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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첫 도량 초개사 터가 있고 그의 아들 설총이 태어난 유곡동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동지역 편(12) - 유곡동(2)
기사입력 2024-06-18 오전 9:10:41
경산을 삼성현(三聖賢)의 고장이라고 한다. 삼성은 세 명의 성인인 원효, 설총, 일연을 가리킨다. 이중 고려 국사 일연 선사가 탄생한 곳은 경산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마을은 전하지 않는다. 원효와 설총이 살던 마을은 여러 자료를 통해 전하는데, 바로 현재 여천과 유곡이다. 이 두 마을은 과거 유등천리였는데, 조선 후기 여천과 유곡으로 나뉘어졌다. 유곡에는 성사 원효가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처음으로 도량(道場)을 연 초개사 터가 있고, 그의 아들이자 유학의 거두이며 이두를 집대성한 설총 선생이 탄생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유곡동에 가면 거정대와 재실을 먼저 보고, 삼성현로 지하 통로를 통하여 지름골로 가서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상기하면 유곡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 유음곡동(지름골) 전경
◆ 원효가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창건한 초개사(신림사)가 있던 지름골
▲초개사-금당사-신림사로의 흐름
▲ 초개사 전경
유곡동 골짜기 유곡지 제일 안쪽에 현재 조그마한 사찰이 하나 있다. 아래에 불광사라는 절이 있고, 그 절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복숭아밭이 있는데 그 안쪽 작은 사찰이 초개사이다. 이 절을 초개사라 명명한 이유는 이곳이 원효가 창건한 ‘초개사(初開寺)’ 터라고 추정하였기 때문이다.
원효가 창건한 초개사(初開寺)는 고려 때 금당사(金堂寺), 조선 때 신림사(新林寺)로 개칭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을 ‘초개’라 한 것은 원효가 처음으로 절을 지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자인현읍지(1832)』에 신림사는 신라 때 원효가 창건하여 이후 금당사라 하던 것을 1620년 승 백양이 신림사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원효는 처음 출가하여 자기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라는 절을 짓고 나중에 ‘금당사’로 개칭하였고, 조선시대 신림사가 되었다. 이후 신림사는 1832년에서 1888년 사이에 폐사했다. 그러다가 2007년 이곳 언덕에 승 청풍(淸風)이 원효의 초개사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지금의 초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영남대학교박물관은 점촌동 절골(168번지 일대)을 발굴 조사한 결과 기와가 발견되어 그곳을 신림사 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참고로 기와가 발견된 점촌동 들미마을은 원래 경산현 동면 평산동이었다가 19세기 중엽 평산동 일부가 자인현 서면 평산동이 되었고, 1914년 압량면 점촌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므로 신림사가 이곳 점촌동 들미마을에 있었다면 조선시대 자인현읍지에 등재될 이유가 없다. 정확한 증거물은 땅속에 있을 것이니 발굴 조사를 통하여 확인해 보면 확실한 결론이 날 것이다.
▲ 신림사 관련 유물

▲ 신림사5층석탑(왼쪽-초개사 소재, 오른쪽-경산시립박물관 소재)
『자인현읍지』에 원효가 창건한 금당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자리에 5층 석탑만 홀로 서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승 백양이 신림사를 세웠는데 조선 후기 폐사된 후 석탑만 서 있었다. 일제 때 일본 가고시마현 출신 의사 구메 에이키치(1884∼1972)가 탑 일부를 사정동 자기 집 정원으로 가져가 장식해 놓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돌아갈 때 그대로 두고 갔다. 그곳에 1951년 경산중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탑을 학교에서 관리하다가 1999년 계양동 계양정수장[경산정수장]으로 옮겼다. 또 경산시립박물관을 개관할 때 그곳으로 옮겨 와 야외에 세워 놓았다. 현재는 3층석탑으로 부르며 고려 때의 석탑이라 기재되어 있다. 한편, 탑이 있던 원래 장소인 현 초개사에는 ‘초개사5층석탑’이라 하여 옥개석 2개만 남아 있다. 둘을 합쳐야 할 것인데, 각각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쉽지 않다.

▲ 홍유후설선생신도비
그리고 현 초개사 대웅전 앞 계단에는 ‘홍유후설선생신도비’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1913년 지역 유림이 신림사 폐사 터가 설총이 태어난 곳이라는 자료에 근거해서 세웠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은 비석이 하대리 도동서원에도 있다. 도동서원은 1864년 설총을 배향하기 위해서 도동단을 설치하였다가 1923년 도동재를 건립하고, 2007년 경모사를 건립하여 2010년 도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서원 안에 1926년 설총의 가묘와 신도비를 탁본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도동단을 세울 때 유곡에 있던 비석을 가져오려 했으나 그곳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모방비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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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림사 막새기와 명문(출처:한국문화재단)
한편, 2010년 삼성현로 공사를 할 때 점촌동 35-1번지에서 고려 때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신림사(新林寺)’라 새겨진 암막새 조각과 ‘신수사(新數寺)’라 새겨진 암키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유곡동 신림사를 중건할 때 점촌동 가마터에서 기와를 구운 것으로 보인다.
