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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흥원과 건흥지가 있던 현흥2리
[경산곡곡 마을 이야기] 압량읍 편(9) - 현흥2리(건흥리)
기사입력 2025-04-01 오전 10:47:43
▲ 현흥2리 전경
◆ 프롤로그
현흥2리는 원래 ‘건흥리’로 불렸으나, 1911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마을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마을 이름이 사라졌고, 현재는 일부 주민만이 ‘건흥’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만, 그 유래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제 ‘건흥’에 얽힌 사연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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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흥2리 행정지도
◆ 역사와 유래
현흥2리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초기에는 압독국에 속했으며, 6세기에는 압독주 압량군 마사리, 8세기에는 장산군 마사리에 포함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경산현 건흥촌이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경산현 동면 건흥리로 불렸다(『경상도속찬지리지』). 1895년 경산현이 경산군으로 개편되면서 건흥동이 되었으며, 1911년 일제가 동리를 통폐합하면서 현창동의 ‘현’과 건흥동의 ‘흥’을 따 경산군 동면 현흥동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부군현 통폐합으로 압량면이 신설되면서 경산군 압량면 현흥동이 되었고, 일제시대에는 현흥2구로 불렸다. 해방 후 현흥2동이 되었다가, 1988년 압량면 현흥2리로 개편되었으며, 2020년 압량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압량읍 현흥2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앞건흥과 뒷건흥 두 개의 각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제시대 이후 과수원과 묘목 재배가 활발해져 현재도 도로변에 많은 묘목 농원이 자리하고 있다.
▲ 건흥·곤응·앞건흥
▲ 앞건흥 전경
건흥리(乾興里)에는 고려시대 여행자를 위한 공공 숙소인 건흥원(乾興院)이 있었다. 이 지역에 물이 많아 가뭄이 들어야 농사가 잘된다는 이유로 ‘마를 건(乾)’과 ‘흥할 흥(興)’을 써서 건흥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의 해석일 뿐이다. 고려 명종의 생일을 ‘건흥절’이라 불렀고, 거창군에 건흥사와 건흥산이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적인 성격을 띠는 명칭일 가능성이 크다.
건흥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등장하지만, 마을 자체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도입된 역참제도는 고려 성종 때 정비되었으며, 역참이 먼저 설치된 후 여행자 숙소인 원(院)이 생기는 구조였다. 건흥리 지역은 압량역에서 영천을 거쳐 경주로 가는 길목으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건흥원이 설치되었고, 이후 주변에 민가가 형성되면서 건흥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환상리의 신상과 구분하기 위해 ‘앞건흥’이라고도 불렸다. 1912년 당시 25가구가 거주했으며, 현재는 현흥2리로 불리고 있다.
▲ 뒷건흥·신상리
▲ 뒷건흥(환상3리) 전경
18세기경 건흥리 북쪽에 새 각단이 조성되었는데, 건흥리 뒤쪽에 있다고 하여 뒷건흥이라 하였다. 이 각단은 19세기 중엽 하양현에 편입되어 신상동이라 하였다. 1910년대 경산 진량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앞건흥과는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현재 하양읍 환상 3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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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흥2리 지적도(1912)
◆ 삶의 터전과 흔적

▲ 현흥리 지명지도
▲ 건흥들판 전경
현흥2리는 들판 가운데 있다 보니 산과 골짜기는 없고, 논이 많았다. 대표적인 논과 들은 건흥 남쪽 말무덤으로 알려진 큰 고분이 있던 말무듬(무듬배미), 말무듬 서쪽 구름번답, 구름번답 남쪽 물이 많아 비가 조금만 내려도 우산(양산)을 쓰고 물꼬를 보러 가야 한다고 해서 양산지고래, 동남쪽 강둑 안에 있다고 하여 두란들, 건흥 서남쪽 새로 된 들이라 하여 새바대 등이 있었는데, 전체를 건흥들(고롱들)이라고 했다.
◆ 여행자 공공 숙소 건흥원

