산면 내사림동, 압량면 유곡동(지름골) 등 깊은 산골에 있던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져 마을 전체가 폐철되는 일이 벌어졌다(현내동에서 일어난 공비의 민간인 학살은 현내동 편에서 서술 예정).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남침하자 남한 정부는 이들이 후방에서 봉기를 일으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한 근거를 제공한 것이 바로 박헌영의 이른바 ‘후방봉기설’이었다(「6·25전쟁, 1128일의 기억」, 중앙일보). 이 때문에 이미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및 예비 검속을 통하여 체포된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일정한 장소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 코발트광산 희생자 위령탑
그런데 보도연맹이 결성될 때 정부에서 지역별로 가입 인원을 할당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들도 땅을 나눠준다는 꼬임에 빠져 당원으로 가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예비 검속을 통해 체포된 사람 중에는 좌익 공비들에게 단순 심부름을 했거나, 이도 저도 아닌 억울한 농민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대구교도소 수감자는 1,402명이었고, 보도연맹원 희생자는 전국적으로 3,593명이었다. 이 중 경산·청도·영천 지역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이곳 보국코발트광산에 끌려와 희생되었다. 이후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하여 당시 희생자 중 상당수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내었고, 2016년 대법원에서도 승소하였다. 현재 보국코발트광산이 있던 곳에는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세워져 매년 위령제를 열고 있다. 이곳을 경산코발트광산이라 부르는데, 원래 이름인 ‘보국코발트광산’으로 바꾸든지, 굳이 지명을 넣어야 한다면 ‘경산보국코발트광산’이라 하였으면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바로 선다.
◆ 에필로그
현재 평산동은 골프장 등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옛날 의병장 승적의 손부에게서 빼앗은 대은골을 이제는 외지인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근대와 현대 일본인과 지배자들이 이곳 평산을 이용했다면, 이제는 외지 부동산업자와 전원의 삶을 즐기려는 외지인들에 의해 조상이 물려준 땅과 들판, 대은골 골짜기가 파헤쳐지고 있다. 언제쯤 들판처럼 평화로운 시절이 올까? 답사 차 들른 선돌배기 마을에서 본 자전거를 타고 가는 촌로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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