▲ 신림사 관련 문학 작품
신림사가 워낙 큰 사찰이다 보니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들도 자인을 방문하면 반드시 이곳을 찾았다. 그중 자인현감 이적의와 봉화에 살던 선비 이항배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적의(1652∼1725)는 영천 출신으로 제30대(1706∼1711) 자인현감으로 근무하였다.
열흘 넘게 병으로 누워 머리가 하얗게 셌지만
봄을 찾아 들판의 절에 우연히 들렀네.
산의 비는 끊임없이 시내 폭포를 이루고
숲의 바람은 무슨 일로 바위꽃을 시기하나.
신선의 길을 찾아가니 속세의 회포는 사라지고
앉아 마음을 깨달으니 티끌 한 점 없구나.
늙은 중의 진중한 뜻에 매우 감사해하니
작은 집에 객을 머물게 하여 차를 끓이네.
이 시는 벼슬아치로서의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번뇌를 신선의 세계로 묘사된 신림사에서 해소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늙은 중이 끓이는 한 잔의 차로 속세의 회포가 사라짐을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항배(1683∼1736)는 경북 봉화 갈산리에서 태어났다. 19세가 되던 1701년(숙종27)부터 여러 차례 향시에 응하여 합격하였으며, 1714년 상상(上庠, 성균관 생원)에 올랐으나 선비들이 엽관운동으로 벼슬을 얻으려는 것을 보고는 곧 물러 나왔다. 그 뒤 향리에 갈음정사(葛陰精舍)를 지어 학문 수양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가 남긴 신림사 관련 두 편의 시는 자인에 있던 대흥사를 관람하고 신림사로 가면서 쓴 작품이다. 여기서는 한 편만 인용한다.
신림사로 가는 도중에 읊다
홀연히 말을 모는 대신 가마를 타고
병들어 바람의 위세에 겁이 나 머리를 내놓지 않았네.
절간의 차가운 종소리는 산 밖으로 떨어지고
강촌의 고목은 눈 속에 떠 있네.
설총의 옛집은 어느 곳이고
서씨의 선영은 어느 언덕을 가리키는가.
곧바로 창이 밝기를 기다려 몸조리한 후에
기이하게 노닐던 지난 자취 깊이 탐구하리.
*서씨선영 : 유곡동 신제지에 있는 사가정 서거정의 윗대 산소가 있는 거정대를 가리킴.
시인은 눈이 내린 후에 신림사를 찾은 듯하다. 사찰로 가는 주변의 자연 풍광과 인간의 사적지를 감각적 심상으로 대비하여 그곳의 특별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근처에 있던 설총의 집과 사가정 서거정의 윗대 묘소가 있는 거정대를 상기하면서 그들과의 일체감을 소망하고 있다.
◆ 유학의 거두이자 이두를 집대성한 설총이 탄생한 지름골
▲ 설총이 강학하던 지름골
현재까지 설총이 나고 자란 곳을 증명하는 제일 앞선 문구는 『자인현지(1786)』의 “현 서쪽 유등촌에서 나서 그곳에서 살았다.”와 「홍유후문집(1912)」의 “유곡에서 나서 유천에서 자랐다.”이다. 이 두 자료를 바탕으로 설총이 나고 자란 마을을 유천이니 유곡이니, 심지어 조선 멸망 후 자인현 사람들의 탄생 조작설(「설총의 압량 출생설에 대한 비정」)까지 나돌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단편적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이다.(조선 초기 설총을 경주 사람이라고 기록한 자료는 당시 자인이 경주부의 속현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 두 자료는 모두 정확하다. 단지, 후대인이 잘못 해석하였을 뿐이다. 유천과 유곡은 다른 마을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이 두 마을은 자인현 서면 대사동 유등천리(유천촌)였다. 그러다가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독립하면서 유등천(유천)과 유곡으로 분리되었다. “유천촌에서 나고 자랐다.”는 마을이 분리되기 전의 기록이고, “유곡에서 나고 유천에서 자랐다.”는 마을이 분리된 뒤의 기록이다. 현재 마을을 기준으로 위의 문구를 다시 해석하면 “유곡에 나서, 여천에 살았다.”가 된다. 그러므로 현재 유곡동이 바로 설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구체적으로는 현재 불광사가 있는 유음곡(지름골)이다.
자인현감 오횡묵이 1888년 9월 이곳을 순시하면서 남긴 시 한 편이 있어 필자가 번역하여 인용한다.
홍유후의 강학소 옛터에서 느낀 감회
지난날 홍유학 설총의 얘기를 듣고
오늘 아침 옛터를 둘러보았네.