▲ 건흥원이 표시된 고지도
1914년 신설된 압량면 대부분 지역은 조선 초 마사리(馬沙里)였다. 즉, 경산현 동면에 속했던 압량읍 동쪽과 북쪽 현흥리 일대, 그리고 자인현 서면의 당음리, 신월리 등이 마사리에 포함되었다. 이곳에는 압량역에서 관리하던 여행자 공공숙소인 건흥원(乾興院)이 있었으며(『경상도속찬지리지』), 현재의 현흥2리(구 건흥동)에 해당한다.
건흥원은 고려 중기 이후 설치되었으며, 당시 근처에 사찰이 있었거나, 동쪽 약 1km 떨어진 인각리(현 인안리)의 인각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개국 후, 원(院)을 관리하던 사찰들이 폐쇄되면서 건흥원을 담당하던 사찰도 사라지고, 건흥원만 남게 되었다. 이후 압량역이 장수역에서 성현역 소속으로 변경되면서, 17~18세기경 건흥원도 폐지되었다. 당시 원의 폐지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원 폐지 후, 주요 길목마다 개인이 운영하는 주막이 성행하였으며, 압량 지역에서는 압량리와 용암리 접경에 ‘오목천주막’이 있었다(『조선지지자료』). 원관이 폐지되면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은 각 읍의 객관(客館)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외 경산 지역에는 여러 원(院)이 존재했다. 남천에는 신원(新院)(현 원리), 중방리(현 대평동)에는 월연원(月淵院)과 광리원(廣理院), 서면 내곶리(현 시지동)에는 시지원(時知院)이 있었다. 하양에는 시천원(匙川院)(현 시천리)과 폭괘원(幅卦院)(현 선화리)이 있었으며, 진량에는 다문원(多文院)(현 다문리)이 있었다. 자인의 원당리에는 고려 시대 원관이 존재했으나, 폐원된 후 마을 이름만 원당으로 남아 있다.
◆ 건흥지를 축조한 정응지
정응지(鄭應智)의 본관은 동래이며, 호는 농수이다. 1568년 경주 교촌동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 정응례, 아우 정응삼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려 했으나, 노모를 모실 사람이 없어 정응지만 남고 형과 아우가 참전했다. 형은 전사하고 동생은 살아 돌아왔으며, 정응삼이 『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동래정씨 장령공파에 속한다.
그는 1604년 경산현 동면 건흥동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당시 건흥원이 있던 마을이었고,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있었다. 저수지만 있으면 농토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여 건흥리 동쪽 들판에 건흥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금호강에 만세량이라는 보를 만들어 수로를 내어 선화리, 현흥리, 금구리 등의 넓은 들판에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저수지와 보를 설치한 후 건흥지 남쪽에 애련재라는 집을 짓고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 현재 그가 축조한 건흥지는 연지(蓮池)라 부르고, 만세량은 금호보로 바뀌었으며, 유유자적하던 애련재는 애련정이 되었다.
◆ 건흥지(연지)에 얽힌 이야기
▲ 건흥지.연지 전경
연지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량읍 선화리에 속하지만, 축조 당시에는 경산현 건흥리에 포함되어 건흥지(乾興池)라 불렸다. 이 저수지가 처음으로 기록된 자료는 『경산현읍지(1758)』이며, 『여지도서』에서는 둘레 760m, 수심 75cm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건흥제(乾興堤)로 불리다가 『경산군지(1971)』에서 연지(蓮池)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저수지는 정응지가 1607년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정응지가 저수지 축조를 고민하던 중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대의 뜻이 기특하도다. 그대에게 큰 못을 주리라. 이것을 구축하여 한 고을 백성을 구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다음 날 들판에 나가 보니 한 곳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고, 이를 보고 정응지는 신인이 점지해 준 자리로 여겼다. 이후 금호강에 만세량이라는 보를 설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왔으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사재를 털어 저수지를 축조하여 건흥지라 명명하였다(『내 고장 전통』 참고).
건흥지는 들판 한가운데 축조되어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았다. 이 때문에 축조 당시부터 연(蓮)을 재배했으며, 여기서 생산된 연실(蓮實, 연밥)은 금구리의 연밭과 함께 왕실에 약재로 진상될 정도로 경산의 특산 토산물이었다. 현재도 이 지역에서는 연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건흥지는 일제 때 수리조합으로 이관되었으며, 해방 이후 농지개량조합을 거쳐 현재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 만세량보에 얽힌 이야기
▲ 금호보(만세량) 전경
지금은 금호보라고 알려진 만세량보(萬世梁洑)는 원래 만세량이었다. 보(洑)와 량(梁)은 모두 물을 가두어 농사에 이용하는 둑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량은 보(洑)보다는 큰 개념이다. 만세량이 기록된 최초의 자료는 『경산현읍지(1758)』인데, 건흥지와 동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현읍지에는 특별히 이 만세량에 대해서 “현의 동쪽 30리 하양 경계 금호강 상류에 일직선으로 있는데, 관개 몽리 면적이 읍에서 제일이다.”라고 부연 설명해 놓았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또한 사찬 하양읍지인 『화성지(1933)』에는 정응지가 축조하였다고 하여 구전 설화와 일치하며, 그 외 일제시대 자료나 애련정 비각 등에서도 정응지가 축조하였다고 하여 조선시대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것을 1900년대 들어 기록이나 증거물로 보완해 놓았다.