꽃가지에 새는 한가하게 앉아 있고
이름 모를 풀은 바람에 누워 있네.
천 년이나 내려온 학문의 계통은
오랜 세대에 걸쳐 스승이 되었네.
동방은 군자 나라인데
문치는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당시 오횡묵은 유천과 유곡을 찾았는데, 유천은 여천, 유곡은 유천, 유곡 북쪽 몇몇 각단은 유곡이라 하였다. 오횡묵이 설총의 옛 강학소를 둘러본 곳은 바로 유곡동 지름골이었다.
◆ 최경회의 애틋한 사연과 자인현감의 명쾌한 판결
이외에도 유곡동 지름골에는 자인현감의 명쾌한 판결 이야기가 얽혀 있어, 주민들도 모르는 사연을 소개한다. 1888년 11월 15일 자인현 동헌 시중당에 70세 정도의 노인이 어떤 장성한 남자와 소년을 데리고 현감 오횡묵을 찾아왔다. 노인은 최경회(崔慶會)이고, 아들을 잃고 16세 된 손자와 유곡 지름골에 살고 있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이달 2일 농사짓는 소를 잃어버렸는데, 손자가 청도 성문 밖 푸줏간에서 자기 집 소머리를 보았다고 했다. 이에 노인과 손자가 푸줏간에 가서 소머리를 누구한테 샀느냐고 하니 황가란 사람한테서 샀다고 했다. 그래서 노인은 황가를 찾아가 따져 물으니, 황가의 자식이 지난 3일 자인장에서 사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청도 관아에 고발하니 솟값을 관아에 상납하라고 했다. 그 뒤 황가 부자를 찾아가니 소머리는 이미 삶아 먹어버렸고, 자기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집 밖에 숨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노인은 황가 부자를 데리고 자인 현감 오횡묵을 찾아와 억울한 사정을 말하였다.
이를 들은 오횡묵은 소를 잃어버린 노인을 나무라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 순간 현감이 황가의 아들을 보니 아버지를 보면서 살짝 웃고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현감은 또다시 최경회에게 소를 잃어버린 것 네 탓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황가 부자 편을 들었다. 그러자 또 황가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이를 본 오횡묵은 큰소리를 치면서 “너희는 진짜 부자지간이 아니다! 함께 도적질한 놈들이다!”라고 하면서 형틀에 매어 엄하게 곤장을 때렸다. 그러자 황가가 “우리는 부자지간이 아니고, 한마을에 사는 사람입니다. 소를 훔친 자는 저 아이인데, 일이 발각되자 나에게 도와주기를 청하기에 거짓으로 부자지간이라 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 황가 아들이란 놈도 자기가 소를 훔쳤다고 자백했다. 이에 현감은 형틀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 청도 사람 몇이 와서 황가의 억울함을 토로하자 현감은 “너희들은 도적을 풀어주기를 청하러 왔으니 도둑과 차이가 없다!”라고 하면서 이들도 구속하여 수감해 버렸다. 그러자 며칠 뒤 솟값 115냥을 가져와 상납하기에 현감은 최경회에게 주었다. 최경회가 고마워하면서 자기는 글자를 좀 안다고 했다. 현감은 그의 단정함에 매료되어 향교의 교임을 지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최경회가 젊었을 때 장의는 지냈으나 수임은 맡지 못하였다고 했다. 현감이 가련한 생각이 들어 겨울에 교임으로 차출해 줄 것이라 하였는데, 몇 달 뒤 최경회가 죽어버려 아쉬워했다고 한다.(이상 『자인총쇄록』 참고. 자인향교 청금록에 따르면 최경회는 1889년 11월 자인향교 도유사를 역임하였음.)
◆ 에필로그
원효와 설총이 자란 유천과 유곡은 자인·경산·압량이 교차하는 지역이어서 행정구역 개편 때마다 세 지역에 서로 합속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두 분이 태어나고 자랄 당시 그 마을의 행정구역은 압량군 노사화현(자인현)이었다. 이 사실을 두고 현재 주민들은 서로 ‘압량 사람이다, 경산 사람이다, 자인 사람이다’ 등 논란을 이어 오고 있다. 행정구역 변화를 안다면 이 논란은 종식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예를 살펴보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활동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 광개토대왕을 두고 중국에서는 자기들 변방 국가의 왕이었다 하여 ‘호태왕’으로 부르고, 우리는 고구려의 왕이었다고 주장하며, ‘광개토대왕’이라 부른다. 우리는 광개토대왕이나 고구려를 절대 중국 사람이나 중국의 변방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를 볼 때 과연 원효와 설총은 압량 사람일까? 경산 사람일까? 자인 사람일까? 헷갈리는 하루다. 유곡을 방문하면 이런 헷갈리는 생각도 한번 해보기를 바란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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