▲ 금호보 표지석
만세량은 1926년 일제가 없애고 그 자리에 증축 공사하여 금호보(琴湖洑)라고 개칭하고 시멘트로 된 표지물을 강가에 세워 놓았다. 이 만세량은 일제시대 비수리조합에 속했다. 현재 주소는 진량읍 상림리 1-2번지와 하양읍 동서리 161번지에 걸쳐 있다.
◆ 정응지의 우모소 애련정
▲ 애련정 전경
애련정은 건흥지와 만세량을 축조한 정응지가 말년에 건흥지 못둑 남쪽(현 인안리 36번지)에 집을 짓고 유유자적 빈객을 초청하여 즐겁게 노닐었는데, 당시에는 애련재라 하였다. 말 그대로 연꽃을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926년 건흥지가 경산수리조합으로 이관될 때 후손들이 허물어져 가는 애련재를 이건⋅중수하여 애련정(愛蓮亭)이라 하였다.

▲ 애련정 현판
「애련정기」는 1930년 성주에 살던 한강 정구의 후손 청주인 정종호(1875∼1954)가 썼다. 이외에도 마루에 애련정 중수를 축하하기 위한 「애련정운」 등 축시 게판문이 여럿 걸려 있고, 기둥에는 『주자대전』의 구절을 초행서로 써서 주련으로 걸어놓았다. 주련의 한시만 필자가 번역하여 소개한다.
정자를 머금은 들판의 물은 거울처럼 맑고 野水涵室一鑒開(야수함실일감개)
어린 삼나무 산을 두르니 깃발처럼 휘날리네 稚杉繞麓千旗卷(치삼요록천기권)
또한 초목에는 참다운 향기가 있음을 알겠고 亦知草木有眞香(역지초목유진향)
창가에 속된 정취가 없음을 스스로 기뻐하니 自喜軒窓無俗韻(자희헌창무속운)
비 갠 달과 맑은 바람 특별한 정취로 전하네 霽月光風更別傳(제월광풍갱별전)

▲ 연지비각 상량문
이와 동시에 정응지의 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애련정 뒤쪽에다 「농수정공포공비」란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때 「포공비명 병서」는 야성 송준필이 썼고, 「연지비각상량문」은 영천 청통 출신인 이후(1870∼1934)가 썼다.
◆ 에필로그
이처럼 이름이 사라진 건흥동에는 여행자 공공숙소인 건흥원과 건흥지가 있었다. 지금은 건흥원도 사라지고, 건흥지는 연지라 부르며 선화리에 속해 있다. 건흥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면서 새로 생긴 현흥은 일제의 정책에 의해 우리 조상들이 마지못해 급조한 이름이다. 각 마을 이름은 역사성을 내포하는데, 수백 년 역사성을 내포한 마을 이름이 한순간 뿌리도 없는 이름이 되고 말았다. 현흥1리인 현창리와 함께 현흥2리도 주민들이 합심하여 원래 마을 이름을 회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그 마을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글 : 이홍우(『자인의 역사』 저자)
사진 : 이홍우/양재완 작가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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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 (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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